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저넌에게 꽃을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라쿤에게도 꽃을


앨저넌에게 꽃을-운명을 같이 했던 너 Flowers for Algernon (1959년)


http://www.hankookilbo.com/v/b414794e3315451d9cdd761f62ff3f94 


  모피가 될 운명의 라쿤이 제게 겨눠진 총을 잡는 장면은 인간 중심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을 인간의 아래로 두어 인간생활의 필요품쯤으로 여기는 인간의 삶, 그러면서도 간혹 멸종동물을 거론하며 공존해야 인류가 생존한다 말하는 지극히 ‘인간적’ 삶. 라쿤을 걱정하는 마음 또한 인간중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않을 지도 모른다. 라쿤이든 어떤 동물이든 잔혹하게 학대하다가 동물에게 행한 일이 인간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거라는 생각. 이미 그런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일곱 살 아이의 일기장을 읽는 느낌으로 시작된다. 뭐가 잘못된 건가 싶어 다시 책을 뒤적이게 만든 맞춤법 틀린 노트는 32살의 찰리가 기록하는 자신의 삶이다. 누군가에는 경과보고서쯤으로 불린다. 과학소설, SF소설로 분류되는데 다소 예스럽게 느껴지는 소설 속 배경은 1959년 출간된 작품임을 알고난 후 이해되었다.

  어릴 적 앓은 병으로 지적장애를 안고 빵가게 점원으로 살고 있는 32살 찰리에게 변화가 찾아온 건 뇌수술과 약물치료로 지적장애를 고쳐보겠다는 교수진들의 제안이다. 지적장애로 친구들과 가족에게도 차별을 받으며 자란 찰리는 실험쥐 앨저넌처럼 임상실험에 참여하여 지적장애 치료에 들어간다. 찰리는 글을 배우며 수술과정과 이 변화들을 기록한다. 똑똑한 사람이 되고픈 찰리의 욕구는 엄마에게 사랑 받기 위한 열망이었다. 찰리의 엄마는 찰리가 저능아라는 것에 공포와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꼈고 동생을 낳은 뒤에야 자신이 정상적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찰리를 바꾸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맞는 것 하나 없는 맞춤법으로 글을 채워가던 찰리의 노트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찰리의 지능은 발달하여 아이큐 185로 치닫는다. 어떤 논문이든 척척 이해하는 찰리의 지적능력을 보건대 찰리의 뇌수술은, 교수들의 이 연구는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지능이 발달하면서 찰리는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삶과 인간,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해나간다. 지능이 좋아지면 세상살이는 마냥 좋고 행복할까. 저능아로 살던 때와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살 때 모두가 찰리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만을 찰리는 깨닫는다.


지능은 인간에게 주어진 뛰어난 능력들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지식을 추구하다가 사랑을 몰아내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최근에 발견한 다른 사실이 있는데요. 가설로 제시하죠. 애정을 주고받을 줄 모른다면, 지능은 정신적이거나 도덕적인 붕괴로 이어지고, 신경증이나 정신병까지 낳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기적인 목표에 온 정신이 팔려 타인과의 관계를 배척하면, 분명 폭력과 고통만 남게 되겠죠.


  그렇다면 찰리의 부모는, 가족은 어떨까. 아빠는 아들의 머리를 깎으면서도 아들인지 모른다. 제 아들을 못 알아본 엄마는 아들임을 알자마자 폭언과 폭행을 가한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찰리의 소망은 가족에게서 완성되지 않는다. 절대 한발자욱도 나아가지 않는다. 다른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다. 지능이 좋을 때에도 나쁠 때에서 찰리를 배척하는 동료들과 실험실 표본으로 대하는 교수들에 대한 배신감, 분노, 존재에 대한 허무 등 찰리는 인간적인 저항을 느껴간다. 그리고 앨저넌은 점차 퇴행을 보이고 마침내 찰리가 만들어준 무덤속에서 잠자고 있다.


나는 두렵다. 삶 혹은 죽음 혹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사실이 두려운 게 아니라,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전혀 없었던 것처럼 낭비되는 것이 두렵다. 그런데 입구를 지나가려 하자 내 주위에 압력이 느껴지면서, 동굴의 입구 쪽으로 거친 파도와 같은 움직임이 나를 밀어낸다.


