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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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초인종을 울려라


황금방울새, 도나 타트, 허진 (옮긴이), 은행나무, 2015.6.


  도나 다트를 알게 된 것은 『황금방울새』가 퓰리처상 수상작이었기 때문이다. 수상작이라는 홍보 덕분에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이후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 연이어 번역·재출간된 것을 보건대 역시 공신력있는 상의 위엄이 작품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도나 다트는 과작 작가로 10년 간격으로 세 작품을 출간했다. 작년 번역출간된 『작은친구들』을 도나 나트의 최신작인 줄 알고 읽었건만 도나 다트의 최신작은 『황금방울새』다. 이 책을 읽고서 도나 다트를 알게 되었지만 도나 다트에 대한 인상은 강하게 자리잡았다. 읽을 작품도 얼마 없는 작가인데도 도나 다트의 신간을 기다린 것은 두 작품에 대한 인상 이외에도 작가 자체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을 거다. 어쩌면 이것도 출판사의 홍보 전략 덕분일지도 모르겠다만.

  도나 다트에 대한 수사는 ‘천재 작가’로 시작한다. 고전의 작가들에게서 이 수식어를 종종 보기는 했지만 현대 작가들에게 이런 수식어가 있었던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거침없이 ‘천재 작가’로 불리는 도나 다트에 대한 궁금증이 그리고 작가의 기이한 성격의 묘사가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언뜻 작가의 소설 『비밀의 계절』 속 등장인물의 성격들을 모두 조합한 캐릭터로 느껴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면서 날카롭고, 냉정하고 이지적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비밀의 계절』의 느낌이 강한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작가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다.

  이런 강렬한 작가의 소설 『황금방울새』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연을 쫓는 아이』가 생각나게 했다. 작가의 전작 광기가 많이 빠진 느낌으로 삶에서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소년이 등장하기 때문이었을까. 이 소설은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실제 그림 <황금방울새>를 소재로 하고 있다. 횃대에 발이 묶인 갈색의 새 한 마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명화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이나 그림의 장면과 같은 모습이 묘사되는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그림을 소지한 상황에서 시작되고 그림의 내용보다는 소유한 상황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술관 폭탄 테러로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열세살 소년 시어도어 데커는 우연히 손에 쥐게 된 그림과 함께 미술관을 빠져나온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엄마를 잃은 소년 시오는 친구 집에 맡겨지면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된다. 소년 시오의 성장의 이야기는 사고의 기억과 상실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방황하고 방랑하는 시오의 이야기는 그날 폭발한 미술관엘 가게 된 것이 전시된 황금방울새 그림을 엄마가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안다. 비가 오기 때문에 미술관엘 들렀기 때문이 아님을 안다. 그가, 학교에서 흡연으로 정학을 당했고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는 것이 먼저임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모두가 찾고 있는 명화의 절도범이라는 죄책감과 불안, 두려움까지. 그리고 불행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시오를 사랑이 아닌, 돈을 이유로 함께 하려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등장까지. 소년 시오는 미국인들의 반항하고 방황하는 전형적인 십대들의 모습 그대로 술, 마약, 도둑질에 빠진채 살아간다. 악의가 가득한 모습이 아니라 그저 한없이 흐느적거리는 그런 상태로 말이다.


반항. 공허하고 헛되고 견딜 수 없는 삶. 내가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가 뭘까? 하나도 없다. 운명을 먼저 한 방 먹이면 어떨까? 책을 불 속에 내던지고 끝장내면 어떨까? 현재의 공포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내 안에서 비롯된 공포만이 아니라 외부적이고 경험적인 공포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은 충분히 있으므로 약을 두껍게 늘어놓고 흡입한 다음 행복하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고결한 어둠, 별들의 폭발.


