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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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버지스 형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7.


  화재 현장에서 할머니를 구한 불법체류 노동자가 영주권을 획득했다. 스리랑카인 니말은 ‘한국인의 생명과 재산 보호에 기여’한 공로로 영주 자격을 얻은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제주도 예멘 난민으로 급격하게 불거진 외국인 혐오는 여전히 사그라지지 않았지만 그 이유와 방식에는 차이가 있으니 이는 곧 차별과 편견의 대상이 되는 외국인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영주권을 얻은 이유를 써 붙이고 살아가진 않을 터이니 니말은 그의 피부색을 이유로 혐오의 시선을 받는 날들을 여전히 겪을 것이다. 한국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버지스 형제』에선 난민 문제를 중심으로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은 이제는 중년이 된 세 남매의 이야기다. 형제자매는 어릴 적엔 함께 살지만 성인이 되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이들 역시도 그러하지만 가족에게 사건이 일어나자 일을 해결하려 당장 달려간다. 또한 그들은 어릴 적 함께 겪은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재를 살고 있다. 언덕 위에 차를 잠시 세워 두고 함께 타고 있던 짐, 밥, 수전의 아버지가 내린 사이 네 살 밥의 장난으로 구른 차에 아버지가 치여 사망한 일이다. 기억에도 없는 어린 날의 일이지만 이 일은 자라는 내내 밥에게 원죄를 부여하였고 그는 죄책감 가득한 소심한 성인으로 성장했다. 반면 여덟이었던 짐은 집안 가장 역할을 맡아야 했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뉴욕으로 간 짐과 밥과 달리 수전은 고향 셜리폴스에 머문다.

  수전의 아들 재커리가 마을의 소말리족 난민 공동체 이슬람교 사원에 돼지 머리를 던진 일로 그들은 고향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사건은 2006년 메인 주 루이스턴에서 실제 벌어진 일이라고 하는데 소설에서 재커리는 증오범죄로 기소되어 변호사 일을 하는 짐과 밥이 이 일을 해결하는 과정이 세 남매가 살아온 이야기들과 연결되면서 각각의 상황에서의 갈등을 드러낸다.

  갈등은 수전의 아들 재커리가 돼지 머리를 던진 일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갈등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그에 대한 감정만 높게, 깊게 쌓아가고 해결할 의지를 갖지 않고 싸우기 위한 대치상태로 소모적이던 상태에서 재커리가 벌인 것과 같은 특정한 ‘사건’이 드러나야 상황에 대한 다른 형태의 일들이 진행되게 된다. 문제가 있음을 소리칠 수 있고 그렇기에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들이 논의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속 서로에 대한 비난과 혐오를 품고서 은근히 드러내왔던 문제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뚜렷해지는데 그때 소말리족과 셜리폴스 주민들의 갈등은 세세한 것까지 드러나게 된다. 짐과 밥의 가족들 간의 은근했던 갈등의 감정들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메인에 왜 소말리족이있는 거야?” 헬렌이 문을 통과해 옆방으로 가면서 물었다. 그녀가 돌아보며 어깨 너머로 소리쳤다. “족쇄를 찬 게 아니고서야 누가 셜리폴스에 가겠어?”

밥은 헬렌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버지스 가족의 고향을 싫어하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면서도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투였다. 짐이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족쇄를 찼으니까. 가난이 족쇄지.”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는 시각은 결국 같은 방향으로 보인다. 짐과 밥과 수전, 그들의 배우자, 그들의 아이들을 사다리로 연결하여 애정관계와 갈등관계를 선으로 잇는다면 무수한 교차가 이뤄진다. 그들 갈등의 이면을 한발짝 깊이 들여다보면 한 개인에 대한 감정의 틀을 쌓아가는 것이 환경에서 체득한 계급의식이다. 소말리족과 셜리폴스 주민들간의 갈등은 개인간, 가족간의 갈등속에 잠긴 생각의 확장판이다. 가족이 개인에게 애정을 달리 하듯, 사회는 특정 집단에게 애정을 달리한다. 그것은 곧이어 당연한 인식으로 굳어진다. 이 처절한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인식, 그것이 갈등의 차별의 편견의 혐오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상처를 준 사람들한테 더 차갑게 대해. 참을 수가 없거든. 말 그대로야. 우리가 누구한테 그런 짓을 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어져. 내가 그랬으니까.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을 정당화하려고 온갖 이유를 다 끌어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이 그러하듯이 이 책 역시도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내면에 집중하고 따스하게 전개된다. 불안하고 두려움 가득한 밥과 그렇게 보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르지 않았던 짐에게 그리고 헬렌에게, 이 세 남매에게 아닌듯이 보였던 가족의 느낌이 서려가듯 이 사회에서 다양한 인종들이 살아가는 형태도 이 남매들처럼이 아닐까. 미국의 개인주의가 무조건 나쁘지 않고 소말리아의 지역문화와 가족주의가 무조건 답이 아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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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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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이 뭘 안다고?!


