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을 나온 암탉 (양장)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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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삭제된 죽음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선미, 2000-12-20.


  작가가 방송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을 봤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과 영화 모두 세계 여러 나라에도 번역·상영되었다. 해외 번역과 상영의 뒷얘기에서 소설의 결말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진 양 놀랐다.

  이 책 첫 출간이 2000년이니 18년된 작품이다. 청둥오리 수명이 30년이라 하니 어린 초록머리가 중년을 지나고 있을 시기다. 2000년의 아이들에 비해 2010년의 아이들은, 2018년의 아이들이 특별히 동화의 결말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진 않은데, 독일에선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동화의 고전, 인어공주의 결말도 우리는 잘 감당하며 커 왔는데…

  동화로서 이 책은 인어공주가 물거품 된 것만큼의 슬픔을 준다. 단지 결말만이 아니라 읽는 내내 단조의 느낌이다. 자연이란 것이 삶과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정해놓았더라도 수없이 생각하고 겪게 되는 생과 사, 그러니만큼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아이들에게도 일찌감치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약하지 않기도 하다. 동화를 보며 아이들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슬픔이라는 감정,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왜 그랬을까.

  이 책의 부제가 ‘꿈과 자유를 향한 여정'인 줄 몰랐다. 해외 번역본 제목도 이에 맞추었다. 그래서 ’꿈과 자유‘를 주제로 했을 때 그 결말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폐계가 꾸는 꿈, 갇힌 공장식 닭장을 벗어나 마당으로 나가는 것에서 꿈꾸기 시작한 잎싹의 삶에서 죽음이 꿈과 자유를 이루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없건만, 실패라 할 수 없건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마침표 이후 보여주지 않는 익숙한 동화의 결말로 끝맺음하려 했던 것인가 싶어 의아하다. 아니, 그림형제의 나라 아니던가. 각종 설화와 민담을 채록하며 잔혹한 부분을 수정한 그림형제였으니 독일은 그림형제가 되어 결말을 삭제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말이 그렇게 잔혹한 동화로 느껴졌을까.

  작가는 “길들여진 오리는 자기 알을 품지 않는다.”라는 만화에서 본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개인적인 경험을 덧대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잎싹은 길들여진 자가 자기 알을 품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길들여진 자가 품는 꿈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길들여져 있었기에 꿈에 다가가는 여정은 더욱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성취해가는 꿈이 얼마만한 희열을 가져다주는지를, 생을 더 아름답고 가치있게 느끼게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죽음’에 대해 금기를 씌운다.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끔 하지 않은 채 피하고 보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길들여진 생각만을 갖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잎싹의 죽음에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인식할 수 있음에도 삭제된 죽음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길들이는 것 같아서 책의 마지막을 오래도록 다시 읽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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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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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 없는 식탁

네 이웃의 식탁, 구병모, 2018.


  제목을 본 순간부터 ‘네 이웃’의 ‘네’는 자동적으로 인칭대명사로 인지됐다. 소설을 읽으면서 식탁을 둘러싼 네 가족의 이야기임을 알았으니 ‘네 이웃’은 숫자 4의 의미도 있다. 내 이웃이 넷이라는 건 축복일지 악몽일지 모를 일이다. 살아보지 않는다면, 겪어보지 않는다면.

  EBS 한국기행은 한국의 자연환경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다룬다. 이런 이야기에는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로 정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웃과 더불어 함께 행복한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모습을 이상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럴 때면 그 모습에 현혹되어 그 삶속으로 뛰어들고 싶어진다. 그것은 좋은 것 이면에도 그냥 사람으로서의 삶이 있다는 것은 잊어버리고픈 꿈꾸고픈 아름다운 꿈, 삶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의 역할이 있음을 간과한 채로 그저 모든 것이 아름답게 꾸며놓아진 식탁일 거라고 기대하는.

  이 소설을 통해서 그 식탁에 대해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을 더했고 꿈꾸기가 다소 파괴되었다. 그러나 분명 내 가정의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면 지역의 공동체 또한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격하게 깨닫게 된다.