  미술관 폭발 현장에 있던 어떤 노인이 죽기 직전 잘 지켜달라며 부탁한 그림을 마치 엄마의 분신인 양 여기며 살아가는 시오의 그림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명화 황금방울새를 찾기 위한 미술관과 언론, 경찰의 움직임도 지속적이다.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사이의 대립이 예술품 암시장과 얽혀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린 소년 시오의 상실감과 좌절이 시오의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보는 것은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흥미롭다. 왜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작가가 <황금방울새>를 선택했는지, 그림의 내용과 이야기의 상관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바꾸게 한다. 소설을 읽고 나서 다시금 그림을 보면 홰에 갇힌 방울새의 모습에서 소년 시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황금방울새가(다른 그 어떤 새도 아니고 오직 이 새가) 잡히거나 잡힌 채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파브리티우스가 볼 수 있는 어느 집에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새는 왜 자신이 그토록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상상하기로는) 소음에 깜짝 놀라고, 연기와 멍멍 짖는 개들, 음식을 만드는 냄새에 괴로워하면서, 술주정뱅이와 어린애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 더없이 짧은 사슬에 묶여 날지도 못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라도 이 새의 존엄성을, 아주 자그마한 용감함을, 솜털과 연약한 뼈를 볼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조차 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새. 세상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새.


  ‘초록색 초인종을 울려라‘. 시오가 미술관 폭발 현장에서 맞이한 운명의 순간에 그림을 안겨준 노인이 한 말이다. 미술관 폭발로 인해 삶의 변화를 겪게 된 시오에게 초록색 초인종을 누르는 일 역시도 삶의 변화를 바꾸는 숙명이 된다. 황금방울새의 운명처럼 시오가 살아가고 있다면 누군가는 그런 시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도와주는 이들이 있다. 불행 가운데에서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인연 중에서도 초록색 초인종이 울린 후 만나는 이들이 시오의 또다른 인생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들일 지도 모른다. 물론 초인종을 울려야 알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은.

  묶인 발을 풀고자 한다면 그들의 손을 붙잡는다면 시오의 생이 또한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들은 단한번으로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지속적인 애정이 필요한 일이다. 비극의 상황 속에 빠지는 것은 충격적 사건을 경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타개하도록 이끄는 존재가 부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성장기의 청소년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약물에 탐닉하고 나락으로 빠지는 전형적인 일탈과 방황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들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은 늘 애정어린 구원자라는 전형적인 등장이 필요하다. 삶에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마음을 돌려줄 것은 언제나, 지속적인 애정으로 이끌어 줄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자신의 불행에만 몰두하던 마비 상태를 벌써 몇 년 전에 벗어나 있었다. 아노미와 의식의 소멸, 관성과 마비 사이를 오가며 나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몰랐을 뿐 그 사이사이에 작고 편안하고 일상적인 다정함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다정함이라는 말 자제가 무의식적으로부터 떠오르는 것과 같았다. 병원에서 수많은 디지털 기계들 사이로 목소리를, 사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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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를 따라간 스페인 - 윤준식.권은희 교수의 여행 에세이
권은희.윤준식 지음 / 꿈의날개(성하)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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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와 베짱이의 도시화


돈키호테를 따라간 스페인, 윤준식, 권은희 지음, 꿈의날개(성하출판), 2001.2010


  확실히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는 스페인 여행은 다이나믹하고 흥미로울 것 같다. 얼만큼 그를 감당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되겠지만 소설속 돈키호테 옆에 있는 산초만큼이나 하면 되지 않으려나. 돈키호테가 흔적을 남긴 곳을 따라가는 것도 나름 재밌긴 할 거다. 맞닥뜨리는 것은 풍차와 여인숙이고 마냥 길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따라간 스페인 여행은 수사적 표현이고 이 책은 스페인에서 생활한 저자들이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스페인의 유명한 관광자원뿐만 아니라 자연문화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스페인의,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스페인에 관해 알면 알수록 새롭고 재미있지만 계속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아랍, 유대, 기독교 문화가 공존했던 나라, 그로 인해 더욱 많은 이야기가 펼쳐져 있고 각각의 특색있는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 자끄 아탈리의 소설 『깨어있는 자들의 나라』처럼 비밀스런 책을 찾는 이야기가 생겨날 수 있던 것도 이 세 종교가 어울러져 있었기에 그와 같은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아랍어 ’마헬리트‘에서 유래된 ‘물이 곳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산복숭아와 곰의 마을’이라고도 불린다는데 그것은 마을의 산등성이에서 나무를 잡고 열심히 열매를 따먹는 곰을 보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이 책은 스페인의 각 도시들의 역사와 유래를 잘 설명해주고 현재의 공간이 가지는 의미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스페인에서 유명한 하몽, 빠에야 등의 음식과 투우와 플라멩고, 스페인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예술가들에 대한 생애와 작품 설명 등 문화, 스페인에서 독립을 외치며 반목을 지속하고 있는 까탈루냐, 바르셀로나에 대해서 비교설명하고 있다. 비록 까먹기야 했지만 이 책은 출판일을 감안하고도 스페인 여행시에는 유용했다.

