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넘어 도망치기
최근 재활용센터에서 절단된 다리가 발견되었다. 이 뉴스 이후 그 다리는 요양병원 입원 환자가 다리가 심하게 부패하여 절단한 것이라는 뉴스가 이어졌다. 어느 요양병원 환자의 입에서는 구더기가 나왔다는 뉴스가 전해진지 며칠 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사건을 보면서, 다시금 요양병원에 대한 노인들의 두려움과 기피가 크겠구나 생각했다.
요양병원을 가는 것은 이제 끝이 아니겠느냐는 인식, 심각한 몸 상태에도 요양병원을 꺼리는 아버지에게 요양병원을 가라고 더 이상은 말하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는 절대 ‘알란’이 되지 못할 것이므로 더더욱.
창문 넘어 도망치는 대신 자식들에게 소리부터 지를 아버지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점차 변화하는 상황에서 요양병원을 믿고픈 마음이 가득한데, 현실에서 나타나는 요양병원 사건을 접하고 보면 이로 인해 안타깝게 욕을 먹는 병원도 존재하겠지만 안타깝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창비, 2022-09-02. /
그 개와 혁명 - 2025년 제48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예소연 외, 다산책방, 2025-02-18.
절대 혁명할 수 없는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그 개와 혁명」 속 아버지가 남다르게 느껴진다. 아니, 사실 창문 넘어 도망치신 100세 노인이 더! 아버지도 100세가 되면 달라지려나.
죽음이 유쾌할 수는 없겠으나 삶을 보다 긍정적인 마무리로 그리고 세상에 대한 포용과 이해를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데, 그리하여 엄숙하거나 혹은 형식적인 장례식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그런 것을 생각해봤는데 안될 일이다. 좀더 편안하게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한편으로 그것은 내가 삶에 가지는 태도와도 관련되어 있음을 느낀다. 아버지가 삶에 대하여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 아버지와 「그 개와 혁명」 속 아버지는 닮아 있다. 그래서 두 소설이 너무 닮은 느낌이었다. 두 소설 속에 나타난 혁명. 전위적인 분위기, 무엇보다 두 아버지들의 성격이나 행동들이 너무나 같다. 그러나 소설을 소설로 보지 못하고 ‘아버지’의 생애에 더 초점을 두고 보니 내게 이 두 소설은 낯설게, 그리고 멀게만 느껴지던지.
새삼스레 아버지의 생애가 어떠했다고 해도 마지막 즈음 아버지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해방’하고 죄고 있던 것을 좀더 놓기를 바랐건만. 그렇게 되지 않는 듯하다. 오히려 좀더 가지지 못한 것에 분노하고 보다 더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 휩싸인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 본다.
너무 오래 생각해보지 않은 부모님의 노후. 죽음을 향해 가는 나이에 이들에게 나는 무엇을 해야 하고 어디까지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돌봄이란 것이 사회화로 대체되고 있지만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될 일이 없다. 돌봄은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힘겨운 일이 되고 있다. 아니, 죽음이 그런 건가.
소설 속 부녀 관계가 낯설어서인지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