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문학동네, 2016.


  교사의 학생에 대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할 때면 에이미가 생각났다. 하나같이 다르지 않는 똑같은 패턴의 말과 행동, 여지없는 결말, 그리고 그루밍. 한여름이란 어찌 해도 그늘을 찾게 만들고 그 볕은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다. 소설의 배경인 무더운 여름 날씨와 셜리폴스 풍경이 습한 열기를 드리우고 숨이 막히게끔 한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관계도 그렇게 느껴진다. 익숙한 패턴처럼 10대 소녀는 제 엄마에게 애정은 저 멀리 두고 반항과 적대적인 감정을 갖는다. 늘 엄마들은 항상 아이에게 이것을 또는 저것을 하지 말라 다그치고, 아이는 항상 그 말에 반항하느라 관계가 어그러지긴 하지만 제 엄마가 다른 엄마이기를 현재의 모습과는 다르기를 바라는 에이미의 감정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엄마”라고 입 밖으로 나오고 난 이후에야 이저벨이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된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에이미가 그 말을 했다는 사실이, 이저벨에게는,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몇 주 뒤에 그윽한 밤의 어둠 속에서 이저벨은 그 말을 떠올렸는데,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와 똑같은 강도로 그녀의 가슴속에 은백색 고통의 파문이 일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휘청거리는 것 같았고, 심장은 어처구니없는 속도로 질주했다. 흉물스러운 수치심 때문이었다. 그 시인의 이름을 잘못 발음한 일이 도덕적 약점이 되지는 않겠지만, 결국에는 이렇게 되었으니 어쩌란 말인가. 진실은 에이미가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는 사실, 에이미가 의도했거나 짐작했던 것보다 더 강한 주먹을 날렸다는 사실이었다.


  삼십대에 구두공장 사무실 비서로 일하는 이저벨 굿로는 교사가 되기를 꿈꿨었고 좋은 남편을 갖기를 소망하고 구두공장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셜리폴스에 십사년째 살고 있다. 사람들과 특별하게 교류하지 않으며 홀로 에이미를 키우며 에이미의 일 하나하나 단도리하기 바쁜 이저벨은 이제 햄릿과 같은 책들을 읽으며 그런 ‘책들을 읽는 여자’임을 에이미가,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저벨 마음속에 깊이 있는 또다른 욕망.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실행할 수는 더더욱 없는 유부남 직장 상사에게 품은 이저벨의 욕망과 열다섯 에이미의 세배쯤 나이가 많은 교사에 대한 욕망은 대비된다. 감정의 깊이에서가 아니라 그것의 실현에 있어서 말이다. 에이미와 이저벨은 지독히도 닮아 있고 그렇기에 그들의 갈등은 평행선으로만 향하는 듯 보인다. 엄마와 딸은 과연 친밀해야 하는가, 이런 생각들이 뒤섞인다. 먹먹해진다. 에이미와 이저벨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감정과 생각속에 매몰되어 버리는 일이 불안으로 인해 확장됨을 느낀다.


자신이 반대만 아는 엄마였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에이미에게 늘 무섭게 대했나? 이런 의문조차 끔찍했다. 그래서 이 아이는 겁이 많은 아이로 자랐고, 늘 고개를 숙이나? 이저벨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줄곧 스스로가 신중하고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기분이 끔찍했다. 에이버리 클라크가 그녀의 집에 오기로 한 약속을 잊은 일보다 더 끔찍했다. 자식이 겁에 질린 채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녀는 딸을 흘끗 돌아보며, 그 말은 맞지 않아, 완전히 반대야, 하고 생각했다. 내가 줄곧 너를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올바르지 않았다. 그녀의 어머니도 겁에 질려 있었지. 이 세상 어떤 사랑도 끔찍한 진실을 미리 막을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그대로를 물려준다는 진실을.


