소설 보다 : 여름 2023 ㅣ 소설 보다
공현진.김기태.하가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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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오지랖[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소설 보다 : 여름 2023, 공현진, 김기태, 하가람, 문학과지성사, 2023-06-09.

 


  제법 되뇌던 말이다. ‘어차피 다 죽을 몸인데’,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이 말을 소설 제목으로 맞닥뜨렸을 때, ‘어차피’라는 말에 가득한 허무를 살짝 비켜내고 다른 이들은 어떤 순간에 저러한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물론 ‘어차피’란 말이 중간중간 간섭하며 ‘어차피 결론은 하나일 텐데’라고 하고 있었지만.

 

희주는 자신을 저격하며 말하는데도 뚱한 표정으로 맨 앞에 서 있는 남자도, 대놓고 회원님은 뒤쪽으로 가주세요, 라고 말하지 않는 강사도 이해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기싸움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가만히 보니 남자는 그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줄 모르는 것 같았다.

 

  희주의 눈에 비친 것처럼 나 또한 주호가 답답했고 상황 자체가 어이없게 느껴졌다. 수영 초급반에서 강사는 늘 이렇게 말한다. “잘하는 사람은 앞으로 못하는 사람 뒤로.”

  누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쭈뼛쭈뼛 사람들의 움직임이 몇 번 있고 나면 적당히 자리잡은 질서 속에 수업은 이어진다. 수영은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운동이고 초급반 수강생들은 줄줄이 일정한 흐름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막혀 버린다. 그건 선두에 선 주호로 인해 벌어지는 일이다. 주호는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주호는 매번 늘 앞에서 물살을 가른다. ‘잘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누구도 주호를 밀치고 앞으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주호’가 수영을 잘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면, 주호로 인해 동선이 막히는 상황을 여러 날 겪었다면 왜 주호보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들은 주호를 앞질러 나서지 않았을까. 우리 사회에 이토록 소심한 사람들이 많았던가? 눈치없는 남자 주호에게 폭발하는 강사를 보며 생각했다. 왜 강사는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말을 하지 않고 뒤늦게 자기 화를 못 누르고 주호를 문제의 근원으로 보는 건가.

  수영장의 주호를 보면 일상에서도 어벙벙하며 세상일에 무심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주호는 예민한 사람이다. 주호는 “정의로운 사람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직장에서 안전문제로 인해 사망사고가 발생했을 때, 책임감을 느끼고 마음을 쓰는 사람이다. 어느 직장이든 이런 사고가 발생한다 해도 공장은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 상황에서 쉬이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는 주호의 마음을, 그 ‘난리’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희주 또한 주호와 같은 면이 있는 사람이다.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다큐를 본 후 ‘우리 모두 30년 후에는 다같이 물에 잠겨 죽는다’는 말을 아이들에게 했다가 사립학교에서 쫓겨난 교사다. 희주의 이 말은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것이지만 누구도 희주의 마음을 알아줄 리 없다. 어차피 지구는 죽고 인간은 죽는데,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들과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이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해받지 못한 두 사람이 수영 강습반에서 만나 물 속에서도 숨쉴 수 있음을 배우고 서로를 건져 올리는 과정이 소설에 담겼다. 언뜻 보면 ‘찐따’일 것 같은 두 사람이 서로의 불안과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를 연민하는 과정은 제목이 주는 체념이나 부정적 이미지와는 달리 매우 긍정적이고 한편으론 동화같기도 하다. 전혀 융화될 것 같지 않은 두 사람이 의지하며 상처받은 삶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며 살아내려는 모습은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빅터 프랭클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전 죽고 싶다거나 죽으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이상해요. 그럴 수가 있는 걸까요.˝

주호는 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밀려오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런 충동은 죽음에 대한 충동이 있어야 짝을 이루는 것 아닌가. 삶이, 살아 있음이 자연스럽다면 살고 싶다는 충동 자체를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호는 최근 들어 죽음에 대한 중동이나 갈망 없이도 절실하게 살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다. 살고 싶다. 더욱 살고 싶다.