누군가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웬만한 소음은 배경음악으로, 어수선한 광경은 손닿지 않는 액자 속 풍경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꿈미래공동실험주택.” 어딘가에서 이뤄지고 있을 것 같은 이 공동주택은 저출산 국가에서 세 명 출산을 조건으로 입주가 가능한 곳이다. 저출산 사회이기에 TV에서는 연일 다자녀 가족의 삶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 아이 세 명은 굳건한 결심이 있지 않고서야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또한 이 나라는 내 집 하나 마련키 어려운 곳이니, 안정된 주거를 갖춘다면 행복은 덤이 될 것만 같은 내 집 없는 설움과 고통에 놓여 있으니, 어떤 방법이라도 깨끗하게 새로 지은 내 집을 가질 수만 있다면 아이 셋쯤이야, 하며 아직은 교통이며 제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도심에서 벗어난 이 주택에 입주를 꿈꾸는 이들이 있다.

  요진과 은오, 단희와 재강, 효내와 상낙, 교원과 여산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 네 가족이 그랬다. 각각의 생활방식이 다르지만 공동주택에 놓인 커다란 식탁 위에서 그들은 연신 ‘함께’ ‘같이’를 외치며 공동체 생활의 첫 활동과제로 공동 육아를 시행한다. 공동 육아의 현장에서의 역할만큼 각자의 삶을 채워야 하는 이들은 일터로 나간다. 네 가족 중 세 명의 아빠와 한 명의 엄마가 일터를 향하고 식탁엔 세 명의 엄마와 한 명의 아빠가 앉는다. 한 명의 엄마 효내는 어린 아이를 돌보고 며칠을 밤새워 하는 일로 인해 공동육아 시간에 딱 맞게 참석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다. 한 명의 엄마 요진은 멀리 일을 하러 가기 전 공동 육아에서 해야 할 일을 담당하느라 힘들고 지친다. 남편 은오는 집에 있지만, 가사일을 도맡아 하지 않는다. 공동 육아에 찬성한 은오는 그것이 마땅히 해야 할 공동체 생활의 일이고 빠질 수 없노라 얘기하지만 자신의 역할을 찾아서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단희는 은오에게 기대하는 바는 낮고 이해하는 듯 보이지만 효내에게는 못마땅함을 감추지 않는다. 고만고만한 아이들 사이에서 여섯 살 시율이가 동생들을 챙기는 모습은 자연스러운 모습 같기도 하지만 그렇게 길들여진 것일지도, 기대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함께, 같이의 역할에서도 아이를 돌보는 일에는 성역할이 명확히 구분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관절과 같은 것이라 활액이 없이는 삐걱거리며, 그에 따른 통증과 불편을 실제로 느끼고 감당하는 쪽이 으레 따로 있다는 게 단희의 주된 불만이었다. 어디까지나 뭔가 인사를 못 얻어서가 아니라 공동주택에 살면서 그 정도가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라고 단희는 믿었다.


  각자의 가족이 지닌 생활의 무게, 그것이 각자의 문지방을 넘어 식탁으로 오르는 일은 순식간이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고 잘 해나가려 하지만 요진도, 단희도, 효내도, 교원도 타인의 행동이 내 마음과 같지 않을 때,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다. 공동체라는 이름하에 각자가 행해야 하는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는 무엇이고 얼마만큼일까. 각각의 사람을 대하는 스타일과 타인에게 느끼는 친밀감의 속도와 정도가 다를 진대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갈 것인가.


요진이 불편하고 불쾌하면 곧 그것이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요진은 가능한 한 ‘누가 봐도 이상하며 그럴듯하지 않은’ 일에 반응하고 싶었다. 해석의 방식과 범위에 따라 불쾌지수가 널뛰는 일에 낱낱이 발끈함으로써 서로에게 개운치 않은 뒷맛을 초래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피곤한 여자로, 웃자고 하는 말에 죽자고 달려드는 예민한 이웃으로 간주되기 싫었다. 좋은 게 좋은 줄 알며, 사소한 농담에 호응해 주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회인이 되는 게 바람직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이 가족들의 공동체에 대한 열의는 공동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다시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그리고 공동체에서의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에 대한 인식만큼이나 가정에서의 최소한의 상식과 도리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가정은 공동체라는 보이는 식탁을 장식하기 위한 꽃이 아닐진대 보여지는 면에 의식을 두다 보면 정작 잘 가꾸어야 하는 가정은 조용히 이지러지게 된다. 내 가정의 안락한 삶을 무시한 채 타인의 가족과 어우러진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내 가족에게 배려가 부족한데 타인에 대한 무한 배려와 이해가 가능할 수 있을까.