  이저벨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춘기를 지나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이미의 나이였다면 에이미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하였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놀란 건 이래저래 이저벨의 나이가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 사실이 더 마음쓰이게 된 이유였다. 에이미를 기르며, 대립하며 자신의 지나온 삶, 그리고 전개된 삶을 생각하였을 이저벨처럼 어느 순간이 시간이 세월이 훨씬 지나서야 깨닫게 되는 일들이 있다 해도 참으로 젊은 이저벨이었기에. ‘심각하고 창백한 얼굴을 한 외로운 외톨이’로 살아온 이저벨의 모습이 이 세상 거의 모든 싱글맘의 모습은 아니었을런지. 하긴 그렇게 볼만도 아니다. 이저벨은 그렇게 여기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맙소사.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해, 사랑하는 남자를 잃는 것에 대해 햄릿이 뭘 안다고?

나약함이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이니! 이저벨은 실내복을 더 단단히 여몄다. 솔직히 슬슬 짜증이 났다. 남자들은 깨우쳐야 할 것이 많았다. 여자들은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먼 옛날부터 세상을 흘러가게 한 것은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만 해도 전혀 나약하지 않았다. 지붕은 새고 차에는 윤활유가 필요한 뉴잉글랜드의 을씨년스러운 겨울 날씨에 혼자 딸을 키우는 여자에게 나약하다니, 가당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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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동조자 - 전2권
비엣 타인 응우옌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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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앵글


동조자, 비엣 타인 응우옌, 민음사, 2018.


  베트남이 한국에 열광하고 있다. 가보지 않은 관계로 기사로 접하는 것일 뿐이지만 베트남 축구가 국제대회에서 우승했고 한국인 감독이 우승을 이끌었다며 감독의 나라에 대한 우호적이고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고 있다 한다. 하긴 히딩크로 인해 네덜란드에 우호적인 경험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 기사를 전적으로 공감할 지도 모르겠다. 축구가 뭐기에, 이 말은 항상 긍정의 의미를 띤 감탄사는 분명 아니다. 그냥 즐겨, 이 말도 있는데 굳이 따지는 것도 흥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호하고 애매한 감정의 어디쯤에 있을 뿐.

  한국인이 베트남전에 참전해 난민 학살과 한국군 위안부를 운영, 아니 강간했던 역사로 베트남은 한국인에 대한 분노가 있다. 축구 우승-더구나 월드컵도 아닌-으로 상쇄될 감정은 분명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감정의 골이 깊지 않은 것인지, 축구가 대단한 것인지, 한순간의 기쁨을 언론이 과장한 것인지, 각 사안에 따라 이성과 감정의 반응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것을 베트남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세상은 하나임을 자본은 국경이 없음을 진정 화합의 승리자는 자본인 것인지…. 이것들 하나하나에 어느 정도 동조하고 있음만은 확실한.

  전지구인의 화합과 동맹을 강조하지만 이건 그냥 허울 가득한 슬로건이다. 세세하게 보면 결국 나라와 민족의 구별이 있고 개인의 이익에 따른 층계가 있다. 이토록 정교하게 세분화하며 화합을 강조하는 세상에서 정체성과 이중성 어느 것이 살아가기 위한 말이 될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둘 다 필요로 하면서 정체성은 가치있는 것으로 이중성은 고약한 것으로 치부한다. 단어에 이미 감정을 부여하고 있기에 이중성의 정체성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이중성을 놀이에서 쓰는 ‘깍두기’라 얘기해도 될까. 게임에서 무척 부러운 자, 깍두기.

  프랑스인 가톨릭 신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면 ‘잡종새끼’가 된다. 이 책은 그 잡종새끼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이 곧 절체절명의 이중성을 지닌 자로 고정되어 버리는 깍두기가 된 그의 이야기. 그의 양 옆에는 명확한 세계가 있고 그는 항상 그 가운데에 놓여 있다. 부모는 프랑스와 베트남을, 의형제 만과 본은 공산주의자와 반공산주의자의 경계를 주었고 전쟁은 북베트남에서 자란 그를 남베트남에서 살게 했다. 남베트남 특수부 소속 육군 대위로서 CIA 소속 비밀요원이기도 하고 베트콩 소속 고정간첩을 수행하고 있다.

