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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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보는 눈


설국, 가와바타 야스나리, 민음사, 2002.


  겨울에 눈이 오지 않으면 3월에 내리는 봄을 기대하게 된다. 어쩐지 봄에 내리는 눈을 보면 한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음을 잊게 된다. 봄눈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겨울과는 너무도 달라서 환상과 몽환이 약간 섞여든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이런 느낌일까.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1968년 노벨상 수장작인 이 책의 첫 문장은 많은 이들에게 감탄할 첫문장으로 꼽힌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이미지를 극대화시키는 감각적 문장으로 쓰여 있다. 이야기, 줄거리는 모호한 잔상이 남는 소설이다.

  가와바타는 일본인으로 첫 번째, 아시아에서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다. 첫 번째는 인도의 타고르라서 어쩐지 인도는 서양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는 까닭에 아시아에서의 첫 번째 수상작가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서양인의 동양, 더 나아가서는 일본에 대한 호기심이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설국>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흑백이다. 어떤 칼라보다도 흑백이 강렬하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눈쌓인 풍경은 있었는데 직접적으로 눈이 내리는 묘사는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의 목조 가옥 위로 쌓인 눈, 서린 냉기속에 피어나는 온천의 하이얀 김, 작가가 반복하여 말하는 깨끗하다, 깨끗하다, 순수하다…. 일순간 맑고 청아한 느낌이었다가 한없이 퇴폐적인 느낌에 휩싸이게도 된다. 일본문학에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퇴폐미로 선입견처럼 쌓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950년 이전의 소설로 그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 해도 정감가지 않는 주인공 시마무라이기에 그의 시선의 끝에서 어떤 과오, 퇴폐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가도 싶다. 시대적 배경 고려는 무슨, 한량으로 시종일관 감탄만 해대는 시마무라와 남성의 보호자이거나 일만 하는 요코와 고마코의 모습을 그저 그 시대는 그러하였노라, 그렇게만 말할 수 있을까. 그러하기에 시종일관 풍경에 압도되는 듯이 탄식하는 시마무라의 그 표현들이 깨끗하다, 순수하다, 아름답다 외치는 그 모든 시마무라의 말들이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의 말처럼 헛수고로.

  여자들 역시도 풍경이 된 느낌이었다. 고마코와 요코에 대한 시선이 풍경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창밖을 바라보며 설국의 풍경을 감상하는 시마무라의 눈이 은근슬쩍 고요코와 요코에 대한 시선으로 바뀔 때 언뜻 관음증적 강박이 느껴진다.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 예사스럽지 않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건만 그렇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거대한 자연에 짓눌린 공허한 인간의 노력 같아서 애달프다.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은하수를 보는 풍경이 눈에 띄었는데 풍경화된 요코의 모습, 그렇게 쳐다보는 시마무라의 시선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아닌 물화된 것으로 대체되는 듯이 보였다. 영화상영이 있어 많은 사람이 모여인 고치창고에서 불이 나 부상자를 구해내고 아이들을 2층에서 마구 던져내린다는 얘기를 들은 고마코와 시마무라가 고치창고를 향해 달려가다 멈춰 서서 하늘을 보며 은하수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허위의 마비’에 걸린 듯한 시마무라의 묘사가 절정에 이르는 지점이 아닌가 싶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풍경과 두 여인에 대한 순수와 아름다움에 대한 반복되는 예찬만큼이나 ‘헛수고’란 말도 반복된다.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남자에게 고마코와 요코의 모든 행동들이 무위로 보일 순 있겠다. 서양무용에 관해 글을 쓰는 시마무라는 직접 서양인의 춤을 본 적이 없다.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직업없는 그의 심리적 위안으로 존재하는 글. 그의 글은 오로지 인쇄물에 의지한 상상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동경심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시마무라의 세계는 도쿄에 있고 그는 거의 일년에 한번쯤 기타마현으로 그러니까 설국의 세계를 찾아온다. 그곳엔 게이샤 고마코와 요코가 있다. 도쿄와 설국의 세계, 시마무라에게 심리적 위안으로 붙잡아 두고 있는 세계와 허위의 세계는 어디일까.


