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중입니다


정희진처럼 읽기-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누구나 자신만의 독서법이 있다. 그래도 때론 타인의 독서법이 궁금할 때도 있다. 빼꼼, 정희진의 독서법을 들여다보는데 재미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생각을 만나면 반갑고, 읽을까 말까를 망설이던 책에 대한 비평을 보면 그냥 편안하게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작가는 2012년부터 2014년 봄까지 쓴 서평들 가운데 79편을 선정해서 다섯 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읽고 있다. “고통, 주변과 중심, 권력, 앎, 삶과 죽음”이라는 이 주제 속에는 어떤 책이, 어떤 글이 놓여 있으며 이 글들에서 작가의 어떤 생각과 느낌을 만나게 될까.

  작가는 무엇보다 책읽기가 “삶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극, 상처, 고통을 해석할 힘을 주는 읽기 치료”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작가는 예상가능하거나 가독성이 지나치게 좋은 책보다 ‘자극적인 책, 이상한 책’만 읽는다고 한다. 하긴, 가독성없는 책을 읽는 것만큼이나 고통스런 일이 또 있으랴. 그러나 이것을 달리 말하면, 작가는 자신의 ‘관점’에 따른 책을 읽는다.

  관점을 갖기 위해 책을 읽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미 자신의 관점이 명확하여 그것만을 골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독서일 수 있겠다 싶다. 한편으로 어떤 책을 읽더라고 내 몸에 각인된 ‘시각’으로 수렴되는 경우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다양한 글읽기가 아니라 거듭 생각이 한정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되는 때가 있다. 많은 책을 읽으며 그것을 수정·보완하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강화되는 경우도 있고 미미하게나마 다른 관점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작가의 관점에 따른, 시각을 찾아 읽는 방법의 긍정성을 생각하며 관점의 수렴에 지나치게 연연하지 않으리. 어쨌든, 많이 읽어 볼 일이다.

  타인의 글을 잘 읽고 잘 해석하는 일은 중요하다. 작가의 말대로 그것이 읽기 치료가 되려면 더더욱. 생각해보면 책을 읽는 것은 정보습득, 지적만족, 재미라고 하지만 알고 보면 책과의 교감이 빠질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내 감정을 정화시키는 것이 있다는 점, 물론 던져버리고 싶은 책도 만나지만, 그것은 책을 읽으며 내 속에 내 머릿속의 질문들에 답해 가는 과정이며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혼란스런 지성을 명확히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니, 나에게도 읽기는 치유와 치료의 과정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독후감의 의미는 단어 그 자체에 있다. 독후감(讀後感). 말 그대로 읽은 후의 느낌과 생각과 감상(感想)이다. 책을 읽기 전후 변화한 나에 대해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없다면 독후감도 없다. 독서는 몸이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통과할 수도 있고 몸이 덜 사용될 수도 있다. 터널이나 숲속, 지옥과 천국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딘가를 거친 후에 나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독후감은 그 변화 전후에 대한 자기 서사이다. 변화의 요인, 변화의 의미, 변화의 결과……. 그러니 독후의 감이다. p305


  어떤 날은 책을 읽고 기록하지 않아 잊어버린 책의 내용에 감정에 쓸쓸하여 기록을 했다. 그러다가는 읽을 책도 많은데 뭘 하고 있는 것인가하는 생각에 멈추기도 했다. 사실, 책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이란 늘 같지 않다. 내가 읽은 상황에 따라서 또한 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읽었다 해도 또 읽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고, 기록을 하고 싶으면 그 마음을 기록하면 되는 것이고. 하지 않음은 또한 그것이 독후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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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자의 글쓰기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수유너머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해서인지 제목 때문인지 은유의 글쓰기 강론에선 치열함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글을 쓰고 싶은 수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글쓰기라는 작법을 배우고자 하는 이들의 열망엔 어느 정도 ‘미학적’인 부분에의 욕구가 있다. ‘글을 못 쓴다’라는 말 속에 잠긴 것은 그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느껴지는 은유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삶의 글을 이미 새기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이제 몸을 움직이면 그 글들이 몸에서 빠져나와 책으로 옮겨갈 것만 같은 느낌이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 있는 것들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p23