  모든 라쿤에게 꽃이 필요하다. 뒷마당에 있는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놓아 달라고 했던 찰리의 소원처럼. 찰리의 친구이자 찰리와 같았던 멋진 쥐 앨저넌에게 꽃을. 털은 솜처럼 부드럽고 눈동자는 검정색이고 둘레가 분홍색인 쥐, 앨저넌에게 꽃을. 그것은 제 무덤에도 꽃을 놓아달라는 찰리의 부탁으로 들린다. 모피가 아니라 한 마리 라쿤이라 말하는 듯한 라쿤의 총을 잡는 손짓이 똑똑하지 않을 때나 지금이나 한 인간이었다고, 감정을 지닌 인간이었다고 외치는 찰리의 절규같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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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씽 (예담)
니콜라 윤 지음, 노지양 옮김 / 예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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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누구도. 아무도.


에브리씽 에브리씽 Everything, everything


 

 세상 밖은 위험해. 하지만 가장 위험한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세상 모든 것에 알레르기를 일으킬 수 있는 SCID라는 중증복합면역결핍증. 이 병을 앓고 있어서 17년 동안 집 밖으로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매디는 다행히 의사인 엄마 덕분에 그리고 엄마가 돈이 많은 덕분에, 병원이 아닌 무균 처리된 집안에서 세상을 알아간다. 특정한 것에만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만큼 매디에게는 정말로 세상밖은 위험할 지 몰랐다.

  책과 인터넷, 상상 속에서 세상을 알아가는 매디에게는 3D의 생생한 현실감이 필요했겠지만 매디의 현실은 어김없이 무균처리 되어 배달되는 2D의 세상이다. 옆집으로 이사 온 올리가 아니었다면. 17세 소녀가 가지는 자연스러운 반응일까. 창밖으로 훔쳐본 올리는 생생한 3D로 자리잡아가고 매디의 생각은 올리가 가득하다. 불치병에 걸린 소녀와 조숙하고 용감한 소년의 사랑과 우정. 소설 『에브리씽 에브리씽』은 이 흔한 이야기를 매우 경쾌하게 그리고 아주 재밌는 스타일과 일러스트로 표현하고 있다. 동화같은 느낌과 함께.

  왜 사춘기 소년소녀들은 그토록 부모들 말은 듣지 않으면서 이성의 말에는 맹목적인가. 또래 올리와 함께 균이 제거되지 않은 세상밖으로 나가고픈 매디의 의지는 강해지면서 누워만 있는 세상이 아니라 좀더 다른 세상을 갈구하게 된다. 처음엔 그저 아주 작은 정도의 바람을 가져보지만 점점 더 원하게 되는 세상. 그 세상에 바로 올리와 함께 하는 자연과 사랑이 있다. 결국 엄마가 보여주는 세상과 올리가 보여주는 세상에서 매디는 위험과 사랑을 선택했다. 엄마의 걱정과 눈물이 억압으로 느껴진다면야 더욱 더 불꽃같은 삶과 자유를 원하게 될 수밖에. 마침내 무균의 집을 탈출해 온갖 균들의 세상으로 나간다. 매디에게는 그것조차도 환상이었다. 다만, 그 온갖 균 하나로 인해 죽을 정도로 아프기 전까진.


이게 전부(everything)가 아니란 걸 알아.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nothing)보다는 낫잖아.


  『에브리씽 에브리씽』이 생각난 건 귀엽고 깜찍한 매디가 생각났다기 보다, 인터넷을 장식한 ‘세가와 병’ 때문이다. 세가와 병이란 도파 반응성 근육긴장 이상이라는 질환으로 뇌성마비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왼발목을 다쳤는데 오른발을 절단한 의사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는 안 그러겠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황당한 사건들은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기사화되지 않은 많은 오진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생명을 잃은 경우도 많았다. 며칠전만 해도 타인의 진료기록으로 멀쩡한 사람을 수술한 의사가 있었다. 이번 세가와 병 오진 기사는 한순간의 판단으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그 충격의 강도가 높다.