기중기를 동원하지 않고는 어려워 보였을 뿐더러 왠지는 몰라도 이 공간은 이렇게 활용해야 마땅한 곳 같았다. 어떤 효용이나 합리보다는 철저한 당위가 지배하는 장소.


  우리는 공동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실천에 대한 의지없이 ‘공동체’라는 단어 자체에 함몰되어 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저 그것 자체로서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이루어가는 각각의 주체들을 배제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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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스피드
김봉곤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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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픽션을 읽을 때의 곤란함

여름, 스피드, 김봉곤, 2018.


  여섯 편의 중단편은 전체적인 틀에서 연결되게 느껴졌다. 소설에서 반복되는 단어는 사랑과 글쓰기였는데 사랑을 해서 글쓰기가 된 것인지 글쓰기를 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인지 애매할 정도로 둘은 분리되기 어려웠다. 누구나 사랑을 하면 시인이 되고 작가가 된다고 했다. 사랑을 하면 세세한 것 하나라도 기억되고, 잊히지 않고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모든 사랑하는 자의 심리가 아닐까. 또한, 사랑하다 헤어진 이들의 마음도. 사랑과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글쓰기, ‘글을 쓰고 그를 쓰는’ 이야기라서 독립적인 서사가 애매한 모든 ‘그와 나’에 관한 이야기는 '나'를 제외한 등장인물 모두에게 몰개성이 느껴지게 했다. 

  또 이런 말들이 있다. 모든 사랑하는 연인들은 진지하고 심각하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유치하고 그저 그런 연애사라고. 그래서 여기, 소설속 사랑이야기가 그저 그런 연애사로 보인다. 그 연애사를 절절하게 묘사하지 않기에 작가의 심리에 다가가지 못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작가의 의도라고 봐야하는 걸까.

  이 소설은 제목만큼이나 스피드하게, 그리고 가벼이 읽혔다. 공부중인 '나'의 현재 고뇌는 ‘그와의 사랑'에 집중되어 있고 ‘그’와 사랑하기 전에도 사랑 중에도 사랑 후에도 '나'는 허세가득한 글에 매몰되어 있다. 섬세한 사랑의 결은 어디로 흘러가고 자의식의 과잉으로 보이는 일기 같은 기록이 남는다.


그는 나의 거짓 과제를 보고서도 나의 글쓰기에 대해 비난했다. 넌 이런 식으로밖에 쓰지 못해. 그건 너의 무능력을 증명하는 길이야. 헛웃음이 나왔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신물나는 애정, 그가 말하는 글쓰기의 기본인 행동하기, 보여주기, 외화(外化).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글쓰기가 선이라 생각했고, 그것을 강요했고, 아니, 그 이전에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결코 굽히지 않았으며, 그것이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했다. 보여주기보다 말하는, 행동하기보다 의식을 좇는 나의 글은 그의 눈엔 그저 멋부림에 불과했다. 교수 자신은 거리낌없었던 전위나 실험을 내가 하는 것은 객기였다. 그럴지도 몰랐다. 그러나 내가 무릅쓴 것에 대해 그렇게 쓰지 않는다고 지적하는 것은 분명한 오만이며 강요라고 생각했다.


  나도 일종의 ‘교수’가 되려나. 이 전위와 실험의 글쓰기를 객기로 보는. 그러나 나와 같은 ‘교수’만 있었다면 작가는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신춘문예 등단작 「Auto」의 심사평―“퀴어의 사랑과 이별, 기억, 시간, 장소, 글쓰기 등의 다양한 무늬를 점프 컷과 소격효과 등의 기법을 통해 노스탤지어라는 캔버스에 개성 있게 그려낸 작품”―은 여전히 이해가 쉽지 않으며, 홀로 이 소설에 대한 이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건가 싶은 생각에 두리번거리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내 스탈이 아냐”를, “문장과 서사들이 나에게는 맛깔스럽지 않았어”, 이런 말을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이 문장 하나를 쓰기 전에 변명같은 말들을 먼저 꺼내게 되는 이유에 대해.