  그래서 이 책은 써야 하는 이유, 쓰고자 하는 열망을 끌어내기 보다는 보다 구체적으로 종이 위에 글을 만들어 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다. 총 6장으로 구성되어 6장을 제외하고 5장에서 글쓰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은유는 글쓰기는 용기라고 말한다. 솔직할 수 있는 용기라고. ‘잘’ 쓰고자 우린 많은 거짓의 감정을 쏟아내어 글을 만든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글과 다르다면 진정성 여부를 떠나, 더 이상 글쓰기가 진행이 될까.


나는 억눌린 욕망, 피폐한 일상 같은 고통의 서사를 길어 올리는 학인들에게 새 가지를 당부했다. 삶에 관대해질 것, 상황에 솔직해질 것, 묘사에 구체적일 것. 결국 같은 이야기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삶이다. 뭐라도 있는 양 살지만 삶의 실체는 보잘것없고 시시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상세히 쓰다보면 솔직할 수 있다. 상처는 덮어두기가 아니라 드러내기를 통해 회복된다. p63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면 즐겁고 좋았던 일이나 기분일 때보다 고통스러울 때 글을 찾았던 일이 많았다. 이런 일은 주위를 둘러봐도 그런 것 같다. SNS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종이 대신에 그곳에 마음을 기록한다. 그들이 마음을 강하게 표현하는 날들은 그들 신상에 뭔가 좋지 않은 변화가 있었을 때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런 것일까, 불행이 우리의 글쓰기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일까. 그래서 이때의 상황에 잘 감응하다 보면 나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고통을 마주하여 그 고통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은유는 더 많이 생각하고 느낄 것을 권유한다. 좀더 많이 읽으면서. 그것이 “감수성의 근육을 키우고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능력”을 찾아준다고 말한다. 함께 글을 읽고 강독하며 글을 쓰고 합평하며 생각을 키우는 그것이.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p132


   은유의 글쓰기 강의는 이렇게 감수성의 근육을 키우는 방법을 함께 한다. 나만의 글쓰기에 자신감을 북돋우며 여전히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특히 은유는 자기의 글쓰기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르포나 인터뷰에 관한 글쓰기를 제안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는 실제 은유의 강의를 듣는 학인들이 쓴 글이 실려 있다. 은유는 르포나 인터뷰가 서로의 삶을 보듬는, 그리고 지탱하는 매개라고 말한다. 이들의 글을 읽으면 은유가 말한 글쓰는 방법에 대한 강의의 말들이 다시 떠올려진다. 


 약자는 달리 약자가 아니다.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다.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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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읽기의 자화상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입에서 천치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 서정주, 자화상 中 -


  누가 뭐라 한들 아는 것만 눈에 보이고 결국엔 관심 있는 것에 더 눈이 가고 아는 선에서 삐딱하게 봐진다. 결국 수없이 많은 말들을 듣고 많은 글들을 읽는대도 모든 것은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끄집어내고 내가 아는 것을 더 알도록 보태는 것이지 낯설고 모르는 것에 관심을 옮겨가는 일은 즉각적이지도 쉽게 되지도 않는 일이다. 그래서 이 시가 떠올랐나. 어떤 이는 죄인을 어떤 이는 천치를 읽고 가는. 시인의 변절은 그 행동은 시에 맺힌 진정성까지 감하게 하는.

  책이 주는 것, 작가가 말하는 것을 습득한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수용의 주체는 ‘나’인 것이다. 수많은 책읽기의 방식은 취향의 동류의식을 건들여 기본 베이스를 공고히 해주는 것에 얼마쯤 더 가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아니 책읽기를 이야기하는 책을 왜 읽는가를 새삼 생각해본다. ‘다른 방식’을 알기 위함인지 ‘같은 방식’을 찾기 위함인지.



