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하는 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44
정현우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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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우 시인의 시에는 슬픔이 많이 등장한다. 누군가를 잃고 누군가와 이별하고 누군가에게 상처입는 날들. 슬픔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슬픔이 몰래 쌓이기도 하고 울고나서 따스해진 두 눈, 울고 있는 당신,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 하고, 슬픔을 지연시키고 싶고, 울고 싶지 않은 밤에는 무엇이 우리를 구원해줄까요.

시인의 아름다운 시들이 울고 있는 나를 다독인다.
슬픔은 여기에 있고, 그래도 내버려 두고
한 번도 울지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완벽한 슬픔의 각도로
갇혀버린 두 빛,
울음이 언제 터트릴지 모를 두 개의 눈을
천사가 자꾸만 건드릴 때
슬픔은 몰래 쌓인다.
시간 차를 두면서
당신의 무릎을 꿇게 만든다.
_Angel eyes

왜 울고 난 뒤 두 눈은 따스할까
그토록 뜨거운 심장을 가져본 적이 있다고 믿기
위해

잘 가, 라는 말 대신 차오르고 마는 강수, 슬픔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네 눈빛을 하고, 빈 의자에
앉아 창가를 보는 사람이 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나열할 수 없는 슬픔은 왜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걸까, 모든 비는, 두 눈은,
너는,
이제 집에 가자,
빗속에 마주 서서 아무 말이 없고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물끄러미 울고 있는 너를 본 것 같기도 한데,
겨울 창가는 겨울 볕이 잘 든다.
_스콜

나를 사랑했던 만큼 당신의 얼굴에서
나는 잠시만 슬플 수 있겠습니까.
두 뺨에 떨어트리는 당신의 울음과
등 뒤로 쏟아지는 정오의 빛이
오래도록 눈매에서 머물다 갈 때
나를 붙든 시간에 모두 울어버렸습니다.
어떤 슬픔은 머무르는 그대로 우리를 살게 하고,
그대로 내버려두고 싶은 슬픔이 있어,
그러나 당신은 한 번도 울지 않은 사람처럼,
한 묶음 목화를 들고 내게 와주세요.
나는 이곳에 서성이다 당신의 차례를
말없이 나는 기다릴 뿐이에요.
당신의 꿈속에서 서 있을 뿐이에요.
내가 없는 당신의 곁,
말의 창가에는 너무 많은 슬픔이 유리알처럼 글썽이고.
_소멸하는 밤

마음에서 입술까지 거리는 얼마나 먼 것입니까,
그러나 검은 손들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마는 것은,
처음부터 깨질 수 없었던 창문 너머 툭 금이 가는
마음에는.
_피에타

어지러운 고요를 꺼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수천 개 서랍이 시간을 만
든다.
턱을 괴고 불 꺼진 숲을 슬픔을 지연시키기 위한
믿음이라고 읽는다.
_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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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혼자
김현경 지음 / 웜그레이앤블루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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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롯이, 혼자 _ 김현경



최근에 독립서적을 자주 접하게 되면서 나의 좁은 시야와 편견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가벼운 글, 조잡하거나 촌스러운 디자인, 일기와 다를바 없는 졸문들, 이라며 후려치기를 해왔고 쓴다는 행위 자체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쓰는 노력을 해온 작가들의 노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차없는 비판을 했었다.(마음속으로, 건방지게) 김현경 작가의 글은 그런 내가 얼마나 바보같았는지 글을 평가한다는 게 얼마나 의미없는 짓이었는지 생각하게 했다. 반성합니다.

그저 쓰는 행위 그 자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 거북하지 않고 편안하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 짧지만 마음을 울릴 수 있는 글이 있다는 것, 글을 읽으면 언젠가 과거의 나를 만나게 하는 것. <오롯이, 혼자>를 읽으면서 마음 여러 번 내려앉았다. 문장과 문장이 머릿 속에 맴돌아 필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글을 읽으면서 지난 날의 나를 많이도 떠올렸다. 오롯이 혼자 버텨내야 했던 순간들과 공허한 마음들로 괴로운 날들이 많았다. 외롭지만 외로운 게 좋은 날도 있었다. 혼자여서 외롭기보다 함께여서 외로운 날들도 있었다. 다정하고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무던히 애쓰던 날들도 있었다. 애쓰는 건 한계가 있고 애쓰는 내가 피곤해져 다시 무너지곤 하는 날들도 있었다. 이해하지 못해 두렵고 속상한 날들도 있었다. 삶이 바닥인 것 같아 무서웠지만 그 바닥에 머물며 우울 속에 갇힌 날들도 있었다. 완벽하지 못하면서 좋은 사람이고 싶고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나를 포장했던 날들도 있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했던 날들도 있었다.