 

  이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란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 그럼에도 결국 ‘함께’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생각했다. 소설을 보면서 그동안 있었던 많은 사고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릿해졌는데, 어차피 멸망할 세상 남을 해하는데 애쓰기보다는 희주처럼 애틋한 마음을 주위로 돌려 오지랖 좀 부린들 어떠하랴 싶었다. 누군가는 허무를 누군가는 사랑을. 아직 버티고 나아가는 세상에서 후자가 더 필요할 듯 싶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시간에, 다른 장소에서, 다르지만 비슷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다큐멘터리는 50년 뒤, 빠르면 30년 뒤에 지구가 완전히 물에 잠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희주는 반짝이던 도시가, 사람들이, 색색의 거리들이 물에 잠긴 모습을 상상했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이상하게 위안이 됐다.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희주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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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 2023 ㅣ 소설 보다
강보라.김나현.예소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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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삶의 풍경


소설 보다 : 봄 2023, 강보라, 김나현, 예소연, 문학과지성사,  2023-03-14.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이런 제목은 주로 그림 제목에서 보게 된다. 정물화가 떠올려지는 그림, 뱀과 양배추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어울릴까를 상상하다가 이런 제목의 그림이 정말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하며 그림을 찾아보기부터 했다. 아는 화가의 이름을 떠올려보지만 딱히 이런 제목으로 그림을 그렸을 이는 떠오르지 않았고 그림 또한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도 내 나름대로 이런 제목으로 어떻게 뱀과 양배추가 그려질지 구도는 그려진다. 그러나 소설이라면?

 

사회적 명성을 얻은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흠집내는 것은 그 시절 현오와 나 사이에 통용된 은밀한 놀이였다. 우리는 습관처럼 그들을 의심하고 분류하고 비판했다. 제대로 된 검증을 거친 사람인지, 시대의 흐름 덕에 과대평가받고 있는 건 아닌지, 애초에 부자여서 모든 게 가능했던 경우는 아닌지 꼼꼼히 살폈다. 처음에는 우리와 가까운 문화계 인사들이 주된 대상이었지만 어떤 때는 일종의 반작용으로, 그저 교양 없고 몰취미한 사람들이 심판대에 오르기도 했다.

 

  소설을 읽자마자 특정한 이가 떠오르며 계속 생각이 났다. 그러다 보니 책을 읽는 속도가 더디게 되었는데, 아주 우습게도 소설 속 문장마다 그 사람이 일치되기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지만 남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 이건 이런 류의 사람들이 가지는 전형성인가. 아니, 자신이 구별에 따라 남에게 함부로 한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아는 것 없이도 타인을 함부로 규정짓고, 제 허영에 맞추어, 제 기분과 안위에 맞추어 남을 재단하는 사람이 이 땅에 많다는 건, 많더라도 그 사람을 마주하며 잠시라도 함께 일해야 한다는 건 비극이다. 게다가 그런 행동이 ‘나와’ ‘현오’에겐 ‘놀이’라니…. 맞다. 숨쉬듯 당연하게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끊임없이 드러내려는 사람을 나도 안다.

소설 속 ‘나’는 여행을 떠나 그 속에서 배낭여행자들을 만나면서 자신이 가진 문제점을 ‘인식’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수히 여행을 하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을 끌어내리고 흠집내는 것”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사람에게 보여주면 좋을 듯싶다. 아, ‘딱히 변화될 리 없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아는 모두가 얘기했지. 스스로의 성찰을 유도하느니 그 사람에 대해 글을 써볼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게 그 사람에게는 무용할지라도.

 

 「오늘 할 일」을 보며 ‘그런 사람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을 오늘의 다짐으로 굳게 하면 어떨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오늘 할 일」의 두 사람처럼 나 또한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적는 것을 해왔다. 물론 그건 일상보다는 ‘업무’를 수행할 때 주로 하는 일이었다. 해야 할 목록이 길어질 때면, 삶이 이다지도 바빠서야 되는가 정신없이 미친 듯이 일을 해야 하는 버거운 삶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업무가 여유로울 때는 굳이 업무를 끄집어내어 미리 일 할 거리를 정리하느라 또한 바빴던. 결국 늘 바쁘고 바쁜 삶의 연속이 되어버리는 업무 목록 리스트 작성!

