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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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멧돼지의 ‘운 또는 불운’

네메시스, 필립 로스,2015.5.29


  동굴에 갇혀 있던 태국 소년들 전원 구조 과정을 보면서 어떤 기억 속에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 과정이 너무나 비교될 수밖에 없어 기쁨 중에도 아픔이 꽉 차올랐다. 실종된 아이들이 발견된지 일주일이 지났음을 확인하고서야 아이들이 생각보다 오래 그곳에 있었구나 싶었다.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안고서 버티는 그 시간 동안이 아이들에겐 어떤 시간이었지 짐작도 어렵지만 동굴 속 유소년 축구팀 소년들과 코치의 모습은 담담해보였다. 언론에 소개된 과정을 보면서 떠오른 기억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자꾸 생각나는 이미지, 익숙한 느낌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내 알았을 때의 희열, 그것은 필립 로스의 소설 『네메시스』주인공 버키 캔터였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필립 로스는 결국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올해 세상을 떠났다. 2012년, 소설 절필 선언에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 된 『네메시스』. 신화 속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어떤 복수에 관한 서사를 이야기할 것인가 했던 이 소설은 막장드라마라 불리는 드라마에서 사용되는 복수와는 전혀 달랐다. 


그의 자신 있고 단호한 태도, 역도선수다운 힘, 매일 열성적으로 우리와 함께 시합을 하는 것-이 모든 것 때문에 그는 감독으로 처음 온 날부터 놀이터 붙박이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이탈리아인 사건 뒤로는 완전히 영웅이 되었다. 특히 친형이 전쟁에 나가고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해주는 우상화된 영웅적인 형이 되었다.


  스물다섯의 유소년 축구팀 태국 코치 또한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았지만 아이들을 위험에 이르게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구조대원 한명이 사망했다. 승려였지만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축구팀 코치로 일하고 있다는 그가 자필로 전한 사과의 메시지와 함께 동굴 속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보살피는지 알려진 지금에는 그는 영웅으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신이 보내준 선물로 칭해지고 있다. 

  버키는 스물세 살의 ‘놀이터 감독’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 가고 싶었지만 시력 때문에 탈락해 좌절감과 죄책감을 느끼지만 제 또래들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열성적으로 돌보고 있다. 하지만 폴리오 유행병이 휩쓸면서 사망하는 아이들이 발생한다. 버키 역시 “그가 스물세 살의 놀이터 감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강한 어떤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애원하고 있는 눈”을 보며 강인함, 결단력,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가르쳤지만 확산되는 전염병과 아이들의 사망에 또다시 좌절과 분노, 죄책감과 슬픔에 싸인다.


   “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덮치는 거요?˝


  글쎄. 그것을 안다면! 설명되지 않는 무엇,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명확히 주어지는 답은 없다. 그렇기에 버키는 그 모든 것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을 심판한다. 단지 비극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운이 누군가에게는 불운이 따르는 우연과 하느님을 비난하며 그는 1944년 뉴어크를 휩쓸던 전염병의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살아온 버키의 인생이 평온했을 리 없으니 그때의 일을 극복하고 평생의 개인적인 비극으로 만들지 않은 ‘내’ 모습과 완벽히 비교되었다.

  제 생을 망칠 정도의 죄책감,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까지 생각하는 버키의 나약함과 의무감은 강도는 낮을 지라도 많은 이들이 경험한 감정이다. 특히,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라면 더욱 강하게 가질 죄책감일 것이다. 동굴에 갇힌 소년들이 전원 무사히 구조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부모들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어쩌면 더 큰 비난을 코치에게로 쏟았을 것이다. 버키는 강한 체력을 가지고 아이들을 성심성의껏 돌보았지만 맞닥뜨린 불운에, 비극에 대항할 정신적인 힘을 타고나지 못하였기에 그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며, 그의 삶은 몰락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죽음을 단지 비극으로 돌리기엔 힘들었던 버키는 생의 많은 일들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이 ‘병적인’ 죄책감, 이 극단적인 생각고 행동을 통해서 비극을 맞닥뜨린 자의 행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가 그의 삶을 시들게 해버린 고통들을 쌓아가는 것에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오만, 의지나 욕망의 오만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유치하고 종교적인 해석의 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 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구인 남편을 얻는 것을 막는 데서 가장 큰 승리감을 맛보며,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부인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된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비극은 항상 고통을 준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당연 ‘정의로운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기도 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울분이 차오르기도 한다. 그럼 감정들을 떨쳐내는 것이 분명 쉽지 않다. 버키를 통해 극한의 생각에 맞닥뜨리며 오히려 비극에, 불운을 맞닥뜨려 가져야 할 생각의 방향이 미로가, 도돌이표가 아니라 길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긴 시간 어둡고 깜깜한 동굴 속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스물 다섯 코치가 선택한, 생각한 길은 끝없는 불운과 죄책감이 아니라 이겨낼 수 있는, 책임질 수 있는 책임감과 죄책감이었다. 상황에 대한 ‘해석’.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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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필 선언했을 때, 이미 노벨문학상에 대한
기대는 내려 놓은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
이 들었습니다.

모시빛 2018-07-12 08:20   좋아요 0 | URL
왜 굳이 절필선언을? 그냥 자연스럽게 안쓰면...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레삭매냐님 글을 보니 기대와 부담, 그런 것에서 해방되려는 선언이구나 싶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