독자들이 자신의 글을 읽고 위로 같은 것을 느낄 때 오히려 너는 이런 사람이었어, 하며 흉터같은 것을 마주하게 만드는 말(p.73)이라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의 글로 위로받았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때의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지난 날들이 나에겐 상처이고 낙인처럼 찍혀 나를 평가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게 될까봐 오히려 나를 지키기 위해 나를 감싸고 나를 숨기고 뾰족한 말들도 누군가를 상처주고 밀어내던 내가 있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거란 생각을 버리지 못했고 네가 뭘 알아, 라며 단단하게 나를 보호하고 방어막을 만들었었다. “나는 이런 점에서 괜찮은 사람이에요, 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두어 가지쯤이라도 있었다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p.160) 라던 작가처럼 괜찮지 않은 나를 보며 후회하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위로하고 당신을 위로하는 일은 늘 쉽지 않았다. 어찌할바를 모르고 머뭇거렸던 내 모습이 책 속에도 있었다. 내 마음이 모두 작가의 마음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가장 좋은 위로는 그저 함께 가만히 앉아있고, 지금 함께 울어주는 일 아닐까(p.184)라는 생각.



저의 기록을 통해, 작은 것들을 함께 볼 수 있다면, 고마운 줄 몰랐지만 고마웠던 사람들을 헤아린다면, 그리고 늦은 새벽을 함께 두려워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도 누군가와, 누군가도 저와 함께, 그렇게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수 있다면 고맙겠습니다.(p.184)



지난 날의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지는 모르겠다. 늘 제자리인 것만 같고 나약한 인간이 기본값인 인간이라..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해도 괜찮다. 작은 순간순간 내 옆에서 힘을 주었던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나를 잊었을 수 있지만 내 마음 안에 남아있는 소중한 위로들이 있다. 오롯이 혼자여도 씩씩하게 걷고 내 옆에 누군가 있다면 그 사람과도 함께 걷고 고마워하고 두려워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그럴 수 있기를. 그럴 수 있다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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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흐림 - 네 추락을 낙화로 기억하는 일
강은우 지음 / warm gray and blue(웜그레이앤블루)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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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책방에서 만난 책. 어떤 장소는 그 시간과 사람을 기억하게 한다. 어떤 책은, 어떤 문장은 조용히 마음 속으로 흘러들러와 폭죽처럼 터져버린다. 그래서 마음은 무참히 찢어져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 울지않고는 버틸 수 없다. 그렇게 만난 문장으로 위로받기도 한다. 이제는 다시 일어나는 일만 남게 되니까. 언제나 상처를 주고도 내가 더 상처받은 것처럼 주저앉곤 했다. 나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다시 제자리. 더 나은 사람,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 이럴 때 나를 다독여주고 어루만져 주는 책을 만났다. 한없이 우울해지게도, 조용히 안아주기도 하는 그런 책을 만났다.

한 줄 한 줄 정렬되어있는 글이 온통 어지럽던 마음을 차분하게 하기도 했다. 강박처럼 맞춰진 글들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멈추지 않고 읽기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밑줄을 긋고 필사하고 하면서 위로의 시간을 보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조금만 더 있어
아주 잠시만 같이 있어
_ 투정

나는 두려워서
조용히 너를 당겼다
그러자 당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_ 중력

모래밭에 절여진 손 밑동만 홀로 남아서
축축하고 짠 글만 쓸 수 있다면 좋겠지
그리고는 흔적없이 지워지면 좋겠지...

가지마, 무슨 일이 있어도 없어지지마
_ 허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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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계절 - 일본 유명 작가들의 계절감상기 작가 시리즈 2
다자이 오사무 외 지음, 안은미 옮김 / 정은문고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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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같이 사계절이 뚜렷한 일본의 작가들에게 계절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어떨까. 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고 계절의 냄새를 좋아하는 나로선 책 소개부터 흥미를 끌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눈으로 코로 귀로 느낀다. 그리고 가을만 타는게 아니라 계절 자체를 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작가들은 계절을 글로 표현하겠지. 아름다운 문장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워낙 모르는 작가가 많기도 했고 문체가 마음을 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계절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계절에 대한 글도 읽어보고 싶다.