  서모씨는 3살 때 부자연스러운 걸음걸이 때문에 병원에서 뇌성마비 판정을 받고 13년 동안 치료를 받았다. 상태가 악화되어 몸을 가눌 수도 없었던 서씨는 물리치료실에서 뇌성마비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되어 다시 찾은 병원에서 세가와 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세가와 병 치료약을 먹은 지 이틀 만에 오래도록 누워있어야 했던 서씨는 걸을 수 있었다. 서씨는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군데의 병원을 다녔다고 했고 기간도 13년이었다. 한 곳에서 한 의사에게만 진료를 받은 거라면, 어쩌면 그 의사가 한번 내린 진단에 대해 재고할 여지없이 환자를, 병을 대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 몇 년 동안 여러 곳의 병원에서 똑같이 오진을 한다는 사실이 쉽게 수긍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 이상을 감지한 것은 물리치료사라니…. 기사로는 알 수 없으니 마치 오진에 대해 일부러 의사들의 카르텔이 형성된 것은 아닌가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에브리씽 에브리씽』에서도 그랬듯.

  13년 세월 동안 뇌성마비로 살아야 했던 서씨가 뇌성마비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때 기뻤을까. 단 이틀이면 나을 수 있는 병을 13년 동안 투병해야 했던 아이를 본 부모들은 기뻤을까. 이 거짓말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의 서씨가, 그의 부모님의 표정이『에브리씽 에브리씽』에서의 매디의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의 행복이었음을 알았을 때 매디의 기분을 상상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주는 비극. 그 비극의 최종이 죽음이라면 차라리 원하는 삶을 살고 최종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 매디가 알게 되는 진실. 17년의 오진에 대해 안 순간 매디 역시 기뻐하지 않았다. 기뻐할 수 없었다. 매디의 오진은 명백히 의도적인 오진이었기에 그것이 주는 충격은 헤아릴 수 없다. 상실과 충격이 인간의 마음에서 일으키는 폭력의 강도를 가늠하게 한다. 그러나 사랑이란 이름이 가하는 폭력 또한 만만치 않다. 사랑의 눈으로만 세상을 읽고 보게 되는 일도 많다. 매디 또한 사랑쪽으로 기울어 올리의 말에 행동에 더욱 이끌리게 되어 그뜻을 따르는 것처럼. 사랑이란 누구를 향해 있든 파괴력을 지닌다는, 행동력을 폭발시킨다는 생각이 언뜻 든다. 그리하여 사랑, 마냥 달콤하고 아름답기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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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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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달러에 팔렸습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The Underground Railroad    


  “400달러에 팔렸습니다.”

  그냥 생각해도 많지 않은 돈인데 싶어 현재 환율을 확인해본다. 43만4,800원. 유럽으로 가려는 아프리카 난민들이 리비아 노예시장에서 팔려 나간다는 CNN 뉴스 보도는 우리나라의 염전노예, 축사노예, 장애인 착취 사건과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인종’ 때문이다. 염전 노예, 축사 노예 같은 일들이 잊을 만하면 나타나긴 했다. 그때마다 착취한 ‘인간’들의 잔인성과 무개념, 형언할 수 없는 인간성에 대해 비난했고 그들의 죄에 대한 처벌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종이 들어가면 얘기가 달라진다. 거기엔 “왜 뭐가 잘못됐는데”란 버팅김과 그것을 타당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이 깔려 있다. 하긴, 세계에서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의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인종차별을 조장하고 지지하는 상황 아니던가.

  이런 기막힌 인식을 한번에 설명해주는 말이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속에 있다.

  

“어딘지 모르겠는데, 사람을 훔쳐다가 파는 사람은 죽음에 처해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코라가 말했다. “그런데 뒤에서는 노예는 뭐든지 주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그리고 그걸 만족스러워해야 한다고요.” 다른 사람을 재산으로 갖고 있는 것은 죄이기도, 혹은 하느님의 축복이기도 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만족스러워하기까지 해야 한다고? 노예 상인이 인쇄소로 숨어들어 가 그 구절을 쓴 게 틀림없었다.


“그 말 뜻 그대로다.” 에설이 말했다. “히브리인은 히브리인을 노예로 쓸 수 없다는 뜻이야. 그러나 함족의 자손은 해당되지 않지. 그들은 검은 피부와 꼬리로 저주를 받았어. 성경이 노예제를 비난하는 부분은 니그로 노예제를 말하는 게 전혀 아니다.”


