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료한 사고와 말


수전 손택의 말 - 파리와 뉴욕, 마흔 중반의 인터뷰

 수전 손택·조너선 콧, 마음산책, 2015


 수전 손택을 알게 된 건 수전 손택의 글을 읽어서가 아니었다. 다른 이의 책을 읽는 중에 수전 손택의 이름과 글과 책들이 수도 없이 튀어나왔다. 마침내 난 수전 손택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고 그녀의 글을 읽고 싶은 열망에 휩싸였다. 글을 읽고 나선 수전 손택의 생전에 더 많이 읽을 것을 후회했다.

  타인의 책에서 반복되어 나타났기에 수전 손택을 알게 된 처음엔 수전 손택의 글을 읽는 것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은데 사실, 수전 손택의 책들은 책의 두께와 말의 무게에 긴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소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흥미롭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듯해도 다른 소설들에 비해 더듬거렸다.

  그에 비해 수전 손택의 사후에 나온 책들은 얼마나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가 생각하면 놀랍다. 이 책 또한 인터뷰 형식이라서인지 글이 쉬이 읽혀진다. 역시나 수전 손택의 말이고 생각을 담고 있는데도 그렇다. 어쩌면 질문과 답으로 이어진 형식은 나홀로 묻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간명하게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수전 손택의 육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글을 통해 생각하는 목소리가 있는데 실제 목소리는 내가 느낀 것과 너무 달라 놀란 작가들이 몇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 느낌과 수전 손택의 실제의 괴리가 얼마만큼인가 알고자 하는 걸까.

  옛 사진이란 것이 항상 그렇지만, 더구나 흑백사진에서 풍기는 느낌이란 것은 사람을 참 인상적이게 만든다. 수전 손택의 젊은 시절과 그리고 생애의 마지막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습게도 타인같지가 않다. 오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들여다본다. 안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지 알면서도, 안다고 그렇게 느낀다.

  수전 손택의 일기에 남겨진 자신의 결점. 말이 많은 것이라는 일기가 생각난다. 말이 많다는 것은 수다스럽다는 것으로 통칭되는 경향이 강한데 그런 느낌은 없다. 하지만 글로 보는것과 또 다르니까. 1978년 파리에서의 12시간 인터뷰 전문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수전 손택의 말은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보는데 “명료하고 권위적이고 직접적인 말투를 갖기 전에는 인터뷰 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한 후의 인터뷰로 그 완성의 결과라고 한다. 인터뷰 당시의 호흡 그대로라고 하는데도 정말이지 명료하다. 삶에 대한 확고한 자기 생각이 없다면 말로 명료하게 나와지지 않는다. 마흔 다섯의 수전 손택은 완결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글을 쓰거든요. 일단 한 가지 주제에 대해 다 쓰고 나면 더 이상 그 생각을 할 필요가 없도록 말이에요. 사실 글을 쓸 때는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하는 거죠. 대중을 경멸하는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겠네요. 왜냐하면 제가 그런 아이디어들을 없애버린다는 건 내가 믿는 바로서―글을 쓸 때는 물론 실제로도 믿죠―그걸 전달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러나 다 쓰고 나면 제가 다른 관점으로 옮겨 가기 때문에 더 이상 믿지 않는 생각들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훨씬 더 복잡해지죠……. 아니, 어쩌면 더 단순해지는 걸지도 모르지만요. 그런 얘기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글을 쓰고 나면 전 이미 어디 다른 곳으로 옮겨 간 뒤랍니다. p177~178


  수전 손택식의 사고와 글쓰기는 내게 유사점을 느끼게 하면서도 상당한 거리감 또한 준다. 이것은 여전한 사고속에 머물러 자기확신이 없는 나와 수전 손택의 차이점일까. 또한 지성의 한없는 부족의 이유도 있겠다. 아무도 내게 인터뷰하자고 조르지는 않을 테지만 나 역시 수전 손택처럼 생각들이 좀더 명료해질 때까진 말을 남발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다. 하긴 자신이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공표되었기에 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낌으로써 일을 진행한다고 한 사람이 있었다. 반면 나는 내가 그것을 행한 이후에나 말을 해애 한다는 강박을 느끼긴 했는데, 그런 점에서 글은 또 다른 것 같다. 글이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도 같다. 말이란 조심스럽고 글또한 조심스럽지만 어떤 형태로든 모두가 생각을 정리하는 도구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일상은 생각의 연속이니까.

