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들의 별점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 김세라, 은빛, 2026-03-25.

 


 

  희한한 광경을 봤다. 그것도 ‘책’이 있는 곳에서, ‘독서’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이 광경에 놀라 흔한 말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기가 막혀 탄성도 튀어나왔다. 참 애달프다 싶기도 하고 짜친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다. 특정 시기부터 집중적으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의 연장선이겠거니 해도…… 유럽 도시 기행 3편이 출간되기 전이었으니 집중될 곳이 여기였나?

  내게 이 책은 ‘강순희의 삶’이었다. 특별히 ‘인혁당 사건 희생자의 아내 강순희’도 아니었고 그냥 ‘강순희’였다. 그건 강순희 삶의 일부였을 뿐이다.

  발단은 이 책은 ‘강순희’의 이야기이니 ‘강순희’에 대해 더 검색하다 출판사 소개글도 읽고 스크롤을 더 내리던 과정에서 본 텅 빈 별점 때문이다. 알라딘 서재 리뷰는 별점을 작성토록 하고 있는데 별점을 매기는 게 탐탁지 않아 서재에 글을 쓰던 초창기에는 거의 페이퍼로 작성했다. 어느 순간 리뷰로 몽땅 올리고 있지만 여전히 내 서재는 페이퍼 수가 더 많다. 타인의 글에 별점을 매기는 건 쉽지 않다. 좋았어도 별로였어도 편하지 않다. 내 별점이야 내 기준에 따라 부여하는 건데도 신경쓰인다. 어차피 내 감상을 적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공개된 공간에 작성하는 마당에 내 기준의 일관성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보면 소심하게 대충, 어떨 땐 신중하게 대충 별 수를 클릭하고 별점이라는 게 없으면 더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부여할 ‘별점’에 대해 항상 조심스럽다는 말이 더 맞다. 아무튼, 별점!이 어떤 상품을 평가하는데 가시적이긴 하다만, ‘테러’라는 말처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순수한 상품의 가치를 난도질하는 데도 직빵이긴 하다.

  그래서 별점. 뜬금없이 책의 별점과 리뷰, 나아가 좋아요를 이렇게 들여다보기도 처음이다. 한편으론 그건 또 타인의 이 책에 대한 의견이고 감상이니까. 그런데, 별점이 너무 낮은 리뷰가 연속적이라 어떤 부분들이 별로였는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를 보았는데, 이런!

어떻게 서로 다른 리뷰어들의 서재 구성이나 리뷰의 수, 리뷰를 작성한 시기, 리뷰의 글자체와 글자 줄간격, 내용들이 거의 같을 수가 있지? 별점에 색깔이 있는 이들의 리뷰를 보면 각각 개성있는 서재 구성과 글자체가 보였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싶다만. 그럴 수 있지.

  좋아요 수가 너무 많아 일일이 클릭해봤다. 좋아요를 누르면 ‘이 글을 좋아요 한 사람들’ 목록이 뜬다. 딱히 서재의 글이 없기도 하지만 좋아요 누른 사람들의 서재 구성과 글자체나 글의 내용이 왜 다 비슷한 걸까.

  재밌는 건 리뷰에는 구매자도 뜬다는 거다. 구매하지 않은 이들의 별점은 왜 또 그렇게 하나같이 낮게 나타나는지. 물론 책을 사는 곳이야 오프라인도 있고 다른 서점도 있으니 꼭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처럼 도서관에서 주로 빌려 읽는 경우도 많을 테다. 이 책의 경우 출간되고 나서도 몇 달 내내 계속 지역의 전 도서관 대출현황을 보았을 때, 작은 도서관에서도 쉽게 대출이 되지 않을 만큼 인기도서였던 걸 생각하면 책을 빌려 읽기도 쉽지 않았을 거다. 읽고 싶은 책도 무수히 많은데, 시간들여 공들여 굳이 맘에 안 드는 이의 책을 읽는 심리는 뭘까. 아니, 적극적으로 그 책이나 작가에 대해 ‘의견’을 피력하고 감상을 공유하려는 그 마음의 기저는 뭘까.

  물론, 안다. 왜 그러는지. 

