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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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불완


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문학동네, 2018.


  “한 가지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오, 올라갈 줄만 아는 사람들.”

  <유행병> 속 인물은 당대 유행하고 있는 병의 근원적인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잠든 동안』이라는 표제 아래 16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의 퍼레이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한가지 밖에 몰라 다른 것에 대한 면역성이 없는 이들의 삶은 복잡하지 않지만 결코 단순하진 않다. 단순성, 하나에 대한 집착만으로도 얼마나 삶이 복잡해질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단편집인줄 몰랐다가 단편 하나가 끝날 때마다 아참, 작가가 누구였지 확인하게 되었다. 뭐라고, 커트…보니것이라고? 정말? 이런 생각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다시 작가가 누구더라,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진짜 보니것 작품이 맞아?라는 의문과 설마 내가 보니것의 문체를 모를 리가라는 당혹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보니것 작품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집도 마찬가지다. 따져보자면 뭘 그렇게 보니것 작품을 많이 읽었기에 읽으면 ‘나는 보니것의 작품이오’를 알아챌 거라고 그러냐 싶었지만 보니것의 작품에서 느꼈던 매혹이 덜해서, 아주 덤덤하게 책장을 넘긴듯하다. 나 또한 보니것 문체의 한가지밖에 모르는 사람이겠다 싶다. 

  어쩌면 단편집이 가지는 같은 소재와 패턴의 반복 때문에 받은 느낌일 수도 있겠다. 특정한 한가지에 집착하는 인물들 외에 이 책속에는 ‘돈’이라는 소재 또한 반복적이다. 마치 자본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가한 찰리 채플린의 작품이 연상된다. 유행병의 대사와 잇는다면 결국 이 이야기 속엔 돈에 집착하는 인간의 삶이 주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돈에 집착한다는 것은 곧 돈을 욕망한다는 것인데 대체로 돈에 대한 욕망의 과정도 결과도 거의 모든 작품은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보니것은 그것을 좀더 유하고 발랄하게 그리고 있다.

  자신이 만든 기계 여인에 집착하는 천재 공학자, 남성 잡지 속 여인에 빠진 남자, 모형 기차 만들기에 빠진 남자, 전통과 관습에 충실한 모범생 소년이 몰두한 그것으로 인해 외면하며 잃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다. 반면 돈에 몰두하는 이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거나 유행처럼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돈이 없다면 굶어야 하고 예술을 하는 일은 멀고 험난하지만.


 “어떤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에게 타인으로 만들려고 하죠.”

  <루스>는 아들에 집착하는 어머니와 며느리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안타깝게도 며느리는 패배를 절감하는 순간 저 통렬한 말을 남긴다. 그렇다. 아들을 둔 어머니들과 며느리의 싸움, 왜 어머니들은 아들에 집착하며 모든 여자들을 타인으로 만들려 하는지 세월이 흘러도 알 수 없는, 궁극의 의문점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 며느리를 두지 않은 탓인지 며느리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서다가도, 깨달음에 힘입어 어머니에게로 간다.


자기에 비해 포크너 부인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들떴다. 포크너 부인이었다면 자신의 좁은 삶 속 비극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대합실에 그냥 앉아 있었을 것이다.


  물론 통쾌하지만 그것으로 머물렀어도 좋겠다고, 돌아서서 가지마라고 그냥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을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루스는 ‘자신의 좁은 삶 속 비극’을 살게 될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발을 돌린다. 이런.


한때 신이 당신에게 사랑하라고 주셨던 불완전한 사람을 봐줘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신이 허락하신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조금이라도 좋아해보도록 해요. 그리고 여보, 제발, 다시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줘요.


  한가지 생각을 가치관, 신념, 중독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쪽으로 기운다면, 물론 이미 지나치게 치우쳐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들을 타인으로 나아가 적으로 돌리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들이 이기적이라는 말로 내버려두고 싶은데 굳이 또, 루스처럼 그들을 어여삐 여기며 그 삶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어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싶다. 그들은 올곧이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제니>속 천재 공학자의 아내가 남기는 편지는 그들에게 남기는 글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그들을 포용하라며 남기는 메지지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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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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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크로싱


지하철에서 책읽는 여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현대문학, 2018.