   


  ‘왜’ 시리즈의 제목 때문에 한 명의 작가가 쓴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세 권의 책의 작가가 다르고 출판사도 다른 책이었다. 어떻게 세 명이 같은, 그러나 다른 이야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출판 일시도 비슷하다.

  동화의 해석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볼 수 있는 네 권을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힘은 사실 상당히 제한적이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생각의 방법과 길은 다양하구나라는 모순된 생각을 같이 했다. 선택하는 동화가 너무 같다는 것이 전자의 이유고 각각의 해석의 주제가 다르다는 것이 후자의 이유다. 같은 책을 보고도 누구는 인간 행동의 심리에 중점을, 누구는 역사적인 상황을, 또 누구는 사회구조를 세밀하게 보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관심을 두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잘 흘러가게 되는 것일 게다.


  


  널리 알려진 동화는 한정적이다. 고전 동화의 대표로 손꼽히는 이야기들은 오랫동안 ‘교훈’과 ‘깨달음’의 전도사로 활약하다 어느 지점부터는 주인공을 바꾸는 역할극으로 교훈의 반전을 시도했다. 그리고 또 어느 지점에선 ‘삐딱’한 시선의 비판을 감수해야 했다. 그럼에도 세상엔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각각의 미묘한 시선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낸다. 다양성이 세상을 움직이는 한 축에 있음은 분명한데 그 지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끔 되는 것은 그것이 분출할 수 있는 여건이 받쳐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이 분위기가 가속화되고 있다. 이 상태로 경직되어 얼마나 또 오래가게 될런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은 몰지각하고 비윤리적인 것은 제외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수많은 다양성을 존중하게 되면 비윤리적이고 몰지각하고 타당하지 않은 ‘견해’를 알고 스킵할 수는 있게 되리라 본다. 생각해보니 책읽기는 결국은 돌고 돌아 내 취향을 공고히 하는 장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래도 나도 모르게 생각지도 못한 ‘훅’ 들어오는 글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선호의 취향을 떠나 수많은 독서가, 독서법이 취향을 뭉치는 일이 되긴 하더라도 다른 것에 대한 고개 끄덕임과 몰상식과 비윤리적인 것을 선별해내는 힘이 되기를. 선별력이 워낙 강한 나라에서 살아가기에 쓰잘데기 없는 걱정에 책읽는 시간을 빼앗기는 이 쓸데없는 걱정도 스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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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를 위하여


   김민웅, 동화독법


  동화의 재해석. 사회학자이며 목회자가 선택한 동화의 해석은 “유쾌하고도 섬세하게 삶을 통찰하는 법”이다. 김민웅 교수는 열 개의 동서양고전 동화에서 삶을 통찰하는 자신만의 방식을 풀어놓는다. <미운 오리 새끼><신데렐라><솔로몬의 지혜>인어공주><토끼전><이솝우화><헨젤과 그레텔><바보 이반><바보들의 나라 켈름><심청전>은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얘기 속에서 자신만의 동화 읽기로 타인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이야기한다. 그런 지점에서 저자 김민웅의 동화이야기는 어떤 차별성이 있을까.

  우선 열 개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동화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분석이 깊다. 동화의 주인공의 역할을 뒤집는 이야기도 새롭게 탄생하고 있는데 이러한 반전의 이야기가 증가하는 이유는 삶의 형태가 워낙 다양하고 ‘주인공’이 아닌 등장인물들에게 우리의 현실적 삶의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삶의 모습이 개인을 둘러싼 사회의 구조 속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들려준다. 저자 자신도 “이야기를 꼼꼼히 읽는 일”이 독법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있듯이 ‘아는 이야기’라고 해서, 다르게 읽는 법 역시도 특별할 게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적당히 흘려 보거나 듣는 것이 아님을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눈으로 다시 보면 아는 것 중에서 새로움이 발견된다. 익숙하다고 넘긴 것에서 낯선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현실이 낙오자, 또는 열패자로 취급하는 이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런 이들의 재능과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의 시선이라고 반격합니다. 또한 본래 백조인 존재를 몰라보고 괴롭히며 멸시하고 추방한 세상을 향한 보복과 과시이기도 하지요. p49