‘나’와 ‘선일’은 다이어리에 할 일을 작성한다. 그건 업무 목록을 작성하는 것과 참 다른 느낌인데, 실제 두 사람이 쓴 할 일 목록이란 ‘나’의 경우 “출근길에 책을 읽는 것, 바닐라라테를 마시는 것, 그리고 일을 맡아줄 업체를 찾는 것”, 직장을 그만두고 웹소설을 쓰려고 하는 남편 ‘선일’의 경우 “원고지 30매 쓰기”다. 이들의 하루하루의 목록이 특별히 달라지는 일은 없다. 그렇다고 계획한 대로 이뤄지는 일도 없다. 또한, 해야 할 일 뒤로 집 대출금, 미래에 대한 걱정, 이사한 집의 소음 문제 등이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불안으로 자리잡고 있다. 현실에 산적한 일들 속에서 작은 일하나 게획대로 해내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지지만 그럼에고 그들은 매일 '오늘 할 일'을 적는다. 신혼부부, 이 두 청년들이 불안을 안고서 그럼에도 ‘미래’를 위해 힘껏 하루하루를 달려나가는 모습이 애틋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나 또한 청년이던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한편으로는 불안한 현실에 대한 요즈음 청년들의 문제적인 행동들에 관한 뉴스를 주로 접해서인지 이런 모습의 주인공들이 귀엽게 느껴지고 흔하지 않은 느낌이라는 생각도 했다. 원체 삶이 팍팍하여 작은 일 하나하나에 행복을 느끼려는 청년들이 많다고 했는데, 그것이 생각 나 안쓰럽기도 하고.

 

지금 식탁에는 환한 속을 펼쳐 보인 다이어리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오직 감상될 목적으로 거기 있는 것처럼 한동안 바라만 보았다. 그것은 가능성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 속에 두서없이 할 일을 욱여넣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채우지 않은 백지로 남길 수도 있었다. 무거운 닻이라도 내린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그것을 보며, 나 역시 두 발을 묵직히 디딘 채 멈춰 있었다. 발을 들어 올리면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와 비슷한 오늘도 괜찮은 것인지 아무에게나 묻고 싶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눈앞에는 없었다. 정말로 오긴 오는 것인가. 다가올 계절이 아직은 믿어지지 않았다.

 

  「사랑과 결함」은 위 두 소설보다 감정적인 격동이 많이 느껴진 작품이다.

  어린 나에게 고모 ‘순정’은 맹목적인 사랑을 가졌다가 ‘어느 순간부터 참을 수 없이 미워지기 시작’한 대상이다. ‘순정’은 여러 가지로 ‘문제’적인 인물이다. 아이가 있는 남자와 결혼했다가 1년도 되지 않아 소박당하고 친정으로 돌아왔으며, 조울증으로 인한 정신질환과 불안정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드세고 충동적인 행동으로 인해 가족과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다. 어린 시절 고모가 제게 준 사랑으로 그리고 자신 또한 삶에서 겪은 많은 일들로 ‘고모’의 행동에 대해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나, ‘성혜’는 고모가 가진 그 결함이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그럼에도’라는 것을 이해한다. 흔히 이야기하듯 사랑이란 상대를 내 기준에 맞추어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이라는 말을 소설로 보여준다면 이러할까. 그 대상을 이성이 아니라 ‘가족’으로 부모와 형제자매가 아니라 ‘고모’를 설정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감으로써 이성적 사랑을 넘어선 ‘사랑’이라는 감정, ‘사랑하다’라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게끔 한다.

한편으로는 종잡을 수 없는 ‘고모’가 사랑을 쏟아주었던 기억과 감정을 성혜가 가지고 있기에 고모 ‘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러한 마음없이 마냥 ‘순정’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결국 ‘사랑’이란 주고 받는 것이구나 싶기도 하다. 또한, 왜 ‘사랑’받았던 기억이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것이기도 힘들게 하는 것인지도 느끼게 한다.

소설에선 이렇게 말한다. ˝평생 외로움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그 사람을 보살필 수 있니?˝ 그렇다. 어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내가 얼마만큼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치 않을 수 있다. 사랑은 존재를 따지지 않는다. 다만, ‘사랑의 방식과 내용’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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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제8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고선우.이연파.최장욱 지음 / 허블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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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타임즈의 재생


2025 제8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고선우,이연파,최장욱, 허블, 2025-09-19.

