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오늘도 입을 옷이 없네! - 내가 사랑한 옷들은 어디로 갔을까?
김현경 외 지음 / 웜그레이앤블루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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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오늘도 입을 옷이 없네>




나의 옷장을 열어본다. 나의 옷에 담긴 이야기를 써본다.


<내가 좋아하는 옷, 나와 잘 어울리는 옷>
어릴 때는 잘 꾸미고 다니질 않아서 옷에 특별히 관심이 없었다. 지금도 잘 꾸미는 편은 아니지만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았다. 원피스를 주로 입는다. 좋아하는 스타일은 후드에 반바지, 반소매에 가디건, 자켓에 슬렉스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해서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나와 잘 어울리는 건 원피스였다. 다행인 건 원피스를 입은 내가 마음에 들고 좋다는 것이다. 안 맞는 옷이나 안 어울리는 옷을 내내 입어보고 실패하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좋아하니까 나만의 스타일을 고수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이뻐보이기도 하고 잘 어울리게 되기도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와 잘 맞는 사람, 나와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와 잘 맞는 건 아니다.  내게 잘 어울리는 옷을 찾았듯이 관계 역시 만나고 헤어지고, 즐겁고 슬프고 화나고 애틋한 시간을 거쳐 서로에게 맞는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 나와는 안 맞는구나, 어울리지 않는구나 깨닫고 멀어지게 되기도 한다.


<옷은 추억을 담고>
옷에는 기억이 묻어있다. 행복했던 순간들, 좋아했던 사람들, 설렜던 장소들. 그 기억을 떠올리면 결국은 사람이 떠오르고 그러면 그 때의 옷 역시 떠오르게 된다. 어릴 때는 검정색을 좋아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빨간 색 옷을 좋아하게 되었다.(좋아하는 색은 보라색이지만 안 어울려!) 추억으로 남은 순간들을 떠올리는 빨간 옷이 있다. 
하얀 눈 세상이었던 오타루에서 빨간 야상점퍼를 입고 있었다. 12월 31일, 그 해를 보내던 순간 새하한 세상에 눈에 띄는 빨간 색. 그 풍경은 오래오래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마음을 다쳐 걷고 걸었던 날들이 있었다. 수목원의 나무들, 천변 가득한 꽃밭을 찾아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그 풍경들이 나를 위로했고 걷는 동안에는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그때 5월의 꽃밭에서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안개꽃으로 뒤덮인 꽃밭에 빨간 가디건을 입은 내가 있었다. 사진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었는데 그 뒷모습이 참 마음에 들었다. 나도 나를 예쁘게 볼 수 있구나. 그러고보니 나는 뒷모습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동생이 찍어준 벚꽃길의 뒷모습도 빨간 가디건이었다. 나의 빨간 가디건을 예쁘게 봐주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옷장을 들여다보며>
옷이 나를 보여주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옷으로도 보여지는 것이 있겠지만. 옷으로 마음을 살 수 있다면 실패하지 않는 관계는 없겠지. 관계도 사랑도 늘 어려운 나는 김현경 작가의 '사랑의 모양' 티쳐즈가 갖고 싶다. 나도 그 작은 희망을 갖고 싶다. 하지만 그 티셔츠가 아니어도. 손현녕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어떤 옷보다 어떤 마음을 걸치고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면서 마음에 소중히 여겨야할 가치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며 살아간다면 어느새 내게도 사랑이 찾아와 있겠다. 


근데, 내일 뭐 입지?