  누군가의 질문에 “잘 모르겠어요” “글쎄요” “생각해 본 적이…” 등등의 말을 하고 있는 나를 상상해본다. 이것참 삶에서 내 확고한 생각하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라는, 나 자신에게 미안해야 할 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수전 손택처럼 지성을 바탕으로 한 강렬하고 열정적인 행동력이 주어진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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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힘


다시 태어나다- 수전 손택의 일기와 노트 1947-1963


수잔 손택 / 데이비드 리프 엮음, 김선형 옮김, 이후, 2013.


 타인의 일기를 읽는 내밀함을 데이비드 리프는 허락했다. 자신의 글이 아니기에 결정이 쉬웠을까 잠시 생각해보지만 어머니의 일기엔 아들의 이야기가 필히 없을 수는 없다. 그러니 그 자신의 이야기도 함께다. 어머니의 일기를 아들은 공개했다. 어머니는 이미 유명인이었고 어머니의 삶과 글, 생각은 어머니의 입과 글로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일기란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과 형식을 갖게 되는데, 아들에게 어머니가 사망 전 일기의 존재를 알린 것을 아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글을 읽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모든 면면들이 나타나는 것을 앎에도 아들은 어머니의 글을 출판했다. 그 자신, 어머니 수잔 손택의 아들이 아니라 저술가, 편집자로서 출간에 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보면 그만큼 많은 이들이 수전 손택의 하나하나에 열광하고 있다는 말과도 같아 보인다.

  이 책엔 14세부터 30세 때의 수전 손택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전생애에 걸쳐 일기를 썼고 그 기록은 많다는데 이 유년과 청춘의 시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자의식 강하고 지성적인 수전 손택을 만나게 된다. 아니면 그것은 그 나이 또래가 갖는 그런 감수성이라고 해야 할까. 좀더 깊고 처절한 감수성. 낙서처럼 끄적인 글귀 하나하나가 사춘기 소녀의 고뇌에 찬 외침이겠지만 어쩐지 그의 아들 말대로 자신감에 차 보인다. 또다른 표현, 자아도취라….

 어린 시절부터 수전은 많은 문학책을 읽고 그에 관한 생각들을 기록했다. 문학에 대한 감수성, 지성, 글쓰기에 대한 열망, 자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성적 정체성과 연애, 결혼에 대한 환멸 등등등. 수전 손택의 동성애 성향을 좀더 이르게 자각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이기에 결혼에 대한 환멸은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당시 17세는 이른 결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가정이지만 결혼 생활이 서로의 갈등과 다툼으로 귀결되지 않았다면 수전 손택의 삶은, 생각들은 다르게 영향을 받았을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어쨌든 지성과 감수성의 홍수 속에 가득찬 사람이구나 싶었다.


    “일기는 자아에 대한 나의 이해를 담는 매체다. 일기는 나를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로 제시한다. 따라서 그것은 그저 매일의 사실적인 삶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대안을 제시한다.”  -1957년 12월 31일


  일기가 사실적 삶의 기록이긴 하지만 그 사실로부터 자신을 이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 수전의 이 고백엔 평생 수전에게 따라다니는 동성애에 대한 불편한 시선이 담겨 있다. 성정체성, 동성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위해 그리고 그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이 시절의 일기 속엔 가득 차 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삶의 기록이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이해이고 대안의 제시라는 고민의 기록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 수전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이 사회는 이성애자를 정상으로 간주하고 동성애를 비정상적인 것이라 간주하니까, 어린 소녀에게 그리고 결혼을 한 여자에게는 동성을 향한 연정들이 자아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일기들엔 그러한 언어들이 해방구처럼 쏟아져 있다.