  책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폭염에는 쓱, 사라지는 모양이다. 지하철이나 기차를 타고서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책 한권을 읽고 돌아오는 여정을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폭염이란 움직이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하면서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도록 한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출근 시간 두 정거장이나 먼저 내려 다른 곳으로 가면서 새로운 일과 맞닥뜨리게 되는 주인공 쥘리에르처럼 평소와는 다른 패턴으로 움직이면,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만날 수 있을까.

  쥘리에르가 일상적인 패턴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 아니 두 정거장이나 먼저 내려 평소와는 다른 출근길을 선택함으로써 맞닥뜨린 세계는 지각, 질책이라는 현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니라 ‘책 전달자’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곳이다. 지하철에서 졸음 끝에 꾸는 꿈이라도 마냥 희한한 꿈이겠거니 싶은 이 몽상과도 같은 세계는 ‘무한 도서협회’다. 한가득 쌓인 책을 정리하고 있는 남자 솔리망은 사람들에게 알맞은 책을 전달시켜주는 책 전달자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달자는 책을 자연이나 기차 안에 되는대로 놓아둬서는 안 됩니다. 책들이 독자를 찾으려면 우연에 맡겨서는 안돼요. 그 사람이 책에 독자를 골라줘야 해요. 관찰하고, 더 나아가 어떤 책이 필요한지 감이 올 때까지 독자를 쫓아가야 하죠. 착각하지 마세요, 이건 진짜 일입니다. 우리는 도발하려고, 일시적 변덕 때문에, 혹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선동하려는 의도로 책을 나눠 주는 게 아닙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아요. 나와 함께 일하는 훌륭한 전달자들은 큰 공감 능력을 가졌습니다. 상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어떤 낙담과 원한들이 쌓여 있는지를 느낍니다.

  

  이 공간에서 편안함과 행복을 느낀 쥘리에르는 부동산 사무소로 출근하는 일을 그만둔다. 이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관찰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위로와 조언을 해줄 책들을 전달하는 책 전달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책 전달자라는 역할은 쥘리에르 자신에게는 모험이지만 점점 이 역할을 통해 타인을 도우며, 책 전달자의 의미를 찾아 성장하는 쥘리에르의 여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에게 공감되는 책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의 묘미는 그런 책들에 대한 소개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만 이 책은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책, 내 인생을 바꾼 책을 좀더 스토리를 가미해서 추천하는 서점의 도서목록이다. 조금 더 즐겁게 표현하자면 타인에게 책을 추천할 때 느끼는 쾌감, 희열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무한도서협회는 독서클럽 같았고 책 전달자의 역할은 각각의 회원들 같다. 살아가면서 고민을 겪는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며 건네는 책, 그것이 그들 삶에 지금 고민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야기할 때의 누군가도 결국 책 전달자인 것이다.


마침내 나는 두꺼운 책들 속에 모든 질병과 모든 치료제들이 감춰져 있다고 믿게 되었다고, 아니, 그렇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책에서 배신을, 고독을, 살인을, 광기를, 격분을,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나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 있고 내 존재를 망가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난다고. 때로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고. 아프리카 소설이나 한국 동화를 읽다가 영혼의 단짝을 만나는 것이 우리 인류가 똑같은 악덕들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닮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덜 악해지기 위해 이럭저럭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러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게 미소 짓고, 서로를 어루만지고, 무엇이 되었든 감사의 표시를 나눌 수 있다고.