웜그레이앤블루 서포터즈로 도서를 제공받아 리뷰를 작성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랑 잘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가진 저울은 기준이 되는 제자리에 멈추지 못하고 계속 흔들리는 망가진 추가 들어있는 것 같았다. 서로에게 소중해지는 관계는 어떻게 생기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꾸 안 맞는 옷을 입어보느라 지쳐갔다. p.16 - P16

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감정이 묻은 옷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남았고, 응원과 믿음이, 나를 오늘에 있게 한 슬픔이 남아있다. 누구나 입기에 무엇보다 평범한 대상, 무엇보다 평범한 행위이지만 각자 전혀 다른 경험을 간직하게 하는 것이 옷으로부터 나를 만들어온 순간을 본다. 옷장을 정리하면서 그것들을 이야기로 압축해 남긴다. 더 이상 입을 수 있는 옷이 아닌, 이제는 이야기로 남은 것을. p.66 - P66

_ 반바지가 하나둘씩 늘어나고, 그 반바지들은 나의 공간에 쌓이기 시작했다. 반바지들과 함께 우리가 지낸 시간도 사진도, 많은 것이 쌓여가며 몇 계절이 지났다. 나를 살아 있게 한다 생각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살고 싶지 않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나는 그 어느 반바지도 돌려주지 않았고, 못했다. p.83 - P83

_ 사랑에 자주 실패한다. 성공한 사랑이 얼마나 있을지 싶기도 하지만, 내 사랑만은 언제나, 그리고 훨씬 자주 실패하는 기분이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고, 좋아하고,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농익고, 만나거나 만나지 않거나, 어째거나 실패라 불릴만해 어떻게 지워야만 했다. 이런 ‘사랑의 모양‘은 내가 그려 만든 티셔츠의 모습과 같다. 모두 다른 모습으로 쓰이고 또 다른 모습으로 지워진다.
재은이 제안한 ‘살려둔 사랑‘ 그러니까, ‘지우지 않은 사랑‘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글로 쓰고, 말로는 많이 하지만 모든 사랑이 어렵고 두렵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서로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지우지 않은 사랑은 내게 어떤 작은 희망 같은 것이다. 사랑을 찾을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 P103

많은 날이 지나도, 여전히 그 지우지 않은 사랑 하나에 헤매고 있을까. 아니면 그 사랑을 지우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p.103 - P103

_ 인간이 궁지에 몰렸을 때 가장 탓하기 쉬운 것은 먼저 남, 타인일 것이고 그다음은 환경과 나의 외적인 요소들일 것이다. 나는 상대보다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찾기 시작했고 탓하기 좋은 옷에다 괜한 화풀이를 해버렸다. (...) 남자친구의 사랑스러운 말에 우리는 어떤 옷보다 어떤 마음을 걸치고 살아야 하는지, 나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p.166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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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냄새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9
김지연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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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의 냄새, 김지연


어쩔 수 없이 악취가 되어버린,

불가해에 압도당한 인물의 불가해한 삶을 이해하기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 갑자기 후각을 잃어버린 K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기억의 냄새들이, 일상 속 주변의 모든 것이 악취로 변하는 불가해에 압도당한 인물의 초상을 그린 소설이다


K는 더위도 추위도 잘 타지 않고, 맛에 관대한 편이라 맛없는 음식이 거의 없으며 비염인데다 후각도 예민하지 않았다. 그런데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후에 갑자기 후각을 잃어버렸다.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맡았던 바다냄새를 맡을 수 없게 되자 어쩐지 서운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후각이 돌아왔지만 악취가 딸려왔다. 악취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자신의 집에서 가장 많이 맡을 정로도 집조차 악취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향기보다는 냄새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오감중에 시각적인 것이 가장 강하겠지만 난 냄새에 민감하다.(하지만 오감 중에 단 하나 고르라고 하면 시각) 아주 예민해서 어떤 냄새를 못 맡고 구역질을 하거나 그 정도는 아니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아무래도 채취에 가깝다.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을 좋아하니까. 좋아하니까 좋은 냄새가 나기도 하고 좋은 냄새가 나서 좋아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만이 풍길 수 있을지도 모르는 고유한 채취. 얼굴이나 지문, 목소리처럼 어떤 사람만이 풍기는 고유한 냄새.p.105)'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품 안이나 아기냄새, 뽀송뽀송한 빨래냄새, 좋아하는 섬유유연제나 향수 냄새 등등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에는 애정이 묻어 있다.


