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32
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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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최현우







시인이 이십대를 지나는 동안 써왔던 시들을 모았다. 밝고 빛나는 미래가 기다리는 이십대의 청춘은 아닐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말을 꽤 싫어하지만 시인의 이십대는 슬픔과 아픔에 젖어있었던 것 같다. 어두운 방구석에서 홀로 있거나, 통증이 동반되는 불행의 시간들, 깨진 컵 같과 같은 아픔이 있다. 가장 밝은 것은 두들겨맞아 부서지고 피멍 든 채 절뚝거렸으므로(p.87 와디 럼)

한밤중에 이불 속에서 튀어나오는 후회(p.108 추억과 추악), 아끼던 빛깔을 쏟아버렸으며(p.79 회색이 될까), 불행한 말들만 가득했던 나날들이었겠다.
그러나 시간은 흐르고 견디고 버티다보면 지금에 와 있겠다. 두들겨 맞아 부서지고 피멍 든 채 절뚝거려도 당신에게 빛을 주려고 담았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망가지지 않은 것들을 주고 싶었다는 시인의 말이 생각한다. 망가져도 괜찮다고. 망가지지 않은 것들을 주고 싶으 그 마음을 기억하고 있다고.

“반짝거리는 모든 세상에는 좋은 슬픔”이 있으므로
“날씨는 태어난 곳의 기억을 버리지 않”으므로
“아름다운 마음들이 여기 있겠습니다”
#출판사리뷰



불을 끈다
방구석에 앉아 무릎을 당겨 얼굴을 묻는다
혼자서,

p.17 #젓가락질가운데
통증을 빻아 만든 가루
시간에 불행을 섞어
한 웅큼 집어 바르고
모르는 거리에서 몸을 말리면

p.24 #회벽
모두 집어던졌지
그때 깨진 컵은 내 살을 기다리며
서랍 속에서 뿔이 되었던가
접은 신발 벗고
피 묻은 유리를 꺼내는 일
아픔은 꺼낼 수 없는 일
p.42 #컵
어디로도 가지 않았는데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없는 사람처럼
물기 없이 말라붙은 얼굴에는
영혼 대신 페인트를 바른
하나의 표정
하나의 표면
p.48 #목각인형

그러나 아직은,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둥글게 따라 눕
는다. 사람이 내 쪽으로 돌아누워 아무말 없이 손으로 귀
를 막아준다.
p.77 #kissingagrave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가장 아끼던 빛깔을 쏟아버렸다
p.79 #회색이될까

빛을 담았어
당신에게 주려고 했어
내게 가장 밝은 것은
두들겨맞아 부서지고
피멍 든 채 절뚝거렸으므로
그걸 담아 팔려고 했어
p.87 #와디럼

후회는
지키지 않은 약속의 잘려나간 부분들로 만들어지므로
한밤중의 이불 속에서 섬뜩하게 튀어나오고
p.108 #추억과추악

우리도 그럴 거야
돌려 말한다고 해서 돌려지지 않는 대화가 있다
내가 나에게 속삭이는 마음은 왜
불행한 말들만 있을까
p.114 #선한종말

슬프지 않다
울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잠깐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그날 밤은 그림자가 그림자를
발밑에 두고 갔다

어떤 마지막보다 그 처음을 생각한다
생각이 난다는 건
자꾸 반송되는 주소 하나가 있다는 건
보낸 적이 없는데 돌아오는
이름과 글씨와 창백한 종이들
p.116 #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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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큐큐퀴어단편선 2
조남주 외 지음 / 큐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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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최진영 외








너무 환하지 않게, 너무 그늘지지 않게

삶을 제자리로 데려가는 아홉 편의 퀴어 소설



새로운 가족의 탄생 

– 조남주 〈이혼의 요정〉



은경은 이혼을 했고 수연은 이혼을 하는 중이다. 수연의 남편은 은경이 수연을 부추겨 이혼을 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은경의 남편은 은경에 묻는다. 아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럽겠냐고. 



“두 사람이야 그렇다 치고 애들은? 애들은 이 상황이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다인이는 그 여자를 뭐라고 생각해?" 