     

한편, 보수와 진보의 양대 거대 세력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도 바르셀로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큰 목소리를 낸다. 공업과 상업, 그리고 금융업이 오래 전부터 발전되어 경제기반이 집중되어 있으므로 세금의 액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 그래서 생긴 말이 세비야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면서 인생을 즐기지만,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일하면서 이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까딸루냐 독립에 관한 투표와 관련 이야기가 뉴스를 장식할 때 난 이 책의 위의 글을 생각하며 씁쓸한 기분에 잠기곤 했다. 구걸도 직업이라 생각하는 스페인식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까딸루냐는 스페인의 정체성에서 너무 멀리 가 있다. 하지만 이 끝없는 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살아가기 위한 까딸루냐의 신철학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세비야와 바르셀로나의 삶 두 가지가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니까. 개미와 베짱이의 도시화가 바르셀로나와 세비야라니.


독일의 우중충한 날씨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내면의 세계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고 철학을 낳게 하였다면,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은 그 푹푹찌는 광야를 무방비로 걷고 있는 사람의 머리를 정면으로 강타하여 미쳐버리게 하였으니, 내면의 생각이고 뭐고 걷다가 포기하고 풀썩 주저앉거나 살기 위해 쉽게 흥분하는 가슴으로 돌진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것 같다. 


  스페인에 대해 반복적으로 갖는 이미지는 정열과 정념과 같은 강하고 화려한 단어다. 스페인을 얘기할 때면 붙는 수식어를 반복적으로 들어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지도. 그렇지만 그 모습을 찾으려 하기에 그 모습만 보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돈키호테의 후손이자 수많은 광기와 정념의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영락없이 그렇소, 할 수밖에는 없기도 하다. 그렇기에 스페인에설 살고 스페인에서 공부한 두 저자의 스페인에 대한 또다른 견해 또는 평판에 시선이 간다. 어느 나라든 세월은 흐르고 인간도 교류를 통해 다양한 시각을 가지기 마련인데 고착화된 이미지 하나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공존의 문화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에는 개인주의라 불리는 특성이 함께 했다는 것은 정열의 색과는 달라서, 또 생각하게 된다. 왜인이 정열은 개인주의보다는 함께, 다같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니까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고슴도치와 같아서 사회란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을 그 사회에 끌어들이려는 순간에는 가시를 곤두세우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가 만들어서 내가 먹으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이들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다.


스페인인들의 개인주의는 개인이 자신이 편한 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뒀으며,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 원주민들과 자연스럽게 합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피부색과 문화의 차이를 두면서 정복해나갔던 영국인들과는 달리 스스로의 기분과 판단에 따라 이뤄진 개인주의의 결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도 그렇소, 외에 달리 뭘 말해야 할까 싶다. 그런가?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렇‘소’하니 스페인의 검은 황‘소’가 생각난다. 스페인의 고속도로에는 아무 커다란 검은 황소 간판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스페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겠거니 여겼건만 단지 개인회사 ‘오스보르네’의 셰리주에 대한 광고물이란다. 더구나 법적으로 철거처분을 받았음에도 회사 로고만 지운 채 그냥 서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스페인의 상징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투우 때문에 황소 간판이 스페인과의 연결고리가 되었으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11월 11일이 빼빼로 데이라는 기념일이 당연시되는 것처럼 상업적인 이유에 의한 억지스럽고 조작된 기념일, 상징은 달갑지 않다.

  검은 황소 간판이 스페인 사람들 스스로가 상징으로 내세웠다기보다 타국의 관광객들이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그렇게 인식하고 확산된 게 아닌가 싶다. 스페인 고속도로에 가면 온통 검은 황소 간판이 있으니 찰칵 인증샷을 남기라고. 상상이긴 하지만 인간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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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4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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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연금술


스페인 기행, 니코스 카잔차키스, 송병선 옮김, 열린책들, 2012.