K의 코로나바이러스 후유증이 무향에서 악취로 변하는 순간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매우 와닿았다. 냄새를 맡지 못할 때는 바다냄새부터 그동안 향으로 마셨다는 걸 깨닫게 된 차, 사랑하는 P의 냄새까지 자신의 좋아했던 것들을 잃어버린 것이 괴로웠다. 그러나 악취를 맡게 된 후로 일상이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시도때도없이 음식을 버리고 악취가 났던 곳에서 있을 수 없다. P는 자신은 맡을 수도 없고 나지도 않는 악취때문에 K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만약 K의 후각이 영영 회복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K는 점점 더 신경질적인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대화주제는 온통 오늘 악취를 맡은 장소와 횟수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이 아프다는 건 일상생활을 완전히 다 장악해버리는 일이었다. p.99'


천희란 소설의 해설에 따르면 <태초의 냄새>는 후각이라는 감각을 경유해 기억과 상실, 계급과 혐오, 이해와 몰이해, 직면과 회의 순간들을 촘촘하게 그려냈다고 한다.

K가 결국 더이상 악취를 맡지 않고 원래대로 돌아왔을까. 잘 모르겠다. 악취는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다. K가 냄새를 맡고 또 맡으며 악취와 함께 살아간다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삶은 이해하기 애쓰는 거라고.


번외로 P의 질문이 인상깊어서 생각해봤다.




"만약 내가 죽었어. 근데 유품 두 가지 중에 딱 하나만 골라서 가져갈 수 있대. 내 비밀 일기가 든 메모리카드랑 내가 자주 입어서 내 냄새가 밴 셔츠. 넌 뭘 가져갈래?" p.104


나는 셔츠를 선택할 것이다. 냄새는 기억을 불러오는 장치다. 셔츠만 있다면 너를 만날 수 있으니까. K의 상상처럼 일기를 읽고 배신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글은 언제든 다른 의미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은 언제나 나만의 것이므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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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1-09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사진도 예쁘고, 그리고 필사한 페이지도 참 좋네요.
하리님의 캘리그라피 글씨는 예쁘고 깔끔한 느낌이 들어요.
손글씨 잘 쓰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서인지,
부러운 마음으로 사진 한번 더 봤습니다.^^
하리님, 따뜻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리 2023-12-08 21:31   좋아요 1 | URL
이제서야 댓글을 달아요. 서니데이님의 한결같이 다정한 댓글, 늘 감사해요!
무척 추웠다가 겨울인가 싶게 또 따뜻해요. 이럴 때 오히려 감기걸리기 쉬운 거 같아요.
감기 조심하시고, 늘 무탈하시길:)
 
좋은 곳에서 만나요
이유리 지음 / 안온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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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곳에서 만나요, 이유리


<달콤한 꿈과 서늘한 현실 사이

서러움과 반짝임을 모두 머금은 아지랑이 같은 빛의 세계


찰나의 순간, 생의 끝에 새겨지는 깊은 사랑의 흔적들>





 


〈오리배〉


 


지영은 엄마와 희재를 만나고나서야 안도한다. 남겨진 자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일어설 수 있게 되었을 때에야 마음 편히 떠나게 되는 것이었다. 죽고나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나니 죽고난 이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남아있는 사람과 놓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나를.


〈심야의 질주〉


 


인간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너지는 것은 내 곁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인 것 같다. 부와 인기를 모두 가졌던 배우 강산은 이제 주변에 아무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구도, 자신에게 열광했던 팬도. 대저택같은 집에 홀로 살아가며 누구도 만나지 않고 그저 시체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해남이 죽고난 후 찾아간 강산은 그 옛날 자신이 부러워하며 동경의 대상이었던 강산이 아니었다. 고작 우울증 때문에 모든 걸 다 놓아버리다니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강산을 지켜보며 깨닫게 된다. '외롭고 괴로운데 어디 말할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거지요.(p.94)' 덩그러니 혼자 남아 외롭고 괴로운 자신의 우상 강산의 마음을.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곁에 없는 경우도 있겠다.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삶을 살아갈 때 결국 필요한 건 사람인 것 같다. 서로를 다독여주고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해도 작은 힘이라도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다.