   “소용없죠.”

   “헛수고야.”


  그토록 아름답게 풍경을 바라고보 순수와 깨끗함과 아름다움을 강박적으로 찬양하는 시마무라의 말은 잠시 내 맘을 흔들기 충분했으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어디쯤에서 나는 위의 두 말을 반복하게 된다. 이제껏 시마무라가, 작가가 묘사한 설국의 세계는 모두 ‘허위의 마비로 가득찬 위험’ 가득한 곳이었으며 순수를 외치는 말끝에 오염되어 버렸다. 깨끗함, 눈처럼 흰,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를 반복·강박적으로 듣다 보니 반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그 세계가 눈처럼 깨끗한 곳이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아니라 정말로 그 풍경을 바라보던 시마무라의 눈(目) 속에 하얀 눈(雪)이 보였던가, 시마무라가 아름답고 순수한 풍경만을 보고자 했는가에 대한 의문이랄까, 이렇게 되고 보니 역시나 나는 시마무라에게서 퇴폐적인 인간상을  기대했던 모양이다.

  <설국>은 1937년 출간하여 12년 동안 여러 번의 수정작업을 거쳐 1948년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강력히 생각나는데 무진기행이 1964년 발표되었으니 <설국>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짐작하게 한다. 때때로 어떤 소설을 읽을 때 그 시대적 배경, 당대의 사회현실을 생각하며 읽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 보기에 이 말의 함의는 여성을 (성적)대상화하는 것이 당연했으니 그것을 불편하게 여기지 말라는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니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지언정 굳이 그런 시대이니 불편히 여기는 것을 문제시하는 말은 때때로 너무 이상하게 들린다. 수천 번을 양보한다 해도 그 시기는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반인륜의 모범을 보여주던 때이다.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유일하게 참고 넘어가야 하는 것,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 오로지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각뿐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그런 일본이었으니 섬세하고 예민한 작가가 현실이 아닌 풍경 속에 압도되어 살고 싶었을까, 현실의 피폐함과 인간의 야만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풍경으로 매몰되어 간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모른다. 그의 연보에는 태어나자마자 몇 년 동안 그의 어머니, 아버지, 조부모의 잇따른 사망이 적혀 있다. 74세의 그는 급성맹장으로 수술·퇴원한 한달 후 가스관을 입에 물고 자살했다고 한다. 허무와 무용, 쓸쓸함의 정서가 작가 자신의 인생에서 연유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즈음 이 소설은 이미지와 감각만이 남아 한없이 덧없음으로 뒤덮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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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보이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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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가 하는, 듣는 말


뉴 보이, 트레이시 슈발리에, 박현주 (옮긴이), 현대문학, 2018-02-10.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트레이스 슈발리에의 작품은 인상적이었다. 그런 작가에 대한 기억으로 펼쳐든 책은 이번엔 셰익스피어의 변용이었다. 트레이시라면 충분히 이런 재해석을 좋아하리라 생각했지만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기획이 아니라 출판사의 기획 시리즈의 일환이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셰익스피어 희곡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라나. 이름하여「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앞으로도 주욱 많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현대적인 이야기를 입고서 출간될 거라는 것은 기대감을 주면서도 정반대로 기대감을 반감시키기도 했다. ‘기획출판’ 시리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으로 인한 반감인건가. 아무튼. 트레이스 슈발리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오셀로>를 선택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74년 워싱턴 교외의 초등학교다. 단 하루, 열한살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셀로의 재현은 ‘역사가 스포’라는 말처럼 비극적인 인간의 질투를 그리고 있기에 중반을 넘어서면 끝을 보고 싶지 않아진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예민한 감정의 결들은 성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감정이란 이다지도 쉬이 흔들리는 것인가, 인간 감정의 그 적나라한 과정을 그리고 있느니만큼 약하고 악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고 서글퍼진다.

