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나의 여신님 45
후지시마 코스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44권까지는 네이버에서 전자책으로 구입했고,  45권이 정발이 되었는데 전자책으로 나오기에는 시일이 제법 걸릴 것 같아서 오늘 구입했다.  대충 내용은 알고 있었다. 정발되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일본 발매된 내용을 보고 대충 리뷰로 올라놓은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아...  강제된 고자(???????)라니. 이걸 고자라고 할 수 있지는 않지만, 정확히는 성적욕망이 제어된 상태에 케이는 놓여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너무 한 것 아닌가 싶었다.  여튼 44권에서 베르단디가 한 진실의 키스로 베르단디와 케이가 처음 계약을 맺은 상태를 유지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종족 연애시스템(참 웃기는 작명이다)이 발동되어 심판의 문 앞에 베르단디와 케이는 놓이게 된거다. 여기서 통과해야 베르단디와 케이는 같이 있을 수 있다.  왜 대마계장 힐드가 베르단디의 아버지(하느님!)과 이루어지지 못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결말이야 알고 있지만서도 어서 다음권을 읽고 싶네. 45권에는 큰 이야기의 전진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역자가 금정이다. 항설백물어/속항술백물어를 옮긴 그 역자랑 동일인인가?...

 

여튼 44권과 45권의 텀이 길었던 만큼 올해안이으로 완결까진 내주기를 바란다. ㅋ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15-05-11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여튼 일본만화는 대단합니다 기본 50,60,70은 보통이니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엄청난 것 같아요
너무 끌고가다가 끝이 조금 이상한 경우도 있긴하지만^^

가넷 2015-05-11 21:16   좋아요 0 | URL
대단하죠 ㅋ 그런데 기본적으로 일본의 만화시장이 크다는 것도 이유가 아닐까합니다. 요즘에 한국에서 (근래에는) 이렇게 긴 장편은 아직 없지요.
 
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자기가 결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거울의 도시, 아니 신기루의 도시가, 바람에 날려 없어질 터이며,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이 원고를 해독하게 되는 순간부터 마콘도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여기에 적힌 글들은 영원히 어느 때에도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100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p.406)

 

 

 

 아, 정말 지독한 고독이 부엔디아 家의 미래를 끝장내어버렸다는 저 마지막 문구를 읽을때, '드디어 끝을 봤구나'하는 해방감이 들었다. 어제아래께에 올렸기는 하지만,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빨리 이 책에서도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디 재미있는 책은 빨리 페이지 수가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야금야금 읽게 되는데, 이 책은 예외였던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엔디아 家를 둘러싸고 5대에 걸쳐 드리우는 고독의 그림자를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보는 1982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수상 수락연설인 <라틴아메리카의 고독>라는 수락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는데, 그 연설문의 내용인지는 몰라도 검색해보면 그 연설 중에서 <우리의 최대의 적은 우리 삶을 믿게끔 만들 수 있는 전통적인 도구가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고독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고독의 정수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는데, 전혀 아리송하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이야기 한 것인데, 글쎄...  그리고 아직까지 잘 모르겠는 것이 또 있다. 왜 문학을 읽으며 사회를 읽어 내기 위해 열심히 읽었다라는 표현은 왜 존재하는 건지?

 

 11년정도 전에 <원미동 사람들>을 읽고 막연한 느낌에 리뷰를 올린 적이 있었다.  몇달 전에 재독을 시작했는데 다 읽지는 못했지만, 당연히 그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건 내가 돈벌기의 고단함을 알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지만, 그렇지만...  그때 11년 전에 올린 리뷰에 달린 댓글은

 

<원미동 사람들이 한참 읽힐때는 이런 서평이 아니었지요.
우리는 이런 책들도 아주 진지하게 읽고, 거기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려고 했지요. 저도 지금 다시 이책을 읽어볼까요?>
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기는 하다. 그때와 나는 분명히 다르고 그 작품 속에서 읽어내려가면서 느끼는 그 사회적 모순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왜 문학이라는 형식를 통해서 읽어야만 하는가 싶다.   

 

 너무 옆길로 새어 버렸나?  여튼... 재미있게 읽었다. 고립된 섬과 같았던 부엔디아 家의 마지막을 보면서 어쩌면 나도 저렇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백년 동안의 고독을 구입했었다. 2007년도 5월 10일에.  그런데 그 사이에 읽지 못하고 덮어두다가 한달 전부터 읽고 있다. 지금 320페이지 읽었는데 드디어 고지가 보인다. 만세다. 아직 150페이지 가량 남았지만 지금 속도를 보자면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는 완독할 것 같다.  이야기의 재미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읽기가 힘든 것도 물론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봤더니, 부엔디아 가문에서 보이는 근친상간은 도저히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초반에는 너무 심해서 읽기가 고역이였다. 그리고 인물의 개성, 성격이랄까가 명확하지 않아서, 왜 이 인물이 이런 일을 하는지 아리송하기도 하고... 거기다 다른 작품의 경우 이야기가  사건A에서 시작 하여 A1,A2,A3... 로 크게 연동된다면, 백년동안의 고독의 경우에는 A1, B2....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의 흐름이 길게 이어지지 않고 다른 수 많은 이야기가 등장해서 버겁다는 느낌도 들었다. 거기다 부엔디아의 인물들의 이름이 너무 헷갈려서...  휴...