〈세상의 끝〉



혜수와 지우는 <심야의 질주>의 해남이 젊은 시절 사고를 내고 도망쳤던 그 사고의 여자 둘이었다. 연작소설이라 각각의 단편마다 주인공들의 연결고리가 있다. 혜수는 늘 죽고 싶어 했고 지우는 그런 해수를 사랑해서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했다. 



"매일 그런 날들이었다. 모든 것이 좋아질 듯 좋아지지 않았고 다만 혜수가 좋았던 날들. 외롭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혜수의 마음이 내 마음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다만 혜수가 있어서 조금 덜 외로웠다. 그거면 됐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p.153"



혜수와 지우는 다른 누군가를 찾아가지 않았다. 세상의 끝과도 같은 절벽 앞. 고맙다는 마음. 그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잘 살고 있었지만 이대로 끝나도 좋다는 마음. 그 역시 사랑이라고.


<아홉 번의 생>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단편이다. 혜수와 지우가 돌보던 길고양이. 고양이가 자신과 다른 존재인 선인장을 사랑하게 되면서 몇 번의 생을 거쳐 선장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우리는 모두 다르고 낯선 존재들이기에 누군가와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찾기위해 애쓰기도 한다. 사랑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것도 고양이에게서!!

사랑은 상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왜 이런 하잘것없는 사실이 이토록이나 기쁘고(p.173)' '같은 이야기를 수백번 들었지만 매번 새로웠으며(p.176)' 사랑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땐 '내가 그 애와 같은 선인장이었다면(p.179)' 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아홉번째 생에 이르렀을 때 다시 만나게 된 무늬벤자민나무로 태어난 선인장. 고양이는 우리에게 알려준다.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사랑이란 매일 함께 하고 싶은 것, 모든 것을 알고 싶은 것, 끊임없이 생각나는 것이라고. 물론 어느 부분에선 옳았지만, 그것들은 사랑이라는 거대한 우주의 아주 작은 별 하나에 불과했다. 별 하나가 없다고 해서 우주가 우주가 아닌 것이 되지 않듯이 사랑도 그랬다. 사랑이 무엇이라고 정의해버리는 순간, 사랑은 순식간에 작아지고 납작해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가 해야할 일은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저 수천만의 행운이 겹쳐 만들어낸 오늘을 최대한 즐기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 p.205'



이 문단이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랑은 그저 지금 이 순간이라고. 오늘, 이 순간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 그게 전부라고 말이다. 


〈영원의 소녀〉



수정은 <아홉번째 생>의 고양이가 세번째 삶을 살았을 때 함께했던 주인이었다. 수정은 죽고난 후 옛 연인 정민을 찾아간다. 자신을 두고 떠난 정민이 행복하기를 바라지 않았고 적당히 힘들기를 바라기는 했다. 그 바람은 적당히였는데 정민은 아이를 사고로 잃고 그 진상규명을 위해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정신의 자살시도를 목격하고 들리지도 않을 말들을 중얼거리며 막아서려 한다. '야, 이러지 마. 이런다고 뭐가 되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두고 봐라, 나아질 거야. 영원히 괴롭진 않아. 뭐든지, 즐거운도 괴로움도 영원하진 않아. 그러니까 얼마나 다행이냐.p.253' 이미 죽어서 귀신이 된 수정이 하는 말이라 웃기면서도 씁쓸했다. 어쩌면 수정 자신에게 했어야 하는 말은 아니었을까.

 

〈이 세계의 개발자〉



<영원의 소녀> 수정의 애인 예진은 게임 개발자로 갑작스레 과로사한다. 죽었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보고 싶은 사람도, 원하는 소원도 없는 사람. 그런데 예진은 귀신이 되었다? 예진 스스로가 납득하지 못하기에 누군가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이 게임 속에 숨겨둔 토끼를 만나면서 이 세계의 개발자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된다.