  순간 순간의 선택으로 점철되었을 그의 운명을 그는 항상 부정한다. 자신이 가진 명확하지 않은 정체성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오로지 하나, 잡종새끼로 태어나 그렇게 불린  대로 살아가는 운명이었다고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것만큼 귀찮고 소모적인 일이 있을까. 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선 어쩐지 끊임없는 모멸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될 것 같다.


내가 ‘우리가’나 ‘우리에게’라고 말할 때,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물으셨습니다. 파견된 스파이로서 첩보 활동의 대상인 남쪽 군인들이나 철수자들을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순간들에 그렇게 불렀던 겁니다. 그 사람들, 나의 적들을 ‘그들’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과 함께 거의 평생을 보내다시피 한 후에,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동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인에게 동조하는 내 약점은 ‘잡종 새끼’라는 내 존재와 많은 관계가 있습니다. 잡종 새끼라 나면서부터 쉽게 동조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잡종 새끼들이 잡종 새끼다운 행동을 합니다. 내가 내편과 다른 편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가치 있는 행동일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배운 것은 상냥한 내 어머니의 공이라고 믿습니다. 어쨌든, 만약 어머니가 하녀와 사제 사이의 경계를 허물지 않았더라면, 혹은 경계가 허물어지게 내버려 두지 않았더라면,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이유로 힘든 시선 속에 혼란을 겪어야 했던 그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쪽에 있었다면 그가 선택한 것을 확고하게 주장하지 못하는 삶이 되는 것의 아이러니와 혼란이 더 크게 와 닿았다. 하지만 선택임이 분명하지만 만과 본의 것과는 다른, 그 것조차도 그 자신의 선택이 아닌가. 그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늘 그렇게 자신을 확연하게 드러내지 않아야 하는 생각하고 있는 것과 반대되는 상황이었다. 이 선택을 그는 늘 자신이 잡종새끼라는 본질을 지니고 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다. 결국 그의 삶의 결과는 정체성을 찾아 헤매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정체성을 가지길 거부하고 있었음에 따른 것이다.


자네의 동양적인 본능을 견제하기 위해 자네는 미국인들이 나면서 배워 온 무의식적인 행동들을 부단히 연마해야만 해.


  소설의 많은 부분에서 주인공이 발끈하는 부분은 누군가가 그를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몰아갈 때이지만 자신이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의해 무언가를 철저히 하지 않았던 것이 그 스스로를 옭아맨 것이다. 그리고 그 옭아맴을 깨달았을 때 그는 어쩌면 확고한 정체성을 획득했다. 정체성이 가지는 의미를.

  그의 존재는 양편에 의해 맥없이 희생과 착취를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방적인 시각을 보여주지 않는 존재가 된다. 오랫동안 베트남 전쟁은 미국의 시각에 의해 해석되어 왔다. 베트남인들이 그들의 목소리가 없었겠는가. 그 목소리를 제쳐두고 한국 역시 미국의 시선을 따랐다. 게임에 참여하는 깍두기처럼 이편, 저편이 되어 보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위선과 모순을 경험할 수 있었던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던 그 시선.

  인간은 항상 이중, 다중의 인격을 가지고 제 이익을 취하며 살아가면서도 ‘정체성’을 강요한다. 권력의 처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인이 취해야 할 정체성이란 결국 어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다름 아니다. 베트남 전쟁의 역사에서 내가 누구인지, 취해야할 가치는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추구하며 삶의 태도와 방향을 설정하는데 힘겨워한 주인공의 간절하고 처절한 고민이 얼마나 허무하게 박탈되어 왔는지를 깨닫게 되는 과정에 감정이 이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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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E. W.
김사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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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스