  그냥 너무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고 그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오늘부터 또 계속 여기저기 일어나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 굳이 이 곳을 찾아와 다시 들여다보았다는 거다. 어제 이후 날짜로 업데이트 된건 없는 건가 싶어서, 여전히 그게 잊혀지지 않아서, 이걸 굳이 글로 남긴다. 나도, 참.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건, ‘이 글을 좋아요 한 사람들’ 수십 명 이름이 일렬로 뜨는데 하나같이 마치 유령들이 줄지어 선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이름 옆에 프로필 이미지가 하나같이 텅 빈 채 있어서다. 마치 유령들이, 귀신들이 일렬로 늘어선 채 ‘영혼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서, 갈 곳 모르고 자꾸 엉뚱한 길로 가는 것 같아서, 이 잔상이 너무 깊게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서재의 많은 이들이 서재명에 따라 프로필 이미지를 정체성처럼 나타내며, 수많은 책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책 이야기 하는데, 책을 토대로 삶을 이야기는 책이 있는 공간에서 무엇 꺼낄 것이 있다고 나를 감추고 영혼없는 모습으로 적의만 가득한 걸까.

아, 그러고보니 나도 프로필 이미지가 없다. 그건 귀차니즘 때문이기도 하고 뭘 넣어 알라딘 서재의 ‘나’가 될까 확정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새삼 유령처럼 보인 이미지를 떠올리고 보니 프로필 이미지를 채워넣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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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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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나의 것


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문학동네, 2025-09-30.

 

 

 어떤 형태의 직업을 가진 이든 평생 그 일을 이어온 사람의 생애는 비슷하지 않을까. 거기에 내게 조금 익숙한 세상엔 적절한 동조나 차별성을 찾아내려 할 테고, 내게 낯선 세상의 이야기는 호기심과 의문을 가지며 바라보게 될 터이다. 편집자의 삶이란 잘 안다고도 낯설다고도 할 수 없는 세계, 이 책을 펴고 읽는 순간에도 페이지가 몇 장을 넘어가는 순간에도 이 책이 이런 내용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1990년대 초 출판계에서 일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엄청난 ‘사건’을 바탕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일’을 주요 소재로 소소한 업무와 함께 제 삶을 이야기하는 회고록이나 자서전 형태의 일기와도 같다. 어떻게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일 중에서 왜 그 일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된 인연들, 그 과정에서 일에 대해 자신이 가지는 감정과 태도들을 담고 있어 어쩌면 후배들에게 또는 어떤 직장의 신입들에게 ‘일하는 자세’를 들려주는데 적합한 이야기처럼도 느껴진다. 사회초년생에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올라선 이가 들려주는 어쩌면 직업에서 성공한 이야기처럼. 그래서, 그녀는?

  그녀, ‘석주’가 조금이나마 목적을 가지고 생기있게 활동한 건 대학 시절 문학 창작 동아리에 가입한 것, 거기에서 나아가 소설 창작 수업을 청강한 것이다. 이후로 교사가 되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에 맞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과 함께 스물 넷에 ‘교한서가’에 교열자로 입사한다. “크게 보면 오탈자와 문법적인 실수를 바로잡는 것이 교정이고, 문맥과 흐름을 파악하여 표현과 문장을 다듬는 것이 교열”로 교열자는 교정자로 원고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이다. 교열자로서 석주는 상사 ‘오기서’ 아래에서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은 주제넘어 보였고, 과도하게 수용적인 자세는 태만하게” 보여 “원고에 어느 정도로 관여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며 점차 교열 업무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진다. 이후 ‘오기서’의 추천으로 부서를 이동하여 인문교양부 편집자로 일하면서 ‘편집자의 마음 같은 것’이 자리하며 편집 일에 대한 열정이 셩겨난다. 편집자 소모임을 찾아가기도 하며 “자신과 비슷한 속도로, 닮은꼴의 꿈을 좇는 듯” 보이는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었”으며 소속감을 느낀다. 또한, 그곳에서 만난 편집자 ‘조원호’와 매일의 산책같은 사랑과 연애를 시작한다.

