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 보이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박현주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셀로가 하는, 듣는 말


뉴 보이, 트레이시 슈발리에, 박현주 (옮긴이), 현대문학, 2018-02-10.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트레이스 슈발리에의 작품은 인상적이었다. 그런 작가에 대한 기억으로 펼쳐든 책은 이번엔 셰익스피어의 변용이었다. 트레이시라면 충분히 이런 재해석을 좋아하리라 생각했지만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기획이 아니라 출판사의 기획 시리즈의 일환이었다. 셰익스피어 서거 400주년을 맞아 셰익스피어 희곡을 현대 소설로 재탄생시키는 프로젝트라나. 이름하여「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앞으로도 주욱 많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현대적인 이야기를 입고서 출간될 거라는 것은 기대감을 주면서도 정반대로 기대감을 반감시키기도 했다. ‘기획출판’ 시리즈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으로 인한 반감인건가. 아무튼. 트레이스 슈발리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오셀로>를 선택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974년 워싱턴 교외의 초등학교다. 단 하루, 열한살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셀로의 재현은 ‘역사가 스포’라는 말처럼 비극적인 인간의 질투를 그리고 있기에 중반을 넘어서면 끝을 보고 싶지 않아진다.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예민한 감정의 결들은 성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감정이란 이다지도 쉬이 흔들리는 것인가, 인간 감정의 그 적나라한 과정을 그리고 있느니만큼 약하고 악한 인간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고 서글퍼진다.

  전학 온지 반나절 만에 유일한 흑인 소년 오세이 코코테는 학교 최고 인기학생인 ‘디’와 캐스퍼의 존경을 받는다. 또한 백인 아이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디’와는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기까지 한다. 운동장 한켠에서 힘으로 군림하는 ‘이언’은 이런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며 오셀로를 흔들었던 이아고처럼 ‘오’를 흔든다. ‘디’와 ‘오’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이언’이 동원하는 방법은 이간질이다. 다른 사람까지 교묘히 이용하며 ‘오’의 마음에 디에 대한 의혹과 불신을 씌우는 ‘이언’의 행동은 어떤 파국으로 나타날까.

  오는 디에 관해서는 끊임없이 불신하면서도 이언의 말은 무조건 믿는다. 참으로 이상하게도 애정관계의 오와 디는 이언의 개입 후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오는 디에게 함부로 대하고 디는 오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그 모든 상황을 잘 설계한 이언의 힘이라 하기엔 당연하게 흘러가는 반응은 뭔가 꺼림칙하다.


하지만 디는 화가 나지 않았다. 느껴지는 감정은 죄책감뿐이었다. 자기가 사과받아야 할 사람이 아니라 사과해야 할 사람인 것처럼. 오는 디에게 소리 지리고 밀어 버릴 만큼 화를 낼 권리가 있었다. 그 애는 흑인이고, 하루 온종일 모두 그 애를 그런 식으로, 다른 전학생들을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대했다. 디는 자기 역시 그 애를 흑인이라는 이유로 흥미롭게 여겼다는 걸 알았고, 그건 반드시 좋은 이유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누군가를 피부색 때문에 좋아하다니.


  ‘디’가 독백하는 것처럼 작가는 이 바탕에 ‘인종차별’을 두었다. ‘오’는 ‘흑인’이기에 그렇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차별을 받는데 익숙한 ‘오’가 ‘디’의 애정을 흩트리는 인언의 말에 ‘디’의 행동을, ‘이언’의 말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 대신에 자신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자신이 ‘흑인’이기에 ‘디’가 막무가내로 애정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고 ‘디’의 행동은 자신을 가벼이 여기는 행동일 뿐이라고 단정짓는다. 자격지심에 가득차 ‘디’에게 함부로 대할 ‘권리’를 취득한 ‘오’의 행동이 몹시 답답하게 여겨지는 지점에서 다음 문장으로 간신히 진정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무지에 기인한 노골적 인종차별주의는 다루기가 쉬웠다. 신경에 더 거슬리는 건 좀 더 미묘한 빈정거림이었다. 학교에서는 친절하지만 생일 파티에 반 전체를 초대해도 오만은 초대하지 않는 애들. 오가 방으로 들어가면 뚝 끊기는 대화, 오가 그 자리에 있으면 생기는 짧은 침묵. 가끔 내뱉어 놓고 나중에 부록으로 덧붙이는 말. “아, 널 의미한 건 아니었어, 오세이. 너는 다르잖아.” 혹은 이런 발언들. “쟤는 흑인이지만 영리해.” 혹은 그게 왜 마음을 상하게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무능력.


