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 고명재 산문집
고명재 지음 / 난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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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고 싶을 땐 눈이 온다, 고명재



첫문장부터 좋았다.



팔월의 한 여름, 계속해서 기억한다. 어떤 기억은 발밑의 자갈, 하늘의 색채, 그날의 나뭇잎까지도 기억에 남는데, 그게 의지에 의한 것인지 순전히 사랑때문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저 기억한다. p.11



시인의 산문집을 특히 좋아하는데 최근에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좋았다. 무채색의 커버와 시인의 얼굴, 은은하게 빛나는 문장들.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런 글들이었다. 어떤 글은 무채색으로 빛났고 어떤 글은 초록의 풍경이 떠올랐으며 어떤 글은 눈물이 앞을 가려 하얗게 보였다.



그저 너무너무 좋았다고밖에. 시인이 말했던 것처럼 인생은 ‘너무’와 ‘정말’ 사이에서 춤추는 일이니까요,(p.53) 정말 너무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고 그것을 위해 산다. 그러기 위해 싫어하는 일도 해야만 하고 싫은 순간, 싫은 사람도 마주하게 된다. 사람을 좋아하지만 또 사람이 싫다. 그래서 맑고 따뜻하고 고운 사람의 글을 보면 마음이 저리다. 그런 사람이고 싶어서. 언제나 말뿐인 나의 다짐들이 부끄러워 앞이 캄캄해진다. 흰 돌이 필요할 때. 그리고 시를 읽어야 할 때. 나에게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말들도 외자다.



시, 달, 눈, 비, 별, 빛, 잠, 책, 글.



눈을 기다린다. 비는 이미 오고 있으니까.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살고 싶다. 혼자서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시인의 사람과 사랑과 마음이 따뜻해서 조금은 기댈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할 거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싸늘해지지 않도록.



하고 싶은 일들을 써본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것들을 오래도록 함께 좋아하기 위해서.



어깨를 조용히 주물러주기. 좋아하는 사람들과 와인 마시기. 조끼를 입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콩떡을 먹기. 눈 내리는 걸 나란히 앉아서 보기. 아픈 자리를 꾹꾹 누르며 귓속말하기. 애도하기. 중얼거리기. 같이 슬퍼하기. 국화빵 한 봉지를 사서 집으로 가기. 해몽을 핑계로 오래도록 거실에 앉아서 엄마와 시간을 물렁하게 만들기. p.36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해. 바둑처럼 네 차례 내 차례 번갈아 오듯 통증도 번갈아 오면 좋겠다. 그럼 머릿속이 하얘질 땐 검은 돌 쥐고 마음이 캄캄할 땐 흰 돌을 쥐고 그렇게 버티는 거지. 순서를 기다리면서. 한 꺼풀씩 통증을 견뎌내면서. 가끔은 네 시를 철교처럼 쥐고 읽게 돼. 기차에 매달린 것처럼 시를 읽게 돼. 어지러울 땐 그게 묘한 희망이 된다? 창밖에는 순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게 벚꽃으로 변할 때까지 손을 잡고서. p.102



윤은 사물의 표면에 고루 퍼진 채 공평하게 드러나는 ‘안온한 빛’이다.



그래서 윤이 나는 것들은 평안해 보인다.

엉덩이 덕에 반들거리는 툇마루처럼. p.175



시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고 시 덕분에 잎처럼 웃기도 했고 시 때문에 삶이 너무 미워져버려서 시를 놓고 포동포동 살이 찌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시가 늘 함께했기에 나는 사랑을 쥐고 이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p.189



그러고 보면 외자로 된 말은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별. 시. 눈. 꽃. 귀. 손. 개. 국. 볼. 종. 빛. 빵. p.189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올 것이 있다. 비와 눈은 오는 것. 기다리는 것. 꿈의 속성은 비와 눈처럼 녹는다는 것. 비와 눈과 사람은 사라지는 것. 그렇게 사라지며 강하게 남아 있는 것.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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