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빌라는 죽고 싶다고 했다


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2018.


   이야기의 구성 때문에 타임슬립처럼 느껴지는 소설이다. 동화로 유명한 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이 동화느낌도 나게 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가 소위 ‘먹히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임슬립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는 것만 봐도. 이 소설은 시간여행자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저, 너무 오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너무 오래, 한 천년 정도? 그런 이가 절대 해서는 안되는 한가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란 규칙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절대 해서는 안된다라고 할 때 목적어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는지 그것은 ‘너무 오래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먹고 자고 사랑하고 그런 일들일텐데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삶이란 일상의 삶을 살지 말라는 말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삶처럼 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왜 그토록 오래 살아가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보통 사람보다 15배 느린 성장속도를 가진 1581년생 톰 해저드는 다른 이들에게 40대로 보인다. 톰 해저드가 전하는 이력서를 검토해보자. 과연 무슨 일들을 했는지. 21세기 현재 그는 런던의 중고등학교 역사 선생이다. 오래 살아온 그의 이력을 볼 때 직접 경험한 역사를 전할 수 있으니 탁월한 직업선택이 아닐까 한다. 역사에는 전쟁이 있고 중세의 마녀사냥이 있다. 마녀사냥이라는 큰 타이틀로 묶일 이야기 속에 톰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보다 늙어 보이는 엄마는 당연하지만 그 아들과 나이차가 너무 나 보인다면 아들이 늙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엄마는 마녀다. 늙지 않은 아들이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마녀가 된다. 엄마가 아들을 늙지 않게 마법을 걸었으니까. 왜? 엄마는 마녀니까.

  “살아남으라.” 물속에 던져진 엄마의 유언이었다. 살아남은 톰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여지없이 늙지 않는 남편이 된 톰은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딸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톰의 딸을 찾기 위한 여정에는 다양한 시대와 나라를 오가는 톰의 삶이 이어진다. 딸과 자신처럼 늙지 않는 병을 가진 사람들, ‘소사이어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8년마다 완전히 정체를 바꾸며 사는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 딸을 찾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함께 하는 톰. 소사이어티의 두려움은 과거의 마녀사냥처럼 현대에서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지배하는 엄청난 무언가의 존재를 믿게 돼. 우리 마음속에 갇혀 사는 무언가를. 그건 우리를 도울 수도 있고, 망쳐 놓을 수도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조차 수수께끼로 남아 있잖아. 과학조차도 그걸 인정하고.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우린 아직도 모르고 있어.


  소사이어티가 금지하는 규칙. 사랑에 빠지지 말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생각,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삶, 시간이란 무엇인지 산다는 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고뇌를 거듭함에도 톰은 다시 사랑에 빠지려 하고 있다.


나처럼 오래 살다 보면 세상에 변치 않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래 살면 모두가 난민이 되어 버린다. 국적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오랫동안 고수해 온 자신의 세계관이 틀렸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을 정의하는 건 오로지 인간으로 사는 것뿐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시간을 오래 살아가는 톰의 고뇌는 사람들이 살면서 행하는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그 생각이 15배쯤 더 길고 오래 한다고 봐야할까. 결국 시간이란 굴레에서 인간의 해답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현재는 매 순간 속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현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면 비로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나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거고.


  영화는 어떻게 표현될지 모르겠지만 소설속 고뇌는 익숙하고 결말은 식상하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기엔 ‘현재’를 소중히 하라는 말 외엔 없는 모양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시빌라는 아폴론이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손으로 모래한줌 움켜쥐고 그만큼 살게 해달라고 했다. 젊게 해달라는 것을 잊었기에 늙고 쪼그라들며 천년을 살아간 시빌라에게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냐 물었다. 지칠대로 지친 시빌라는 “죽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톰이 시빌라에게 자신의 고뇌를 전해주었다면 시빌라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톰은 늙지 않고 웬만한 병은 걸리지 않는 신체를 지녔으니 시간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시빌라에 비해 여유롭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걸까.


시간이란 그런 거야. 늘 한결같지 않지. 살다 보면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잖아. 그게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때도 있고. 괴어 있는 물처럼 무의미한 시간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해를 맞게 되지. 그건 딱 하루일 수도 있고, 오후의 짧은 순간일 수도 있어. 모든 게 갖춰진 완벽한 시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당신은 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2018.