“엄마라고 생각해. 은경 엄마라고 부르고. 효림이는 나를 수연 엄마라고 불러. 걔들 아무렇지도 않아. 우리 넷 지금 되게 좋은데? 왜 우리가 불행하고 혼란스럽고 우울할 거라고 넘겨짚고 그러지?"  p.35



우리가 정상가족이라 부르는 엄마, 아빠, 아이 둘의 4인가족. 그 안에서도 가장 약자는 아이와 여자. 엄마 둘과 아이 둘이 이혼을 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은 사회가 생각하는 정상가족에서 벗어났겠지만 오히려 자유로운 새로운 가족의 탄생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상실한 자들이 품은 단 하나의 문장 

– 김현 〈고스트 듀엣〉



석찬을 순식간에 철들게 한 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었다면 어땠을까. p.44



인생은 언제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

그래서 오늘도 무너졌구나.p.45



죽은 연인의 홀로그램과 함께 여행하는 남자의 이야기. 죽은 연인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애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인생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어도, 무너졌다 하더라도 우리는 뒤돌아 과거로 갈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고 오늘을 살아간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작가의 말이 가장 마음아팠다. 사랑은 사랑일 뿐인데 투쟁으로 얻어내야 하고 숨겨야 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작가의 말대로 누구나 사랑한다면 마음껏 손잡고 다니기를.



사랑이나 우정으로 이룩되는 공동체의 마음도 있을테지만, 투재이나 연대로 이룩되는 연인들의 마음도 있을 것이다. 사랑을 사랑이라 말하기 이전에 투쟁이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을, 존재를 존재라 말하기 전에 존재-한다, 라고 말해야 하는 사람들을, 결혼을 결혼이라 말하기 전에 동성 결혼이라고 밝혀 말해야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일이 여전히 문학의 몫임을, 믿고 싶다.

세상의 모든 짝꿍이 자유롭게 손잡을 수 있기를.

#작가의말_김현





내 안의 숨겨진 정원들 

– 윤이형 〈정원사들〉



데브는 달랐다. 내가 진짜 나를 보여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연애가 싫은 게 아니었다. 그저 데브가 원하는 연애와 내 연애가 달랐을 뿐이다. 하지만 그 다름이 그렇게 힘들었다면, 결국 그 애를 밀어내며 선언한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내가 그토록 소중했다면, 지금 여전히 데브를 떠올리며 미련인지 뭔지 모를 이 텁텁한 감정에 젖어 있는 나는 무엇일까. p.85



저는 기뻤어요. 그 정원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한 존재로서 온전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로 갈 수도 없고, 유리를 깨거나 문을 만들어 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냥 그게 있다는 게 좋았어요. 이렇게밖에 설명이 안 돼요. p.98



사람에게 인정이란 무엇일까. 왜 혼자서도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아도 가끔은 참을 수 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찔리고 피가 나고 붕대를 감을 일이 생길 걸 알면서도. p.100






데브야, 듣고 있니. 나는 여기서 이렇게 소리치고 있고 더 이상 죽고 싶지도 무리해서 행복해지고 싶지도 않아. 나는 그냥저냥 살아갈 거고 가끔은 오늘처럼 웃기고 유치한 영화를 찍을 거고 낯선 사람의 어깨에 기대 속을 털어놓았다가 후회하기도 하면서 조금씩 더 괜찮아질 거야. 너 없이. p.110




효주는 퀴어 퍼레이드에 갔다가 직장 동료인, 무려 팀장님을 만나게 된다. 애인과 헤어지고 지기 싫어서 퀴어 퍼레이드에 왔다는 효주와 결혼했지만 그래서 퀴어 퍼레이드에 오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래영. 둘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자신의 마음을 풀어낸다. 래영이 말했던 정원에 대해 생각한다. 사람들 마음 속에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정원이 있다. 래영의 정원은 숨겨진 정원이 있었고 그 정원을 알게 되어 기뻤다고 말한다. 이제서야 자신을 한 존재로서 알아차렸다고. 정원에서 나오지 않고 정원을 꾸미고 그곳에 안주하며 살아갈 수도 있겠다.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래영은 정원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으나 남편은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효주는 자신의 정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에서 바라보기만 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하고 그러면서 그런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까봐 숨기기도 한다.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나는 나일뿐이고 나 스스로 알아주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인정받고 싶고 드러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마음을, 정체성을 드러내고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환영받지 못하는, 어쩌면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는 퀴어의 삶과 사랑이 틀린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님을, 보통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평범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덧붙여 윤이형의 작가의 글이 다시 세상에 나오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다고 종종 말하지만 그럴 때조차 말없이 인정받고 싶어 하고,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어딘가에 기대고 싶어 하고, 자신이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다고 느끼면 힘들어합니다. 그런 게 인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작가의말_윤이형