오르가슴의 도래와 함께 내 인생이 바뀌었다. 나는 해방되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이야기는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더 협소해졌고 가능성들은 봉쇄되었으며 그 덕분에 대안들이 명료하고 날카로워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무한하지 않다. 나는 무無다.

섹슈얼리티는 패러다임이다. 예전에 내 섹슈얼리티는 수평적이었다. 무한한 분화가 가능한 무한한 선이었다. 이제 내 섹슈얼리티는 수직적이다. 위로 올라가 넘어가 버린, 어쩌면 무無. p282


  수많은 일기를 썼다는 수전 손택. 그 일기들이 대안이라면, 그녀 스스로 만든 대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녀가 고백하듯이 그리고 보여주었듯이 글쓰기로 나타난다.


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은 내 동성애와 연관이 있다. 나는 사회가 나를 향해 겨누고 있는 무기에 맞서기 위해 무기가 될 만한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게 내 동성애를 정당화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내 느낌이지만―일종의 면허를 발급해 준다. p286

 

  수전의 치열한 글쓰기가 동성애 욕망의 반동형성이라 생각한다면 약간 김이 새려 하지만 무엇이든 어떤 욕망은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반하여 형성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렇다고 그것이 전적으로 모두 동성애로 인해서는 아니기도 하고.

  어쨌든 수전에게 있어 이 동성애에 대한 욕망이 자신을 보다 새롭게 자각하고 인식하는 힘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욕망을 사회가 바라보는 눈 사이에서 매우 적절히, 아니 그 자신은 괴로웠을지 모르지만, 조화시키고 있지 않았나 싶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성애자들이 연인과 헤어지고 나면 늘 작가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측면으로 수전 손택을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글의 바탕이 실패한 연애 경험이었어라고 말하면 호기심과 김이 빠지는 것이 열렬한 투쟁가들에게 느끼는 더 큰 대의를 말하리라 생각해서인지 모른다. 사실, 더 큰 대의라는 말도 웃기거니와 모든 인간은 제 삶을 살아내는 거 자채에서 벌써 치열함을 내장하고 있다.

  또한 욕망에 좌절한 수많은 이들이 반사회적인 형태로 욕망을 해소하거나 좌절된 욕망에 대한 분노를 펴는 것을 생각한다면 수전 손택의 욕망의 해결 방법, 그 자신의 대안은 매우 긍정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가 그랬다. 책을 한번 쓴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수전 손택은 수없이 달라질 수 있었던 또다른 요인이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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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문학은 자유다 At The Same Time, 수잔 손택 , 이후, 2007.


  동시에At the same time와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을 보면서 나라면 이 책에 어떤 제목을 붙였을까 생각한다. 저자가 아니니, 편집자의 입장에서라도 말이다.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은 이 책이 문학 관련 내용이 가득찬 것으로 느끼게 한다. 반면 동시에라는 제목은 그 내용을 예상하는데 어려움을 준다.

  이 책은 저자 수잔 손택의 마지막 생애에 쓴 평론과 연설을 모은 책이다. 소설가로 평론가로 에세이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수잔 손택의 글들이 빛을 발한다. 암투병 중에도 수잔 손택 자신이 직접 구상과 계획으로 쓰고 정리한 차례라고 한다. 총3부로 1부는 문학평론으로 문학작품에 대한 해설,  2부는 미국의 9·11 테러 직후의 글과 포로수용소 학대 등 수잔 손택이 관심을 둔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글, 3부는 수잔 손택의 문학에 관한 연설들을 모았다.

 미국 편집자는 동시에를 한국 편집자는 문학은 자유다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한국판은 스스로 ‘소설가’로 불리기를 원했던 손택의 뜻을 담았다 했다. 미국판은 “이 책의 다양성과, 손택의 문학세계와 정치 활동, 미학과 윤리학, 내적 삶과 외적 삶의 분리 불가능성에 대한 경의의 뜻으로.”라고 제목 선정의 이유를 밝혔다.