  전학 온지 반나절 만에 유일한 흑인 소년 오세이 코코테는 학교 최고 인기학생인 ‘디’와 캐스퍼의 존경을 받는다. 또한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디’와는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까지 한다. 운동장 한켠에서 힘으로 군림하는 ‘이언’은 이런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며 오셀로를 흔들었던 이아고처럼 ‘오’를 흔든다. ‘디’와 ‘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이언’이 동원하는 방법은 이간질이다. 다른 사람까지 교묘히 이용하며 ‘오’의 마음에 디에 대한 의혹과 불신을 씌우는 ‘이언’의 행동은 어떤 파국으로 나타날까.

  오는 디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불신하면서도 이언의 말은 무조건 믿는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애정관계의 오와 디는 이언의 개입 후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오는 디에게 함부로 대하고 디는 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 모든 상황을 잘 설계한 이언의 힘이라 하기엔 당연하게 흘러가는 반응은 뭔가 꺼림칙하다.


하지만 디는 화가 나지 않았다. 느껴지는 감정은 죄책감뿐이었다. 자기가 사과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사과해야 할 사람인 것처럼. 오는 디에게 소리 지리고 밀어 버릴 만큼 화를 낼 권리가 있었다. 그 애는 흑인이고, 하루 온종일 모두 그 애를 그런 식으로, 다른 전학생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했다. 디는 자기 역시 그 애를 흑인이라는 이유로 흥미롭게 여겼다는 걸 알았고, 그건 반드시 좋은 이유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를 피부색 때문에 좋아하다니.


  ‘디’가 독백하는 것처럼 작가는 이 바탕에 ‘인종차별’을 두었다. ‘오’는 ‘흑인’이기에 그렇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차별을 받는데 익숙한 ‘오’가 ‘디’의 애정을 흩트리는 인언의 말에 ‘디’의 행동을, ‘이언’의 말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 대신에 자신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자신이 ‘흑인’이기에 ‘디’가 막무가내로 애정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고 ‘디’의 행동은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행동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 자격지심에 가득차 ‘디’에게 함부로 대할 ‘권리’를 취득한 ‘오’의 행동이 몹시 답답하게 여겨지는 지점에서 다음 문장으로 간신히 진정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무지에 기인한 노골적 인종차별주의는 다루기가 쉬웠다. 신경에 더 거슬리는 건 좀 더 미묘한 빈정거림이었다. 학교에서는 친절하지만 생일 파티에 반 전체를 초대해도 오만은 초대하지 않는 애들. 오가 방으로 들어가면 뚝 끊기는 대화, 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생기는 짧은 침묵. 가끔 내뱉어 놓고 나중에 부록으로 덧붙이는 말. “아, 널 의미한 건 아니었어, 오세이. 너는 다르잖아.” 혹은 이런 발언들. “쟤는 흑인이지만 영리해.” 혹은 그게 왜 마음을 상하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인종차별로 내재된 이 패배의식을, 더구나 열한살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척 할 수 없기에 안타까움을 가진다. 아이만이 아니라 어른들 역시 ‘오’에 대한 시선은 노골적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일찌감치 ‘오’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걱정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은 유일한 흑인 아이 ‘오’가 아니라 백인 아이들이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나 외교관의 아들인 ‘오’는 상류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백인 사회에서 ‘소수’의 존재일 뿐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 저 애는 너무 쉽게 살겠죠. 저렇게 자라서 좋은 직업을 그냥 낚아챌 겁니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 덕분에. 그보다 더 자격 있는 사람들이 가졌어야 할 좋은 직업을요.”