주인공들 모두 삶에 크게 미련이 없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도 아쉬워하지도 않는 사람들. 그런데 죽음 이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시간과 몸이 존재했을 때는 몰랐던 것을. 그리고 그것을 해냈을 때에게 사라지게 되는 것이었다.

삶은 항상 비슷하게 흐르고 일상을 지루하며 특별한 이벤트없이 평온하게 흘러간다. 보통의 평범한 우리가 살아가는 삶. 그 삶 속에서 우리는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기쁨과 행복, 슬픔과 고통이라는 다양한 감정을 나누며 끈질기게 사랑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든 삶이든 일이든 그 무엇이더라도.

신이 세상을 참 아름답게도 만들었나보다. '어쩜 그렇게들 끈질기게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지.p.289'



그래요. 끈질기게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서 살다가, 좋은 곳에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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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산문집
은희경 지음 / 난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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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 못버린 물건들, 은희경


"이런 순정을 잊기는 어려운 일이다"

효율과는 상관없는,

오래된 물건이 건네는 조금은 소심한 위로!

12년 만에 선보이는 은희경의 신작 산문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나에겐 또 못 버린 물건들이란 제목부터 이건 사야해!를 외치게 했다. 게다가 은희경 작가의 산문이라니 안 살 수가 없었다.

오래된 물건들 앞에서 생각한다. 나는 조금씩 조금씩 변해서 내가 되었구나. 누구나 매일 그럴 것이다. 물건들의 시간과 함께하며. p.11

오래된 물건들을 보면 물건 그 자체이기보다 그 물건이 내게 온 경로와 그 순간들을 함께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물건이 물건이 아니라 나에게 하나의 소중한 추억이 되기도 한다. 은희경 작가의 물건들을 술잔부터 구둣주걱, 인형, 목걸이, 달력 등 꽤 다양한 물건들이 등장한다. 직접 산 것도 있고 선물받은 것도 있다. 작가님이 등단한지 꽤 되었으니 많은 시간과 경험이 있을테지만 정말 다양하고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몽블랑 형광펜 잊지못해...)

나는 한때 비가 오는 날마다 한 사람을 생각했다. 바로 내가 우산을 선물했던 사람. 오늘 그 우산을 쓰고 나갔을까. 마음에 들었을까. 그런 날 외출이라도 하게 되면 또 생각했다. 지금 그 사람도 내가 선물한 우산 아래에서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이런 짐작은 우산이 비 오는 날에만 사용되는 물건이기에 가능하다. 비 오는 날에는 내 우산을 보게 마련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우산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p.40

어떤 선물은 그 순간으로 돌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선물을 많이 주고받았을 때 더 기억이 선명해지는 것 같다. 내 우산 잘 있으려나.

선물이란 인사를 건네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물건에 만족하고 즐거워할 것을 생각하면 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지는, 그러니까 그냥 좋아하는 마음인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정확하게 생각하려고 애쓰는 조금 전 내 소설 주인공의 말을 다시 인용해보자면 나는 ˝가볍게 살고 싶다. 아무렇게라는 건 아니다˝. p.54

(생각해보니 선물 많지않지만) 모든 선물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게 선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엽서와 편지이다. 특히, 해외에서 날아온 편지 너무 소중해. (언니 보고 있나요?) 지난 날의 쓸모없는 편지도 있을 수 있겠으나 지나간 인연이든 지금도 소중한 인연이든 편지 속에 담긴 마음을 버리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중, 고등학교 시절 의미없는 크리스마스 카드도 갖고 있다. 그 친구들는 알까. 내가 너희의 카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언젠가 버릴 날이 오겠지만 다시 꺼내보고 이불킥을 날리는 편지나 울고싶어지는 편지도 지금은 그저 소중한 것들이다. 이미 끊어진 인연이라 할지라도.