 

그러게요. 참 이상하죠? 일이 쉬워지는 법이 없으니. 오래하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일은 그렇지도 않아요. 좋아하는 게 이렇게 무섭습니다. 밉고 싫고 그만두고 싶어도 꾸역꾸역 해나가게 되거든요. 예전에 제 사수가 그러더군요. 뭘 좋아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라고. 더 좋아하고 많이 좋아할수록 마음 다칠 일이 많다고. 그땐 무슨 이런 감상적인 소릴 하나 싶었는데 지나고 나니 틀린 말도 아니더라고요.

 

  물론 연애만큼이나 일에 대한 ‘석주’의 열정과 애정 또한 깊어간다. 직장생활을 해본 이라면 반복된 일 속에서도 혼을 쏟아가며 일을 해내고, 소진이 오기도 하는 반복된 업무의 일상을 보낸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와 트러블이 있으면 일은 더 힘들어지기도 하고 보상처럼 승진이 걸려 있다거나, 주어진다면 더욱 열정적으로 그 일에 매몰되기도 한다는 것을. 출판사의 편집자인 석주에게는 어땠을까.

  출판사에서 일하는 편집자, 문학 동아리에 가입하고 소설 창작 수업을 들은 이라면 이후 업무와 관련하여 ‘석주’가 맡게 되거나 하게 되는 일이란 건 예측이 된다. 또한 1990년대 출판사에서 일하는 여성 편집자라면 당시에도 당연하게 흘러갔을 노동하는 여성, 전문직 여성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을 지도 짐작된다. 일과 사랑이란 왜 이분법처럼 나눠지는 선택이어야 하는 것인지.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왔다”

 

  그렇다. 이 소설은 ‘석주’가 말하는 것처럼 “닮은꼴의 하루가 반복되는 진부한 이야기 같았다. 극적인 사건도, 놀라운 반전도 없는 서사, 개성도 매력도 없는 주인공이 완성해 나가고 있는 그 스토리”와 같다. “어떤 독자에게도 특별한 인상을 남기지 못할 것 같”은 스토리. 하지만 그럼에도 먹먹함이 밀려오는.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


  여기에서 소설의 제목이 등장한다. 오직 그녀의 것. 업무도 다르고 처한 상황도 다름에도 ‘석주’의 서사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 그것은 ‘석주’가 하는 일을 다른 업무로 대체한다고 했더라고 보편적으로 느끼게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얼마간 자신과 닮은 듯했고 때때로 자신처럼 느껴지는” 이야기. ‘석주’가 그 마음까지를 모두 알려주는 꽉 닫힌 엔딩.

 

특별한 사건도, 감정의 동요도 없는 그 이야기에 어째서 마음이 끌리는지 석주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녀가 읽는 건 작가가 상상한, 현실에는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 인물은 얼마간 자신과 닮은 듯했고 때때로 자신처럼 느껴졌다. 석주는 알고 있었다. 이야기가 향하는 곳이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허구의 서사가 불러일으키는 것은 내밀한 기억의 감정이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자신에게도 돌아오는 것이 실은 읽는 행위의 전부라는 것 또한.

 

  이것이 ‘오직 그녀의 것’이 ‘나의 것’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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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의 온기
김혜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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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햇살


달걀의 온기,  김혜진, 창비, 2026-04-08.

 


  “넌 봄날의 햇살같아.”

  우영우가 이런 말을 했을 때, 분명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 빛나는 언어 표현도 우영우를 대하는 ‘봄날의 햇살’ 행동도.

  한국인은 ‘정’이라는데, 최근에는 외국인에게 어필하되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부담스럽게 여겨지거나 의심부터 하게 되는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것도 같다. 오랜 시간 뼈 속에 박힌 이 정서가 쉬이 사라지진 않겠지 싶으면서도, 개인주의를 넘어 점점 이기주의로 치닫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정인지, 오지랖인지, 범죄를 위한 미끼인지 생각해야 하는 일이 서글프다. 『달걀의 온기』는 이런 마음을 모듬은 소설집이 아닐까.