  이런 상황의 ‘오’가 애정을 주고받은 ‘디’를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일반화된 백인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길들여진, 여전히 진행중인 차별받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삶의 방식일 수밖에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니, ‘오’라는 개인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대표성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오’의 파멸은 예정되는 수순일지도.

 

“가지 마.” 오는 목소리를 높여서 반복했다. 그런 다음 이전에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자기가 쓸 거라고는, 쓰는 법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했다. “창녀!”

 

  굳이 ‘오’가 ‘창녀’라는 말을 내뱉었기에 ‘검둥이새끼’라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다. 이미 ‘오’가 흑인이라 불편한 이들은 그 말을 수없이 외치고 또 외치고 있었을 뿐이다. ‘오’의 충격은 ‘검둥이새끼’라는 말이었을까, ‘이언’의 간교함에 빠져 ‘디’를 오해한 일이었을까, 순간 헷갈린다. 하지만 ‘검은 것은 아름답다’라고 외치는 만큼 전자일 것이다. 흑인으로서의 자의식, 그가 순간 잃어버린 자존감에 대한 탄식과 의지의 표현으로서.

  이 소설이 인간의 파국을 가져오는 질투라는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로 며칠 전 미국 뉴욕의 초등학교에서 흑인 학생에게 노예역할을 맡게 하고 노예경매제를 재연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오’로 인해 여전히 진행중인 깊은 인종차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한창 들끓는 사건 때문인지 ‘창녀’라는 말을 보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성인들의 카톡창과 법정에서 봄직한 이 단어가 얼마나 적나라하게 인터넷을 휩쓸고 있는지를 새삼 실감하며…. 소설 속에서 내가 대적해야 할 상대, 여학생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 단어는 ‘창녀’다. 그러나 내가 대적해야 할 상대가 남학생일지라도 그 싸움에서 남학생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는 ‘창녀’ 또는 그와 같은 말이다.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이 아니다. 나의 여자를 비난하는 말이 곧 상대를 비난하는 말로 등가된다. 이른바 ‘이언’의 꼬붕 ‘로드’가 ‘이언’의 조언을 받아 ‘캐스퍼’와 싸움을 벌일 때 ‘캐스퍼’를 향한 비난은 ‘블랑카’를 성적으로 욕하는 말이다. 질투의 감정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단어의 정점은 ‘창녀’인 걸까, 혐오와 차별의 세상에서 ‘창녀’와 ‘검둥이새끼’가 나타내는 단어의 상징을 반복하여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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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맹 - 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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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견뎌야 하는 사막


문맹-자전적 이야기, 아고타 크리스토프,  한겨레출판, 2018.


  이 짧은 책을 사두고서 한해가 지났다.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고,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지만 읽고 싶어 ‘산’ 책은 왜 이다지도 책장 속에 오래도록 묵혀두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 책은 그나마 책꽂이에 꽂아 둔 지 짧은 시간에 읽힘을 당한 책이다. 두루두루 보니 아직 묵혀둔 책이 많다. 사두고서 10년이 훨씬 지나서야 읽힘을 당한 책이 1년짜리 문맹을 꼴아보고 있다.

  작가의 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매일 읽기만 하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르는, 가장 나태한 소일거리를 하는, 게으른 자”인 줄 알았는데, 이 정의는 내게 허용되지 않게 되는 건가. 질병에 빠져 있었다 싶었지만 치유의 시기가 지나고 다시 질병에 들까 말까 했는데 새삼, 질병이랄 것도 없었다 생각하게 든다. 아무튼.

  작가의 어린 날의 기억과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생각과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이야기가 흐른다는 점에서 굳이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가 생각난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일과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프랑스어를 배우는 일은 엄청난 간극이 있지만 한편으론 끊임없이 타자로, 이방인으로 느끼며 살아가는 심정은 큰 간극이 없다.