  스페인에 관한 책들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스페인은 돈끼호테, 산티아고, 그리고 카탈로니아 찬가 스페인 내전으로 기억되는 나라였다. 하고 많은 스페인에 관한 이미지 중에 하필  스페인 내전이 혁명이 각인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가지 이미지가 너무 부조화스럽다가 또 한없이 어울리는 조합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나만큼 스페인 내전이 각인된 사람들은 많은 것 같고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인지 1930년대의 스페인은 수많은 예술 작품에서 단연코 단골이다.

  스페인 여행의 기록을 쓴 이 책에서도 스페인 내전에 관하여 담고 있다. 스페인을 내전으로만 기억하기에는 스페인이라는 도시 곳곳에 스민 자체의 매력과 수많은 예술가들이 남긴 예술품과 그들의 자취가 억울하다고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예술가들의 창작혼 또한 스페인의 역사와 이 내전에서 발현되기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대의 예술품에도 그들의 생애에서도 스페인 내전을 쉽게 지우지는 못할 것이다.

  아랍 문화와 유대 문화 기독교 문화가 공존하는 곳, 스페인. 이 세 문화가 어울려지고 또한 각각의 특징을 내세우며 스페인이 흘러왔듯이 스페인 내전에도 수많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뛰어들었다. 어떤 전쟁에서도 명백한 선악이란 구분되지 않듯이 스페인 내전에도 수많은 명분과 이유와 소망들이 혼재되어 있다. 스페인 내전에 관해서는 역사책에나 ‘권위있는’ 이의 입을 통해서 정의되는 형태로 기억하고 생각할지 모른다. 모든 전쟁의 속살은 들여다보면 비참하고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어쨌든 무엇이, 누가 더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하면서 전쟁은 반복되어 왔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스페인 내전에서 독재라 칭해지는 프랑코의 편에 있었다. 이것으로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에게 ‘호감있는 자’,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권위있는 자’로 보는 이들에게는 한두번쯤은 스페인 내전에 대해 다시 자료를 찾아보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동기를 주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일방적인 구분이 아니라 조금 더 나쁜 자라거나 복잡하고 얽힌 상황에 대해, 그가 그렇게 한 이유에 대해 말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나를 절망으로 몰고 가오. 이 모든 것이 스페인 사람들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긴다고 생각하시오? 절반은 기독교를 믿고 나머지 절반은 레닌을 믿는 것이란 말이오? 아니요! 절대 그런 것이 아니오! 들어 보시오. 내가 말하려는 것을 주의 깊게 들어 보시오. 이 모든 것은 바로 스페인 사람들이 아무것도 믿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오. 아무것도……, 아무것도 믿지 않소! 그들은 <데스페라도>요. 이 세상의 다른 어떤 언어도 이것에 해당하는 단어를 갖고 있지 않소. 왜냐하면 스페인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도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오. <데스페라도>는 계속해서 붙잡고 있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뜻하오. 그들은 아무것도 안 믿는 사람들이오. 그리고 믿지 않기 때문에 거친 분노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오.


  이 문단들을 보며 드는 생각은 스페인에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던 것이나 전쟁을 겪은 것이나 절대적 신념이나 이유 때문이 아니라 아무것도 믿지 않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배려와 존중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에 개의치 않았기에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거친 분노가 어떤 상황에서 일괄적으로 움직여지느냐는 또한 신념의 문제가 될 수도 있고 무언가가 발생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을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스페인 여행은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기 전에 이루어졌다. 시간이 흘러 스페인 내전이 뚫고간 이곳을 다시 방문했고 전쟁을 겪은 스페인의 모습을 덧붙였다. 스페인에 관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선은 수없이 회자되고 인용되었고 그가 묘사한 스페인의 모습을 보면 달리 더 표현할 말이 떠오르진 않는다. 스페인 곳곳을 둘러보지만 일반적인 여행의 기록이라기엔 도시의 랜드마크에 대한 소소한 감상은 물러둔 채 사색적이면서 재미있는 시각을 덧붙인다. 그러니 좋다. 관광책자엔 반딱반딱한 스페인의 랜드마크들이 나열되고 있으니 경험해보지 못한 1930년대 스페인의 분위기를 그때 그곳에서 느낀 누군가의 감성을 읽는 것은 실망할 생각을 주지 않는다. 실망이란 말이 딱 맞는 것은 관광 책자에서 온갖 미사여구로 동원된 글과 사진발을 보고 난 뒤에야 오는 것이니까.