  아랍의 카프카로 불리는 작가의 이 소설은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비교되는데 등장하는 괴물 역시도 무명이다. 무명씨의 활약을 보는 것만큼이나 탄생이 흥미롭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판타지 분위기는 이라크, 바그다드라는 도시와 연결되며 현실처럼 여겨진다.

  폭발이 끊이지 않는 미군 점령하의 바그다드에는 파편이, 시체가 넘쳐난다. 때로는 팔 하나, 다리 하나, 몸통이 하늘로 솟구쳤다 모일 곳을 찾지 못하고 흩어진다. 죽은 영혼은 흩어진 제 몸을 찾아 떠돈다. 그곳으로 사람들은 걸어 다니고, 밥을 먹고, 이라크와 이란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기다리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등쳐먹으려 안달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동네 깡패같기도 한 폐품업자 하디가 폭발로 흩어진 시체의 부위를 하나씩 주워 모으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렇게 모아진 시신의 형태를 꿰매는 건 그렇게 해두면 누군가가 장례를 치러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난폭하고 도둑놈 심보를 보이는 하디를 사람들은 한때, 누구도 상대하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 나헴의 죽음 이후로 성격이 변했다고 했으니 하디의 심성은 처음부터 공격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폭발이 일상화된 곳에서 살지만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함께 하던 동료 나헴의 죽음에서, 어느 살점인지 분간할 수 없게 폭발해 버린 나헴이 죽던 그날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하디의 마음이 무명씨를 낳았다.

  세상에 온갖 죽음의 현장이 된 곳엔 갖가지 유령들의 소문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바그다드의 골목골목엔 폭발로 죽을 때 온전한 제 시신에 안착하지 못한 영혼들이 떠다닌다. 호텔 경비원 자파르도 자살폭탄 테러로 죽어 제 몸을 잃은 영혼이다. 그런 자파르의 영혼이 꿰맨 시신으로 쏘옥 빨려 들어가 자리잡을 때, 이 시신은 자파르일까. 각 부위의 주인일까, 새로운 인물일까. 무명씨, 그렇게 지칭된 이 시신이 살아 움직이면서 바그다드에는 폭탄 발생 빈도만큼이나 기이한 죽음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생애를 바탕으로 한 산 사람들의 평가. 


죽음은 죽은 자에게 존엄의 아우라를 선물한다. 산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미안한 마음에 죽은 자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 사람만은 절대 아부 자이둔을 용서하지 않았다. 유보된 정의된 개소리에 불과하다. 정의는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나중에는 오로지 복수의 시간뿐이다. 정의로운 신이 행하는 고문, 영원의 고문이 있을 뿐이다. 복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반면에 정의는 이곳 지상에서, 그것도 증인 앞에서 이루어질 때만이 의미가 있다.


  분명 죽음은, 더구나 전쟁에서 폭탄이 난무하는 나라에서의 죽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 의한 죽음이라면 죽은 것이 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로 미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정의일까. 괴물은 정의의 다른 이름이 되는 건가.

  분명 무명씨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살해용의자가 아니라 ‘정의’라고. 이 땅은 이미 탐욕, 야망, 과대망상, 무참한 폭력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대신한 복수, 그를 통해 정의를 이루려 한다고. 아부 자이둔에 의해 억울하게 전쟁터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을지 모르는 아들을 수십년 동안 기다리는, 아부 자이둔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엘시바에게는 이 괴물의 정의가 닿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무명씨에게 조각난 시신의 살점을 계속 가져다주는 추종자들에게도.