삶에서 사소한 정을 주고받는 일이 점점 드물어진다는 생각을 그녀는 자주 했다._「빈티지 엽서」

 

관심도 지나치면 병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사생활과 생활 방식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세요. 참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_「관종들」

 

그러니까 안전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영위하는 현명한 사람들이 매일 반복하는 일. 그건 애실이 평생 노력했으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던, 현서로 인해 잠시 잊었던 일상이었다. …… “애실씨, 혹시 걔한테 돈 빌려줬어?” _「하루치의 말」

 

  그러니까 타인의 호의에 반신반의하게 되고 선뜻 타인의 손을 잡기 힘든 불편한 기류들이 흐른다. 그래서 내가 행한 단순한 선의가 타인에게 불경한 것으로 치부되며 뒷담화의 소재로 사용될 때, 「빈티지 엽서」속 ‘나’는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로 자신을 단속해야 한다. 내 일상을 변화시키며 그 안으로 스며들어 좋은 기운을 전하는 이, 그래서 좀더 삶을 애착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그 사람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행복할 수 있을 듯한 순간, 호의가 ‘목적’을 위한 것, 거짓임을 알았을 때 느끼게 되는 당혹감. 「하루치의 말」속 애실이 경험하는 감정이다. 아마, 다시는 사람에게 호의도 삶의 환희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집의 제목은 『달걀의 온기』다. “무슨 일이 있나 한번 살펴주는 게 뭐가 어려워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세상에서 마냥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관종들」의 정해는 가까운 이들에게서도 모진 말을 듣지만 타인에게 관심을 두는 걸 거두지 않는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불안과 걱정을 나누는 데 시간과 마음을 들이는” 일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니까. 작가는 이처럼 ‘최소한의 온기’를 나눌 수 있기를 더 소망하는 듯하다.

  닭이 갓 낳은 달걀은 따스하다. 그 달걀을 맛보려면 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온기를 느끼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일인데, 그 온기를 나누려면 따스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더 세심해야 할까. 「달걀의 온기」에서 선희가 청란 두 알의 따뜻함을 느끼는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선희는 아이가 건넨 청란 두알을 받아 들었다. 따뜻했다. 그건 바깥의 열기와 무관한, 내부에서 만들어져 흘러나오는 온기였다. 아니, 바깥에서 불어넣지 않았다면 결코 생겨나지 못했을 온기인지도 몰랐다. _「달걀의 온기」


  내부, 속으로만 흘러 들어가서는 깨닫지 못할 온기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다. 아마도 이것이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관계맺음 속에서 ‘나누는 온기’일 것이다.

  선희는 투자 사기를 당하고 아버지가 살던 고향집을 처분하기 위해 내려와 지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 마음이나 행동이 까끌까끌한 상태이다. 혼자 닭을 키우고 달걀을 팔며 살아가는 소녀 ‘민지’를 보며 선희는 과거의 자신을 마주한다. 자신이 얼마나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지, 그만큼 타인에 대한 원망을 하고 있는지를.

  「푸른색 루비콘」속 ‘그’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고,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재미를 찾지 못하는, 관계 안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는 부류가 아닌 ‘그’의 관심사는 늘 내부로 향했는데 교회에서 만나게 된 ‘남자’와 엮이며 차가 구덩이에 빠지는 일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그의 얼굴에 따뜻하게 와닿”는 것을 느끼고 ‘남자’가 준 꿀물 한잔은 ‘그’에게 “입안에 달콤한 내음이 감돌게 하고, 나른한 졸음을 주며 잠깐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하나의 세계는 필시 다른 세계와 엮일 수밖에 없다. 홀로, 내부로만 집중해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타인의 선의를 기대하다 실망하고 문을 닫아버리기도 하지만 내가 타인에게 선의를 줄 수도 있음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봄날의 햇살’처럼 무심히 행하는 보살핌과 애정을 받게 되면 “마음을 뭉클하게 하며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오게” 한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 따스한 햇살의 온기처럼 조용히 퍼져나갈 온기를 잊지 않기를, 타인에 대한 애정을 감각하기를 소설은 전하는 듯하다.

 

선희는 지갑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며 청란을, 그 청란이 품고 있는 온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왜 그것이 돌연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지, 왜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오는지에 대해선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것이 자기 삶에는 없다고 여겼던, 스스로 감쪽같이 지워버렸던 누군가의 보살핌과 애정 같은 것을 일깨웠다는 사실을 안 건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곳을 떠날 때 동력으로 삼았던 원망과 미움이 옅어지고, 그 아래 자리한 것들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거였다.  _「달걀의 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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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 만개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초엽 지음, 박지숙 그림 / 마음산책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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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이력을 명시하듯


해파리 만개

 김초엽, 박지숙 (그림), 마음산책, 2026-04-30.