 

여행을 기록한다는 것은 오만한 자아를 인간이라는 고통 받는 편력 군대 속으로 던져 담금질하여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다.


  오만한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 여행 후 기록을 남긴 적은 없지만 심지어 찰칵 사진 하나도 제대로 찍지 않았기에 내 영혼이 부드러워질 기회를 놓친 지난날들이 문득 아쉬워졌다. 하긴 좋다, 나쁘다, 맛있다, 맛없다, 별로다 이런 글을 쓸 거라면 굳이 기록할 필요가. 감흥은 가득찬데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한 말들을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글로 달랜다. 스페인 내전 전후의 그의 글의 느낌처럼 그의 글을 보고 또 보고 스페인을 생각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그럴 때면 이것은 내 느낌인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느낌인가 구분하려 애를 쓰게 된다. 우습게도.


툴레도는 엘 그레코의 정신과 똑같은 모습으로 내 마음속에 나타났다. 한쪽은 빛이 관통하고 있고 다른 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어느 비잔티움의 신비주의자가 말했듯이, 냉담이 아닌 하느님의 광기의 출발점이며,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인간적인 노력의 절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툴레도는 엘 그레코가 유명하고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저자 역시도 이런 툴레도의 모습을 그리고 있지만 스페인 전쟁 전후에 툴레도에 대해 쓴 글은 차이가 있다.


툴레도는 격렬하고 고동치는 모습들로 가득하고, 모든 희망을 잃은 높고 거대한 벽으로 가득한 엘 그레코의 캔버스가 되어 있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터무니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이제는 덧없이 사라지는 그림자들이 서로 속이듯이 움직이면서 이 도시의 건축물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너무나 마술적인 장면이어서 그곳을 떠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재앙을 향한 충동이 숨어 있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약탈된 도시의 광경을 야만적인 기쁨으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툴레도는 자신에게 맞게 사납고 모질어졌다. 그래서 마침내 호전적이고 용맹한 정신에 걸맞은 육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것들을 바라보며 음미하고 또 음미하며 모든 기쁨과 슬픔의 정수로 정제시키려는 마음의 연금술이 이 책에 담겼다. 읽을수록 저자가 스페인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 너머 인간 영혼의 정화를 찾고자 한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더구나 스페인 전쟁을 겪은 후라면 더욱 그렇지 않을까. 달리 『영혼의 자서전』을 쓴 작가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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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상의 도서관 6
이병훈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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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랴찌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 - 러시아 예술기행, 이병훈 저, 한길사, 2007.12.15.


  문학에 깊이 빠져들기는 러시아문학에서 시작했다. 그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겠다고 밤을 지새우던 시간이 그리워진다. 러시아문학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 러시아에 대해서도 정감을 느끼게 된다. 이 모든 것이 똘스또이, 도스또예프스끼, 체호프, 뚜르게네프, 고골, 바흐찐, 푸시킨, 파스테르나크… 이들 덕분이다. 러시아의 수도 모스끄바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예술가를, 수많은 혁명가를, 수많은 민중을 품고 있다. 냉기가득할 것만 같은 모스끄바는 이들 생생한 인물들의 힘으로 좀더 화려하고 아름답고 강하고 우수에 깃든 도시로 각인된다.


모스끄바에 대한 러시아인의 애정은 거의 신성불가침에 가깝다. 모스끄바는 러시아인의 영혼을 상징하는 도시이고,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의 심장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랜 세월에 걸쳐 러시아 예술가들은 모스끄바를 수없이 찬양하고 숭배해왔다. 그들은 모스끄바를 러시아 영혼의 성지라고 여겨왔다.


