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
한명, 김숨 저, 현대문학, 2016.
김숨 작가가 사회성 짙은 문제를 다룬 소설을 최근 잇달아 출간되는 것 같다.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L의 운동화도,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이 책 「한명」도 그렇고. 두 작품 모두 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하다. 특히 「한명」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느낌이 강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대사에, 소설 속에 녹여 넣어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절절함을 넘어 읽는 것을 두렵게 만들게 한다. 소설의 대사만큼이나 각주가 많은 이 책. 그 말들이 모두 생존자들의 증언이라는 점은 소설이 허구라는 기본을 뛰어넘어 현실이 소설보다 더 끔찍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명」. 작가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마지막 한명이 남은 시점을 생각하며 이 글을 썼다고 했다. 마지막 한명.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시간은 다가온다. 오늘도 최고령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99세, 한많은 세월을 마지막까지 한을 쌓으신 채 말이다. 이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중 생존자는 38명이라 한다. 모두들 연로하시고 병세가 가득하며 가슴에 한이 많이 쌓여 있다. 그리고 정부로 인해 그 풀릴 수 없는 한이 분노가 되어 치솟는 상황을 여전히 겪고 계신 분들이다.
선거 때면 찾아가 악수하고 대책 필요성을 강조하며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정치인들은 권력을 휘어잡고 난 이후엔 나 몰라라 하며 그들이 엎드려야 할 대상이 따로 있음을 부끄러움도 없이 보여준다. 얼마 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 개인보다 나라 안전이 우선한다며 구속 판결이 내려졌다. 개인보다 나라 안전이 우선이라면, 나라로 인해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삶이 피폐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대우는 왜 그런 것인가.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며 왜 나라의 안전은 제대로 지키지 못했는가. 한일 위안부 협상타결이 나라의 안전을 위한 것인가, 그리하여 나라의 안전이 해결이 되는가, 성조기와 함께 일장기도 들고 휘두르고 있는 상황 아닌가. 아, 이 나라의 안전을 지켰어라고 자랑차게 힘껏 흔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소설은 작가가 엄청 빨리 썼으리란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아니다 싶기도 했다. 빨리 썼다는 생각이 든 건,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 없이 생생한 증언이 너무도 넘쳐 나기에 쓸 것이 많아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도 아니다 싶은 건, 그 많은 자료를 읽어나가는데 그리고 그 증언들을 다시 소설로 옮겨 적는데 무척 힘이 들었겠구나 싶어서였다. 그 말이, 글이 가진 내용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힘에 겨워, 마음도 엄청 무거웠겠다 싶었다. 그러니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얼마나 오래도록 가슴앓이를 했을까.
그녀는 티브이 받침대 서랍을 열고, 그 안에 넣어두었던 백지를 꺼낸다. 반으로 접힌 백지를 펼치자 또박또박 힘을 주어 쓴 글자들이, 억눌려 있던 스프링처럼 앞다투어 튕겨 오른다.
나도 피해자요.
그 한 문장을 쓰기까지 70년이 넘게 걸렸다.
그 문장에 이어서 뭔가 더 쓰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갑자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럴 수만 있다면 말을 하는 대신, 한쪽으로 돌아간 자궁을 꺼내 보여주고 싶다. p236
오래도록 전쟁터에서 종군 위안소에서 일본인들이 붙여준 이름으로 불리다가 마침내 끝장에서야 제 이름을 찾은 풍길. 마지막 한명이 남아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제 이름마저 제대로 찾지 못해 끙끙 앓는 세월을 살다가 자신도 피해자라고 이제 외치는 한명. 이 땅에 풍길 할머니 같이 "나도 피해자요“라고 말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할머니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할머니들이 더 계실 것이라 생각한다. 전쟁 중에 위안부는 20만 명이 넘는다 했으니, 그리고 그들이 전쟁에 지면서 증거를 없애듯이 무참히 죽여 버렸다 했으나…….
동네 냇가에서 다슬기를 잡다가 무참히 끌려가버린 풍길. 그런 소녀들이 많았다. 그 수만명의 피해자들 중엔 이유도 없이 어깨를 잡힌 소년들이. 그리고 나라는 앞장서서 소녀들을 팔아 치우기도 했다. 전쟁은 그러했다가 아니라 나라는 그러했다. 그렇게 내버려두었고 지금도 그렇게 내버려두고 있다. 나라는 국민을 위해 존재가치가 있는 나라는 그 가치를 뒤바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소녀상 문제에 민감한 일본 정부의 반응에 더 예민한 한국 정부와 그리고 지자체가 더할나위없이 몰상식과 비상식의 표상이지만 아무런, 반응도 관심도 없다. 목적하는 바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길 없어 선거라는 이 휘황찬란한 분위기 속에 암울과 비참한 기분으로 서 있다. 한 개인으로서 이들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움을 준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드니까 이런 화도, 분노도 부끄럽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