  읽기와 쓰기에 관한 작가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에는 생존을 위해 말을 삼키고 달려야 했던 역사가 있다. 작가의 생애는 처참하기 이를 데 없는 언어로 표현해도 부족할 만큼을 보여주지만 그것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언어는 담백하다. 그날을 탈탈 털어 빨랫줄에 수백번은 걸어놓은 것처럼 건조하다. 그것이 사막을 견디어낸 작가의 언어였을까. 이 반복된 건조함이 작가의 생애에 대한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지우게 한다.


아무도 러시아어를 알지 못한다. 독일어나 프랑스어, 영어 등의 외국어를 가르치던 선생님들은 몇 달 동안 러시아어 속성 수업을 배웠지만, 그들은 그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것을 가르칠 마음이 전혀 없다. 그리고 어쨌든 학생들도 그것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국민적인 지식의 사보타주를, 당연히 미리 계산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저항을 목격하게 된다.


  헝가리 태생인 작가는 1956년 소련이 쳐들어왔을 때 여러 나라를 도망친 끝에 스위스에 정착했다. 작가는 모국어를 죽이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어를 적의 언어라 부른다. 그나마 러시아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얼마나 다행인가, 할 수 있는 건 이런 위로뿐. 마침 3.1절, 상황의 차이가 있었다 할지라도 헝가리인의 러시아어에 대한 ‘저항의 방식’이 부럽게 느껴진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려고, 일본어를 쓰고 말하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저항으로 스러져간, 수동적인 저항조차도 해보지 못한 그들을 생각하면…. 

  

공장에서는 모두들 우리를 친절히 대한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 웃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사막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사회적 사막, 문화적 사막. 혁명과 탈주의 날들 속에서 느꼈던 열광이 사라지고 침묵과 공백, 우리가 중요한, 어쩌면 역사적인 무언가에 참여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나날들에 대한 노스탤지어,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과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뒤따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언어로든 글을 읽고 썼으리라는 작가의 글에 대한 갈망은 단지 작가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의미를 얘기하는 것 같아서 숙연하게 느껴진다.

  나도 점점 문맹이 되어 간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터넷 상의 문자어를 이해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해 당황한다. 세상의 흐름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대화가 늘어만 간다. 그럼에도 알고 싶지 않은 말들이 넘쳐 나고 간극은 더욱 커져간다. 이것은 내가 견디어야만 하는 사막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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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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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말할 수 있을까


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문학동네, 2018.


  이 책에 관한 탄사에는 형식에 주목했다는 말이 많다. 문학이란 그 시작 이래로 이런 형식적 틀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새롭다, 놀랍다기보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로 이루어진 소설. 그 위에 덧붙여진 실제 사료-신문과 칼럼과 일기, 증언 등-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아름답고 의미있게 펼쳐져 흥미를 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링컨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남북전쟁에 관한 것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어린 시절부터 정직했다는 위인전용 이야기, 가장 많은 암살에 관한 이야기 등등. 남의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굳이 열렬히 찾아 볼 만큼은 아니었기에 링컨이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 열한살에 사망했고 무덤을 찾아가 아들 시신을 꺼내어 안고서는 울었다는 이야기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매우 인상적임인 링컨의 일화이다. 작가는 이 지점을 잘 끌어내어 소설로 확장시킨다. 바르도에 머물고 있는 존재, 대통령의 아들 윌리 링컨과 경계에 머문 이들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영원한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 그 경계가 가진 처연하고 혼란한 분위기는 열한 살 소년 윌리를 통해 더욱 부각된다. 작가가 묘사하는 바르도는 익숙하게 인지된 이미지다. 다양한 사연으로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한 이들은 그 이유들로 이승의 끈을 쉬이 놓지 못한다.


나는 ‘병자’도 아니고, ‘부엌바닥에 누워’ 있지도 않고, ‘병자-상자를 통해 치료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소생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소.