  러시아인에게 마음의 성지이자 영혼의 고향이라는 모스끄바에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서 가고픈 열망을 블라디보스톡으로 대체하고 몇계절이 흘렀다. 어느 도시나 고유한 속도가 있다는 저자의 말처럼 러시아는 커다란 나라이고 모스끄바와 블라디보스톡의 속도는 달랐다. 같은 러시아라고 해서 모스끄바가 아닌 곳에서 모스끄바를 느끼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고 그것은 또한 블라디보스톡에 대한 예의도 아니었다. 우습게도 러시아 전체에 대한, 모스끄바에 대한 책들만을 잔뜩 읽고서 블라디보스톡을 향했으니 그곳에선 레닌이 있을지언정 도스또예프스키며 똘스또이며 이런 예술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예술의 자취는 묻어났다.

  『모스끄바가 사랑한 예술가들』이 아니라 모스끄바를 사랑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책 속에 있다. 러시아 문학가들만 명확히 각인되어 있었는데 러시아 예술가를 만날 수 있었다. 저자는 러시아의 여름과 겨울에 러시아의 모스끄바와 인근을 여행하며 수많은 예술가의 흔적을 만나고 그들의 삶과 예술을 이야기하고 있다. 국립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만나는 수많은 예술인들의 생애와 작품들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아무래도 조금 더 걸어서 멀리 이동하여 그들이 직접 살았던 장소를 찾는 여정은 그 풍광을 함께 느낄 수 있어서 다르다. 특히 저자는 모스끄바 내 박물관, 미술관, 인근 지역을 겨울의 풍경 속에서 거닐었다면 똘스또이가 살던 곳, 뿌쉬낀이 러시아의 파르나소스라고 불렀던 아스따피예보, 러시아 문학의 성지라고 불리는 뽈라냐, 체호프 문학이 깃든 멜리호보, 바쩨르나크의 집 등을 여름에 거닐었다.

  모스끄바 강의 여름을 느끼면서 자작나무 숲이 울창한 곳에서 길을 잃는 저자의 동선을 따라 같이 아득함을 느끼면서 러시아의 여름을,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은 문학인들의 자취가 서린 곳을 쫓는 여정은 경외감마저 들었다. 왜인지 러시아의 모스끄바는 가기 쉽지 않은 곳이란 생각이 겹쳐져서 더 그러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득하고 깊으며 설레면서 애잔함이 이 책을 읽는 내내 따라다녔다.

  모스끄바의 여름과 겨울은 이렇게, 느낌이 다른가 싶으면서 이토록 러시아에서 예술가들이 탄생했고 서구에서도 많은 예술인들이 러시아, 모스끄바를 찾았던 것이 단지 정치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었을까 하는 물음도 들었다. 예술혼이라는 것이 자유스러울 때 절정으로 발현되는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억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도 절정의 혼이 발현된다고 하기도 한 것 같은데. 어쨌든 러시아라는 모스끄바라는 도시가 예술가에게는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칫하다가는 위축되기도 하겠다 싶었다. 조금만 발을 걸어도 대문호라 칭송받는 이들이, 수많은 예술가들이 있기에 그들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세월이 마감될 것 같고 또 언뜻 그들과 비교하느라 마냥 위축될 수도. 아니 예술가라면 선배들의 영향을 받아 좀더 진취적으로 청출어람의 예술혼이 이루어지려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게을러진데다 겨울이라 더더욱 이불속에서 나오질 않는데 러시아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는 ‘굴랴찌’라고 한다. 이를 통해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있을 수 있는 마음의 벽을 허문다고 한다. 굴랴찌! 이것은 산책하다라는 말이다. 내게도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이긴 하다. 그러다 보면 나의 정체성도 확립되어지려나. 수없이 번역되어 나오는 책들 속에서도 여전히 러시아문학으로 회귀하여 러시아문학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작가의 특성이 아무리 깃들어있다지만 나라가 가진 분위기가 글에도 영향을 미치는지도 모르겠다. 특정한 작가에 대한 선호도를 물리치고는 여전히 문학은 러시아!라는 말이 깃드는 것을 보면 말이다.


러시아의 굴랴찌 문화가 어떻게 그들의 정신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 예를 하나 들어보자. 내가 읽은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굴랴찌를 한다. 뿌쉬낀, 고골, 도스또예프스끼,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부닌의 주인공들을 보라. 예브게니 오네긴, 아까기 아까끼예비치, 라스꼴리니꼬프, 바자로프, 레빈, 아르세니예프 등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들은 굴랴찌를 하면서 자연과 교감하거나 정신적 공황상태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그들은 길 위에 존재한다. 그들은 굴랴찌 문화의 산물이다.