백 년 동안의 퀘스처닝 – 김성중 <에디 혹은 애슐리>



'나'는 스스로 아들이 아니라 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마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엄마는 그걸 이제 알았냐고 되묻는다. 인간이 태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주어진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 건가. 세상이 멈췄다. 더 이상 인간이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세상. 멈춰버린 세상에서 '나'는 여러 젠더를 횡단하며 실험해보기로 한다. '나'는 자신의 몸이 자신과 맞지 않다는 껄끄러움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세상의 시간은 다시 흐르고 '나'는 이제 불면에서 벗어난다. 엔도의 죽음 이후로. 이제 '나'는 죽을 때 나 자신으로 죽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성전환이나 젠더에 대해 깊이있게 알지는 못하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살아가고 싶어한다. '나'는 에디이거나 애슐리이거나, 둘다이거나 상관없이 그저 나 자신으로 살아가게 된 것처럼. 자신의 존재가치와 정체성, 온전한 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뿐이다.



"엄마는 네가 원하는 삶으로 가봤으면 좋겠다. 잠도 잘 자고, 애인도 생기고, 애인이랑 싸우기도 하는 뭐 그런 삶 말이야." p.121



죽지 않는 세상에서 여전히 시스젠더로 남아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더 신기했다. 어떻게 아무런 의심 없이 주어진 성별대로만 살 수가 있지? 그게 진짜 자신이라는 것을 무엇을 확신하지? 내게 젠더는 하나의 나이테에 불과했다. p.130



만약 엔도가 인간이라면 어떤 젠더였으면 좋겠어?” “저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 되고 싶어요. 몸에 털이 나 있고 꼬리도 있는 육식동물, 이를테면 표범이나 재규어 같은 고양잇과 동물이요.” 인공지능이 인간이 되고 싶어 하리라는 것은 선입견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러나 이 엉뚱한 소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p.137



“너는 유일하게 혼자다. 하나, 유일, 혼자.”

나를 증명하고 너를 설득하기 위해 – 한유주 <원을 구하기 위하여>



내 안에 자리 잡은 편견 – 최정화 <라디오를 좋아해?>

명주는 라디오 진행자로 라디오를 좋아하고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그런 명주에게 라디오작가 우희가 거슬린다. 우희는 라디오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 때, 사이비 이단교회의 전단지를 나눠주던 우희를 발견하고 난 후였다. '명주는 그런 우희를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고 라디오를 싫어한다고 믿으며 미워한다. 기어이 우희가 그만뒀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싸워오던 편견을 고스란히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내가 우희를 바라보는 시선이 편견이라니. 편견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편견은 나와 나경이 열렬히 싸우던, 싸우고 있던, 싸워야 했던 대상이다. 편견으로 인해 우리가 얼마나 많이 울었고 무너졌고 상처받았는가. 그런데 그게 내 안에 이렇게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p.206



레즈비언인 명주는 편견으로 인해 울고 무너지고 상처받아놓고 자신이 편견어린 시선으로 우희를 바라봤다는 사실에 당황한다. 게다가 애인인 나경이 자신과 헤어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제대로 된 대화없이 자연스레 지내고 있다.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그 시간이 덜 소중해지는 것은 아니다. 헤어져야겠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진짜로 해어지게 되는 것도 아니다. p.208



누군가를 미워하고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 다를 수 있고 또 같을 수 있다. 누군가를 미워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이 편견으로 바라보는 건 아닌지, 내 시야와 경험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편견의 늪에 빠진 건 아닌지 고민해봐야할 것이다.


“무언가를 버린다면 그건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겠지요”

이상한 나라의 꿀벌들 – 듀나 <바쁜 꿀벌들의 나라>


알콩달콩 중장년 레즈비언 로맨스 – 최진영 〈XOXO〉



나이와 성별을 떠나, 떠나긴 왜 떠나! 누구에게나 사랑은 있다. 사랑은 그냥 아름다운 것이다. 울고불고 싸우고 서운해하고 지지고 볶더라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키스하고 안아주고 사랑하는 두 여자의 이야기. 알콜중독이었던 내가 너를 만나 강해지고 싶었다. 나만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며, 너무 괴롭다고 엉엉 울어버리는 나의 모습이 어린 아이같았다. 마흔 네살의 나이에도 사랑앞에서는 울고 웃고 하는 것이다. 배우자를 동지처럼, 가족까리 그러는거 아니다라는 둥 농담섞인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웃으면 받아준다면 나도 웃고 의아하게 바라본다면 나도 의아하게 바라볼거라는 '나'의 말을 빌려 말한다. 이상한 건 이상하게 바라보는 당신이라고.