N. E. W. 김사과, 문학과지성사, 2018-08-08.


  새로운 세상이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지는 소설은 낯설지 않다. 동화도 미래세계를 그림에 있어 그 기괴함이야 만만찮지만 대체로 긍정적 환상으로 가득하다. 기대하지 않기 때문인지 기대가 너무도 크기 때문인지 미지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은 기괴한 세상을 창조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계보에 이 소설도 놓일까. N.E.W. 새로운 것일지 새것일지를 가늠하기엔 애매하다. 소설이 그리고 있는 공간은 꽤나 익숙하기에. 낯설지 않다는 말은 새롭지 않다는 것, 새것 같지 않다는 것이므로 N.E.W.라는 단어에 일치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뭔가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사람 같은 표정으로, ‘엔, 이, 더블유, 뉴N. E. W.가 현대 세상을 결정했다.’ 그게 무슨 약자인지 아세요? 신경학neurology, 전기electricity, 제2차 세계대전World War 2. 믿어지세요? 제 아버지가 이렇게 황당할 정도로 유치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런데 사람들은 아버지를 두려워하죠. 그게 다 아버지의 연기에 속고 있는 거야.


  내가 속고 있는 건 무엇일까. 아무리 보아도 소설이 구축하고 있는 세계는 막장드라마 일컬어지는 배경을 지닌 인물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런 인간군상에게서 보던 삶을 살아가는 패턴은 새로움과는 거리가 멀어, 새롭게 읽어나가기엔 무리이다. 적당히 환상이라 생각하며 넘어가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이 익숙한 그림 속에서 제목 때문에 N.E.W.를 되뇌며 연관성을 억지로 주입하다 눈길을 사로잡는 문장에 생각은 다른 방향, 그리스신화 속으로 흘러간다.


새로운 시대엔 새로운 시대에 맞는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세계에 걸맞은 환상이요. 죄송한데요, 아버지의 시대는 끝났어요. 아버지의 거짓말은, 아버지의 사기는, 그 조잡한 마술은 이제 통하지 않아요.


정말로 죽어주시면 안 되나요? 저와 제 아내를 위해서. 아버지에게 드리는 제 유일한 부탁이에요.


  제우스의 할아버지 우라노스는 아들 크로노스에 의해 거세당한다. 자식에 의해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는 발버둥에도 불구하고 크로노스 또한 제 아비와 같은 운명이 될 뿐. 이것은 과거가 물러나고 현재가 도래하는 것이니 아버지 세대가 사라지고 아들 세대가 오는 것이다. 오손그룹의 정대철 회장이 구축하고 있는 권력이 그의 세계에 속한 아들 정지용과 며느리 최영주에게로 옮겨가는 과정이야말로 완벽하게 과거와 현재의 교체이며 ‘N.E.W.’가 아닌‘N.E.W.’의 모습이다. 그런데…신화와 소설이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뭘까. 아니다, 결국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권력이란 그렇게 신들이 벌이는 전쟁처럼 그들만의 리그라는 것을. ‘신’으로 나타났을 때는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인마냥 세뇌당한 그 세계가 현실에도 얼마나 강요되고 있는지를.


정 회장이 굳이 복잡하게 5평짜리 서민용 원룸과 2백 평짜리 최고급 펜트하우스까지 한 건물 안에 섞어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거기에도 그만의 독특한 신념이 숨어 있다. 가난한 자들은 부유한 자들과 완전히 섞여서도 안 되지만 완전히 격리되어서도 안 된다. 그들은 멀리서, 보이지 않는 벽 너머에서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를 느껴야 했다. 그래야 쌍방간의 두려움이 유지되며, 살얼음 같은 평화가 지속될 수 있다.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수준의 두려움을 꾸준히 유지하는 것, 그것은 통제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이가 가장 까다로운 예술이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다 느껴질 때, 두려움의 대상이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개달았을 때 사람들은 용감해진다.


  국숫집 성공자도 BJ 이하나도 욕망을 갖는다. 어쩌면 성공이라 이름할 수도 있겠다. 그들이 벌이는 처절한 ‘노력’과 대비되게도 모자란 한량같은 정지용은 쉬이 권력을 가진다. 5평짜리 서민용 원룸에서 사는 이들이 몸과 마음으로 발버둥칠 때 정지용은 그저 아버지 하나만 제거하면 늘 하듯 재밌는 게임에 몰두하다가도 오손그룹이란 세계를 거머쥘 수 있다. 아, 그조차 제 힘으로 거두지도 못한 것이지만. 심오할 듯 보이는 정회장의 독특한 신념이란 결국 권력을 더욱 드높이게 보이는 수단일 뿐이다. 2백평 펜트하우스만 늘어선 곳에서 권력을 명확히 휘두를 수 있을까. 2백평 펜트하우스가 더욱 빛날 수 있는 건 그 옆에 놓인 5평짜리 원룸의 존재다. 그들이 어떤 신념으로 그들 자신을 이미지화시키든 5평의 인생이란 그들에게 개를 키우는 공간일 뿐. 정지용이든 최영주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여 제 왕국을 세우든 변하지 않는 것, 여전히 5평짜리 원룸을 만들어 낼 것이고 그 안에서 그들을 위한 개를 사육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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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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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같은 소리하고 있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2018.