  미운 오리 새끼에서 일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위와 같다. 내면은 외면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역경 속에서도 재능을 펼치며 노력하는 일의 중요성 같은 것을 미운 오리 새끼는 전한다. 결국엔 백조로 밝혀진 오리에 우리는 희열을 느끼면서도 이 차별이라는 현실에 대해서는 분개하고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미운 오리 새끼를 통해 수없이 읽어 왔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 이 얘기를 꼼꼼히 살핀다.


 이 이야기는 오리와 백조에게 신분차이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백조보다 못한 오리일 뿐이고 백조는 그 성장과정에서 이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고귀한 백조입니다. 서로 다른 생명체로 어울려지는 존재들이 아니라 누구는 못나고 누구는 잘난 겁니다. p50


 엄마 오리가 세상을 처음 보여줄 때 세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그러나 끝끝내 이 미운 오리 새끼는 그런 세상과 마주하는 의지와 지식을 길러내지 못합니다. 그가 관심갖는 것은 오직 하나, 자기가 못생긴 오리라는 낙인에서 벗어나는 일뿐입니다. 농장의 오리 집단에서 쫓겨나듯이 도망나올 때 그는 깊은 열등감에 사로잡힌 상태였습니다. 이 피해의식은 나중에도 지속되면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가운데 극복되기보다는 사실상 더욱 예민해지고 말았습니다. p54


  그렇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힘든 ‘미운’ 오리의 역경에 공감한 나머지, 같은 가족 안에서도 구박받는 그의 삶에 너무 이입한 나머지 잊고 있었다. 백조와 오리를 차이 짓는 저 구분을. 그리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결국 되돌아보면 오리는 ‘재능’과 ‘가치’를 발견하고 키워간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정해져있던 ‘자격’을 타인들이 그제야 보았을 뿐인 것이다. 더 아름답게 자라난 오리일지라도 결국엔 백조에게는 비견되지 못할 ‘태초’에 '애초‘에라는 낙인. 언제부턴가 ’헬조선‘이라는 용어가 만들어낸 사회 속에서의 우리의 상황이 ’오리‘이다. ’미운‘오리가 아니라 그냥 오리. 백조인 ’미운 오리‘가 아니라 백조가 될 수 없는 오리. 그렇게 사회가 이 명명 속에서의 부당함을 인식하기를 바라지만 그 부당함이 오히려 제 정체성이라는 듯 변함을 꾀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결코 피해가지 못할 피해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오리들의 역사.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종교와 연결짓는 것 또한 특이하여 눈여겨봐졌다.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런 해석이 있는 것인지 내가 보지 못한 이와 같은 인어 공주에 대한 해석들이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인어공주의 질문은 성서 안의 종교적 질문과 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인간이 되고 싶은 언어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나, 이는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의 허무함을 해결할 방법을 찾는 모든 인간의 질문과 다를 바 없습니다. 종교는 이에 대해 신을 믿고 그 구원의 손길에 의지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할머니 인어의 이야기는 그런 가르침과 같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영혼이 생겨나는 것을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 사이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네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가장 귀중한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고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 하나가 되는 순간, 인어는 인간이 된다는 겁니다. p147~148