  저승이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기에 생에 대한 미련은 바르도에 머물고 헤맨다. 현재의 상태를 치료받으면 나을 존재로 인식하는 바르도의 영혼들. 하지만 아이들이란, 어린 영혼이란 바르도를 쉬이 지나쳐 가기 마련이다. 윌리는 다르다. 그의 아버지가 그곳에 찾아와 자신을 안아주었으므로, 곧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으므로 윌리는 바르도에 머물러야 한다. 링컨의 아들에 대한 이 사랑의 행위는 바르도의 모든 영혼들을 감탄하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윌리와 감흥을 받은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행위가 된다.


그의 마음은 새삼스럽게 슬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세상이 슬픔으로 가득하다는 사실, 모두가 어떤 슬픔의 짐을 지고 노동한다는 사실, 모두가 고난을 겪는다는, 이 세상에서 어떤 길을 택하는 모두가 고난을 겪고 있다는(아무도 만족하지 않고, 모두가 부당한 대접을 받고, 무시당하고, 간과당하고, 오해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려 노력해야 하고, 따라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그의 현재의 슬픈 상태가 그에게만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고, 전혀 아니고, 오히려 모든 시대에, 모든 시간에, 다른 사람들 다수가 느껴왔고, 앞으로도 느끼게 될 것이며, 따라서 오래 끌거나 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런 상태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세상에서 그가 차지한 위치로 인해 그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큰 해가 될 수도 있는데, 계속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은 도움이 안되므로 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곳에는 윌리 링컨만이 아니라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윌리 링컨이 사망한 1862년 2월 20일은 1961년 4월 시작되어 4년을 이어간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아이의 죽음으로 오열하는 링컨의 모습에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아이를 보았을 테고 어떤 이들은 그들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책임자로서의 대통령 링컨 자신이 느꼈을 비애도 아이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산 자든 죽은 자든 어쨌든 그 모습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삶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심판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 수 있나?”


 각자의 핵심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종말, 그 종말로 가는 길에 우리가 격어야 하는 많은 상실들. 


나는 죽었소.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소.

그리고 갔소.


  상실에 관한 가장 절정의 인식은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에서 그럴진대 자신의 죽음에서 느낄 이 감정은 얼마나 강렬할까.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심정으로 영혼으로 떠돌 미래의 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마침내 스스로 내 상태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고통, 체념, 슬픔이 때론 미련스럽게 느껴진다. 아직, 죽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상상만 하는 순간에도 강한 집착에 머무는 것에 대한 환멸까지도 겸해지면서 왜 삶에 대한 성실함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것엔 소홀한가, 그런 생각들이…. 그 경계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삶일 수 있을까. 바르도, 그곳 수많은 영혼들이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깨닫는 자신의 상태는 계속 머릿속을 휘집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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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 스스로 ‘정상, 평균, 보통’이라 여기는 대한민국 부모에게 던지는 불편한 메시지
오찬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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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해!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오찬호, 휴머니스트, 2018.


  한국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삶은 아주 힘들고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한번만 돌려 생각하면 이만큼 쉬울 수도 있을까, 그런 극과 극의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어쩌면 양육의 다른 가치관이 개입할 여지가 없이 방식이나 태도가 획일적이기 때문일 거다. 좌우를 쳐다보며 결국엔 모든 것이 특정한 대학에 진학하는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으니까. 양육이란 아이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동일시되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아이의 생각은 없는 채로 일관되고 획일적인 목표로 전진하면서 지켜야할 다른 많은 것들은 외면하려니 어렵고 힘든 건 아닐까.

  저자는 한국의 육아 문제, 한국 부모들의 육아 행태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그러나 출발선은 ‘출산과 육아’ 즉, 부모 됨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 이전, 연애와 결혼을 시작점으로 한다. 이는 한국의 육아에 관한 한 결혼 이전의 ‘무언가’에 의한 연장선이라는 저자의 통찰은 결혼한 이에게도 결혼하지 않은 이에게도 공감적 요소가 있을 것이다.