  미국 편집자의 말이 길어서가 아니라, 동시에라는 제목에 더 끌린 것은 수잔 손택에 대한 인상 때문이다. 수잔 손택은 평론가, 소설가, 에세이스트 등 작가로서 명성이 드높다. 하지만 수잔 손택은 또한 정치사회문제에 대한 참여의식이 높고 실제 활동가였다. 그 활동가적인 사회참여의식을 생각하면 동시에란 제목이 수잔 손택의 모든 것을 더 적절하게 담는 느낌이다. 단지 수잔 손택이 쓴 글과 여러 뉴스, 타인의 글을 통해서 수잔 손택을 접할 수밖에 없는데, 수잔 손택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수잔 손택의 지적이고 활동적인 모든 면모가 부러움과 경외감을 안겨준다. 그래서 수잔 손택의 글을 읽을 때면, 뭔가 모르게 떨린다.


자기 수양 자체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타주의,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라는 기준이 없는 문화(문화라는 단어는 표준적인 의미로 썼습니다.)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확장하는 것은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처음에는 독자로서, 나중에는 작가로서 문학이라는 기획에 제가 몰두하게 된 것은 문학이 다른 자아, 다른 영역, 다른 꿈, 다른 언어, 다른 관심사에 대한 공감의 확장이기 때문입니다. p202


  수잔 손택 스스로 문학인이라 불리기를 원했다고 하는데 수잔 손택의 ‘문학’은 사회문제, 사회참여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소설가이든 평론가이든, 에세이스트이든 글을 쓰는 작가로서 수잔 손택의 활동은 끊임없는 사회활동의 연장선이자 상호작용이다. 수잔 손택의 문학관이 곧 그가 쓴 글과 유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저는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가를 당연히 도덕적 행위자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작가에 대한 이런 개념은 나딘 고디머의 문학관과 제 것 사이의 여러 연결점 가운데 하나지요. 저는 나딘 고디머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보는데, 문학에 매달리는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고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 어떤 것이 낫고 어떤 것이 나쁜가, 혐오스러운 것과 존경스러운 것은 어떤 것인가, 개탄할 일은 무엇이고 기뻐할 것은 무엇이고 인정할 것은 무엇인가. 직접적으로 생경하게 교훈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지한 소설가는 도덕적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지요. p278~279


  수잔 손택에게 느끼는 동경이 그저 지식인으로서 활동가로서 그녀의 외적인, 보여지는 측면에 대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지만, 난 그녀의 삶 전체에 대한 동경에 빠져 있진 않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그녀의 삶인 것이고 현재 세상에 있지 않은 작가라는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 뿐. 그 삶에서 느껴지는 열정에 대한 동경이 더 강하다고 할까. 그러나 이런 글들을 만나면 같은 생각을 마주할 때의 반가움, 통찰력 있는 예리한 시선, 거침없는 비판들에 주체할 수 없는 떨림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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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7-04-0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년 전인가 한 출판사가 주최가 되어 수전 손택의 <수전 손택에 관하여(REGARDING SUSAN SONTAG)>란 다큐영화를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다큐를 통해 미처 몰랐던 수전 손택의 민낯이라고 해야 하나 일상을 보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의 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같아요. 간만에 저도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

모시빛 2017-04-07 23:23   좋아요 1 | URL
마침 수전 손택의 목소리가 넘 궁금하던 차였는데 이런 다큐가 있군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다큐를 보고 나면 글만 볼 때와는 느낌이 또다를 것 같네요. 막 설레지네요. 또 다른 이해의 문을 만난 것 같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다큐를 꼭 찾아서!!!
 


사색이 필요할 때


쇼펜하우어 문장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훈, 2006.


 쇼펜하우어 하면 염세주의 철학자의 대표라 기억된다. 이 철학자의 문장론은 얼마나 다를까를 생각하며 책을 펼쳤는데, 상당히 간결하고 쉬운 글이었다. 자연적으로 철학자들의 책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부터 갖고 있던 것을 말끔히 씻어주듯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은 사색과 글쓰기, 독서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담고 있는 글이다. 더 정확히는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집 <어록과 보유>에서 사색, 독서, 저술과 문체에 관한 부분만을 역자가 추려 제목을 <쇼펜하우어의 문장론>이라 붙인 것이다. 명언처럼 명료한 생각의 전개가 돋보인다.

