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원이든 오천만원이든
백온유, [반의반의 반」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외, 문학동네, 2025-04-02.
아버지가 그랬다. 폰지갑에 있던 5만원이 없어졌노라고. 어디에서 없어진 건지는 알지만, 아니 그렇기에 누군가를 의심하지만 자신이 폰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했기에 따지지 않을 거라고. 오천만원도 아니고 오만원에서 시작된 아버지의 이 의심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건강에 대한 염려를 강하게 하기보다 아버지의 과거 행동까지를 소환하며 뭔가 점점 거리를 두게 되고 골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건 정말 소설같은 이야기다. 백온유의 「반의반의 반」속 영실처럼 오천만원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가 그 말을 한 곳은 병원이었고 나는 심각하게 나타났던 섬망을 떠올리며 정말 치매가 진행되는 건 아닌가, 의심했다. 점점 아프고 병들어가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과 연민이 변질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백온유의 「반의반의 반」에서 소설에서 ‘잃어버린 오천만원’의 행방은 ‘영실’이 잃어버렸다고 할 수 없다. 잃어버렸다면 영실은 그 돈을 찾아야 하는데 찾지 않는다. 딸인 ‘윤미’와 손녀인 ‘현진’은 오천만원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고 두 모녀는 오천만원을 요양보호사 ‘수경’이 가져갔다고 의심한다. 정작 ‘수경’은 영실이 자신에게 준 것이라 하고 영실은 ‘수경’을 감싸며 더 의지한다. 요양보호사가 영실을 돌보고 있는 것처럼 영실은 인지능력에 어려움을 겪는 치매 환자다.
오천만원은 각자에게 과거를 떠올리고 미래를 그리게 한다. ‘윤미’와 ‘현진’이 떠올리는 과거 속에서 ‘영실’은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른 나이에 현진을 낳고 젊은 시절 이혼하며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아온 ‘윤미’는 결정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조차 ‘영실’의 외면으로 딸인 ‘현진’과 오래도록 헤어져 있어야 했다. 이때, ‘영실’이 ‘윤미’에게 한 말은 “현진이는 내가 돌볼 테니 죗값을 잘 치르고 와라˝였다. 그렇기에 점점 ‘윤미’는 마음이 자꾸만 차가워지고 ”오한처럼 다가오는 원망이라는 감정“을 느끼며 어머니의 모성에 의문을 가진다. 계속 어머니에게는 허전함을 느끼게 될 것이지만 이런 어머니의 인색한 사랑을 서운해하는 것조차 부질없을 정도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러면 ‘현진’은 어떤가. ”어릴 때부터 현진은 자신의 외할머니가 남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해왔고 ”할머니를 조금도 닮지 않은 엄마를 바라보며 줄곧 아쉬움을 느꼈다“. ”오십대 중후반까지도 할머니에게는 영화배우 같은 아우라“가 있었고 ”외로움과 고독의 냄새를 풍기며 자식들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에 어느 정도 위안을 가지기도 했다. 강인한 할머니, 하지만.
현진은 할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받은 후로 어느 정도는 자신과 엄마에게 위악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발음이 어눌해질 때, 괄약근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때, 다리에 힘이 없어서 손녀의 작은 등에 억지로라도 업혀야 할 때, 그럴 때마다 정신이 온전한 건 너무 괴로우니까. 자기 자신이 초라해질수록 말을 함부로 하고 노망을 가장한다고 이해했다. 할머니는 천부적으로 연극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어느 순간 깨달았으니까. 그런데 지금의 태도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어디까지가 위악이고 어디까지가 노망인지 알 수 없어졌다.
애정과 사랑이라는 게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상호 주고받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한다. DNA에 박힌 것처럼 맹목적이고 당연한 일이라거나 사람의 도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따위로 복잡미묘한 마음을, 현실적인 어려움이 해결될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 손녀 ‘현진’이 바라보는 ‘영실’의 모습이 인상깊게 남는다. ”위악“이란 말이. 내가 느낀 지점이기도 하다. 분명히 아픈 ‘노인’은 위악을 부릴 줄 안다. 아픔을 과장할 줄도 안다. 그리고 ‘영실’처럼 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본다. 그것이 현실적인 치료를 하게 하고, 아픈 몸을 의탁할 자식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힘’일 테니까.
또한 ‘윤미’처럼 내가 돌봐야 하는 ‘환자’가 된 ‘아버지’를 보며 점점 ‘많이 힘들고 지친 아픈 환자’, ‘늙은 아버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아버지로서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하셨느냐, 내게’를 따져가게 되는 것을 본다. ‘도리’에 매몰되어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빠져 있다가 점점 ”내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늘어간다. 미래를 그리기보다 ‘과거’의 일들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잦다. 돌봄이란 끝나지 않을 일이다. 멋지고 다정한 아버지가 아니었던 과거를 계속 떠올리며 ‘반의반의 반’으로 줄어드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게, 아픈 부모를 돌보는 많은 이들이 겪게 되는 일일까. ‘영실’이 잃어버렸다는 오천만원이, 아버지가 잃어버렸다는 ‘오만원’이 실제하는 힘을 작용하긴 할까. 이 불편한 감정적 소모가 반의반의 반이라도 줄어들 수 있는 방법은 찾을 수 있을까. 삶은 소설보다 더 소설같다는데, 소설에 대해 삶을 묻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