  쥘리에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체험하였기에 사람들은 책을 읽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에게 책을 추천하고 또한 함께 모여 독서클럽을 만들어가는 것일 게다. 북크로싱book-crossing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말이다. 북크로싱 안내서라고 할 만한 이 책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쥘리에르에 쉬이 공감하며 읽게 될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는 쥘리에르의 과감함을 부러워하면서 말이다. 다만 생각보다 책 전달자의 여정은 폭염 중에 읽기에는 아주 단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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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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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멧돼지의 ‘운 또는 불운’

네메시스, 필립 로스,2015.5.29


  동굴에 갇혀 있던 태국 소년들 전원 구조 과정을 보면서 어떤 기억 속에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 과정이 너무나 비교될 수밖에 없어 기쁨 중에도 아픔이 꽉 차올랐다. 실종된 아이들이 발견된지 일주일이 지났음을 확인하고서야 아이들이 생각보다 오래 그곳에 있었구나 싶었다.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안고서 버티는 그 시간 동안이 아이들에겐 어떤 시간이었지 짐작도 어렵지만 동굴 속 유소년 축구팀 소년들과 코치의 모습은 담담해보였다. 언론에 소개된 과정을 보면서 떠오른 기억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자꾸 생각나는 이미지, 익숙한 느낌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내 알았을 때의 희열, 그것은 필립 로스의 소설 『네메시스』주인공 버키 캔터였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필립 로스는 결국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올해 세상을 떠났다. 2012년, 소설 절필 선언에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 된 『네메시스』. 신화 속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어떤 복수에 관한 서사를 이야기할 것인가 했던 이 소설은 막장드라마라 불리는 드라마에서 사용되는 복수와는 전혀 달랐다. 


그의 자신 있고 단호한 태도, 역도선수다운 힘, 매일 열성적으로 우리와 함께 시합을 하는 것-이 모든 것 때문에 그는 감독으로 처음 온 날부터 놀이터 붙박이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이탈리아인 사건 뒤로는 완전히 영웅이 되었다. 특히 친형이 전쟁에 나가고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해주는 우상화된 영웅적인 형이 되었다.


  스물다섯의 유소년 축구팀 태국 코치 또한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았지만 아이들을 위험에 이르게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구조대원 한명이 사망했다. 승려였지만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축구팀 코치로 일하고 있다는 그가 자필로 전한 사과의 메시지와 함께 동굴 속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보살피는지 알려진 지금에는 그는 영웅으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신이 보내준 선물로 칭해지고 있다. 

  버키는 스물세 살의 ‘놀이터 감독’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 가고 싶었지만 시력 때문에 탈락해 좌절감과 죄책감을 느끼지만 제 또래들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열성적으로 돌보고 있다. 하지만 폴리오 유행병이 휩쓸면서 사망하는 아이들이 발생한다. 버키 역시 “그가 스물세 살의 놀이터 감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강한 어떤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애원하고 있는 눈”을 보며 강인함, 결단력,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가르쳤지만 확산되는 전염병과 아이들의 사망에 또다시 좌절과 분노, 죄책감과 슬픔에 싸인다.


   “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덮치는 거요?˝


  글쎄. 그것을 안다면! 설명되지 않는 무엇,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명확히 주어지는 답은 없다. 그렇기에 버키는 그 모든 것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을 심판한다. 단지 비극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운이 누군가에게는 불운이 따르는 우연과 하느님을 비난하며 그는 1944년 뉴어크를 휩쓸던 전염병의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살아온 버키의 인생이 평온했을 리 없으니 그때의 일을 극복하고 평생의 개인적인 비극으로 만들지 않은 ‘내’ 모습과 완벽히 비교되었다.

  제 생을 망칠 정도의 죄책감,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까지 생각하는 버키의 나약함과 의무감은 강도는 낮을 지라도 많은 이들이 경험한 감정이다. 특히,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라면 더욱 강하게 가질 죄책감일 것이다. 동굴에 갇힌 소년들이 전원 무사히 구조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부모들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어쩌면 더 큰 비난을 코치에게로 쏟았을 것이다. 버키는 강한 체력을 가지고 아이들을 성심성의껏 돌보았지만 맞닥뜨린 불운에, 비극에 대항할 정신적인 힘을 타고나지 못하였기에 그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며, 그의 삶은 몰락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죽음을 단지 비극으로 돌리기엔 힘들었던 버키는 생의 많은 일들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이 ‘병적인’ 죄책감, 이 극단적인 생각고 행동을 통해서 비극을 맞닥뜨린 자의 행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가 그의 삶을 시들게 해버린 고통들을 쌓아가는 것에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오만, 의지나 욕망의 오만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유치하고 종교적인 해석의 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 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구인 남편을 얻는 것을 막는 데서 가장 큰 승리감을 맛보며,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부인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된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비극은 항상 고통을 준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당연 ‘정의로운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기도 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울분이 차오르기도 한다. 그럼 감정들을 떨쳐내는 것이 분명 쉽지 않다. 버키를 통해 극한의 생각에 맞닥뜨리며 오히려 비극에, 불운을 맞닥뜨려 가져야 할 생각의 방향이 미로가, 도돌이표가 아니라 길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긴 시간 어둡고 깜깜한 동굴 속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스물 다섯 코치가 선택한, 생각한 길은 끝없는 불운과 죄책감이 아니라 이겨낼 수 있는, 책임질 수 있는 책임감과 죄책감이었다. 상황에 대한 ‘해석’.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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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필 선언했을 때, 이미 노벨문학상에 대한
기대는 내려 놓은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
이 들었습니다.

