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너가의 남매들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김윤미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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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예술, 그리고 불행


타너가의 남매들, 로베르트 발저, 2017-06-28.


  산책과 눈밭 하면 어느새 로베르트 발저가 떠오른다. 자신의 작품에서처럼 크리스마스 아침 눈밭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된 로베르트 발저는 그의 작품마다에서 걷고 걷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추위가 지배했던 겨울, 밤새 소복하게 쌓인 눈밭에 처음 남기는 발자국에서 근엄한 고독의 느낌이 드는 것은 발저가 남긴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발저의 첫 장편소설 『타너가의 남매들』에서도 걷는 일은 이어지고 있다. 눈쌓인 어느날, 길에서 쓰러진 한 예술가의 마지막 또한 나타난다.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고도 하는 이 소설엔 타너가 다섯 남매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누군가에게 말을 하지만 마치 혼자만의 생각처럼, 독백처럼 내뱉어지는 이야기가 소설에 가득하다. 그 말하기의 중심엔 타너가의 막내 지몬이 있다.

  지몬은 서적상, 간병인, 변호사 사무원, 대규모 무역상사 직원 등등 수시로 직업을 바꿔가며 거처를 옮기며 살아간다. 늘 의무에 충실한 지몬의 형, 장남 클라우스 박사의 눈엔 이 모든 행동이 마뜩치 않다. 의무에 충실하지도 못한 나는 처음엔 클라우스 박사의 눈이 되어 지몬의 행동의 이유엔 어떤 괴팍스런 연유가 있는 것인가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몬은 일을 구함과 그만둠에 있어서 언제나 당당했고 단순히 ‘하기 싫어서’가 행동의 이유가 아니었다. 지몬이 말하는 ‘지금 이 일’을 그만두는 이유는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직장인의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부당하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일과 대우를 받을 때, 그리고 그 자신이 그 일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할 때 지몬은 그 이유를 밝히고 일을 그만두었다.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며 누구라도 고용되어 일하기를 원하는 당신네 사무실들에서 젊은 남자의 발전은 기대하지 못하지요. 확고한 월급을 받는 것과 같은 혜택 따위 안 누려도 그만입니다. 그런 거 있으면 저는 영락하고, 어리석어지고, 쓸개 빠지고, 꽉 막힌 사람이 되거든요.


  젊은 청년 지몬은 일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며 형제들의 경제적 도움을 거절하면서 방랑하며 살아간다. 그 여정에서 형제들을 만나기도 하고, 누군가와 마주하고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가족과 인생과 삶에 대해 지몬은 이야기한다. 그렇게 지몬의 삶에는 지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가족일 때도 있지만 그 대부분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인물들, 특히 여인들이다. 그들에게 지몬은 들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제 삶에, 제 가족과 형제들의 삶을 이야기한다. 지몬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은 지몬을 연민하고 응원한다. 지몬의 이야기에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온갖 삶의 비의들이, 고독과 절망들이 연민들이 묻어난다. 어쩌면 끝없는 방랑이기도 한 그의 걸음에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간절함이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타너가의 남매들은 모두 다섯이다. 특히 지몬이 사랑하며 따르는 형 카스파는 풍경화가다. 이 소설 속에서 크게 두 삶이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장남 클라우스 박사로 나타나는 성실하고 의무에 찬 도시적이고 기계적인 삶과 카스파로 대표되는 방랑과 고독이 가득한 예술가의 삶으로 말이다. 카스파를 비롯하여 눈밭에서 스러져간 시인 제바스티안, 카스파의 동료화가 에르빈 등, 이야기속에서 유독 예술가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불행한 예술가의 표상처럼 생애 자체가 흔히 말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재능이 많았지만 정신병원에 있는 지몬의 셋째형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리하여 예술과 더불어 불행에 관해서도 열띤 견해가 펼쳐진다.


불행한 예술가는 불행한 왕과 같은 거예요. 자기가 재능이 없음을 아는 게 얼마나 영혼 깊숙이 고통스럽겠어요.


그는 제가 더 진지하게 예술에 임하기를 바랐지만, 저는 대꾸했지요. 예술을 행할 때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노력, 흥에 겨운 열성 그리고 자연 관찰이 필요할 뿐이라고요. 그리고 어떤 일에 대한 과도하고도 신성시하는 진지함이 그 일에 가할 수 있는 해악, 또 가할 수밖에 없는 해악에 대해서도 그에게 주의시켰습니다. 그는 제 말을 정말로 믿었지만 그가 움켜쥐고 있던 요지부동의 진지함을 내던지기엔 너무 나약했어요. 그후 제가 떠나왔지요.


  불행한 예술가들의 일상의 삶과 그리고 마지막을 보며, 과연 예술적 재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불행이란 말이 예술가들에게는 필연인 것처럼 예술적 영감을 위한 밑천인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얼마나 많고 강하던가! 불행이 아름다움을 위한,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기도 하지만 불행이 반복된다면 불행이 발판이 되지 않는다면 그저 불행한 삶일 뿐인 것을. 그렇기에 “미래를 갖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갖고자 한다, 미래라는 건 현재를 갖지 못했을 때나 있는 거”라는 말이 와 닿는다. 미래는 늘 희망에 대한 의지의, 기대의 관점이었던 것 같지만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결국 현재의 삶에 대한 불만족, 불안과 불행이라는 현실을 가지고 있다. 희망이라 일컬을 수도 있겠지만 판도라 상자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은, 판도라 상자가 재앙만을 쏟아내었던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가장 큰 절망이자 불행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불행, 재능, 인생, 형제, 고독, 예술 등등에 관해 여러 가지로 생각을 토해내는 지몬을 따라 여러모로 생각을 덧붙이며 깊이 잠기게 된다. 이 생각, 저 생각들이 조금 가라앉게 하지만 가만히 앉은 채로 지몬을 따라 생각의 방랑을 이어가는 것은 즐겁다.    


말 난 김에 덧붙이자면 잃어버린 것, 지나간 것이 그토록 값어치 있는 것도 전혀 아냐. 왜냐면 나는 내 주변을 둘러보거든, 너무 추하고 악의적이라며 자주 폄하된 우리의 현재에서 나를 매혹시키는 이미지들을 엄청 많이 본다고. 그리고 두 눈에 넘치도록 널린 아름다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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