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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 노예 남편 아내 - 2024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작
우일연 지음, 강동혁 옮김 / 드롬 / 2025년 12월
평점 :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우일연, 강동혁, 드롬, 2025-12-24.
이 책은 한국계 미국인의 퓰리처상 수상작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을 보긴 하지만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이 이유도 크다. 보면서 계속 앞장과 마지막장을 다시 들추며 생각한 말, “이거 소설이었나?” 이 책은 퓰리처상 보도 부문 수상작이다. 그러니까 소설이 아니고 실제 이야기다. 책을 읽을수록 그 사실을 잊고 다시금 이 글이 주는 이야기에 놀란다.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했던 것을 어느새 잊고 두 부부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왜 그동안 이 두 부부에 대해서 몰랐을까. 난 엘렌 크레프트도 윌리엄 크래프트도 처음 알았다. 이들이 미국 남부를 탈출한 ‘노예’라는 것을. 더구나 여자인 엘렌이 백인 주인으로 남편인 윌리엄이 흑인 노예로 변장하여 탈출했다는 것을. 책 제목은 그것이었다.
막연하게 노예는 ‘흑인’일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가 엘렌이 백인이라고 하는 것에 놀란다. 엘렌은 혼혈로 피부색이 밝았기에 병약한 백인으로 분장할 수 있었다. 당연히 이들이 자유를 찾아 탈출하는 여정은 길고 위험하다. 그러나 그들은 많은 노예들이 그들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어두운 경로가 아닌, 기차와 증기선을 이용하여 어둠 속에서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선택한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담대한 방법으로 노예 부부가 탈출하는 그 긴 여정의 이야기다.
두 부부는 1848년 미국 조지아주 메이컨에 살고 있던 노예였다. 이 책에선 ‘노예’를 ‘예속 피해인’, 노예를 부리는 이들을 ‘예속 가해자’라 명명한다.
이 시기에 소위 “한방울 법칙”이라는,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가면 그 사람의 몸 전체가 유색인종으로 변한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게다가 노예제도는 언제나 어머니의 혈통을 따랐다. 흑인이라는 혈통과 예속은 건드려서도 취소해서도 안 되는 영구적인 조건으로 간주되었다. 힐리 가족이, 그리고 이제는 엘렌도 바로 이런 가정에 반기를 들었다.
우리나라 또한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랐다. 어떻게 이다지도 역사는 다를 게 없을까. 엘렌이 노예가 된 이유는 어머니가 노예이기 때문인데, 엘렌의 어머니 또한 혼혈이었다. 자기 자식을 노예로 만드는 아버지라니. ‘흑인’의 피에 그토록 반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흑 성적 대상으로는 생각하고 실행하는 모순이라니.
브레머는 엘렌에게 왜 예속 가해자들에게서 도망쳤느냐고 물었다. 브레머는 그들이 엘렌을 학대했는지 궁금해했다.
엘렌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잘해줬어요.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지는 않았죠. 그래서 도망친 거예요.”
다른 말이 더 필요할까. 엘렌의 저 말이 엘렌이 기나긴 여정을 버티는 힘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엘렌은 ‘예속 가해자’는 자신의 아버지였으며 또한 자신의 이복 자매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백인’ 중심, ‘백인’ 우월인 시대, 엘렌은 스스로를 ‘백인’으로 위장하여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순수한 혈통 중심의 사회, 왜 인종 간 차별이 계급이 생기게 된 것인지 인류의 역사를 되짚어보아도 지금 시대에도 결국 여전한 차별과 계급이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그 참담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이 떠나온 세계는 “흑인이 말을 소유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있는 세계, 아무리 자유 흑인이라도 총을 들었다가는 등에 39대의 채찍질을 당해야 하는 세계, 백인의 몸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 사형에 처해지는 중범죄인 세계”였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음과 같은 세상이었다.
별만 떠 있는 새벽이 오기 전인 이 시간에는 많은 것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이 지나온 풍경에는 한 가지 분명한 변화가 있었다. 이곳에는 커튼과 붉은 깃발이 달린 노예 우리나 경매장이 없었다. 담장이 높고 가시 박힌 슈거 하우스도 없었다. 소금물 웅덩이나 후추 병, 소금자루가 갖추어진 채찍이나 쳇바퀴도 없었다. 부부나 부모나 아이가 판매되는 법원도 없었다.