 

 

  유럽 폭염이 심각한 상태로 지속되고 있다. 파리를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 지중해뿐만 아니라 독일, 체코, 폴란드 등 동유럽으로 번지고 있다고. 뉴스를 보면 폭염 지역 기온은 40도 이상이며 45도 이상을 기록한 곳도 있다. 고온에 트램, 신호등, 선로까지 녹아내려 기차가 멈추고 전력공급 차질 등 도시 인프라가 마비・파괴되고 있다. 무엇보다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1,300명 이상이라고 하는데, 냉방시설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아 위험에 노출된 더 많은 사망자가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유럽 폭염 속 우리나라는 장마 소식이 들린다. 장마가 끝나고 나면 여름, 우리에게도 폭염이 닥칠 거라고 하는데…… 기후변화로 인한 지구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가려는지 막막하고 아득하기만 하다. 어릴 적 미래는 과학문명의 발달로 저 우주를 유영하거나 로봇이 등장하고 세상은 더할나위 없이 각진, 그러니까 기계가 가득한 세계로 그려지곤 했다. 공상과학 글짓기나 그림에서 아이들이 상상할 수 있는 공상과학의 세계엔 이토록 원시적인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문명이 제아무리 발전한다 한들 ‘자연’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 자연을 극복해 내야 한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된다.

  내가 어릴 적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공상과학 글짓기 대회가 아닌 ‘한국과학문학상’ 속 세계는 어떠할까. 미래과학이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한 놀라움, 경이, 찬탄보다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많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경각심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냥 인간의 삶이 늘, 그러한 것인지도.

  한국과학문학상 여덟 번째 작품집 「카나트」는 이러한 느낌을 주는 대표적인 소설이었다. 아주 먹먹한 느낌이 드는. 순간, 과학문학상이라는 타이틀을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되는.

  카나트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개발된 지하수로로 사막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여 유용하게 물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인간 기술의 집합체다. 고선우의 소설 「카나트」의 세계 역시 여전히 카나트가 필요한 사회다. 기후변화로 인한 극심한 사막화로 물이 비싼 도시, 거대한 수로 카나트에서 물을 공급받는다면 물을 가진 자가 아마도 상위의 권력자가 아닐까. 거대 기업 ‘오아시스’가 이 역할을 맡는다. 오아시스는 물의 공급과 유통을 독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비전까지 제시한다.

 

‘오아시스’는 바이오 로봇 스타트업을 인수하고 오랜 기간 연구 개발한 끝에, 인체의 장기와 팔다리의 일부분을 로봇화하는 하이브리드 생체 로봇 기술을 선보였다. 이 기술로 인체의 물 의존율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보고서가 곧바로 학계에도 발표되었다.

 

  이건 폭염 문제 해결방안으로 인간이 폭염에 견딜 수 있도록 신체 일부를 로봇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인데, ‘로봇화’ 수술의 대상은 사회에서 부를 가진 자의 몫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왜냐고? 로봇화 수술 비용 문제를 생각하더라도 그건 가진 자나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떡하든 위험한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로봇 신체를 갖고자 가지지 못한 이들은 처절하게 발버둥치고……. 아, 이래서 내가 작가가 못되는 모양이다.

 

학교에서 배운 ‘노동자 계층을 위한 역사’에서 선생님이 가장 강조했던 건 여러 세기에 걸쳐 반복되었던 혁명과 투쟁 뒤에도 결국 순응한 자들만이 살아남았다는 교훈이다. 역사는 되풀이되었다. 인류의 90퍼센트가 사라졌던 그날에도 살아남은 건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자본과 권력의 편에 섰던 노동자, 그에 맞서지 않고 길들여진 사람들. 딱 할아버지의 삶이 그랬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할아버지의 한 손에는 마실 물이, 다른 손에는 먹을 음식이 있었다. 그 이상을 쥘 손이 없기에 더 많은 걸 꿈꾸지 않아야 했다.

 

  소설은 시작부터 ‘노동자 계층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어쩌면 시작에서부터 느껴지는 기시감은 소설의 결말이 예견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노동자의 삶이란 결국 늘 그래 왔던 것을. 현재의 노동 시장은 점점 인간 대신 AI가 대체할 것이라 하고 있다. 나아가 피지컬 AI가 등장하며 인간의 노동력이 점점 필요없어짐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카냐트 속 세계에선 일반 로봇보다는 ‘인간의 몸을 기초로 만들어진 하이브리드 로봇’이 더 대접을 받는다. ‘오아시스’ 노동자들에게 효율성을 강조한다. 물부족 사회에서 인체의 물 의존율을 낮춘 노동자란 더 큰 이익을 가져다 주겠지. 그렇다면 아예 ‘하이브리드 로봇’보다 그냥 일반 로봇으로 대체하는 것이 더욱 더 효율적이진 않을까? 굳이 라이더들에게 하이브리드 로봇화를 해주는 ‘오아시스’의 세계. 이 사회에선 인간화 지수 20%, 로봇화 지수 80%면 인간 등록이 말소된다.