물건들을 버릴 수 없게 만드는 데에는 거기 깃든 나의 시간도 한몫을 차지한다. 물건에는 그것을 살 때의 나, 그것을 쓸 때의 나, 그리고 그때 곁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억이 담겨 있으며 나는 그 시간을 존중하고 싶은 것이다. p.153

선물 외에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 중에 오래된 물건은 뭐가 있을까 찾아보았다. 산 건 아니지만 고등학교 명찰도 갖고 있고 오래된 편지들, 이십대 초반에 썼던 노트, 각종 기념품들, 수많은 사진들, 망가진 카메라, DVD나 CD, 너덜너덜한 만화책, 인형, 손수건, 좋아하는 책들까지. 잡다한 것들이 집안 곳곳에 쌓여있다. 정리를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리를 하려고 하면 이건 이랬지, 저건 저랬지 하며 다 넣어두고 버리지 못하다가 지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많이도 버리고 버렸다고 생각했던 여전히 낡은 물건들이 많다. 누군가에게 쓰레기일 수 있는 물건들이 나에게 그 시간과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방식이다. 소설 <이끼숲>에서 소마가 친구들이 자기를 잊으면 어떻게 하지라며 걱정하다가 내가 기억하면 되지라고 말하던 장면을 생각한다. 내 기억에 담아두고 있으니 그 시간은 아직 내게 살아있다.


여전히 쓸모없어보이는 것들을 많이 산다. 작고 귀여운 것을 좋아하고 여전히 문구와 책들이 좋다. 그게 왜 필요하냐고 묻는 사람하고는 친해질 수 없을 것 같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우리는 사람과의 관계든 물건이든 필요한지 아닌지로 나누기 십상인데, 그 윗단계에는 '그냥'이라는 경지가 있다, 고 주장해본다. p.221


작가님의 그 경지, 아주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냥 좋은 게 있는거다. 나는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그냥 좋은 사람, 그냥 좋은 물건이 좋다.


읽다보면 작가님이 자신의 작품 속 문장을 인용하여 이야기하거나 작품 속 관련된 물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출저를 정확히 써놓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책을 꺼내놓았다. 조만간 그 책의 필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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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간힘
유병록 지음 / 미디어창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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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간힘, 유병록

_ 슬픔 속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소중한 것을 다시 잃지 않기 위해 내딛는 한 걸음.

갑작스레 아이를 잃게 된 시인의 슬픔을 토해내는 글이 참 아프고 아팠다. 자식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이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자신이 치욕스러웠다던 시인의 마음이 절절해서 마음이 저렸다. 그러나 치욕스럽다는 이유로 소중한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처럼 슬픔과 고통을 딛고 나아가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다.

인간이 견디는 고통과 슬픔은 누구나 그 크기가 크겠지만 자식을 잃을 때의 고통이 가장 크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자식을 먼저 보내고 가정이 깨지거나 무겁고 가라앉는 기운을 떨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누군가의 죽음은 다시 행복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불행에 잠식되기 쉬울 것이다. 시인 역시 불행이 전염될까 두려워하고 주변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하며 불행 속으로 스스로 더 빠져들었다. 그러나 곧 깨닫게 된다 위로라는 것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의 슬픔과 고통을 알아주고 일으켜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찾아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위로가 필요하다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찾으러 가야 한다. 위로는 어딘선가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위로는 주변 사람들 마음 속에 있을수도 있고, 새로 만나게 될 누군가의 마음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책에서 마주칠 수도 있고, 영화관이나 산책로에서 만날 수도 있다.
나는 이제 위로를 찾아서 한 발을 내딛는다. p.43

아들의 죽음 이후 아내와의 절망적인 시간에 대해서도 풀어놓는다. 아내 앞에서만 울다가 울지 않고 강건하게 살자고 얘기하는 아내에게 서운했으나 서로의 힘든 마음을 이해하고 울지 않기로 한다. 그러나 울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 커다란 고통과 슬픔 앞에서 참고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참지 않고 울음을 토해내고 마음껏 울고 슬퍼했을 때 슬픔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것 같다. 애써 슬픔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슬픔의 공간에서 슬퍼하면서 슬픔을 천천히 보내주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들을 잃었다.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이제 행복한 날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렇다고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행복 대신 보람이 있는 삶을 살기로 했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로, 약속했다.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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