 

“쓸모없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일까”

 

  짧은 소설집이라고 하나 그다지 짧은 소설은 아니다. 여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단편 분량이 넘는 소설도 있고 각각 제법 길이가 길다. 그런데 짧은 소설이라고 하고 있으니 “짧다”는 건 무언가 생각하게 된다. 읽고 나면 “짧다”라고 느껴지긴 한다. 스토리와 등장인물이 단순하기에 얘기의 길이가 “짧다”. 그렇기에 캡쳐한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순간적이고 특정한 단어가 둥둥 떠다닌다.

  김초엽 작가하면 광활한 우주를 떠올리는데 해파리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바다가 연상되었고, 서두에 쓰여진 “쓸모없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일까”라는 문구 때문에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쓸쓸함이 느껴졌다. 쓸모라니, 이 단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직간접적으로 받고 있는 압력을 대표하는 말 아닐까 싶다. 끊임없이 쓸모를 묻는 인간은 모든 것을 쓸모로 ‘판단하고’, 모든 존재를 그에 맞춰 생각하기에 ‘무용’을 업신여긴다. 그렇다고 ‘쓸모 쓸모’하면서 얼마나 쓸모 있게 생을 살아가는지는 모르겠다. 쓸모를 따져가며 외치는 ‘성과’ 따위가 얼마나 이루어졌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뜨악한 결과물을 ‘성과’로 포장하기도 하니까.

  모든 생물들이 제 쓰임이 있을진대 그 쓰임의 기준을 ‘인간’으로, ‘나’로 하기에 ‘위기’니 ‘멸망’이니 하는 말들도 솟아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탈탈 털려 도구적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이다지도 어려울 일인가.

 

아까부터 너무 과한 해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젤리는 무척 우울해 보인다.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고 기피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같다. 어떤 기분일까? 꼭 필요한 존재였다가, 자신을 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던 바로 그 특성 때문에 모두가 자신을 피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_「젤리의 우울」


  모래를 그러니까 우리가 모래하면 당연 떠올릴 그 모래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는 누가 있을까. “네가 지닌 진짜 힘은 고정하는 힘이 아니라 바라보는 힘이야. 응시하는 힘이지. 너는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이 세계가 느린 숨을 쉬게 해.”

  “서로를 낯선 순간 속에 붙들어” 세상을 달리는 모래의 존재 때문에 이다지도 살아가기 어려운 세상에서 숨을 쉬는 것일지 모른다. 모래를 찾아 바다로 가는 것이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도. 모래에 대한 이 정의만으로도 이 책을 계속 읽어갈 이유가 된다.

  하지만, 우주선에 불시착함으로써 끊임없이 눈물을 전파하고 있는 ‘젤리’들을 마주하게 된다면. 해파리들이 원하지 않을 만큼 계속 증식하고 있다면. 접촉하면 ‘말과 생각과 느낌을 주입하는 ’끈적이‘를 마주하게 된다면. 이미 쓸만큼 써서 버린 것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이 소설은 이러한 ‘존재’들을 새로이 인식하는 이야기로 읽힌다. 과하게 표현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지만, 마치 ‘존재’에 대해 더 세심히 파악하여 특징을 찾아내 ‘재활용’ 방안을 찾아내는 것 같달까. 전시장에 전시하기 위해 이전의 이력을 명시하고 있는 과정 같달까. 이미 그것은 그들의 존재의 의미를 보였으므로, 충분히 다시보기 또는 재정의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천장 틈새로 보이는 도시의 골목이 해파리의 보랏빛으로 물든다. 해파리들은 기능이 없고, 쓸모가 없고, 그저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존재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할 것이다._「해파리 만개에 관한 기록」

 

  앞으로도 세상엔 의도하든 의도치 않은 수많은 ‘존재’들이 탄생케 될 것이다. 잊히고 버려지는 그 존재가 ‘나’가 아니게 되리라 장담할 수 없다. 이러한 ‘존재’들을 마냥 외면하고 살아갈 수도 없다. 누군가에겐 무섭고 두렵고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힘있는 것들에 의해 ‘쓸모없는 것’으로 규정되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이란 또한 마냥 예측가능한 것만은 아니어서 우리가 마주하게 될 무수한 ‘존재’들은 어떤 ‘쓸모’로 되돌아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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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 제3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함윤이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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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저없이, 막


정전 - 제31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함윤이, 문학동네, 2026-03-13.