모시빛 2018-07-12 08:20   좋아요 0 | URL
왜 굳이 절필선언을? 그냥 자연스럽게 안쓰면...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레삭매냐님 글을 보니 기대와 부담, 그런 것에서 해방되려는 선언이구나 싶기도 하네요...
 
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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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 꾸는 꿈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2018-05-09.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후터키”와는 달리 최근 몇 주 가을 같은 날씨에 침전하고 있다. 태풍이 오기 전부터 새벽이면 비가 내렸고 여전히 비를 내릴 거라는 듯 검은 구름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는 하늘을 보면 여름이란 계절이 맞나 싶다. 종소리 대신  사이렌 소리만이 들려와 불안감을 극대화한다. 현실은 여전히 많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지만 때로는 먹구름 가득한 소설 분위기가 현실보다 더 흥미롭다.

  소설은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흩날리는 낙엽과 무너진 공산주의 이미지가 얹어지며 무겁고 쌀쌀하게 가라앉은 느낌의 1980년대 헝가리를 배경으로 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마을 주민들은 ‘그’를 한없이 기다린다. 죽은 사람으로 알려진 그의 귀환 소문에 사람들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안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존재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과연 그는 불행을 안고 오는 사탄일까, 불행을 떨궈낼 존재일까.

  ‘그’, 이리미아시를 슈미트는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 성을 지을 수도 있는 위대한 마법사’라 칭하지만 ‘그’에 대해선 마냥 칭송이라 하기엔 부족한, 아니면 더 보태야 할 말이 있다. 이리미아시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외감은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온다는 호기심 이상이었지만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계속된 비참과 불행을 ‘그’가 끝내줄 것이라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막연한 기대만큼 불안 또한 고조된다. 작가가 우울한 기운을 계속 그려내기에 읽는 입장에서 ‘그’는 사기꾼이거나 악마가 아닐까 우려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왜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아무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었다. 술집 주인의 말대로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도착해 몇 년 동안 계속되어온 비참과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었다. 음습한 정적과 아침에 그가 들었던 괴상한 종소리, 그로 하여금 황망히 침대에서 일어나 땀을 흘리며 창밖을 무력하게 바라보도록 만든 그 죽음의 종소리 또한 사라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그러했듯 마을은 집단농장을 이루고 살아왔지만 집단농장은 실패했다. 폐허가 된 마을의 신산한 정경과 절망적이고 비참함으로 가득찬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보인다. 어쩌면 ‘그’가 구원자로서 여겨지지 않는 이유가 이 무력하고 영혼없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그를 칭송하는 무력과 불안이 짙게 배인 마을 사람들의 언어이기에 ‘그’에 대한 신뢰에 대해 의아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집단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사고하고 행동한다. 곳곳에서 묘사되는 거미줄처럼 무력감과 불안은 그들을 묶어 놓는 듯이 보인다. 천사를 만나고픈 의지를 보인 소녀 에슈티케의 결말이 자살에 가 있는 것만 봐도 마을 사람들에게 도사린 기대감과 희망은 스산하다. 이런 스산함은 술집에 모여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욱 발산된다. 한없이 절망적인 배경에서의 군무는 마을 사람들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보이게 한다. 색조가 빠진 광기의 느낌이랄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을 땐 바람빠진 개업식 풍선인형의 흩날림이 연상되어서였을지도. 박자를 맞추지 않는 춤사위에 공허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한히,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이란.