 

  깊은 밤과 매서운 추위에 장편소설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았겠냐고 장편소설을 깊은 밤 내내 읽지 않았겠냐며 러시아 문학에 대해 얘기하던 때가 있었고 수긍했던 시절이 있었다. 새삼 굴랴찌를 생각하며 그 주인공들과 소설을 다시 떠올려 보니 저자가 말한 것처럼 ‘굴랴찌’ 였구나! 싶다.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에 아열대기후인 미국 플로리다에는 이구아나와 바다거북이 얼어서 기절하고 있는 때다. 다행인지 2018년 1월의 대한민국은 눈도 내리지 않고 강추위라고 불리기엔 미적하다. 책속으로의 굴랴찌가 아니라 진짜 굴랴찌가 필요한 시간,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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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城) - 김화영 예술기행 김화영 문학선 4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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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은, 무덤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 김화영 예술기행, 문학동네, 2012.


  저자가 만난 성은 관광객에게 입장료를 받고 문이 활짝 열려지지 않을 때의 성이다. 안개가 어슴프레 끼어 있고 시선에는 보이면서도 여전히 저 멀리 물러앉아 있는 성. 관광안내 책자에서 보는 반짝반짝 빛나거나 광택이 나는 모습이 아니다. 그렇기에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을 만나온 저자의 이 책은, 성(城)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는 포장된, 깔끔한, 생기없는 모습이 아니라 서글프고 애잔한 모습이다. 보일듯 말듯, 울창한 나무에 가리워져 있거나 시간이 내린 빛깔의 흐름으로 흐트러져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안내하는 성을 둘러보면 삐걱거리는 문을 열고 성의 주인들이 고개를 내밀듯하다. 어떤 이는 차한잔 해도 좋다고 기꺼이 성의 방문을 허락하고 어떤 이는 시간이 늦었으니 돌아가라며 눈앞에서 문을 닫고 커튼을 내릴 것도 같다. 아예 성문을 굳게 닫고 문을 두드려도 내다보지 않을 곳도 있을 듯하다.

  가보지 못한 많은 성들이 가진 이야기를 저자는 들려준다. 문학에 등장하는 성, 실존 인물이 살았던 성에 대한 이야기는 호기심이 더해지고 분명 낯선 곳이지만 친숙하게 느껴진다.  저자의 문학같은 문체에 한없이 빠져들다 보면 오래 시간이 쌓아올린 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 더구나 저자는 “생전 처음 가보는 곳에 대한 흥미보다는 전에 이미 가보았던 곳에 또 가보는 반복 속의 변화를 더 좋아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변해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면서 자신 또한 나이를 더 먹었다는 사실 이외의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변화와 공간의 접촉에서 여행을 실감한다고. 그렇기에 이 책을 들여다보면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낯섦과 호기심보다는 저녁밥을 지을 때쯤 동네에 피어나는 땔감의 온기처럼 무언가 따스하면서도 하루가저물어 간다는 아쉬움과 애틋함이 녹아난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역시나 웃긴 것이 저자가 처음 방문한 곳에 대한 감상은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인도기행 같은 경우에는 좀더 경쾌한 발놀림과 호기심같은 게 있긴 하다. 아님 단체여행에서 오는 긴박감이거나. 