  소설의 차별점이 무언가를 생각한다. 사랑과 글쓰기가 소설 전반의 내용이라 했지만 그보다 이 여섯편의 소설을 지배하는 건 퀴어, 라는 단어 아닐까. 시작부터 끝까지 ‘보편적이지 않은’ 퀴어의 사랑이야기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 그리하여 자전적 체험을 소설화한 것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소재의 차별화라고 할 수 있지만 소설의 매력이나 색다름과는 구별되는 것이고 소재를 어떻게 ‘소설적 형상화’ 하여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가는 다른 문제이니, 내게는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떤 면에선 남동생의 일기장을 들여다본 기분이 들기도 했다.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은 사생활이라 여겨지는 나의 내밀한 삶과 생각을 밝히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이 진실된 문장과 이야기인지, 어떠한 감정을 추출하고 획득해내기 위한 작위가 없었는지―나와 독자에게 모두―에 대한 경계심에서 비롯되는 감정으로, 꾸밈을 유혹받는 데서 오는, 혹은 필연적인 착오를 무릅써야 한다는 한계에서 생기는 부끄러움이다. 또 언제나 문학과 남자로 수렴되고 마는 나의 편협함에서 생기는 가벼운 수치심의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글 읽기/쓰기와 남자, 절대 끊을 수 없는 것.)


  이 소설 스타일이 맘에 들지 않아라는 말을 하기에 왜 이다지 껄끄러운 느낌이 드는가 했는데 거듭 소설에서 작가를 분리하기가 어려워서인지도 모르겠다. 전혀 아는 바 없는 작가인데도 ‘오토픽션을 쓸 때의 부끄러움과 곤란함’을 느끼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타인의 오토픽션을 들여다볼 때의 곤란함이 솟구쳐서인지도. 그리하여 나는 이것이 소설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자칫 작가에 대한, 평가로 비쳐지는 건 아닌가 우려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을 천천히 음미할 수 없을 것이란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누군가를 한입 가득 집어넣고 게걸스럽게 해치우는 짓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것이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이번에는 꼭 그렇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첫 소설집이니 다음에 작가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 ‘스피디하게 읽어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쓰든 달든 아주아주 천천히’ 읽을 수 있을까. 다음번에는 꼭,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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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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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네밀기 

경애의 마음, 김금희, 창비, 2018.


  양희와 필용이 다시 등장한 듯했다. ‘반도미싱’ 팀장과 팀원, 공상수와 박경애. 양희같고 필용같은 경애와 상수의 너무한 남의 연애사. 옆에 이들이 있으면 참 재미있겠다, 생각들만큼 그들의 그네밀기를 보고 있으면 미소가 지어진다. 

  소설의 필연이 주인공들의 운명적 연결고리이기에 경애와 상수도 과거부터 이 줄을 서로 쥐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은 사건보다는 사건의 이후의 감정과 생각들을 풀어내는데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이랄까. 누군가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조금만 열어보면 어떤 일들에 대해서 같은 마음으로 아파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행복해하고 그리워하고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호프집 화재사건에서 친구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경애와 그 사건으로 친구를 잃은 상수에게는 이때부터 이미 ‘같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상실에 상실이 더해진 경애가, 그러니까 오랜 연인과 이별하고 무력감에 빠진 경애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건 페이스북에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었고 형의 학대와 일찍 어머니를 잃은 상수의 상처, 직장에서의 냉대와 배제, 낙하산이라는 굴욕이 더해진 상수가 하는 일은 ‘언니’로서 페이스북에 상담 솔루션을 해주는 일이었다.

  7~80년대의 공장과 오버랩되는 ‘반도미싱’은 그시대를 살고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부당한 운영들을 일삼고 이에 맞서 파업하는 이들 속에 경애가 있다. 부당하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되는 것처럼 연애와 사랑, 관계에 관해서도 경애는 부당함을 말하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움직이고 행동할 수 있을까.

  경애의 흘러가고 복잡하게 오가는 이 마음들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상실의 기억에서 같은 마음으로 절절해진다. 내면의 섬세한 감정들이 작가의 독특한 문체의 결에 얹어져 『경애의 마음』은 명쾌해지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포근해진다. “아무리 꽉 엎드려 있어도 경애가 만들 수 있는 어둠에는 한계가 있는” 경애의 힘인가.