  ‘오아시스’의 라이더 ‘아이작’은 업무 중에 잦은 실수를 하고 종종 유년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 할아버지와 친구들과 함께 했던 날들, 몰래 우물에 들어가 물을 훔쳤던 날의 기억, 훔친 물맛이 주는 기쁨과 두려움. 그의 기억은 나이가 들어가는 사람이 떠올리는 옛기억처럼 그립고 먹먹하다. 기억은 부분부분 생각나지 않기도 하는데 뭔가 계속 희미하거나 파편화되고 지명이나 이름이 생각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작의 신체는 건강하다.

  아니, 아이작의 몸에 이상이 나타난다. 생체에 수분을 공급하는 장치에 문제가 생겼다. 필연적으로 재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생체에 수분을 공급하는 장치라 한다면, 아이작은 하이브리드 로봇인 건가. 아이작은 재수술을 받고 배달 업무에서 물 저장소 감시자의 지위로 올라서고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고, 자부심을 느낀다”. ‘오아시스’는 효율적인 업무와 생존을 위해 노동자에게 '신체 기계화 수술'도 진행해주며 ‘하이브리드 로봇’ 지수가 높아질수록 더 좋은 업무를 제공하는 아주 착실한 체계를 갖추고 있으니, ‘오아시스’에는 얼마나 많은 ‘아이작’들이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들 아이작들은 꿈꾸지 않는, 꿈꿀 수 없는…….

  소설을 읽고 나면 왜 먹먹한지 눈물이 날 것 같은 느낌은 아이작이 보여주는 파편화된 어린 날들의 얘기가 큰 몫을 차지한다. 과거는 서정적으로 서술되어 있고 되돌아가지 못할 추억들은 언제나 그립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생을 마감하는 자의 의식처럼 점점 흐릿한 기억이기에 더더욱. 생을 마감하는 자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작은 이미 인간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로봇화 수술의 부작용이 기억상실이라면 ‘아이작’은 점점 더 기억을 잃어버리고 건강한 신체만을 가진 채 업무 매뉴얼만 정확히 숙지하며 충실한 업무를 지속할 것이다. 1936년 영화 모던타임즈의 찰리처럼 ‘오아시스’가 만든 철저한 ‘하이브리드 노동자’로서 말이다. 이것이 과거에도 미래에도 이어지는 “노동자 계층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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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돌멩이 -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ㅣ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 외 지음 / 다산책방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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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


눈과 돌멩이- 2026년 제49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위수정,김혜진,성혜령,이민진,정이현,함윤이, 다산책방, 2026-01-23.

 

 

  대상작으로 최종까지 논의된 작품이 위수정 작가의 「눈과 돌멩이」, 이민진 작가의 「겨울의 윤리」라고 한다. 대체로 수상작 모두 재밌게 읽었으나 나 또한 이 두 작품이 소설의 분위기나 문체 등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러고 보니 둘 다, 겨울 이미지다.

  일본의 눈 덮인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눈과 돌멩이」를 읽으며 『설국』이 생각났다. 특히, 일본의 설경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보면 자동적으로 설국이 생각나는데, 생각보다 『설국』의 세뇌가 강하구나 새삼 느꼈다.

  눈을 보지 못한 지 너무 오래라 소리없이 펑펑 쏟아지며 쌓이는 ‘눈’을 보고픈 강렬한 욕구가 남아 있는지 소설을 보면서 눈내리는 산골짜기 어디쯤으로 가고 싶었다. 어쩜, 이런 기분에 나도 친구들에게 눈풍경 좋은 곳으로 여행가자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 그렇게 여행장소를 정하고 여행 갈 날을 기다릴지도. 그러나 그 이후……. ‘수진’처럼 죽은 후 나의 유골을 여행하고자 한 그곳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길 수 있을까. 나는 암 투병 중 자살한 친구의 유골을 다른 나라에 가서 뿌리고 돌아올 수 있을까. 내가 죽은 후 나의 친구들은 나의 유언대로 유골을 다른 나라에 뿌려 줄까, 난 어떤 친구들에게 이런 유언을 남길 수 있을까. 그것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리울 수 있나?