  프랑스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프랑스의 성들을 만나 성에 살았던 주인들을 불러낸다. 성이 가진 특권일까, 살았던 사람의 이름으로 누구네 집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라 그 성만의 ‘이름’을 달고 있어서 성이 무생물이 아니라 생물처럼 느껴졌다. 그 성 모두에 인간이 살았지만 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각기 다르다. 성 자체가 품고 있는 특색 또한 달라서 성이라는 명사에 성의 이름이 곁들여지며 명백한 고유명사로서 위풍을 달리한다. 이 책을 통해서 프랑스 귀족들의 연애사를 새삼 확인했고 역시 성이라는 공간에 대한 환상적인 감각은 유효하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의 삶이 서린 공간이기도 하지만 왜인이 한이 서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곳 성 하나하나는 넘쳐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저자는 파리의 또 하나의 성을 소개한다. 바로 페르 라셰즈 묘지이다.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들의 고향 메닐몽탕 가에 위치한 이 묘지는 하나의 도시에 가까우며 수많은 골목길들과 늘어선 대로들이 뻗어 있다 한다. 이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묻혀 있다. 발자크, 에디트 피아프, 프루스트, 폴 엘뤼아르, 쇼팽, 뮈세, 코로, 오스카 와일드, 콜레트, 도데, 아폴리네르 등 수많은 예술가와 정치가들, 그리고 파리 코뮌 당시 희생된 시민들이 이곳에 있다. 이 무덤을 돌아보며 이 예술가들의 행적을 알아보려면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가 버릴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어떤 무덤이건 무덤은 그 사람 최후의 성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성에서 무덤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저 돌문 뒤의 어둠, 한번 들어가서 다시 나오지 않는 사자(死者)의 성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무도 그 닫혀진 성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만 상상할 뿐이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삶의 빛을 통하여 죽음의 어둠을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성은, 참다운 성은 그 상상과 그 짐작으로 산 사람이 짓는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은 가장 참다운 성이다. 그 어둠 속으로 난 수많은 보도와 골목길과 지하실……다시 그 지하실 밑으로 망각의 강이 흐른다고 하던가? 


  또한 저자는 개선문과 노트르담 보바리 부인의 배경지를 찾아 소설에서 묘사된 것과 비교하고 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번역한 후의 저자가 소설의 배경이 된 장소를 찾아 보바리의 삶을 풀어낼 때 소설의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의 삶을 물리고 보바리 부인의 집, 성당, 약국 등으로 기억되는 장소가 후손들에게는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궁금해졌다. 그리 유쾌하거나 긍정적인 모델로이 아닌 경우에 말이다. 소문으로 인해 마을에서 쉬이 살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소설로 인해 더더욱 강하게 굳혀져버린 가족의 일대기는 남은 자에겐 멍에일 터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씁쓸해졌다. 플로베르나 라마라크나 빅토르 위고 모두 문장력이 탁월하기에 개선문과 노트르담과 마을을 묘사하는 필력이 남다르기에 그들이 소설속에서 그린 언어로 이 건물을 마을을 보는 기분은 단지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게 되는 맛이 있다. 눈으로 머물러 말을 잊었을 지 모를 곳이 어쩌면 말로써도 그려진달까.

  동화속에서 공주들이 살았을 성 아니면 유령이 나왔을 성으로만 굳혀졌을 성이 실존인물의 희노애락의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재정립한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살던 성의 모습은 위셰 성이 모델이고 레오나르도가 생의 마지막을 머물다가 간 곳은 프랑스의 클로 뤼셰 성이었다. 수많은 예술가들의 집이었던 성, 권력자의 애인이었던 이가 머물렀던 성은 관광지가 되어 있다. 일정한 시간에 문을 열어 휘익 둘러보아야 하는 시간을 허락한다. 당연히 그 옛날의 삶이야 느껴볼 시간은 내 마음속에서 정해야 한다. 저자가 말했듯이 저자는 그곳의 이야기를 ‘조금’ 들려주었을 뿐이고 그곳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이제 내가 할 일이다. 역시나,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찾아가고프다. 관광지이니 더 찾아가기 쉬울 것임은 분명한데도 아직은 시간으로만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과 소설들과 인물들의 생애를 더욱 알고난 후에야 그 공간을 찾아가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냥 보고프다는 느낌이 있을 때 가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 터질 것 같은 방랑의 마음을 책으로 대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여행이란 역시 돈과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요건 외에도 기질의 힘이 작용하는 모양이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중국에 일주일 동안 가본 사람은 한 권의 책을 쓴다. 한달 동안 가본 사람은 글을 한편 쓴다. 일년 동안 가본 사람은 중국에 대해 남이 물어보아야만 겨우 대답한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중국에 살다 온 사람은 그저 미소짓기만 한다.


   여러 해 프랑스에 살아 돈 사람처럼 그저 미소짓기만 했으면 좋으련만, 프랑스에 가보지 않은 채로 리뷰 하나를 썼다. 그럼, 한달 가본 사람처럼 군건가. 정말로 이 책에서 이야기한 성들을 쫒아다니다가 많은 예술가들을 떠올리다 보면 책한권의 얘기는 거뜬히 나옴직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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