  기다림과 무력감을 반복·교차시키던 소설은 2부에서 전환된다. 전환을 이끌어낸 것은 그, 이리미아시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하고 이용할 줄 아는 탁월한 연설가였다. 사람들은 무력감에 더해 소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도 휩싸여 있었으니 이리미아시의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에 안착한다. 그가 제시하는 마을의 비전, 변화에 감화된 사람들이 죽도록 일한 품삯을 내놓으며 새롭게 일구어낼 마을을 품어본다. 이리미아시가 꿈꾸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꿈을.


한참 뒤에 이리미아시가 말했다. “좀 전에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천국? 지옥? 피안?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홀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명확히 제시되는 두 개의 기록에 의해 이야기는 새로운 인상을 남긴다. 이 두 개의 묵시록에 의해 이 소설이 가지는 의미와 이 소설의 묘미가 강하게 각인된다. 기록은 어김없이 증언과 감시의 역할을 한다. 이리미아시의 기록은 감시와 억압의 기록이다. 스스로 마술적 글쓰기라 일컫는 마을 의사의 기록은 어떤가. 무엇 하나 놓치는 것 없는 세세한 의사의 기록은 그의 표현대로 ‘마술적’이어서 하나의 소설을 이룬다. 확실히 이 기록에 마음 뺏긴 나는 진실을 영영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트럭을 타고서 도달한 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피안인지를. 이리미아시의 힘차고 열정적인 연설에 나도 감화되었는지를. 마을 사람들은 구원된 것인가와 같은 질문의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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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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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기록하는 또다른 언어


가족어 사전, 나탈리아 긴츠부르그, 2016-04-15.


  많은 작품을 썼지만 국내 번역본은 이 책만 있는 이탈리아 소설가 나탈리아 긴츠부르그는 파시즘 시대를 살아가는 이탈리아 유대인 가족의 이야기를,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썼다. 이 이야기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이 그대로 등장함에도 소설‘로 분류되어 있다. 작가 자신이 ’소설‘이라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굳이 작가가 ’소설이오' 외치는 이유가 무얼까 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알았다. 처음엔 그저 가족의 실명을 써가며 내밀한 그들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대한 부담인가 생각했는데 이런 단순하고 일차원적 생각을 하는 것이 나탈리아와 나의 차이였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제법 낯익은 이름들이라 잘 알지도 못하는 가족들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그러하기에 이들 가족이 문밖을 나서면 맞닥뜨리는, 문 안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이탈리아의 상황이 비켜가기를 바라게 되는지도 모른다. 독재자 무솔리니가 권력을 잡고 흔들던 파시즘과 인종차별의 시대. 이탈리아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잊을 수 없는 시기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사의 순간순간을 드러내는 증언이기도 하다.

  지식인으로 또한 독재에 맞선 반파시스트 운동을 한 나탈리아이기에 그들 가족들의 독재에 맞선 활약상이나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어떤 담론들이 경건하게 펼쳐지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 시기의 지식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하게 내비칠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소설은 나탈리아 가족들의 유난스런 성격과 가족간의 대화에 집중한다.


우리 형제는 5남매다. 우리는 각기 다른 도시에 살고 있으며 어떤 형제는 외국에 산다. 만났을 때도 서로에게 무관심하고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우리들끼리는 단 한마디면 족하다. 단 한마디, 한 문장, 우리의 어린 시절에 수도 없이 듣고 반복했던 그 오래된 말 한마디면 우리들의 옛날 관계를 단숨에 되찾는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된다. ‘우린 베르가모에 소풍 온 게 아니오’라든지 ‘황화수소산 냄새는 어떤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는 떼려야 땔 수도 없게 이런 문장, 이런 말과 연결되어 있다. 이런 문장들은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존재하게 될 우리 가족 간의 연대감의 토대를 이루면서, 우리 중 누군가가 “친애하는 리프만 씨”라고 말하게 될 때, 그리고 곧 “그 이야기 좀 집어치워! 도대체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군!”이라고 말하는 성급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리의 귀에 다시 울리게 될 때, 지구상의 이곳저곳에서 이런 말들이 다시 창조되고 살아날 것이다.