그러자 세상은 어느 맥락에서 그렇게 순해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영은 복날이 되면 야산의 개들도 그때쯤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러 다니는 걸 알아서 더 깊은 산속으로, 도시의 외곽으로 달아난다고 했다. 그러다가 여름의 고비가 지나면 도로 밑으로 내려와 무리를 지어 달리면서 일영 같은 외부인들을 경계하면서 쫓고 그사이 또다른 개들을 낳기도 하다가 문득 일영이 건네는 먹이로 배를 채우기도 한다는 것. 그렇게 해서 개들도 순해지고 수도검침원도 순해지는 시간. 누구도 상처받지 않은 채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은 삶에서 언제 찾아올까.


  한계 경애의 힘이 그런 시간을 찾아낼 것이다. 본질적으로 내재한 경애의 힘이 순하게 살 수 있는 순간으로 접목하고자 하니까. 흐르는 경애의 마음이 常數로서의 존재, 질서가 있는 상수에게로 수렴하는 시간이면 더 이상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일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시간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남들에게도 최선인 생각과 행동으로 그들의 마음결을 찾아갈 것이다. 사는 건 시소가 아니라 그네밀기라고, 그저 각자 발을 굴려 공중을 느끼다 서서히 내려오는 것이라 말하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의 그네를 밀어주며 오를 수 있는 최대의 공중을 자주 느껴가는 것이 그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갈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 ‘언니’의 마음으로 살뜰히 상처받은 이들을 챙기던 상수의 마음이 가닿는 순간일 것이다.


결국 상수는 마치 추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경애는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수는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는 사람이었고 다만 그런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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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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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없는 사람


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문학동네, 2018.


  『내게 무해한 사람』속 일곱 개의 이야기는 누군가와의 관계가 끝나버린 시점을 찾는 이야기 같다. 각각의 이야기마다 지난 시간을 회상하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훅 지나가는 것, 지금은 내 곁에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없는 그 사람에 대한 회상은 좋았던, 아름답게 지냈던 날들을 기억하게 한다.

  소설이 작가의 분신이라고 하는 만큼 작품마다 작가의 분위기가 비슷하게 녹여 나오겠지만 인물들이 뚜렷한 개성없이 그가, 그녀가 다 같게 느껴진다. 모두, 같은 한자리에 모여 한가지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처럼. 끝나버린 관계들에서 헤어나지 못한. 그러한 관계들이 단지 한명이 아닌 것처럼. 누군가가 의미있게 다가왔다기보다 누군가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마음을 나누었을 날들이 점차 사그라지는 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마음속 자그마한 균열이 어떻게 크게 상처로 대체되는지를 보여준다.


사람이란 신기하지. 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 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모래로 지은 집」


  「그 여름」은 학창시절 만난 수이와 이경의 동성애를 보여주고 있지만 소설 전반에서 작가는 여성과 여성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하고 있다. 연인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등 삶에서 의미있는 존재와의 우정, 사랑, 연대와 같은 감정들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심하게 서술되어 아픔과 상처도 더욱 깊고 길게 울린다. 


여자는 어쩌면 자신에게 삶의 무거움을 미리 알려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자신이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고, 그저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고. -「손길」


  하지만 세상과 인간에 대해 미리 겁을 먹은 이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움츠리고 움츠려 있을 뿐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누군가의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거나 느끼는 대로의 진실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포장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한다”는 건 관계의 진전을 이룰 수 있는 감정일까, 생각하게 된다.


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 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진희와 함께할 때면 미주의 마음에는 그런 식의 안도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고백」

 

 과거를 회상하는 자의 쓸쓸한 목소리가 전반에 울리는 소설에서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제목이 가진 맛깔이 좋다. 이 제목만으로 이 책이 따스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르게 읽힌다.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에서 말하고 있지만 내게 무해한 사람이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사람들. 세상을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웠던 그 순간들이, 가장 미워하는 누군가가 가장 보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시간이 흐른 후 지난 관계들을 되돌려 굳이 상처받았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했던 나를 돌아보는 일이자 감정들을 회복하기 위한 일이다. 결코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앞으로 더 나아가기 위한 일이다. 상처받았던 그 순간들을 복기해 그날의 원인들을 찾아내어 자신을 반성하는 소설의 ‘나’가 단련된다면 그들은 타인의 눈빛에도 의연해 질것이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미주를 바라보던 무당의 표정은 슬퍼 보였었다. 아마 미주는 자신을 안타까이 보는 무당의 그 눈빛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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