 

그나저나... <백년동안의 고독>에서는 너무 많은 죽음이 나온다.  정말 <죽음이 너무 많다>.  뭐 그렇게 쉽게쉽게 죽는지...   그런데 죽음에 대한 반응 중에서 제일 웃겼던 것은 미녀 레미디오스를 보고  한 장교가 당신때문에 죽을 것 같소!... 라고 이야기 한 것을 가지고,  미녀 레미디오스는 자신을 <복통>인 줄 안다면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정확히 장교가 그런 말을 미녀 레미디오스에게 꺼낸 바로 직후의 일이라 죽음에 대한 반응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만.  여튼 제일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ㅋㅋ

 

... 그리고...  초반에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가  우르슬라에게 마콘도를 떠나자고 했을때가 있었다.

 

 

“난 안 떠날 거예요.” 우르슬라가 말했다. “난 여기서 아들을 낳았으니까 여기서 살아야 해요.”

“하지만 여기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아?” 그는 말했다. “식구가 죽어서 땅에 묻힐 때까지는 그 어디도 고향이라고 할 수 없어.”

우르슬라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죽은 사람이 없으니 이곳을 떠난다면, 내가 당장 죽겠어요.” (p.19)

 

 

 글쎄.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보통 고향이라고 하면 태어난 곳을 말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건 남미의 특성인지 궁금하다.  

 

 그건 그렇고...  제목이 제목인 만큼 부엔디아가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독하다.  물론 부엔디아 가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인간은 언제나 고독하다.  나는 남이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 고독으로 사람은 성장하기도 하지만, 고독이 지나치면 가지가 마르듯 생명이 멎는다. 부엔디아가의 사람들은 도대체가 대화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냥 대화가 아니라 서로 두 인물 이상이 소통된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가 않는다.

 

  아르카디오는 피에트로 크레스피의 장례식을 공개적으로 거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오랜만에 보기 드문 관용을 베풀었다. 우르슬라는 아르카디오의 이러한 행동을 보고 길 잃은 양이 다시 찾아왔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우르슬라는 아르카디오를 그가 제복을 입던 날부터가 아니라 처음으로 잃었었다. 레베카와 마찬가지로 우르슬라는 어떤 특혜나 차별을 주지 않고 그를 그저 평범한 아들로 길렀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르슬라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은, 불면증이 마콘도를 휩쓸던 시절에 우르슬라가 돈을 버는 일에 너무 열을 오리고 있었고,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는 정신이상에 시달리고 있었고, 아우렐리아노는 연금술에 빠져 있었고, 아마란타와 레베카는 목숨을 걸 만큼 극렬한 대결을 하고 있던 그 오랜 기간 동안 아르카디오가 외롭고 겁에 질린 어린 시절을 홀로 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p.122)

 

 

 이런 고독함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근친상간을 택했다고 해야되나, 아니면 그런 부엔디아가의 본질적인 특성(근친상간이라는 가문의 특성?)이 고독함을 따라오게 만들었던 것이라고 해야될까? 이 끝없는 고독은 버겁고 힘들었다. 읽는 나에게는.  우르슬라는 어떤 느낌으로 부엔디아가의 고독을 지켜보았던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사람의 거리 추정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전부 시리즈는 뭐 탁! 하고 쏘는 맛의 재미는 없다.  그냥 심심한 맛으로 먹는 음식처럼.  고전부 시리즈 5권인 <두 사람의 거리추정>도 마찬가지였다. 개인적으로는 이전 보다는 재미는 떨어졌다. 여전히 그 풋풋함이 풍기는 싱그러움은 여전했지만.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은 일본의 고등학교에는 저런 마라톤이나 보행제와 같은 행사가 전형적인 걸까?  싶은 것.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을 생각해보고 떠올린 의문이다.  그 걷고 뛰은 과정에서 오해와 갖가지 감정의 뒤섞임을 즐겁게 읽었다. 다만 다음 권에는 고전부의 부원들의 이야기가 더 들어나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선통신사 - 에도 일본의 성신 외교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98
나카오 히로시 지음, 손승철 옮김 / 소화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역자인 손승철 교수의 <조선시대 한일한계사>를 읽고 어느 정도 보충한다는 면에서 골랐었다. 일단 책의 분량을 보자면 그 정도는 기대 해도 좋을 것 같아 그랬는데 기대에는 부합했던 것 같다. 일단 저자는 조선통신사에서 신의 있는 한일관계 미래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의도인 것 같지만 글쎄. 일단 다루고 있는 것도 조일관계의 파국까지는 다루고 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저자가 조신통신사와 성신외교라는 측면을 과하게 해석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외에는 조선통신사의 모습. 통신사를 대하는 당시 쓰시마와 막부, 당시 지식인 민중들의 모습이 약간은 입체적으로 그려 볼 수 있어 좋았다. 야나가야잇겐. 그러니까 국서개작 폭로사건의 전말(?)응 간략하게나마 알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중국인 뿐아니라 조선인도 당인이라 불렸다는 것도 새로웠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