  우선 저자는 부모가 되는 선택을 한 이들에게 자식키우기는 일종의 과시적, 증명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비혼이 증가하는 사회에서 결혼을 왜 선택했는가에 대한, 아니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문제는 비혼에서 기혼자가 되는 그 ‘선택’이 가진 어쩔 수 없음에서 시작한다.


그만큼 비혼자들은 연애-결혼-출산에 대해 가장 현실적으로 고민한 사람이다. 이들이 드러낸 공포, 그러니까 ‘그 부모'와 다른 레일로 들어선 결정적인 계기는 세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존재를 미약하게 만드는 경제적 사정이고 둘째, 면역이 없기에 버티기가 힘들다고 판단한 인간관계의 문제, 마지막은 지금껏 배운 것이 너무나도 무용함을 인정해야 하는 빌어먹을 성 불평등의 세상이다. 이를 감수할 각오가 있어야 기혼자가 된다.


  현실은 특히 여성에게 독박 육아와 강요된 모성에 놓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 현실에서 충분히 탈피할 수 있기란 어렵다. 은연 중 수긍하면서 과거로부터 답습된 잘못된 관행에 길들여지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은연 자기계발의 형태를 띠면서 흘러간다고 저자는 말한다.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했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결혼 이후 변했다. 기혼자들은 평등이라는 이론을 화석화시키고 전통적 질서, 즉 ‘기울어진 운동장’에 적응하면서 가족의 화목을 도모하고 있었다.


  저자가 관찰한 것일 테니 ‘과도한 육아 현장의 사례’는 흥미를 돋운다. 종종 기사로 접하기도 했고 익히 들어왔고 소문으로 접하기도 했던 그 사례들을 보고 있으면 역시나 답답하다. 한국에서는 ‘맘’은 유일하게 모든 것이 통용되고 이해되는 (부정적인 의미의) 만능프리패이며 이유를 막론하고 욕을 들어먹는 벌레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결코 자정되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도대체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다. 부정적인 현상은 난무하는데 그대로 굳어져서 흘러가버린다. 그리고 그 자체를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다.


자녀를 ‘내가’ 보호해야 한다는 범위를 넘어선 ‘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는 정말로 많다. 많은 이들이 자녀보호와 자녀소유를 혼동한다. 마치 소유권이 있으니 어떻게 보호하든 간섭하지 말라는 식이다.


  저자도 상황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지만 서두에서 말했듯 특별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도대체 답없는 이 현상에 대해서 그저 느끼고, 생각하고, 깨닫는 방법만이 있을 뿐하다. 그러나, 누가 깨닫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냥 끊임없는 도돌이표, 뫼비우스의 띠 같기만 하다.


자녀소유는 ‘내 것’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올바른 사회적 가치에 자녀가 노출될 수 있도록 부모가 더 노력하겠다는 의미여야 한다. 그래야 내 아이 더 바르게 키우겠다는 다짐이 가능하고 내 아이 멋대로 키우겠다는 자기소유의 강박이 사라질 수 있다.


  그 노력이란 스카이캐슬과 같이 극단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형성이 되는 건가? 한 아이를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한데 그동안 엄마 혼자만이 아이를 키워왔기에 문제가 되었나? 육아의 책임이 엄마에게, 모성에게 짐지워진 현실에서 이 책 역시도 이 과도한 자녀소유로서의 육아방식은 엄마가 주도하는 것으로 말한다. 동조자이자 방관자는 아빠다.

  가만 생각해보면 서양에서도 ‘모성’이 강요되었다고 얘기하고 육아는 엄마에게 독박된 현실을 부르짖으며 이러한 ‘가부장제’의 가족구조의 해체를 주장해왔다. 그럼에도 나타나는 현실은 다르다. 물론 나라마다 형성된 사회문화적인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토록 심한 차이는 어떤 이유일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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