“저는 피부가 검지만, 꼬리는 없어요. 제가 아는 바로는요―확인해볼 생각은 못했네요.” 코라가 말했다. “노예제가 저주이긴 하네요. 그건 맞네요.” 노예제는 백인들이 그 멍에를 메고 있을 때나 죄이지, 아프리카인들일 때에는 죄가 아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하지 않는 이상.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노예소녀 코라의 탈출기다. 19세기 미국은 노예제를 두고 남북간 대립하고 있었다. 당시 ‘지하철도’라는 흑인 노예 탈출 비밀 조직이 존재했고 작가는 이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여 지하를 운행하는 지하철도의 모습을 그려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온 할머니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대대로 노예가 된 코라가 어떤 계기로 탈출을 결심하고 탈출과정은 어떻게 전개되는지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한 사람의 필사적인 탈출기에 ‘흥미진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민망스럽지만, 코라의 탈출을 응원하는 입장에서 떨리는 심장을 좀더 객관화시킨다면 그말이 적당할 듯하다.

  레미제라블에서처럼 탈출자에 대한 긴장감을 촉발시키는 것은 뒤를 쫓는 자이다. 그가 얼마나 집착적이며 악랄한가가 얘기의 방향을 달리한다. 수많은 악랄한 인간들이 있음에도 20년 가까이 장발장만을 쫓는 자베르 경감 역할은 이 책속에서 노예사냥꾼 리지웨이로 나타난다. 이 노예사냥꾼은 노예사냥을 통해 ‘돈을 얻는다’라는 것 외에도 업무에 대한 신념을 품고 있다. 도망간 노예를 끝까지 쫓아 제 위신을 세우는 것과 절대로 탈출이라는 마음을 먹지 않는 공고함을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신념이란 인생을 살아가는데 방향을 설정해주는 소중한 것이긴 하지만, 신념의 ‘내용’이 중요함을 자베르와 리지웨이를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노예사냥꾼 리지웨이의 신념은 농장에서 유일하게 탈출한 노예인 메이블, 코라의 엄마를 잡는 것이다. 당연히 메이블의 딸이 또다시 노예 농장을 탈출하여 자유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자유의 땅인 북부 또는 캐나다로 가는 여정은 험난한 과정이다. 정착하는 역, 도시는 노예제에 대한 그 도시의 찬성여부에 따라 코라에 대한, 노예에 대한 다른 분위기를 전한다. 그렇기에 어느 도시에서든 코라는 자신의 의지 외에 타인, 흑인뿐만 아니라 백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백인들이 모두 노예제에 찬성하지는 않는 것처럼 흑인이라서 모두 노예제를 반대하고 탈출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노예가 처한 위험한 상황에 손을 내밀고 연대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고, 노예제에 찬성하거나 우호적인 행동을 보인 백인에게 잔인하게 대하는 백인도 있다. 이런 백인의 행동은 개개인의 인식에 따라 나타나겠지만 그 인식을 타당하게 만드는 것은 그 도시의 분위기이다. 집단이 정의하는 당연함과 타당함의 정도가 인간에 대한 잔인한 행동을 허용하는 근거가 된다. 

  자유와 생존, 인간 존엄을 찾아 농장을 탈출한 코라와 메이블, 그리고 수많은 노예들의 치열한 탈출기도 탈출할 꿈조차 꾸지 못한 채 비참한 생애를 사는데 머물렀어야 하는 수많은 노예들도 이 책속에 있다. 노예제를 다룬 무수한 이야기속의 내용과 같은데도 무엇이 이 책을 특별하게 만드는 걸까. 많지 않은 페이지 속에 작가는 이 모든 이야기를 녹여냈는데 속도감과 문장과 캐릭터가 그 시대를 풍부하게 상상해낼 수 있도록 해준다. 물론 코라에 대한 연민과 응원까지. 코라만큼 마음을 휘어잡는 메이블까지.

  실제로 미국의 지하를 달리는 지하철도는 없었지만 목숨을 걸고서 노예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철도는 존재했다. 그 지하철도를 운행하는 이들은 모든 인간존엄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었다. 아니 신념까지는 아닐 지도 모른다. 당연한 인식에 대해서 특별한 신념으로 행해야 하는 시대라니, 생각할 지도. 어쨌든 그 시대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노예사냥꾼으로 살아간 리지웨이의 신념과 지하철도 요원들의 신념은 얼마나 다른가.