그리워? 그립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진의 친구 ‘유미’와 ‘재한’은 유골을 들고 일본으로 향한다. 암투병 중 자살한 수진은 자신의 유골을 일본 나고야 도가쿠시 신사에 뿌려달라고 유언을 남긴다. 폭설까지 내리는 낯선 곳은 그들에게 매순간 불안과 위험을 준다. 그들의 기억 속 수진은 그리움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기도 하고, 이해못할 유언과 낯선 곳에서 폭설로 인해 고립될 상황에서 수진을 떠올리며 믿기지 않는 현실과 함께 다양한 감정에 빠져든다. 가까웠던 누군가가 떠나면 누구라도 이런 마음이지 않을까. “그 무력함과 슬픔을. 이어서 뒤따르는, 대상이 모호한 분노도”

 

소리와 풍경의 불일치가 오히려 재한의 불안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그것은 낙관이라기보다는 슬픔에 가까웠다. 먼 곳의 풍경은 천천히 멀어졌고, 가까이 있는 나무들은 빠르게 사라졌다. 타인의 기억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이유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재한은 창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들이쳤다. 뻐근한 눈알을 깜빡였다. 슬픔이 날아가도록. 저 흰 풍경 속으로 모두 다 사라지도록. 유미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눈송이는 얼굴에 닿는 순간이 끝이었다. 바늘처럼 날카롭게 톡, 치고 소멸하는 차가운 감각.

 

눈은 인간을 고립시킨다. 무기력하게 만들고 결국 미치게 만든다. 자비를 모른다.

 

  설경은 미치도록 아름답지만 수많은 감정 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고립되기 전 마주쳤던 ‘여장 남자’인 근처에 사는 일본인 ‘코요’. 코요에 대한 편견을 가득 안고 있지만 고립 상황에서 현지인의 도움은 매우 절실하다. 이런 상태에서 ‘코요’를 만난다는 건, 소설에서 ‘코요’가 이들에게 어떠한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걸 알게 한다. 재한은 ‘코요’에게 편견을 가지고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남성인 ‘재한’의 이러한 반응은 편견없는 ‘유미’와 대조되는데, 여행 내내 현실을 대하는 태도나 수진에 대한 기억과 감정 표출방식에서 두 사람은 차이가 나타난다.

  ‘코요’의 존재가 이들과 연결되는 지점, 그 역시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다는 점이다. 코요는 자신의 집 정원 한곳에서 그의 연인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코요’의 애도의 형태는 재한과 유미보다 더 적절하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 ‘적절함’이란 내내 재한과 유미가 그들의 우정이 ‘지극히 느슨하고 끊임없이 수진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계속 그들의 불안하고 혼란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드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두 사람의 수진의 유골을 뿌리기 위한 이 여행에서 표출하는 모습이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 애초에 정말 이런 마음으로 이 여정을 시작할 수도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코요’의 연인은 죽은 것이 아니라 떠나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또다시 이미 ‘코요’의 그의 연인을 위한 애도 방식에 대해 가졌던 마음이 주춤해진다. 아니, 그러니까 그냥…그래, 사람에 대한 마음이란 그들에 대한 기억하는 방식도 잊기 위한 방식도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온전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방식은 정해지지 않은 것일 텐데도, 과도하게 뭔가 그래야 하는 것이 있기라도 하는 양 그것에 매몰되었나 싶다.

  수진과 재한, 유미. 그들이 처음 일본 여행을 계획한 것은 일본의 설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히쓰마부시란 음식을 먹기 위해서다. 장어요리로 나고야 지방의 대표적인 향토 음식이라는데 재한은 코요와 대화를 나누며 ‘히쓰마부시’를 ‘히쓰으 마부시이’라고 잘못 발음하였음을 알게 된다. 재한은 장어덮밥을 이야기한 것인데 잘못된 발음으로 인해 재한은 ‘비통’, ‘눈부시다’라는 단어를 읊조린 것이다.

  이제 고립도 끝나고 무기력하고 미치게 만드는, 자비를 모르는 눈도 그쳤다. 밤이 지나 ‘흩날리던 희뿌연 풍경 속 꼭대기가 보이지 않던 나무 사이로 내리던 눈송이들 속에 수진의 뼛가루를 뿌려둔’ 그들은 무엇을 할까. ‘수진’을 ‘수진’에 대한 기억을 떨구어 내고팠던 그들의 아침은 어떤 모습이 되려나.