여름 안에 가을이 몰래 숨어 이미 찾아왔는데도 사람은 불볕더위에 속아 알아채지 못한다. 귀 기울여 들어보면 여름이 오자마자 벌레가 울고, 정원을 유심히 둘러보면 도라지꽃이 피어 있다. 잠자리도 원래는 여름벌레이고 감도 여름 동안에 착실히 열매를 맺는다.

가을은 교활한 악마다. 여름 사이 모든 단장을 마치고 코웃음을 치며 웅크리고 있다. 나만치 날카로운 눈을 가진 시인이라면 그 기색을 눈치챈다.

아, 가을_다자이 오사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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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83
루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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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와

코뿔소 품에서 태어난 어린 펭귄.

그땐 기적인 줄 몰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에게 서로밖에 없다는 게.



노든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끼리들과 자란 코뿔소다. 지구상의 마지막 하나가 된 흰바위코뿔소 노든은 소중한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으면서 매일 악몽을 꾸고 살아남은 것이 운이 좋은 것인 알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들을 코뿔소의 뿔을 얻기위해 쉽게 코뿔소들을 사냥하며 코뿔소를 멸종직전에 이르게까지 만든다. 그러다 전쟁으로 노든이 있던 동물원이 파괴되면서 노든은 다시 한 번 세상밖으로 나서게 된다. 치쿠와 버려진 알을 데리고. 치쿠는 죽는 순간까지도 펭귄알을 품었고 노든은 그렇게 태어난 펭귄과 함께 바다를 찾아떠난다.



책을 읽는 내내 자꾸만 눈물이 나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은 노든이 코끼리 고아원을 나와 가족을 만들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아내를 잃는 그 순간은 터져나오는 울음에 책을 계속 이어갈 수 없었다. 상처입은 채로 동물원에 가게 된 노든이 앙가부를 만나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지만 또다시 친구를 잃게 된다.



하지만 노든은 살아남은 것이 정말 운이 좋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p.40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고통스럽고 후회와 자책으로 가득찬 노든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포기할 수가 없어. 왜냐면 그들 덕분에 살아남은 거잖아.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하는거잖아. 그러니까 안간힘을 써서, 죽을힘을 다해서 살아남아야 해.”



그들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노든과 스스로 살고 싶어서 악착같이 살아낸 어린 펭귄. 너무도 다른 둘이 바다를 찾아떠나는 여정이 자꾸만 먹먹해져서 혼났다. 노든을 지키기 위해 할 줄 아는 거라곤 똥뿌리는 것뿐인 펭귄의 모습에도, 나도 그래라고 대답한 노든의 모습에서도, 복수하지 말고 같이 살자고 말하는 펭귄의 말에도 눈물은 시도때도 없이 흘러내렸다.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윔보와 치쿠가 버려진 알을 품어 준 것부터, 전쟁 속에서 윔보가 온몸으로 알을 지켜 내 준 것, 치쿠가 노든을 만나 동물원에서 도망 나온 것, 마지막 순간까지 치쿠가 알을 품어 준 것,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노든이 있어 주었던 것……. 그 모든 것이 기적이라는 단어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p.94



안전하다 생각했던 동물원에서 나와 홀로 나아가야 할 수많은 긴긴밤이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길로 두렵지만 긴긴밤을 견디며 찾아갈 것이다.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서.

우리를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게 하는 것은 내 옆을 지킨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힘을 줄 것이고 나 역시도 그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저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함께하는 삶의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고, 그렇게 긴긴밤을 보내며 반짝이는 무언가를 찾게 될 거라고 말이다.



나는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나간 노든의 아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직 죽지 않은 연인을 뒤로하고 알을 데리고 도망쳐 나오던 치쿠의 심정을, 그리고 치쿠와 눈이 마주쳤던 윔보의 마음을, 혼자 탈출하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던 앙가부의 마음을, 코끼리들과 작별을 결심하던 노든의 심정을 이해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p.124



노든의 이야기와 함께 아름다운 그림들이 있었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였고 앞으로 이어질 긴긴밤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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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3-06-09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예전에 독서괭 님 서재에서 감동적이었다는 글을 읽고 한 번 읽어보려고 찜했었던 책이네요.^^
아...병렬독서!!! 한 권 곧 추가될 것 같네요ㅋㅋㅋ
근데 잉크 글자색도 이쁘군요?^^

하리 2023-06-09 21:33   좋아요 1 | URL
오래오래 여운이 있는 책이었어요 추천추천🥰 제가 파랑계열을 좋아해서 잉크가 파랑쪽이 많더라고요 히히 쨍한 파랑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