  내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은 21세기가 나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라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노래하고 있다. 20세기에서 그린 21세기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었을지언정 무조건 살기좋은 세상이었다. 진보와 발전이란 거부할 수 없는 단어였고 기대감을 가속화·극대화시켰다. 하지만 21세기는 20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진보와 발전이란 제한적인 단어였고 어제에서 이어진 문제는 지속적이다. 미래라고 불린 사회가 현재가 된 지금 문제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이 존재하고 그에 대한 해결 방안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시각은 영향력을 갖는다. 유발 하라리도 대표적이다.

  인류가 직면한 커다란 질문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나느냐”라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그러니까 현재, 인류는 고통에 처해 있다는 말이겠다. 그 고통의 주원인이 그토록 21세기에 기대하던 기술혁명이라는 점은 또다른 아이러니긴 하지만 결국 익숙하게 겪어왔던 대로 기술혁명은 인간소외를 급격히 부추긴다. 총체적으로 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가지는 한계라 말할 수 있으며 유발 하라리는 그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21세기의 전례 없는 기술적, 경제적 파괴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모델을 최대한 빨리 개발해야 한다. 이런 모델들은 일자리보다 인간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따라야 한다. 많은 일자리들이 따분한 고역이고 구할 가치가 없는 것들이다. 아무도 현금출납원을 평생의 꿈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고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을 보호하는 일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한계로 도태된다며 사회주의·공산주의 체제로의 이행을 주장했고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식 복지 제도’를 도입하여 마르크스가 한계로 지적한 부분을 수정하며 지속해 왔다. 물론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은 다르지만 말이다.


점점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 가지 새로운 모델은 보편기본소득제UBI다. UBI는 정부가 알고리즘과 로봇을 지배하는 억만장자들과 기업들에 세금을 물려서 그 돈을 모은 개인에게 기본 필요를 충당할 만큼의 급료를 제공하는 데 사용하자고 제안한다. 이것이 빈곤층에는 실직과 경제적 혼란에 대비한 완충 역할을 할 테고, 덕분에 부유층은 포퓰리즘에 의한 대중의 격분으로부터 보호받을 거라는 구상이다.


  유발 하라리도 ‘보편기본소득제’를 제안한다. 항상 예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국회는 선발시에는 ‘복지’를 부르짖으며 그것이 유용하다고 활용한다. 하지만 그 이후 실행은 복지예산을 삭감하는 것에서 보듯이 대중의 격분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고 유용하게 흘러간 패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의 격분 역시도, 쉬이 사라졌으니까. 자유민주주의를 완벽히 포장해주는 것이 복지제도이다. 복지제도를 이렇게 갖다 쓰는 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복지제도를 혐오했다. 그것이 이용당하고 버려질 것이기에. 목적이 무엇이냐를,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결국 당하고 만다.

  목적을 정하는 것도 인간이기에 어쩌면 유발 하라리의 인간의 겸손을 외치는 목소리도 수긍은 간다. 하지만 ‘겸손하세요’라고 해서 겸손할 수 있다면 인간의 고통이 있을 리가 없다. 유발 하라리의 말에 귀기울이고 맞다고 감탄하며, 무릎을 탁 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렵지 않은 글임에도 왜인지 명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아성찰과 자기반성의 명상과 자기계발서로 바뀌는, 마무리되는 장르에 당황하지는 않지만 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유발 하라리의 생각과 글에 대한 매력은 책이 출간될 때마다 하강곡선을 그리게 된다. 그렇다고 해도 책이 나오면 읽게 되겠지. 결국 나도 늘같은 유권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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