  쇼펜하우어는 사색하는 인생은 남다르다며 사색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누구나 책을 읽을 수 있고, 누구나 공부할 수 있지만, 누구나 이를 통해 사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사색이 단순한 신변잡기적 생각의 흐름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스스로 사색하는 정신은 나침반과 같고, 사색의 결과에서 얻어지는 것이 사상이라고 말한다. 단, 독서는 타인의 생각을 읽는 것이기에 독서보다 더 한발 나아간 행위가 사색이고 사상가는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색을 통해 사상가가 되었다면 사상가의 언어는 어떠해야 하는가.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사상가의 글쓰기에 대해 말한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가능한 순수하고 명확하게, 간결하고 확실하게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단순함이야말로 진리의 특징이며, 모든 천재들 또한 단순함을 사랑했다. 앞서 말했듯이 아름다운 문체는 사상을 통해 만들어진다. 이 시대를 농락하는 사이비 사상가들처럼 문체를 통해 사상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문체는 사상의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졸렬한 문장이 탄생하는 원인은 문체가 졸렬해서가 아니라 작가의 사상이 졸렬하기 때문이다. p105~106


   글쓰기는 생각하는 힘에서 나온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글쓰기는 글쓰는 기법에서 나오는 힘이 아니라 생각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렇기에 독서와 생각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만 마냥 독서를 통해서 생각의 정리가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점은 극복해야 할 문제이긴 하다.

  쇼펜하우어는 사상가의 글쓰기와 문체를 이야기하면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헤겔의 저작물에 대한 비판을 제법 한다. 쇼펜하우어가 보기에 헤겔의 글은 ‘졸렬함’의 표본이 되는 모양이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점차 독일어의 문법 체계를 파괴하는 글쓰기 형태가 이뤄지는 것에 상당히 분개한다. 언어의 삭제와 왜곡된 용법이 언어의 의미를 침범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독일어의 핵심이랄 수 있는 완료형 시제의 삭제는 모국어를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야만어로 전락시키게 될 거라며 제대로 된 문법의 교육을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이러한 언어의 삭제가 글쓰기의 명료함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오로지 생각의 힘으로 이뤄내야 할 것을 문법의 삭제를 통해 행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표현을 정확하게 하는 힘, 즉 수단이야말로 모국어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런 힘과 수단에 호소할 때 비로소 사상은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으며, 작가의 미묘한 심리형태까지 정밀하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아름답고 생기 있는 고전적인 문체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문장을 가리키는 말이다.p133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권력이 아니라 철학이라 말하는 쇼펜하우어의 사색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은 흔들림없이 명언처럼, 힘있고 강건했다. 그러나 언어와 문법의 당시의 글쓰기 체계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히 격앙되고 설명적이었다. 구체적인 단어와 문법체계를 들어가며 독일어의 문법 파괴 현상에 대해 지적하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사색과 글쓰기, 문체를 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색과 독서와 글쓰기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명확했다. 그렇기에 이 세 주제를 관통하는 작가의 사상 또한 깔끔하고 명쾌했다. 독서도 필요한 일이고 중요하지만 그것은 타인의 생각을 읽는 일이므로 쉬운 사색의 방법이다. 제 사상을 다듬는 일은 독서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좀더 생각을 키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사색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사색을 통한 글쓰기는 명확한 사색을 통해 제 사상을 잘 정립함으로써 이뤄진다는 것이 쇼펜하우어가 전하는 문장론의 핵심이었다.

  독서가 타인에게 제 생각을 떠넘기는 행위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지금 시점에서 와닿는 것은 사색은 제쳐두고 독서에 매달리는 행위가 지극히 편안한 길만 가려는 방법이란 말 때문이기도 하다. 지극히 그 심정으로 독서에 매달리고 있었다. 독서가 가장 쉬웠어요. 그러나 지금은 내게 사색이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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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한명, 김숨 저, 현대문학, 2016.