 


  함윤이 작가의 소설은 리얼리티 속에 환상을 흩뿌린 작품이 유독 많다. 아니다, 환상이 주고 리얼리티를 첨가한 건가? 이 소설 또한 작가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어떤 부분을 ‘환상’으로 삼느냐가 중요한 포인트인 듯한데, 작가의 단편소설 「강가/Ganga」에서의 모호하고 환상적인 부분은 좀 버려두고 ‘현실 사건’을 갈무리하여 최대한 현실적인 틀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해결에 방점을 두자면 ‘환상’으로 회피하기보다 ‘환상적’으로 해결하고픈 노력이 보인다랄까.

  어렸을 적 내가 갖고 싶었던 것은 순간이동력이었다. 어느 곳이든 가고 싶었던 마음이 남긴 염원이다. 내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음을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참 좋겠다. 아무튼 다른 사람은 가지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활용할지, 쓰임새를 만들기 위해 애쓸 듯하다. 현실적이든 아니든. 그렇다면 ‘타인’이 나의 ‘능력’의 쓰임을 찾아 요구할 때, 주저없이 응할 수 있을까.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다시 만난 세계’가 불려지는 순간

 『정전』을 이야기하자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아니라 ‘다시 만난 세계’가 불리는 그 변화의 순간이 떠올려진다. 투쟁의 이유를 파악하고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의 유사성도 인식하지만 방법은 다른 형태. 현재 내가 가진 상황을 고려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흐름. 논의나 논쟁보다는 즉각적인 실행력이 돋보이는 방식. 그리하여 좀더 발랄함이 가미되고 다소 엉성하고 우려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울컥하게 되는 그런 투쟁 말이다. 『정전』속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청년’이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닌가 싶다. 연령으로 누군가를 규정하고 싶지 않지만 MZ세대가 경험한 ‘투쟁’은 민주주의의 가치가 묵살당하던 시대의 투쟁과는 또다른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최루탄과 쇠파이프 등을 휘두른 공권력에 맞서 돌멩이, 화염병으로 방어하던 시대에서 촛불로 LED등으로, 이제는 응원봉으로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투쟁가도 “다시 만난 세계‘를 비롯하여 다양한 노래가 울려펴지는 ’문화 퍼포먼스‘의 형태로 변화했다. 일상에서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 막상 ’이슈‘가 생기면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그 기저는 각자 다르겠지만.

물류를 멈춰 세상을 멈추자_정전아 일어나라

  ‘물류를 멈춰 세상을 멈추자’는 대표적인 투쟁구호다. ‘기계를 멈춰’, ‘물류를 멈춰’,‘공장을 멈춰’, ‘세상을 멈추자’라는 구호는 오래도록 이어온 ‘노동’의 가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슬로건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노동자’는 필요하지만 ‘노동’에 대한 가치는 크게 달라진 것 같진 않다. ‘자본’과 ‘노동’의 끝없는 대립에서 오히려 ‘자본’의 가치가 더 부상하는 느낌이랄까. AI시대, 노동에 대한 인식과 그로 인한 재정의는 계속 이루어질 것이다. 물론, 아직은 전통적인 ‘노동’이 ‘공장’이 존재하고 있으며 ‘노동자’를 대하는 방식 또한 급격한 변화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어느 순간부터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는 ‘노동자’의 사고와 사망 소식은 주로 20대이거나, 이주노동자인 경우가 많다. 물론 정확한 산재사고 현황은 알려주지 않고 나또한 열심히 찾아보지 않았지만. 더구나 그들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이니까, 뉴스가 알려주는 대로 그렇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내가 아는 누군가가 취재를 통해서랍시고 보도에 나온 기사를 보면, ‘막’처럼 ”이게 다가 아닌데“라고 생각할 것이다. ”기사 속 A씨의 삶은 서글픈 결말을 향해 필연적으로 달려가는 양 묘사되어 있었다. 문장들을 핥으면 비리고 쓴 맛만이 가득할 것 같았다. "얘는…… 이렇게 어두침침하고 서글프기만 한 사람이 아냐.“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막은 파우더가 들어가지 않게끔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네 손가락은 내 손가락보다 훨씬 짙은 색깔이잖아. 밀크 파우더 안에서라면 더더욱 눈에 띌 거야.