  법의 판결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다. 턱없이 낮은 형량, 온갖 이유로 감형되거나 가석방되는 일 등은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 차라리 분노만큼이나 자력구제하고파 지는 일이 너무 많은데 무명씨는 그런 분노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존재다.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기워진 신체의 주인들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살인하는 무명씨에 의해 자살테러범이 죽고, 모집책이 죽고, 트럭 폭탄의 알카에다 지도자 등이 죽어 나가니 어쩌면 그래도 정의가 흐른다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명씨가 행하는 일들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무명씨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신체부위에 해당하는 사람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부위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수를 완수한다 해도 피해자의 부위는 어쨌거나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무명씨가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온전한 시신의 모습을 하기 위해선 결국 복수와 정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죽지 않을 사람은 없다. 테러가 진행되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복수할 대상이 멈춰질 수 있단 말인가. 개개인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사사로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과연 있는가. 무명씨의 살인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묻게 된다. 그런데 무명씨는 왜 온전한 시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거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괴물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러니만큼 괴물 이야기를 쫒는 기자의 등장이 현실성을 부여잡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당국이 등장하고 점성술사가 등장하고 온갖 미신들이 난무하며 거짓말쟁이가 목격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하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도 모른 채 이라크에서라면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게 된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살점을 받아 생을 이어가는 무명씨. 각기 다른 이들의 신체부위로 형성되는 무명씨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나. 매일 바뀌는 얼굴이 무명씨일까. 신체 부위가 무명씨일까. 결국 무명씨는 모든 죄를 진 자의 얼굴을 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범죄자가 행하는 복수는 과연 정의인가.

  이 책은 2018년 한강 작가가 수상한 맨부터 인터내셔널상 최종후보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영국 영화사에서 영화화된다고 하니 시각적으로 표현된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야의 주장


베어타운, 프레드릭 배크만, 2018.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베어타운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베어타운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사건도 마을도 모두 베어타운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아이스하키의 명성만이 존재하는 소도시, 베어타운은 그저 세상을 조금 축소해 놓았을 뿐이다.


모두들 문화를 운운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조직이 다들 자기들은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승리하는 문화뿐이다. 수네도 알다시피 모든 세상이 마찬가지지만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이 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들은 좋아한다.


  작은 마을일수록 공동체가 강하다고 하지만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결속의 양과 질이 차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이 곧 공동체와 동일시될 때 구성원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를 고수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한 마을을 옮겨다 놓은 만큼 베어타운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생생한 캐릭터의 향연이 맛깔스럽게 펼쳐지며 마을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한다. 베어타운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니 각종 사회문제들이 산재하고 사람들 사이 우정과 사랑,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성폭력도.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니 부모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이라고 하고, 그는 열일곱 살이지만 다들 ‘어린애’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젊은 아가씨’다.


  가해자와 피해자인 청소년들을 대신해 부모와 마을 어른들의 대리전으로 이루어진 싸움은 ‘어른’의 정의와 상식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왜 공동체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지, 정의와 윤리와 상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권력과 이익의 관점으로 보는지. 가해자가 공동체의 지지에 힘입어 어떻게 당당하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아니 아예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지의 반대편에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절대적인 악을 본 것처럼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기분 전환용’이라거나 오로지 ‘떡치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학습하게 함으로써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글쎄, 집단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으니 더욱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될까. 그것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사랑이 아니라 증오라고 베어타운은 보여준다. 아이스하키의 마을 베어타운은 아이스하키 우승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적이라 간주하고 그에 맞추어 사고한다. 마을의 변화와 성공이 아이스하키 우승이라면 아이스하키를 가장 잘 하는 선수는 마을을 구제할 영웅이므로 영웅은 절대로 가해자여서는 안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걸로 간주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수많은 호의가 의리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


  베어타운이 아니더라도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진 성폭행이 얼마나 많았는가는, 그것을 어떻게 은폐하는가는, 한국에서 일어난 실제사건들이 보여주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그 결과들을 가늠케 한다. 그렇다면 베어타운은, 베어타운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상마을 베어타운처럼 결과 또한 가상 아니 환상이 아닐까.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서 시작한, 베어타운의 이야기….


나중에 검은 재킷의 사나이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왜 그는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이 케빈인지 아니면 아맛인지 고민했을까. 왜 마야의 주장으로는 부족했을까.


  베어타운을 통틀어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베어타운이 아무리 마을 전체의 사람들 한명 한명에 서사를 부여하며 길게 이야기를 이어간대도 정체모를 검은 재킷의 사나이의 말이 의미하는 것만큼의 명료함이 또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년의 자화상

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2018.