  동화 속 많은 공주들이 자신의 특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엔 ‘왕자’를 만나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라고 끝맺는 이야기 중에 유독 인어공주만이 슬픈 결말을 맞았다. 인어 공주의 이야기를 뒤집어 보면 왕자와 결혼하게 된 공주의 입장에선 다른 동화 속 공주들의 해피엔딩 결말이 성립한다. 같은 신분, 계급에서만 가능한 일인가. 그러니까 인어공주는 결국 그들 사회 속에선 같은 신분이 아니니까. 아무리 육지보다 몇 배는 넓은 바닷속의 공주라 한들, 그것을 밝힐 수 없고 그래서 공주가 아닌 그저 말못하는 시녀일 뿐. 적극적으로 자신의 사랑을 찾아 육지로 경계를 넘어선 인어 공주의 ‘변화’와 ‘변혁’을 결국 죽음으로 귀결지어졌다. 신분을 넘는 사랑, 국적을 넘는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종교가 지배하던 시대에 더군다나 성에 대한 적극적 표현을 하는 것은 음탕한 악녀의 짓거리로 지탄되었습니다. 그건 마녀의 가슴을 찔러 흘러나오는 검은 피를 먹은 여자들의 소행으로 받아들여졌지요. 성, 쾌락, 여자의 육체를 거론하는 것은 금기의 대상이었고 그걸 여성이 주체적으로 욕망하는 것은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서구 중세의 종교는 근대에 이르기까지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여성의 성적 갈망과 성적 정체성의 성장을 억압했어요. p159~160


  그래, 동화라고 해도 인어공주는 적극적으로 왕자에게 다가간다. 바다가 생활터전이 인어공주에게 옷이란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그렇기에 자연스러운 것은 옷을 입지 않는 것일 테지만 또 누군가 보기에 그것은 그렇게 곱게 보이지 않을 모습이다. 성스러운 공주와 비교해서 더욱 더.


인어공주의 비련은 여성의 성적 정체성과 그 적극적 실현 그리고 사랑의 진실이 억눌리고 외면되는 현실의 슬픔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인어공주의 마지막은, 우리에게 이런 현실을 계속 용납하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300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가, 라고 또한 묻고 있지요. 인어공주와 같은 아픈 이야기가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도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인어공주가 잃어버린 목소리는 바로 그 희생당한 이들의 존재를 일깨우고 있지 않나요? 그에 더하여 이 세상 도처에 생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운을 확산시켜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p186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동화는 만들어 질 것이고 읽힐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이 지나도 동화 속엔 여전히 꼼꼼히 읽어봐야 보일 억압된 민중과 여성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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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위험한 행위

 

 

읽다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보다> <말하다> <읽다> 삼부작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읽다>는 작가의 독서경험과 그동안 읽은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우리는 왜 책을 읽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그 책에서 무엇을 보는지, 어떻게 생각하고 느꼈는지 작가의 경험은 같은 듯 다르게 전달된다. “만약 어떤 형벌을 받게 되어, 읽기와 쓰기 둘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뭘 선택하게 될까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 쓰지 못하는 삶도 편치는 않겠지만 읽지 목하는 고통이 더 클 것 같다”라고 말하는 이 작가의 독서 경험은 그가 말하는 감성근육을 키우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독서는 왜 하는가에 대한 수많은 이유들 중에 작가의 이유는 뭘까. 작가는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오디세이아』,『오이디푸스 왕』을 읽으며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믿는 오만과 자만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며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이라 말한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이라는 어떤 우월한 존재가 책이라는 대량생산품을 소비하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이야기가 책이라는 작은 틈을 통해 아주 잠깐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영겁의 시간에 접속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바로 이야기이고, 이야기가 바로 우주입니다. 이야기의 세계는 끝이 없이 무한하니까요. p69

 

   작가는 좋은 독서는 끊임없이 헤매는 경험이라고 말한다. 소설을 읽으면 하나의 세계가 내면에 겹쳐지며 새로운 세계, 광대한 우주를 탐색하는 것과 같고 또한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투쟁이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전개될 이야기를 예측하며 맛보는 스릴과 작가의 의도와 나의 해석에 따른 괴리를 조율하는 정신적 투쟁. 그래서 읽기는 기쁨과 고통이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듯 기쁨과 고통을 경험하기에 책을 통해서 감각의 근육을 키울 수 있는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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