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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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가 결코 이 방에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내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거울의 도시, 아니 신기루의 도시가, 바람에 날려 없어질 터이며,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가 이 원고를 해독하게 되는 순간부터 마콘도는 인간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이며, 여기에 적힌 글들은 영원히 어느 때에도 다시 되풀이될 수 없을 것이니, 그것은 100년 동안의 고독에 시달린 종족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없다고 적혀있었기 때문이었다.(p.406)

 

 

 

 아, 정말 지독한 고독이 부엔디아 家의 미래를 끝장내어버렸다는 저 마지막 문구를 읽을때, '드디어 끝을 봤구나'하는 해방감이 들었다. 어제아래께에 올렸기는 하지만, 재미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빨리 이 책에서도 벗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디 재미있는 책은 빨리 페이지 수가 사라지는 것이 아까워 야금야금 읽게 되는데, 이 책은 예외였던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부엔디아 家를 둘러싸고 5대에 걸쳐 드리우는 고독의 그림자를 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가보는 1982년 노벨문학상 시상식장에서 수상 수락연설인 <라틴아메리카의 고독>라는 수락연설문을 읽어 내려갔다는데, 그 연설문의 내용인지는 몰라도 검색해보면 그 연설 중에서 <우리의 최대의 적은 우리 삶을 믿게끔 만들 수 있는 전통적인 도구가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고독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고독의 정수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라고 했다는데, 전혀 아리송하다.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된다고 이야기 한 것인데, 글쎄...  그리고 아직까지 잘 모르겠는 것이 또 있다. 왜 문학을 읽으며 사회를 읽어 내기 위해 열심히 읽었다라는 표현은 왜 존재하는 건지?

 

 11년정도 전에 <원미동 사람들>을 읽고 막연한 느낌에 리뷰를 올린 적이 있었다.  몇달 전에 재독을 시작했는데 다 읽지는 못했지만, 당연히 그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건 내가 돈벌기의 고단함을 알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뜻했지만, 그렇지만...  그때 11년 전에 올린 리뷰에 달린 댓글은

 

<원미동 사람들이 한참 읽힐때는 이런 서평이 아니었지요.
우리는 이런 책들도 아주 진지하게 읽고, 거기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발견하려고 했지요. 저도 지금 다시 이책을 읽어볼까요?>
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기는 하다. 그때와 나는 분명히 다르고 그 작품 속에서 읽어내려가면서 느끼는 그 사회적 모순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왜 문학이라는 형식를 통해서 읽어야만 하는가 싶다.   

 

 너무 옆길로 새어 버렸나?  여튼... 재미있게 읽었다. 고립된 섬과 같았던 부엔디아 家의 마지막을 보면서 어쩌면 나도 저렇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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