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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ㅣ 문학동네 시인선 194
황인찬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평점 :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황인찬
마음에도 정해진 규칙과 법이 있는 것일까. 사랑과 마음과 슬픔에 대해 생각해본다.
시로서 당신을 쓴다. 현실은 당신을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서일까. 깨진 유리병 사이에 앉은 슬픔과 마당에 내려앉은 한줄기 빛이 슬퍼지는 것, 겨울비가 계속 내리고, 혼자 흔들리는 그림자를 보며 밤새 우는 사람.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 사람이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고 사랑이 사랑으로 보여지지 않는 것. 그 사실이 못내 슬프다.
당신의 시에는 현실이 없군요
현실에는 당신이 없는데요
(왼쪽은 창문 오른쪽은 문, 14쪽)
슬픔은 바닥을 뒹구는 깨진 유리병 사이에 앉아 돌아올 너
를 상상하고 있었다(마음, 23쪽)
사진 속에 남아 고정되고 기억 속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이
미지들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사랑하고 너무 좋다고 생각하
며 너무 좋아하면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27쪽)
그 여름은 뭐였을까, 자꾸 생각하게 되고
우리의 생활은 여름밤의 반딧불이 점멸하다 사라지는 것
처럼 갑작스럽게 끝나게 된다
(인화, 37쪽)
종종 마당에 빛이 내려와 한동안 머물다 떠났다 자주 슬
픔을 느꼈으나 까닭이 떠오르지 않았다
(음애, 53쪽)
손을 잡고 걸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사랑이라 치치 못할 것도 없지만 여전히 겨울비가 세차게 내린다. 사람이 먼저라고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것을 나중으로 미루는 아이러니. 왜 사람이 아닌가? 왜 사랑이 아닌가? 비인간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한다. 빠짐없이. 이 이야기는 이제 끝없이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니까.(철거비계, 68쪽)
이야기를 들려줘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눈 내리는 겨울밤, 쏟아지는 눈을 보며 차가워진 두 손을
마주 잡았을 때,
한쪽 어깨에 머리를 기댄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때 웃으면서 한 말이 무엇이었는지
다 말해줘
빠짐없이 들려줘
(철거비계, 68쪽)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눈을 뜨면 혼자 가는 먼 집, 눈
을 뜨면 영원히 반복되는 꿈속에 갇힌 사람의 꿈을 꾸고 있
었고
그러나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군
애당초 마음도 없지만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83쪽)
사람 가득한 거리에서 손을 잡고 걸어도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네
긴 하루를 보내고 같은 집에서 그와 함께 밥을 먹고 잠들
어도
우리 삶에 펼쳐진 무수한 난관을 모두 이겨낸 후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함께 밥을 먹었지
(자율주행의 시, 101쪽)
눈을 뜨면 여전히 겨울비가 쏟아집니다
사람이 먼저라고 말하는 사람과
나중에라고 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비인간을 걷겠습니다
생각 없이 걷겠습니다
(외투는 모직 신발은 피혁, 103쪽)
혼자 흔들리는 그림자가 있고
그걸 보며 밤새 우는 사람이 있고
그걸 사랑이라 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
(없는 저녁, 109쪽)
겨울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빗소리에 묻혀 파돗소리는 들리지 않고
되게 세상 끝난 거 같네
웃으면서 말하는 네 목소라만 남았고
(리스토어, 1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