  오래도록 지속되어온 인종차별로 내재된 이 패배의식을, 더구나 열한살 아이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척 할 수 없기에 안타까움을 가진다. 아이만이 아니라 어른들 역시 ‘오’에 대한 시선은 노골적이다. 학교 선생님들은 일찌감치 ‘오’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 걱정하고, 식당에서 일하는 이들은 유일한 흑인 아이 ‘오’가 아니라 백인 아이들이 적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나 외교관의 아들인 ‘오’는 상류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백인 사회에서 ‘소수’의 존재일 뿐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면, 저 애는 너무 쉽게 살겠죠. 저렇게 자라서 좋은 직업을 그냥 낚아챌 겁니다. 소수 인종 우대 정책 덕분에. 그보다 더 자격 있는 사람들이 가졌어야 할 좋은 직업을요.”


  이런 상황의 ‘오’가 애정을 주고받은 ‘디’를 특정한 존재가 아니라 일반화된 백인으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탓하는 것은 길들여진, 여전히 진행중인 차별받는 존재가 자연스럽게 취하게 되는 삶의 방식일 수밖에 없을 지도 몰랐다. 그러니, ‘오’라는 개인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대표성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오’의 파멸은 예정되는 수순일지도.

 

“가지 마.” 오는 목소리를 높여서 반복했다. 그런 다음 이전에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자기가 쓸 거라고는, 쓰는 법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했다. “창녀!”

 

  굳이 ‘오’가 ‘창녀’라는 말을 내뱉었기에 ‘검둥이새끼’라는 말을 들은 것은 아니다. 이미 ‘오’가 흑인이라 불편한 이들은 그 말을 수없이 외치고 또 외치고 있었을 뿐이다. ‘오’의 충격은 ‘검둥이새끼’라는 말이었을까, ‘이언’의 간교함에 빠져 ‘디’를 오해한 일이었을까, 순간 헷갈린다. 하지만 ‘검은 것은 아름답다’라고 외치는 만큼 전자일 것이다. 흑인으로서의 자의식, 그가 순간 잃어버린 자존감에 대한 탄식과 의지의 표현으로서.

  이 소설이 인간의 파국을 가져오는 질투라는 감정을 전면에 내세우며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실제로 며칠 전 미국 뉴욕의 초등학교에서 흑인 학생에게 노예역할을 맡게 하고 노예경매제를 재연하도록 한 일이 있었다. ‘오’로 인해 여전히 진행중인 깊은 인종차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었다.

  한편으로 한창 들끓는 사건 때문인지 ‘창녀’라는 말을 보다가 의아함을 느꼈다. 성인들의 카톡창과 법정에서 봄직한 이 단어가 얼마나 적나라하게 인터넷을 휩쓸고 있는지를 새삼 실감하며…. 소설 속에서 내가 대적해야 할 상대, 여학생을 조롱하고 모욕을 주는 단어는 ‘창녀’다. 그러나 내가 대적해야 할 상대가 남학생일지라도 그 싸움에서 남학생을 모욕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는 ‘창녀’ 또는 그와 같은 말이다.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이 아니다. 나의 여자를 비난하는 말이 곧 상대를 비난하는 말로 등가된다. 이른바 ‘이언’의 꼬붕 ‘로드’가 ‘이언’의 조언을 받아 ‘캐스퍼’와 싸움을 벌일 때 ‘캐스퍼’를 향한 비난은 ‘블랑카’를 성적으로 욕하는 말이다. 질투의 감정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단어의 정점은 ‘창녀’인 걸까, 혐오와 차별의 세상에서 ‘창녀’와 ‘검둥이새끼’가 나타내는 단어의 상징을 반복하여 보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