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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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 꾸는 꿈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2018-05-09.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후터키”와는 달리 최근 몇 주 가을 같은 날씨에 침전하고 있다. 태풍이 오기 전부터 새벽이면 비가 내렸고 여전히 비를 내릴 거라는 듯 검은 구름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는 하늘을 보면 여름이란 계절이 맞나 싶다. 종소리 대신  사이렌 소리만이 들려와 불안감을 극대화한다. 현실은 여전히 많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지만 때로는 먹구름 가득한 소설 분위기가 현실보다 더 흥미롭다.

  소설은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흩날리는 낙엽과 무너진 공산주의 이미지가 얹어지며 무겁고 쌀쌀하게 가라앉은 느낌의 1980년대 헝가리를 배경으로 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마을 주민들은 ‘그’를 한없이 기다린다. 죽은 사람으로 알려진 그의 귀환 소문에 사람들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안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존재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과연 그는 불행을 안고 오는 사탄일까, 불행을 떨궈낼 존재일까.

  ‘그’, 이리미아시를 슈미트는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 성을 지을 수도 있는 위대한 마법사’라 칭하지만 ‘그’에 대해선 마냥 칭송이라 하기엔 부족한, 아니면 더 보태야 할 말이 있다. 이리미아시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외감은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온다는 호기심 이상이었지만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계속된 비참과 불행을 ‘그’가 끝내줄 것이라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막연한 기대만큼 불안 또한 고조된다. 작가가 우울한 기운을 계속 그려내기에 읽는 입장에서 ‘그’는 사기꾼이거나 악마가 아닐까 우려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왜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아무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었다. 술집 주인의 말대로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도착해 몇 년 동안 계속되어온 비참과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었다. 음습한 정적과 아침에 그가 들었던 괴상한 종소리, 그로 하여금 황망히 침대에서 일어나 땀을 흘리며 창밖을 무력하게 바라보도록 만든 그 죽음의 종소리 또한 사라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그러했듯 마을은 집단농장을 이루고 살아왔지만 집단농장은 실패했다. 폐허가 된 마을의 신산한 정경과 절망적이고 비참함으로 가득찬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보인다. 어쩌면 ‘그’가 구원자로서 여겨지지 않는 이유가 이 무력하고 영혼없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그를 칭송하는 무력과 불안이 짙게 배인 마을 사람들의 언어이기에 ‘그’에 대한 신뢰에 대해 의아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집단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사고하고 행동한다. 곳곳에서 묘사되는 거미줄처럼 무력감과 불안은 그들을 묶어 놓는 듯이 보인다. 천사를 만나고픈 의지를 보인 소녀 에슈티케의 결말이 자살에 가 있는 것만 봐도 마을 사람들에게 도사린 기대감과 희망은 스산하다. 이런 스산함은 술집에 모여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욱 발산된다. 한없이 절망적인 배경에서의 군무는 마을 사람들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보이게 한다. 색조가 빠진 광기의 느낌이랄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을 땐 바람빠진 개업식 풍선인형의 흩날림이 연상되어서였을지도. 박자를 맞추지 않는 춤사위에 공허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한히,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이란.

  기다림과 무력감을 반복·교차시키던 소설은 2부에서 전환된다. 전환을 이끌어낸 것은 그, 이리미아시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하고 이용할 줄 아는 탁월한 연설가였다. 사람들은 무력감에 더해 소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도 휩싸여 있었으니 이리미아시의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에 안착한다. 그가 제시하는 마을의 비전, 변화에 감화된 사람들이 죽도록 일한 품삯을 내놓으며 새롭게 일구어낼 마을을 품어본다. 이리미아시가 꿈꾸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꿈을.


한참 뒤에 이리미아시가 말했다. “좀 전에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천국? 지옥? 피안?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홀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명확히 제시되는 두 개의 기록에 의해 이야기는 새로운 인상을 남긴다. 이 두 개의 묵시록에 의해 이 소설이 가지는 의미와 이 소설의 묘미가 강하게 각인된다. 기록은 어김없이 증언과 감시의 역할을 한다. 이리미아시의 기록은 감시와 억압의 기록이다. 스스로 마술적 글쓰기라 일컫는 마을 의사의 기록은 어떤가. 무엇 하나 놓치는 것 없는 세세한 의사의 기록은 그의 표현대로 ‘마술적’이어서 하나의 소설을 이룬다. 확실히 이 기록에 마음 뺏긴 나는 진실을 영영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트럭을 타고서 도달한 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피안인지를. 이리미아시의 힘차고 열정적인 연설에 나도 감화되었는지를. 마을 사람들은 구원된 것인가와 같은 질문의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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