두 부부가 ‘예속 피해자’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탈출의 긴 여정 속에서 그들을 지지하고 도움을 준 이들 덕분이다―물론, 엘렌은 이들의 이 여정에 ‘신앙’의 힘이 있었음도 얘기한다.―그중에는 그들과 같은 ‘예속 피해자’뿐만 아니라, 인간의 권리를 박탈하는 이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 이들 부부에 대한 연민을 가진 사람들 덕분이다. 이들의 힘은 ‘예속 피해자’가 증가할수록 더욱 더 강해지고 견고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일이 단지 현재 삶의 평안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단순함을 떠나 보편적인 문제 인식으로 확산되기까지, 또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음도 잊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이 부부의 여정은 실화이기에 이들이 노예제도가 성행하는 남부를 탈출하여 자유의 땅으로 도착했다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현재의 시점에서도 이들의 탈출 여정이 놀라운데 당시에는 어떠했을까. 이들에 대한 비판과 찬탄이 이어졌을 것이고 이들로 인해 노예문제에 대한 논쟁 또한 가속화되었을 것이고 이들을 영웅화한다거나 무엇에라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조금이라고 깎아 내리려는 이들도 있다.
엘렌은 대단히 유능했고 큰 인기를 얻었으며 태도도 자신감 있게 변했다. 엠마 미첼이 친구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어떤 사람들은 그녀가 허영심을 갖거나 자기 분수를 잊을지도 모른다고 약간 우려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엘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이제야 자신을 여자라고 느끼게 됐습니다. 제가 더 이상 단순한 물건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런 제가, 단지 사람 대접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우쭐해질 거라고 생각을 대체 어떻게 하실 수 있나요?”
임신 마지막 3개월 동안, 엘렌은 남부에서 더 많은 나쁜 소식을 들었다. 신문에서는 엘렌이 자유롭게 살면서 너무 불행해진 나머지 남편을 버리고 미국 신사의 손에 자신을 내맡기며 예속 가해자들에게 돌려보내 달라고 애걸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마치 남부의 권위자들이 엘렌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그녀의 몸을 되찾지 못한 자신들의 무능력에 괴로워한 나머지 그녀의 이야기를 대신 차지하려는 것만 같았다. 엘렌에게는 자기 삶에 대한 주권이 없으며, 그녀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노예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말이다. 그들은 엘렌을 아내가 될 능력도 없는 사람, 남편을 버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들은 가짜 뉴스를 통해 엘렌의 의지를, 욕망을 도용하려 했다.
이 책 전반에서 이들이 무사히 자유의 땅으로 탈출할 수 있기를 응원했다면-우습게도 이 책이 그들이 무사히 탈출한 기록임을 알면서도-, 후반부에는 이들 부부에 대한 당시 사회의 반응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특히, ‘엘렌’에 대해 아니 ‘여자 노예’에 대해 가지는 사회의 압력은 편견은 ‘인간에 대한 억압 철폐’를 주장하며 ‘평등’을 외치는 상황에서도 얼마나 모순되게 이어지는지…….
여기서든, 다른 곳에서든 크래프트 부부가 받은 반응을 보면, 이들이 앞서 한 여행이 성공한 이유는 엘렌이 백인 행세를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돈이 많고 장애가 있는 백인 남자 행세를 했기 때문임을 잘 알 수 있다. 크래프트 부부가 그렇게 여행할 수 있었던 건 서로 친밀한 관계나 남편과 아내라는 점, 어느 학자의 말을 빌리자면 ‘성적인 친족 관계’라는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관계가 드러난 지금, 크래프트 부부는 조지아주를 떠나 이동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편견에 마주하게 되었다. 남부를 벗어나고 미국을 벗어났는데도 남편과 아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인과 노예, 그건 아니라도 주인과 하인이라는 역할은 받아들여졌는데도 말이다.
작가는 “엘렌의 성공은 그녀가 속한 세상의 위선과 가능성을 동시에 드러냈다.”라고 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가능성,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역사가 이미 알려주었지만 이 책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구조는 더더더 세월이 지나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아니, 어떤 이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누군가를 ‘차별’하기 위해서 ‘꺼리’를 만들어내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들을 ‘예속 가해자’라고 부르면 되려나.
이처럼 여전히 ‘차별 꺼리’를 양상해내는 국가들 혹은 사람들이 있지만, 두 부부가 지나온 풍경이 변화였듯이 역사는 어쨌든 변화해왔다. “노예와 노예주라는 두 범주의 사람이 ’원래‘ 존재하지 않으며, 납치와 인신매매가 등 예속화(enslaving)”하는 것이 문제다. ‘문명이 스스로 세운 잘못된 구조를 인식조차 못한 채 허물 수 있다는 가능성’은 이제 그것이 어떤 것이냐와 더불어 속도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문제가 되는 제도를 ‘인식’하였음에도 그것을 철폐하지 않으려는 이들로 인해 계속 ‘예속 피해자‘가 생겨난다. 이 땅의 “예속 가해자”의 “예속”에 대한 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인식이 “속도를 갖춘 가능성”에 의해 빨리, 신속하게 해결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