  스웨덴의 한 섬에서 살고 있는 일흔살 프레드리크 벨린의 집은 어느 가을 밤 불타버린다. 이웃 섬과 본토에서 한밤중에 불을 끄러 왔지만 제대로 된 고무장화 하나 건지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불타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외과의사로 의료사고를 낸 후 오랜 시간 홀로 살고 있던 그는 자신의 집 방화범으로까지 의심받는 신세가 된다. 의사이던 시절에도 인생의 무상함과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벨린에게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은 상실감과 인생의 회한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의 삶은 환자의 엉뚱한 팔을 자르고 난 후 도망치듯 섬으로 들어와 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래도록 교류한 섬사람들은 특별히 그와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벨린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큼의 성향도 아니었다. 하지만 화재와 함께 찾아온 딸 루이제와 취재차 온 어린 여기자 리사 모딘은 그의 삶을 결코 평온케 만들지 않는다.

  그는 리사 모딘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며 사랑을 꿈꾸고 존재조차 몰랐던 딸의 황당한 행동에 힘겨워하면서도 딸 루이제를 챙기고 보살피려 애쓰며 섬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재의 용의자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이렇게 화재 후 살아나던 상실감과 인생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감정 위에 애정과 분노, 희망 등을 섞으며 섬에서만 살던 삶의 패턴을 바꾸기도 하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노년이란 생물학적 나이는 그를 욕망에 충실하게끔 놔두지 않는다. 노년이란 죽음에 관한 빈도와 깊이를 더하게끔 하니까.


그렇게 곧 죽게 될, 그리고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고 싶은 소망을 가진 중환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죠. … 그 사람들 대부분이 꼭 보고 싶어 하는 게 렘브란트의 자화상이에요, 그중에서도 특히 늙었을 때의 자화상. 눈과 눈이 마주하는 그 만남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을 좀 덜 고통스럽게 만들어주죠.


  마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감정들 또한 쌓아간다. 외딴 폐가에서 수집벽을 갖고 살거나,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거나, 그들 또한 섬에 찾아든 자신처럼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해 간다. 벨린에게는 마을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보고싶은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같았다. 


그 사람들에게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내게서 그들 자신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이해 봄과 여름 동안 깨달았다.


어두운 현관복도에 가만히 서 보았다.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에 항상 따라붙는 어떤 떫은 냄새가 분명히 느껴졌다. 불이 나기 전의 내 집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었을까?


  스웨덴 장화는 뭔가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는 줄 알았다. 장화가 스웨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거나 장화의 최대 생산국이 스웨덴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라도. 하지만 스웨덴 장화에 대한 주목할 만한 특징을 찾지 못했고 작가와 소설 배경이 스웨덴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화. 노년이란 그냥 장화같은 것 아닐까.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가지고 있을 장화처럼 곁에 있는 것. 그런 장화지만 화재가 난 이후로 제대로 장화를 구할 수 없었던 벨린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항상 그것을 맞을 준비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때로는 거부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몰랐던 마을 사람들처럼 오랜 인생을 살아본 뒤에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제때 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 역시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o)

마카로니 프로젝트, 김솔, 문학동네, 2018.


  이탈리아 피렌체, 그곳에서 생활하지 않는 나에게 그 도시는 낭만적 공간이다. 관광객의 눈으로 바라보며 실생활을 잊는다. 100년 전통의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 문화 또한 환상과 낭만의 분위기를 주는 요인이 된다. 주문해놓고 마시지 않은 커피, 맡겨둔 커피. 이 문화가 경제위기를 타고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커피를 마신 손님이 여분의 커피값을 미리 지불해놓으면 카페의 주인은 입구에 그 숫자를 표시해둔다. 그러면 누구라도 주인에게 무료 커피를 요구할 수 있는데 보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커피 없이는 하루를 시작하거나 끝낼 수 없는 나폴리에서 시작된 전통이다.


  이 카페 소스페스 문화를 전세계적으로 확산시킨 이탈리아 피렌체에 미국 본사를 둔 다국적 무기회사의 공장이 있다. 이 무기회사는 이탈리아에 어떤 문화를 심겨놓을까. 카페 소스페소는 여전히, 진행될까.