숲에서 나오며 재한은 주머니 안의 돌멩이를 만져보았다. 코요의 눈빛과 그의 정원이 떠올랐다. 여기다 버리고 갈까, 잠깐 고민하다 집으로 가져가기로 했다. 하지만 돌멩이는 국외 반입 금지일 텐데. 재한은 앞서 걷는 유미를 불렀다. 유미가 뒤돌아 재한을 보았다. 하얀 풍경 때문인지 유미의 얼굴도 환했다. 돌멩이는 유미에게 비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히쓰으 마부시이 먹으러 가자. 재한은 일부러 끝을 길게 늘여 말했다. 재한은 주머니 속 돌멩이를 꼭 쥐었다. 그것은 단단했고 언제든 만질 수 있었다.

 

  계속 이미지와 감각이 눈 앞을 아른거렸다. 한편으론 그럼에도 삶은 이어진다는 말이 생각나는, 눈송이보다 돌멩이를 움켜쥐고픈 마음이 들었던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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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노예 남편 아내 - 2024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작
우일연 지음, 강동혁 옮김 / 드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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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우일연, 강동혁, 드롬, 2025-12-24.

 


  이 책은 한국계 미국인의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을 보긴 하지만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이 이유도 크다. 보면서 계속 앞장과 마지막장을 다시 들추며 생각한 말, “이거 소설이었나?” 이 책은 퓰리처상 보도 부문 수상작이다. 그러니까 소설이 아니고 실제 이야기다. 책을 읽을수록 그 사실을 잊고 다시금 이 글이 주는 이야기에 놀란다.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던 것을 어느새 잊고 두 부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왜 그동안 이 두 부부에 대해서 몰랐을까. 난 엘렌 크레프트도 윌리엄 크래프트도 처음 알았다. 이들이 미국 남부를 탈출한 ‘노예’라는 것을. 더구나 여자인 엘렌이 백인 주인으로 남편인 윌리엄이 흑인 노예로 변장하여 탈출했다는 것을. 책 제목은 그것이었다.

  막연하게 노예는 ‘흑인’일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가 엘렌이 백인이라고 하는 것에 놀란다. 엘렌은 혼혈로 피부색이 밝았기에 병약한 백인으로 분장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여정은 길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노예들이 그들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경로가 아닌, 기차와 증기선을 이용하여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선택한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담대한 방법으로 노예 부부가 탈출하는 그 긴 여정의 이야기다.

  두 부부는 1848년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에 살고 있던 노예였다. 이 책에선 ‘노예’를 ‘예속 피해인’, 노예를 부리는 이들을 ‘예속 가해자’라 명명한다.

 

이 시기에 소위 “한방울 법칙”이라는,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 전체가 유색인종으로 변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게다가 노예제도는 언제나 어머니의 혈통을 따랐다. 흑인이라는 혈통과 예속은 건드려서도 취소해서도 안 되는 영구적인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힐리 가족이, 그리고 이제는 엘렌도 바로 이런 가정에 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또한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다. 어떻게 이다지도 역사는 다를 게 없을까. 엘렌이 노예가 된 이유는 어머니가 노예이기 때문인데, 엘렌의 어머니 또한 혼혈이었다. 자기 자식을 노예로 만드는 아버지라니. ‘흑인’의 피에 그토록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흑 성적 대상으로는 생각하고 실행하는 모순이라니.

 

브레머는 엘렌에게 왜 예속 가해자들에게서 도망쳤느냐고 물었다. 브레머는 그들이 엘렌을 학대했는지 궁금해했다.

엘렌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잘해줬어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지는 않았죠.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다른 말이 더 필요할까. 엘렌의 저 말이 엘렌이 기나긴 여정을 버티는 힘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엘렌은 ‘예속 가해자’는 자신의 아버지였으며 또한 자신의 이복 자매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백인’ 중심, ‘백인’ 우월인 시대, 엘렌은 스스로를 ‘백인’으로 위장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순수한 혈통 중심의 사회, 왜 인종 간 차별이 계급이 생기게 된 것인지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아도 지금 시대에도 결국 여전한 차별과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그 참담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이 떠나온 세계는 “흑인이 말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세계, 아무리 자유 흑인이라도 총을 들었다가는 등에 39대의 채찍질을 당해야 하는 세계, 백인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인 세계”였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음과 같은 세상이었다.

 

별만 떠 있는 새벽이 오기 전인 이 시간에는 많은 것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지나온 풍경에는 한 가지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이곳에는 커튼과 붉은 깃발이 달린 노예 우리나 경매장이 없었다. 담장이 높고 가시 박힌 슈거 하우스도 없었다. 소금물 웅덩이나 후추 병, 소금자루가 갖추어진 채찍이나 쳇바퀴도 없었다. 부부나 부모나 아이가 판매되는 법원도 없었다.