아주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고 돌아와 심하게 울었다. 나는 친구들의 대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오랜 친구들이었지만, 우리는 같은 나라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나는 외부인이었다. 타인과의 소통을 단념해가면서도 서로를 믿고 사랑하고 손을 잡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다. 나는 정말 사랑과 믿음이 소중한 가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삶에서 그것들은 점점 희박해졌다. 이미 끝난 소풍인데, 다들 집으로 돌아갔는데, 나만 홀로 남아 보물이 적힌 쪽지를 찾아 헤매는 것도 같았다. p.255



그렇게 살면 답답하지 않아?

너를 걱정하고 싶었는데, 네게 화를 내고 말았다.

네가 나를 알잖아. 그거면 돼.

네 말과 너의 시선, 너의 낮은 목소리 모두 나를 아프게 했다.

어쨌든 가족은 중요하니까.

중요하다고 말하는 너의 표정은 어두웠다.

그럼 거짓말하자. 혼자 사는 친구가 많이 아파서 당분간 네가 보살펴줘야 한다고 해. 사실 그건 거짓말도 아닌걸. 너와 같이 살 수 없어서 나는 많이 아프니까.

너는 쓸쓸하게 웃으며 조금만 더 두고 보자고 했다. 그즈음 내 마음에는 아주 작은 생채기가 났다. 금방 나아 흉터가 될 줄 알았는데, 낫지 않고 지속적으로 벌어졌다. 붉은 피와 흰 고름이 흘렀다. 가끔 나쁜 냄새를 풍겼다. 네가 그 냄새를 눈치챌까 봐 두려웠다. p.271



응. 네가 옆에 있으면 좋겠어. 아픈 나를 안아주면 좋겠어.

네가 와달라고 한다면 나는 가는 수밖에. 나는 너의 늙은 부모님을 생각했다.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친구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너를 바라보는 내 눈빛을 감출 자신도 없었다. 너와 내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한다면 너의 부모님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우리가 말하는 '사랑'과 그들이 듣는 '사랑'은 같은 사랑일까? 여자랑 여자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웃어버릴 것 같다. 터지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의 사랑은 할 수 있거나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는 것. 할 수 없거나 하지 않을 때 그것은 거기 없었다. 너의 가족이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면 나도 미소 지을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면, 나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볼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가요? 당신들도 이상합니다. p.280



사랑하는 마음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그것이 있기에 나를 겨우 견디는 순간이 많다.

(...)

봄은 '아름답다'에서 '아름답지만은 않다'로 기울었다. 봄은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봄과 꽃은 별 상관 없을 수도 있다. 봄이 있고 꽃이 있고, 내가 있고 당신이 있고, 우연히 눈 마주치고 그것이 거기 있음을 알고, 무언가는 무언가를 아름답다 생각할 수도 무심할 수도, 그것이 거기 있기에 아파할 수도, 보았기에 그리워할 수도 있다.

#작가의말_최진영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 정지돈 〈포스트 게이 아포칼립스〉



김현시인의 투쟁, 정지돈 작가의 패배자라는 단어가 씁쓸하다. 투쟁하고 패배자가 되지 않기 위해 멈추지 않고 맞서고 싸우고 나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렇게 얻어내야 하는 사랑. 그래서 정지돈의 글이 읽기는 어려웠지만 이 앤솔로지를 관통하는 문장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해 없이,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p.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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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의 자리 트리플 18
이주혜 지음 / 자음과모음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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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의 자리, 이주혜




너와 나의 자리, 우리의 자리


<누의 자리>


나는 우리 속에 들어간 적이 별로 없어. 누구도 나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환대해주지 않았어. 네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넌 달라. 넌 나를 우리라고 불러주었어. 그런 너를 흔한 말 속에 가두고 싶지 않아. 바흐친이 그랬어. 각 단어는 서로 다른 방향의 사회적 힘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하나의 작은 무대라고. '누'라는 무대에 오직 너와 나, 단 두 사람만 올리고 싶어. 이제 '누'는 너와 나만의 단어야. 내가 그렇게 언명했어. 그 자에서 우리는 함께 춤을 출거야. 그때 너의 눈빛이 얼마나 번들거렸던가. 나는 너의 열렬함이 부담스러워 팔에 솟은 소름을 조용히 쓰다듬었다. p.25


이혼당한 여자, 빨판, 교수 자리 욕심내 꼬시려고 한 여자. 그렇게 환대받지 못한 네가 있다. 그런 네가 죽어도 장례식을 지킬 수도, 뼛가루를 가질 수도, 유품인 만년필을 가질 수도 없었다. 너와 나에겐 자리가 없다. 그런 너에게 나는 자리를 만들어준다. 