  “400달러에 팔렸습니다.”

  19세기에 일어난 일이 현재에 재현되는 이 상황, 개인의 잘못된 신념이 아니라 시대와 그 도시, 나라가 그것을 타당하게 만들어버리고 있다. 성경에서 따라야 할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가치는 눈감고 한문장, 한구절을 제 이기심과 제 이익에 맞추어 해석하는 것처럼, 누가 무엇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본 가치를 제 본위로 해석하고 퍼뜨리고 있는지 참으로 경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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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2016.


  이 책이 보통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도 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응원에 힘입어 문학상의 수상까지 이뤄낸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책으로 또한 82년생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김지영이라는 이름이 신문에 인용되는 현상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내내 82년생 김지영의 돌풍이 이어져 웬만한 이들은 모두 이 책을 읽었으리라 의심치 않고 있었는데 얼마 전 알라딘에서 이 책에 대한 1000명 읽기였는지 구매였는지 그런 이벤트가 게재된 것을 봤다. 수많은 사람들이 읽어서 이제 더 이상 읽을 사람도 책을 구매할 사람도 없을 만큼 무수히 읽고 무수히 구매를 했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의 구매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어쨌든 좀 놀랐다.

  이 책이 한창 돌풍을 일으켰지만 이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꽤나 회의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한 열풍은 책 자체에서 기인한 저력 외에 외적인 요소가 상당 부분 작용했기 때문일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 역시 기대만큼의 만족감이 없었기에 그 실망의 강도가 강했는지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서 페미니즘에 대한 더 깊은 이해와 공감이라거나 82년생뿐만 아니라 여성 보편의 삶에 대한 인식을 달리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소설에, 문학에 기대하는 문학적 요소를 느끼지 못해서 그냥 그랬는데, 그런 내 감상 때문인지 이 책에 대한 또한번의 이벤트라고 해야 할까, 아니 ‘주목해서 읽으세요’라는 어떤 강요의 느낌이 마뜩치 않았다. 이보다 더,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 아니 이것말고 다른 것을 더 읽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을 했다. 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베스트셀러라서 부러워서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베스트셀러인 것이 마냥 부러워서.

  나는 왜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나를 생각했다. 책이 쉽게 읽힌다는 점은 장점인데 내게는 그 점이 단점으로 작용했나 보다. 나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자 했다. 그러나 이 책은 내게는 소설이 아니라 인터넷 까페나 게시판에 올라오는 사연으로 읽혀졌다. 그런 사연에 대해서는 위로나 공감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이지 내 문학적 감수성이 특별히 더해지거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서도 82년생 김지영이 겪는 일들은 너무도 특별할 게 없어서 별 감흥이 없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도를 가지고, 뭘. 아마도 그런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 자극적인 삶을 기대했나 싶기도 하다. 82년생 김지영의 삶의 여건은 확실히 평균 이상으로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82년생 김지영이 삶이 지금보다는 특별한 층에 속하는 여성의 삶이라고 인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시판에 올려진 사연같은 이 글이 처음엔 ‘너무 문학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문학적’인 것이었으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겠나 하는 쪽으로 다소 옮겨갔다. 이런 형태로 작가가 글을 쓰면서 사람들이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사람들로부터 ‘김지영’에 대한 공감을 할 수 있도록 설계를 한 것이구나, 그런 생각으로. 82년에 태어났든 70년에 태어났든 90년에 태어났든 지금 현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같기에 김지영을 보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어쨌든 이 삶들은 왜 이토록 달라지지를 않았니, 그런 거였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갔고 여전히 경제적인 여건이 힘겨운 여성이 아님에도 그 삶이 자아를 상실할 정도로 치닫는 다는 건 얼마나 모순적이고 얼마나 문제적인가. 그렇다면 작가가 전달하고픈 의도는 내게도 잘 전달된 것이구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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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로 가기 위하여




청춘시대 - 박연선 대본집, 박연선, 2017-09-11.