 

  두 부부가 ‘예속 피해자’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탈출의 긴 여정 속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도움을 준 이들 덕분이다―물론, 엘렌은 이들의 이 여정에 ‘신앙’의 힘이 있었음도 얘기한다.―그중에는 그들과 같은 ‘예속 피해자’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는 이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 이들 부부에 대한 연민을 가진 사람들 덕분이다. 이들의 힘은 ‘예속 피해자’가 증가할수록 더욱 더 강해지고 견고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일이 단지 현재 삶의 평안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단순함을 떠나 보편적인 문제 인식으로 확산되기까지, 또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 부부의 여정은 실화이기에 이들이 노예제도가 성행하는 남부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으로 도착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시점에서도 이들의 탈출 여정이 놀라운데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이들에 대한 비판과 찬탄이 이어졌을 것이고 이들로 인해 노예문제에 대한 논쟁 또한 가속화되었을 것이고 이들을 영웅화한다거나 무엇에라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조금이라고 깎아 내리려는 이들도 있다.

 

엘렌은 대단히 유능했고 큰 인기를 얻었으며 태도도 자신감 있게 변했다. 엠마 미첼이 친구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허영심을 갖거나 자기 분수를 잊을지도 모른다고 약간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엘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이제야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게 됐습니다. 제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 제가, 단지 사람 대접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우쭐해질 거라고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하실 수 있나요?”

 

임신 마지막 3개월 동안, 엘렌은 남부에서 더 많은 나쁜 소식을 들었다. 신문에서는 엘렌이 자유롭게 살면서 너무 불행해진 나머지 남편을 버리고 미국 신사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며 예속 가해자들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마치 남부의 권위자들이 엘렌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녀의 몸을 되찾지 못한 자신들의 무능력에 괴로워한 나머지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 차지하려는 것만 같았다. 엘렌에게는 자기 삶에 대한 주권이 없으며, 그녀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노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말이다. 그들은 엘렌을 아내가 될 능력도 없는 사람, 남편을 버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들은 가짜 뉴스를 통해 엘렌의 의지를, 욕망을 도용하려 했다.

 

  이 책 전반에서 이들이 무사히 자유의 땅으로 탈출할 수 있기를 응원했다면-우습게도 이 책이 그들이 무사히 탈출한 기록임을 알면서도-, 후반부에는 이들 부부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특히, ‘엘렌’에 대해 아니 ‘여자 노예’에 대해 가지는 사회의 압력은 편견은 ‘인간에 대한 억압 철폐’를 주장하며 ‘평등’을 외치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모순되게 이어지는지…….

 

여기서든, 다른 곳에서든 크래프트 부부가 받은 반응을 보면, 이들이 앞서 한 여행이 성공한 이유는 엘렌이 백인 행세를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돈이 많고 장애가 있는 백인 남자 행세를 했기 때문임을 잘 알 수 있다. 크래프트 부부가 그렇게 여행할 수 있었던 건 서로 친밀한 관계나 남편과 아내라는 점,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성적인 친족 관계’라는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드러난 지금, 크래프트 부부는 조지아주를 떠나 이동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편견에 마주하게 되었다. 남부를 벗어나고 미국을 벗어났는데도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인과 노예, 그건 아니라도 주인과 하인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졌는데도 말이다.

 

  작가는 “엘렌의 성공은 그녀가 속한 세상의 위선과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냈다.”라고 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역사가 이미 알려주었지만 이 책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구조는 더더더 세월이 지나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아니, 어떤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를 ‘차별’하기 위해서 ‘꺼리’를 만들어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들을 ‘예속 가해자’라고 부르면 되려나.

  이처럼 여전히 ‘차별 꺼리’를 양상해내는 국가들 혹은 사람들이 있지만, 두 부부가 지나온 풍경이 변화였듯이 역사는 어쨌든 변화해왔다. “노예와 노예주라는 두 범주의 사람이 ’원래‘ 존재하지 않으며, 납치와 인신매매가 등 예속화(enslaving)”하는 것이 문제다.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이냐와 더불어 속도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문제가 되는 제도를 ‘인식’하였음에도 그것을 철폐하지 않으려는 이들로 인해 계속 ‘예속 피해자‘가 생겨난다. 이 땅의 “예속 가해자”의 “예속”에 대한 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인식이 “속도를 갖춘 가능성”에 의해 빨리, 신속하게 해결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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