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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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다 말할 수 있을까


바르도의 링컨, 조지 손더스, 문학동네, 2018.


  이 책에 관한 탄사에는 형식에 주목했다는 말이 많다. 문학이란 그 시작 이래로 이런 형식적 틀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 새롭다, 놀랍다기보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로 이루어진 소설. 그 위에 덧붙여진 실제 사료-신문과 칼럼과 일기, 증언 등-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아름답고 의미있게 펼쳐져 흥미를 준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링컨에 관한 이야기는 무수히 많다. 남북전쟁에 관한 것을 시작으로 일찌감치 어린 시절부터 정직했다는 위인전용 이야기, 가장 많은 암살에 관한 이야기 등등. 남의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굳이 열렬히 찾아 볼 만큼은 아니었기에 링컨이 매우 사랑하는 아들이 열한살에 사망했고 무덤을 찾아가 아들 시신을 꺼내어 안고서는 울었다는 이야기는 이제껏 알지 못했던 매우 인상적임인 링컨의 일화이다. 작가는 이 지점을 잘 끌어내어 소설로 확장시킨다. 바르도에 머물고 있는 존재, 대통령의 아들 윌리 링컨과 경계에 머문 이들을 통해 삶과 죽음에 관한 영원한 인간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이승과 저승 사이, 그 경계가 가진 처연하고 혼란한 분위기는 열한 살 소년 윌리를 통해 더욱 부각된다. 작가가 묘사하는 바르도는 익숙하게 인지된 이미지다. 다양한 사연으로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한 이들은 그 이유들로 이승의 끈을 쉬이 놓지 못한다.


나는 ‘병자’도 아니고, ‘부엌바닥에 누워’ 있지도 않고, ‘병자-상자를 통해 치료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소생을 기다리고’ 있지도 않소.


  저승이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기에 생에 대한 미련은 바르도에 머물고 헤맨다. 현재의 상태를 치료받으면 나을 존재로 인식하는 바르도의 영혼들. 하지만 아이들이란, 어린 영혼이란 바르도를 쉬이 지나쳐 가기 마련이다. 윌리는 다르다. 그의 아버지가 그곳에 찾아와 자신을 안아주었으므로, 곧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으므로 윌리는 바르도에 머물러야 한다. 링컨의 아들에 대한 이 사랑의 행위는 바르도의 모든 영혼들을 감탄하게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었을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윌리와 감흥을 받은 자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행위가 된다.


그의 마음은 새삼스럽게 슬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세상이 슬픔으로 가득하다는 사실, 모두가 어떤 슬픔의 짐을 지고 노동한다는 사실, 모두가 고난을 겪는다는, 이 세상에서 어떤 길을 택하는 모두가 고난을 겪고 있다는(아무도 만족하지 않고, 모두가 부당한 대접을 받고, 무시당하고, 간과당하고, 오해받는다는) 것을 기억하려 노력해야 하고, 따라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 그의 현재의 슬픈 상태가 그에게만 있는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고, 전혀 아니고, 오히려 모든 시대에, 모든 시간에, 다른 사람들 다수가 느껴왔고, 앞으로도 느끼게 될 것이며, 따라서 오래 끌거나 과장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런 상태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며, 세상에서 그가 차지한 위치로 인해 그는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큰 해가 될 수도 있는데, 계속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은 도움이 안되므로 할 수만 있다면 피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곳에는 윌리 링컨만이 아니라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윌리 링컨이 사망한 1862년 2월 20일은 1961년 4월 시작되어 4년을 이어간 남북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자신의 아이의 죽음으로 오열하는 링컨의 모습에서 전쟁으로 인해 죽은 아이를 보았을 테고 어떤 이들은 그들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전쟁의 책임자로서의 대통령 링컨 자신이 느꼈을 비애도 아이에 대한 것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산 자든 죽은 자든 어쨌든 그 모습에서 깨달아야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다. 또한 삶에서의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 심판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 수 있나?”


 각자의 핵심에는 고난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 종말, 그 종말로 가는 길에 우리가 격어야 하는 많은 상실들. 


나는 죽었소.

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소.

그리고 갔소.


  상실에 관한 가장 절정의 인식은 죽음이다. 타인의 죽음에서 그럴진대 자신의 죽음에서 느낄 이 감정은 얼마나 강렬할까. 죽음을 수용하지 못하는 심정으로 영혼으로 떠돌 미래의 나를 생각해보게 한다. 마침내 스스로 내 상태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고통, 체념, 슬픔이 때론 미련스럽게 느껴진다. 아직, 죽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상상만 하는 순간에도 강한 집착에 머무는 것에 대한 환멸까지도 겸해지면서 왜 삶에 대한 성실함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것엔 소홀한가, 그런 생각들이…. 그 경계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는 삶일 수 있을까. 바르도, 그곳 수많은 영혼들이 내부적인 요인과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 깨닫는 자신의 상태는 계속 머릿속을 휘집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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