 

금방 찾을 수 있다던 ‘A’의 손가락을 찾을 수 없다면, 찾는 노력이 없다면 ”어두침침하고 서글프기만 한“ 것이 아닌 ”더 넓고 많은 애“를 알리기 위해 여전히 ‘기계를 멈춰’, ‘공장이 멈춰’가 유효한 세상이 된다. 『정전』속 화자 ‘막’은 그렇다.

 

“내가 원하는 건 공장 전체가 정전되는 거야. 단 하루만이라도 말이야. 하룻밤만이라도 그 안의 일이 완전히 꼬여버리면 좋겠어.”

 

어긋난 사랑의 작대기

  누군가에게 비밀을 털어놓는 건,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특별한 관계가 되고 싶다는 고백이다. ‘은단’의 고백은 ‘막’에게 불편함을 안긴다. 서로 어긋나는 마음, 교류는 그것으로 단절된다. ‘은단’이 아무리 눈 한번 깜빡임으로 눈앞의 전등을 꺼버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대도 ‘막’에게는 와 닿지 않는 능력이며, 감정이다.

  스무 살의 ‘막’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휴학하고 등록금을 벌기 위해 제약회사에 들어간다. ‘잠깐 일을 하러 나왔을 뿐인 대학생’으로 일하고 있지만 공장생활을 하며 ‘수지’와 ‘영준’, 외국인 노동자 ‘라히루’를 만나 친구가 된고 ‘라히루’에게는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라히루’에게는 애인 ‘서영’이 있고, ‘라히루’는 기사 속 A가 된다. 공장에서 버려진 라히루를 위해 노조에 가입한 ‘막’은 노조활동이 어렵고 스스로 ‘노동자’의 정체성이 크지 않기에 노조 활동을 그만둔다. ‘라히루’에 대한 감정이 큰 ‘막’은 어떤 형태로든 ‘막’을 돕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

  여기서 기획자 ‘막’이 활용하는 것이 ‘은단의 능력’이다.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로 만나지 않았던, ‘은단’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막’은 주저없이 ‘은단’에게 연락하고 ‘은단’이 능력을 발휘하기를 요구한다. ‘은단’을 만날 때마다 원인도 모를 ‘신물이 치솟는다’는 ‘막’이 ‘은단’을 대하는 방식은, 솔직히 상당히 불쾌하고 불편하다. ‘라히루’에 대해 애정으로 필요한 ‘은단’이기에 신물을 삼키며 참고 “은단이 막을 부를 용기를 내기 전에 서둘러 달아나”는 ‘막’의 이기적인 행태에 혹은 제 사랑을 위해 헌신하는 놀라운 행태에 대해서. 오로지 ‘막’에 대한 애정으로 오케이를 외치는 ‘은단’에게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유없이 외면당하는 인물인 것 같아서도 그렇고 ‘공장에서 행한 일’로 죄책감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더더욱 그러했다.

  그들의 계획이 성공하든 아니든 ‘막’이 사람을 대하는 행태는 내게 영원한 물음표와 느낌표를 안길 것이다. 무턱댄 혐오와 자신을 좋아하는 이에 대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진 것처럼 행하는 행태, 주저없이 막 사람을 ‘도구’로 대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크나큰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한 우정과 애정에서 시작한 ‘막’의 행동은 ‘은단’에게 행하는 방식 때문에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아니, 무섭게 느껴졌다. 거듭 생각해보는데, 내가 혐오하는 이에게 내 필요에 의해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내겐 없을 것이다.

  ‘정전’은 공장의 정전, 노동소설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거침없는 스무살의 이야기라라고도 볼 수 있겠다. 멈춤의 방식은 함께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막’처럼 홀로 돌진하는 형태가 되는 걸까. 스무살이 세상에 나와 겪게 되는 일과 사람에 대한 거침없는 감정의 펼침을 마주한다. 그러니, 이건 사람과의 ‘교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와는 ‘교류’가 아니라 ‘정전’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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