 꽤 오래 길을 잃어버린듯했다. 그래서 지치고 가라앉고 우울하고 아프기까지 했던 건가. 이런 마음의 상태가 몸의 상태를 힘들게 이끈 모양이다. 그리고 서로가 앞서거니 하면서 몸과 마음이 엎치락뒤치락 가라앉고만 있다. 이런 침체 상태가 몇 개월을 지속되다 보니 이 상태에 익숙해진 듯, 습관화되어 버린 것도 같다. 도대체 시작이 언제였는지,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를 슬프고 아픈 소식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왔는데, 무엇 때문인지 언제인지를 명확히 알면서 이러한 상태가 종료되어야 하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다.

  이야기하다가 ‘우리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란 말을 자주 하는 걸 알았는데 이 모든 것에 청춘의 시절을 보낸 안타까움이 있던 건가 싶어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정말 늙어서, 하루하루 늙어가서 그런가. 어쨌든 이유를 찾으려는 생각이 그 속에 더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빠져나오기 위해서라는 쪽으로 1% 더 두기로 했다.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할 때이기도 하고 이렇게 방황하는 동안 달력은 올해를 한달만 남겨두었으니까.


어딘가를 가려고 하니까 길을 잃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목표 같은 걸 세우니까 힘든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있어도 길을 잃나 보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그 물속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계속계속 가라앉으면서….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JSA 귀순 병사의 달리기 영상 때문인 거 같다. 무엇을 위해 달리는지 분명한 저 몸짓. 현실감이 없는듯하면서도 현실감있는 영상에 붙들려서인 모양이다. 태어날 때부터 분단국가임을 알았으면서도 새삼 분단국가임이 어떤 것인지 뚜렷이 느껴지는 현장의 모습. 자신도 모르게 넘어버린 북한 병사처럼 보이지 않지만 실재하는 군사경계선의 이미지. 스물다섯의 병사가 40여발의 총알속을 달리고 여러발을 맞고 쓰러져 마침내 의식을 찾은 열흘을 담고 있는 저 찰나의 순간.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묘하게 느껴졌다. 아주 묘한.   

  허무를 끌어안고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지 돌림노래에 빠져 있었던 건지. 점심은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그런 것을 생각하기 귀찮았던 건지. 공과금, 청구서, 일…이런 것들을 매달고 사는 것이 싫어서인지, 무엇을 하고 싶어서인지, 무엇을 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그저 모르게 흘러가 우울에 처박혀 버린 시간들을 불러내보니 고민인 것도 같고 그냥 그저 그런 귀차니즘인 것도 같고, 때론 심각해 보이기도 하다가 너무 가벼운 걱정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한.


평범하다는 것은 흔한 것, 평범하다는 것은 지루하다는 의미였다. 그때의 나에게 평범하다는 것은 모욕이었다.


  정말, 내가 이런 상태였던가. 지루한 일상에 스스로 지쳐서 방황했던 건가. 생과 사의 선을 넘은 병사의 달리기 영상을 보았다고 당장 달라질 내 몸과 마음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작은 돌멩이 하나 맞은 만큼이라도 각성은 하게 될까. 이젠 나이를 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이든 하려고 하기보다 어떻게든 안하려 용을 쓰는 게 하루의 일과인 듯하다.

  작년 여름이던가. 청춘시대가 방영됐고 올해에 시즌2도 방영됐다. 방송됐던 드라마를 대본집으로 읽어보는 것은 처음인데 확실히 소설을 읽는 것과는 달랐다. 청춘시대를 보며 나또한 청춘시대의 등장인물들처럼 버티고 견뎌내는 청춘의 시대를 겪었다 생각했는데, 그 시절을 겪으며 느끼고 생각하고 결심한 것은 어디로 다 소멸해 버렸을까. 그때에는 견뎌냈는데 왜 지금은 오기도 객기도 없어진 걸까.

  이 선을 넘어와서는 안돼.

  누군가는 넘었고 누군가는 넘지 않았고 누군가는 넘어서 놀라 되돌아갔다. 가상의 선 하나가 주는 의미와 그 선을 바라보는 이들의 의미가 어떤 상황을, 변화를,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았다. 내가 둘러놓은 선이 너무 많구나 싶었다. 달리기까지는 아니라도 몇 발자욱 떼야 하리란 걸, 생각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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