  생물학 교수인 아버지 주세페 레비는 고집불통에다가 막말도 서슴지 않는데 반해 어머니 리디아는 쾌활한 낙천가로 수다스럽고 집안일보다 다른 일들을 하기를 더 좋아한다. 오빠 셋과 언니 한명을 가진 막내 나탈리아가 ‘보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강하고 사사건건 주세페 레비와 대립한다. 문 밖에는 이탈리아 파시즘이 문 안에는 주세페의 파시즘이 성행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어쩌면 주세페의 아이들은 일찌감치 파시즘에 대항하는 법을 체현하여 반파시스트 운동에 적극적이고 필요성을 절감했으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이 개성강한 가족은 유대계이며 억압과 차별을 겪었으리라는 점이 주요했을 것이다. 주세페 자신도 몇 번이나 수감되었고 그런 만큼 자녀들의 반파시스트 운동에 대해 자랑스러워한다. 또한 가족들이 관계하는 이들 대부분이 각자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반파시스트 운동가였다. 그런 이들만을 만났다기보다 그저 이웃으로 친구로 같이 하던 사람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탈리아의 독재정치에 반대하게 되었을 뿐이다.


전쟁이 모든 사람의 삶을 즉각 뒤엎고 변화시키리라 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은 자기 집에서 항상 해오던 일을 계속해나가면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살았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결국엔 위험을 그럭저럭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며 혼란스러운 상태는 벌어지지 않을 테고 집도 파괴되지 않고 탈출이나 고문 같은 것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도처에서 폭탄과 지뢰가 터지고 집이 무너지고 폐허 더미와 군인과 피난민들이 길을 뒤덮었다. 이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할 수 있는 사람,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베개 밑으로 머리를 밀어넣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탈리아에서 전쟁은 그렇게 벌어졌다.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 하루하루가 어떤 형태였는지를 생각하지 못할 때가 있다. 전쟁에도 사람의 일상은 지속된다는 것을 잊게 된다. 거대한 사건에 영향을 받으며 세세한 하루의 삶들이 이어져간다는 것을 잊게 된다. 나탈리아 가족들의 말, 그들만이 통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는 이 소설을 써내려갔지만 다른 어떤 가족인들 달랐을까. 등장인물마다의 성격과 직업이 다를지언정 가족마다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가 가족문화가 있다.

  제삿날 각기 다른 곳에 사는 고모들이 모여 상차림을 두고 말들이 오갔다. 음식의 종류, 상차림 시간과 방법 등등. 그때에 고모들의 기준은, 문화는 어디였었나. 어린 시절 그네들 모두가 함께 해온 부모의 차림 예법이건만 시간이 흘러 ‘다른 가족의 문화’라고 말하는 그 지긋지긋한 수다에서 난 또다시 짜증과 함께 서글픔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가족들만의 가족어로 가족 연대감과 시대의 이야기를 전했던 이 책이 생각났다. 가끔은 나도 작가처럼 가족문화에 우리들만의 충만함에 싸일 때도 있지만 때론 지긋지긋하고 연민의 감정이 느껴질 때가 있다. 열렬히 환영하고 싶지 않은 유대감, 이해하고 싶지 않은 감정에 벗어나고프기도 한 가족의 무게, 가족어 가족문화. 

  나탈리아가 자신의 가족들은 서로간 무신경하지만 단한마디만 족하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가족 역시도 그럴 것이다. 연이은 일들로 가족, 친척들을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 이리도 닮았나 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머리를 내젓게 되는 어떤 것들이 있다. 가족문화는 어떤 경우엔 더욱 공고히 되기도 하고 사회에 맞부딪치며 수정되고 변화되기도 한다. 한사회도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그리고 크고 거대한 사건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그 사건들에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개인의, 가족의 역사는 그들의 언어와 역사로 기록되어 세상의 이야기와 맞물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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