  김숨 작가가 사회성 짙은 문제를 다룬 소설을 최근 잇달아 출간되는 것 같다.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L의 운동화도,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이 책 「한명」도 그렇고. 두 작품 모두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특히 「한명」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느낌이 강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대사에, 소설 속에 녹여 넣어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절절함을 넘어 읽는 것을 두렵게 만들게 한다. 소설의 대사만큼이나 각주가 많은 이 책. 그 말들이 모두 생존자들의 증언이라는 점은 소설이 허구라는 기본을 뛰어넘어 현실이 소설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명」. 작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마지막 한명이 남은 시점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고 했다. 마지막 한명.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간은 다가온다. 오늘도 최고령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99세, 한많은 세월을 마지막까지 한을 쌓으신 채 말이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38명이라 한다. 모두들 연로하시고 병세가 가득하며 가슴에 한이 많이 쌓여 있다. 그리고 정부로 인해 그 풀릴 수 없는 한이 분노가 되어 치솟는 상황을 여전히 겪고 계신 분들이다.

  선거 때면 찾아가 악수하고 대책 필요성을 강조하며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정치인들은 권력을 휘어잡고 난 이후엔 나 몰라라 하며 그들이 엎드려야 할 대상이 따로 있음을 부끄러움도 없이 보여준다. 얼마 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개인보다 나라 안전이 우선한다며 구속 판결이 내려졌다. 개인보다 나라 안전이 우선이라면, 나라로 인해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삶이 피폐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대우는 왜 그런 것인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왜 나라의 안전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가. 한일 위안부 협상타결이 나라의 안전을 위한 것인가, 그리하여 나라의 안전이 해결이 되는가, 성조기와 함께 일장기도 들고 휘두르고 있는 상황 아닌가. 아, 이 나라의 안전을 지켰어라고 자랑차게 힘껏 흔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소설은 작가가 엄청 빨리 썼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아니다 싶기도 했다. 빨리 썼다는 생각이 든 건,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 없이 생생한 증언이 너무도 넘쳐 나기에 쓸 것이 많아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도 아니다 싶은 건, 그 많은 자료를 읽어나가는데 그리고 그 증언들을 다시 소설로 옮겨 적는데 무척 힘이 들었겠구나 싶어서였다. 그 말이, 글이 가진 내용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힘에 겨워, 마음도 엄청 무거웠겠다 싶었다. 그러니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오래도록 가슴앓이를 했을까.


그녀는 티브이 받침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백지를 꺼낸다. 반으로 접힌 백지를 펼치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쓴 글자들이, 억눌려 있던 스프링처럼 앞다투어 튕겨 오른다.

나도 피해자요.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

그 문장에 이어서 뭔가 더 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한쪽으로 돌아간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 p236


  오래도록 전쟁터에서 종군 위안소에서 일본인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불리다가 마침내 끝장에서야 제 이름을 찾은 풍길. 마지막 한명이 남아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제 이름마저 제대로 찾지 못해 끙끙 앓는 세월을 살다가 자신도 피해자라고 이제 외치는 한명. 이 땅에 풍길 할머니 같이 "나도 피해자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할머니들이 더 계실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 중에 위안부는 20만 명이 넘는다 했으니, 그리고 그들이 전쟁에 지면서 증거를 없애듯이 무참히 죽여 버렸다 했으나…….

  동네 냇가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무참히 끌려가버린 풍길. 그런 소녀들이 많았다. 그 수만명의 피해자들 중엔 이유도 없이 어깨를 잡힌 소년들이. 그리고 나라는 앞장서서 소녀들을 팔아 치우기도 했다. 전쟁은 그러했다가 아니라 나라는 그러했다. 그렇게 내버려두었고 지금도 그렇게 내버려두고 있다. 나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가치가 있는 나라는 그 가치를 뒤바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소녀상 문제에 민감한 일본 정부의 반응에 더 예민한 한국 정부와 그리고 지자체가 더할나위없이 몰상식과 비상식의 표상이지만 아무런, 반응도 관심도 없다. 목적하는 바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길 없어 선거라는 이 휘황찬란한 분위기 속에 암울과 비참한 기분으로 서 있다. 한 개인으로서 이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런 화도, 분노도 부끄럽게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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