<소금의 맛>


걸핏하면 서로의 뺨을 어루만졌다. 로프웨이를 타고 하코다테산에 올라가 야경을 보았다. 하늘에 불꽃놀이가 펼쳐졌던 날에는 저 멀리 검은 물 위로 주황색 불꽃이 밤의 태양처럼 쏘아올려질 때마다 입을 맞추었다. 그런 우리를 이상한 시선으로 흘끔거린 사람들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오직 상대방만 보느라 다른 시선을 알아볼 수 없었다. 신들의 언덕 아래에서 우리는 인간끼리 맘껏 사랑했다. p.59


인간끼리 맘껏 사랑했다는 문장이 오래오래 읽는다. '이 사랑은 고통이다. 그게 이 사랑의 값이고 대가이다. 소금은 짜서 소금이고 이 사랑은 고통이지만 끝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끝내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서로의 언어로 <소금의 값>을 번역하는 일에 몰두하고 그러다 신들의 언덕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둘의 결말이 아름답다.


그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그렇지 않아? p.67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인간끼리. 


<골목의 근태>

왔어?

빛 한가운데 앉아 있던 여자가 너를 반겼다.

춥지?

여자는 앉은 자세 그대로 엉덩이만 움직여 너에게 난로 옆자리를 내주었다. p.83


자리없는 여성들. 자신의 일을 하면 엄마자격을 운운하고, 자신의 몸을 위해 임신을 중단하면 이기적인 여성가 되고, 여성으 욕망이 부정이 되고, 부모와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한 여성의 자리. 여성이 여성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장면은 그래서 애틋하면서 아프다. 제비뜨개방을 찾아가는 길이 언뜻 신비롭고 세상에 없는 환상의 공간으로 가는 길 같다. 그곳에서 함께 리스를 만들고 팥죽을 먹는다. 그곳에선 그저 오롯이 나 자신이다.

이주혜의 소설들은 여성성에 근거해 여성에 부여된 자리들에 대한 고발이자 자리 없는 여자들에 대한 구원의 이야기이다. p.126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사람을 위해 끝내 자리를 마련해주고, 사랑을 하고, 사랑이 멀어지고, 사랑을 되찾고, 따뜻한 환대를 받는 이야기. 인간끼리 사랑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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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과 순간
박웅현 지음 / 인티N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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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여덟 단어』 저자 광고인 박웅현의 신작
그가 손수 기록해온 문장과 주목했던 순간을 담아낸 첫 번째 에세이!


책을 읽고 밑줄을 긋고 문장을 필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끈기없는 내가 오래오래 이어온 나의 삶의 한 줄기 빛같은 취미였다.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글을 잘 쓰고 싶었으며 책 속에서 울고 웃고 아프고 기뻤다. 그 시간들이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시간때우기용이었을수도 있다. 내 삶은 대단히 성공하지도 잘나지도 않았기 때문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문장을, 옮겨적는 이 일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순간순간 나를 살리고 나를 일어서게 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믿고 싶다. 작가의 말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흔적을 엮어서 내는 것은 책 속 한 문장이, 한 편의 시가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꿔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넘어졌다가도 일어나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다. 오늘을 견디고 버틸 힘을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_작가의말 중에서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바라보고,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으로 담고, 찬란한 이 삶을 찬란하다 여기며, 행복에 매달리지 않고 그저 흐르는대로 살아가 수 있기를.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임과 동시에 충분히 가능한 일임을 믿으면서.
이 책을 읽고 알았다. 문장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이런 거라는 사실을. 아직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고 앞으로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을 울렸던 내 마음에 박혔던 어떤 문장이 내 것이 되고 당신에게도 나와 같은 감동과 힘을 줄 수 있기를 조심스레 기대해본다. 그렇게 나와 함께 문장을 품에 안고 같이 천천히 걸어갔으면 좋겠다. 내가 걷는 이 길에 나홀로 걷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곁에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당신, 나와 함께 읽을래요? 같이 쓰고 같이 위로받을래요?