  본사는 피렌체 공장 폐쇄를 결정한다. 영업 실적이 부진하니까 더 돌아볼 필요 없는 결정이다. 진행해야 한다. 모든 직원을 해고해야 하니 저항하지 않게 잘해야 한다. 본사가 생각하는 ‘저항하지 않게’는 해고될 수밖에 없는 모든 직원들을 위한 최대한의 보상과 안정 협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본부장, 공장장, 부서 팀장들을 중심으로 한 ‘마카로니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들과 생존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인 일반 직원들의 갈등 속에 본사는 관망하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 팀장들은 함께 일한 동료에 대한 안쓰러움과 배신한다는 죄책감 사이에서 힘겨워하고 직원들은 저항, 시위, 호소, 약탈 등등을 벌이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이뤄진다. 이 소설은 공장폐쇄 과정에서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들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연대도 부르짖지만 미묘하게 파고드는 이간질에 넘어가며 나와 내 가족의 불안한 미래로 인해 당장의 이익을 더 생각하게 되고, 동료는 타인이 되어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마음들이 ‘이기심, 본성’이라는 이름으로 집결된다. 진창에 빠진 인간이 해야 할 생각과 행동, 마냥 선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할까.

  

인간에 대한 깊은 절망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어떤 절망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고한 논거가 될 수 있었다. 특히 누군가의 시체를 뜯어먹으면서도 여전히 불평하고 있는 자들의 이기심은 니코에게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들을 극명하게 주입해주었다. 돼지우리의 진창 속에 하루종일 코를 박고 살면서 정신적 순결과 우주적 이상을 갈망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우리 밖으로 나오려면 돼지의 삶과 돼지라는 인식에서부터 해방되는 게 급선무였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공개되는 정부의 비밀문건에 비장하기도 또한 우습기도 한 작전명이 여럿 있었다. 한국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국민을 위한 중요하고 엄중한 것들도 있었지만 국가권력 유지를 위한 작전들이 수두룩했다. 비둘기를 위한 파티도 있었고 계엄령문건이나 사법부의 재판개입, 댓글공작 등등 이 모든 것들이 엄중한 작전명을 달고 진행되어 왔다. 김솔의 마카로니 프로젝트의 주체는 기업이지만, 뭐 다를 리 있을까. 사람의 삶을 진창으로 몰아넣고 시체를 뜯어먹고 있는 무리들에 맞서야 하는 힘없는 자들의 노력은 늘 연대, 연대, 연대. 쉬이 연대를 무너뜨릴 힘을 가진 무리에게 패배하고 마는 이들이 가져야 할 높은 수준의 합리성과 순수한 선, 이 불합리한 균형. 절대적 선에 이르지 못했기에 절대적 악이 이기는 게임.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나약해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나약해진 인간은 오로지 타인과의 연대를 통해서만 그들을 둘러싼 위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데도, 더 많은 이익과 더 안락한 조건을 편취하려는 욕망에 이성이 마비되어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인간이 늘어가고 있다. 실업과 파산과 가난의 대물림이 이어지는 세태에서 노동은 더 이상 자본가들에게 재갈을 물릴 수 없다. 교육조차도 혁명의 무기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소비가 혁명을 야기한다.


  이 책을 보며 생각했다. 프로젝트는 얼마나 많았을까, 라고. 지금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프레임들도 언론의 논조들도 따지고 보면 마카로니 프로젝트의 진행 아니던가. 목표를 위해 인간들의 연대와 선한 마음 사이를 파고드는 갈등 조장에서 믿을 만한 것이 인간의 양심이라는 것은 모순이다. 결국 이뤄지는 것은 인간의 파멸인데, 단지 문학적으로 이상적인 표현으로서 인간 모두 파멸했다고 말한들 무슨 소용인가. 삶의 명백한 현실에서 패배는 또렷이 나타나는데.


인간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덤덤하게 적어 내려가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오히려 그들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일이 훨씬 어렵다. 왜냐하면 파멸의 과정은 명징하고 짧지만 치유의 그것은 불분명한데다가 너무 길고 더디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쨌든 그 과정은 다를 리 없을 것이다. 무너진 인간이 어떻게 치유되고 회복되어가는가는 중요하다. 그것은 어렵고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공장이 있던 인근 식당이 문을 닫고 지역경제가 영향을 받는 상황이 묘사된다. 실제로 해고노동자들의 연이은 자살 소식은 해고라는 사건이 있은 지 오래 시간이 지난 후에도 들려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가에게 권력가에게 카페 소스페소(caffe sospes) 문화의 순수한 정신을 기대하는 일은 어려운데,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자들에게 절대적 선을 기대하는 일은 당연처럼 되는 것이 씁쓸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