(그런데 욕망을 어떻게 버리지? 더 많은 책을 갖고 싶다. 더 넓은 집에 살고 싶다. 더 멋지고 재미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많이 관심받고 싶다. 더 많이 사랑받고 싶다. 더더더 행복해지고 싶다. 더더더더더더더를 버리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사실 이게 진심인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가장 마지막에...ㅋㅋ)


















지금 내가 이렇게 숨쉬고 있다는 것.
이 단순한 사실을 기억하면
순간 속에 깃든 찬란함이
가벼이 지나쳐지지 않는다.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면
기적은 도처에 있다.
p.27

사상가 볼테르는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말고 일합시다.
그것이 인생을 견딜만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에요."라고 말했고,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어쩌면 일어났을지 모르는
공상을 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p.50

지금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기를,
평안하고 단단하기를 바란다면,
내 삶이 아름다워지기를 바란다면,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내게 주어진 것들을 그대로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 욕망으로 덧칠해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p.60

피천득 시인은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는 것이
사랑을 하지 않는 것볻다 낫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생각해보라.
로맨스가 없는 삶은
얼마나 척박하겠는가?
사랑이 없는 삶은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p.99

대인공포증이 있었ㄷ던 마르셀 푸르스트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위해
‘대화의 소재를 다른 사람의
생각 속에서 찾았다‘고 한다.
화젯거리를 자기 머릿속이 아닌
상대방의 머릿속에서 찾으려는 노력.
그런 노력 없이 듣는 것은
제대로 듣는 것이 아니다.
p.107

"사랑이란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느끼며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자신과 닮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는 대립하여 살고 있는 사람에게
기쁨의 다리를 건네는 것이 사랑이다.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의 말 중에서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한 살 한 살 나이를 더해갈수록
매 순간을 더 자주,
더 생생하게 체험하고 싶다.
그것이 남은 삶의 유일한 지향점이다.
p.150

"행복해질 필요가 없다고
굳게 믿을 수 있게 된 그날부터
내 마음 속에는 행복이 깃들기 시작했다."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중에서

"행복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 것인지
다시금 느꼈다. 포도주 한 잔, 군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다 소리.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행복이 있음을 느끼기 위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만 있으면 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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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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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외롭지 않기 위해 외로워진 사람들과

이름 없는 땅에서 자라난 무섭고 아름다운 이야기





SF소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걸 깨트린 게 바로 천선란 작가다. 이끼숲을 가장 먼저 읽었는데 슬픔이 유별나도 되는 곳으로 가고싶다 던 소마의 말이 아프게 와닿았던 소설이었다. 이끼숲 다음으로 천선란 작가의 책들을 사들이고 있다. 그 중 노랜드를 이어서 읽게 되었다.


《노랜드》에는 멸망하는 세계 속에서도 느리지만 꿋꿋하게 희망을 곁에 두는 열 편의 작품이 담겨 있다. 


천선란 작가의 작품이 좋았던 것은 아름다운 문장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던, 아니 놓치고 있던 사실들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미움보다 사랑을 찾고 절망보다 희망을 잃지 않기 때문이었다. 


<-에게>에서 이름은 잃은 망자가 추모의 현장에서 이름을 되찾게 된다. 어떤 인간들은 이제 그만하라고, 지겹다고 덮어버리려고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짧은 글로도 강렬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단편 하나하나 이별의 순간들을 담고 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명월에게 100년이라도 기다릴테니 죽지 말고 돌아오는 강설. 헤어지는 게 두려워 상처주는 말을 쏟아내고 밀어냈지만 결국은 희망을 놓을 순 없었다. 마지막을 홀로 보낼 순 없었다. (흰 밤과 푸른 달) 더 이상 살 수 없게 지구를 대체할 행성을 찾아 먼저 떠난 사투르호. 지구에 대한 마지막 기억이 암흑으로 끝나길 바라지 않았다. 우리의 아름다운 지구를 기억할 수 있게.(푸른 점) 백혈병으로 죽은 형이 돌아왔다. 형의 기억을 갖고 있으면 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슬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은 기억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인가 기억인가 고민해본다. 기억없이 그 사람을 그리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옥수수밭과 형)

<노랜드>에서 지구는 대부분 멸망하거나 멸망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지구는 지금도 이미 망가져가고 있고 기후위기와 환경문제 등은 심각한 상태다. 천선란 작가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마저 든다. 지구가 멸명한다면, 지구에서 더 이상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때가 온다면 소설에서처럼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이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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