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불꽃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7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윤하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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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요즘, 아니, 벌써 이 작품에 관한 수다가 뜸한 것이 느므 아쉽다. 오직 천재만이 쓸 수 있는 작품 아닌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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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1-14 20:0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헉..그럼 제가 읽어보겠습니다🖐ㅋㅋㅋ

Falstaff 2022-01-14 20:15   좋아요 5 | URL
넵넵넵넵! 응원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읽고 난 다음에 성취감이 대단합니다. ㅎㅎ

페넬로페 2022-01-14 20: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께요^^

Falstaff 2022-01-14 21:15   좋아요 4 | URL
좋습니다! 멋있는 리뷰 기대하겠습니다!!!

coolcat329 2022-01-14 23: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흑! 저 나는 고백한다 읽어야 하는데요...아직 펼치지도 못했는데 자꾸 이러시면 ㅠㅠ
저는 롤리타도 안 읽었는데요.ㅜㅡㅠ

Falstaff 2022-01-15 15:14   좋아요 3 | URL
ㅎㅎㅎ 가지고 계신 <나는 고백한다>부터 읽으셔야지 무슨 고민을 하셔요! ^^

반유행열반인 2022-01-16 07: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주 좋았습니다. 나보코프 진짜 천재... 꼴랑 세 권 봤지만 볼 때마다 한 대 후려치는 새로움이요 ㅋㅋㅋ

Falstaff 2022-01-16 14:11   좋아요 3 | URL
옙. 열반인 님 페이퍼도 잘 읽었답니다. ㅋㅋㅋ
하여튼 정말 천재 아니라고 우길 수 없게 썼다니까요!
 
종이시계 - 개정판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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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장영희는 1952년 전시 서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윌리엄 포크너 작 <압살롬, 압살롬> 번역의 전범을 이룬 영문학자 장왕록의 딸로 태어난다. 지금은 서태평양 인근 국가에서는 박멸했음을 선포한 질병이지만 이때는 백신이 생기기 전이라 한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평생 목발을 사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이의 사진을 검색해보라. 증명사진을 빼고 단 한 장의 엄숙한 얼굴이 없다. 늘 밝은 기운을 보이는 듯한 웃는 얼굴. 서울사대부고와 서강대 영문과를 거쳐 모교에서 석사를 하고, 뉴욕주립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곧바로 모교인 서강대 영문과 교수직에 오른다. 이후, 번역을 하며 수필가로도 이름을 내지만 병마에 그나마 부실한 발목을 잡히고 만다. 2001년에 유방암, 2004년 척추암. 이것들을 이겨내고 강단에 서나, 결국 2008년에 간암으로 전이되어 2009년,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장영희의 후기를 보면, 이 작품 <종이시계>를 처음 번역, 출간한 것이 1991년이고, 12년이 지난 2003년에 다시 새 판을 낸 것으로 보인다. 새 판이라지만 첫 번역을 완전히 잊고 다시 번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책에선 두 살과 한 살 터울의 부부가, 대화를 나눌 때 남편은 말을 놓고, 아내는 꼬박꼬박 경어를 쓴다. 이혼한 부부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이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2022년에도 아내가 남편한테 말을 놓으면, 즉 반말을 하면, 대통령 후보의 아내로는 마땅하지 않다고 시비하는 것이 현실이니 그냥 눈 한 번 질끈 감고 넘어가자. 작품의 원래 제목도 <The Breathing Lesson>, “호흡연습”이다. 앤 타일러의 작품은 그동안 많이 번역 출간한 모양인데, 많은 작품들이 원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았다. 이것도 역시 올드 패션이다. <Back When We Were Grownups>는 <인생>으로 <A Patchwork Planet>는 <바너비 스토리>라는 제목으로 2002년과 2001년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작가 앤 타일러는 1941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의 퀘이커 교도인 로이드 페리와 필리스 마혼 타일러 부부의 네 아이들 가운데 맏이로 태어난다. 숲 속 퀘이커 공동체에서 유년시기를 통째로 보내고 열한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도시 나들이를 했으니 장래에 유명작가가 될 꼬마 아이에게 세상은 얼마나 관찰할 만한 것으로 충일했을까. 그러나 노스 캐롤라이나 랠리Raleigh의 공립학교에 입학한 앤은 자신이 아웃사이더라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후에도 소외감은 여전했는데, 이게 자신을 작가로 이끈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믿는다.
  하여튼 16세에 고등학교를 마치고 사립자유예술대학인 스워스모어 대학에 가고자 했으나 결국 전액 장학금을 받고 듀크 대학에 입학한다. 이때 부모는, 내가 부모라도 당연했겠지만, 세 명이나 되는 동생을 보더라도 명문대 가운데 하나인 듀크에 가달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당연한 거 가지고 설득이라니. 맏딸이 고집이 셌나? 하여간 듀크 대학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 슬라브 문학 학위를 받고 도서관에서 서지학자로 일하며 소설을 써 오늘에 이른 작가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된 <홈시크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식사>, <우연한 여행객>, <종이시계>로 세 번 퓰리처 상 픽션 부분의 최종 심사까지 올라, 1989년에 오늘 소개하는 이이의 대표작 <종이시계>로 상을 받는다. 이외에도 부커 상 후보(한 번은 최종심, 한 번은 예심)로 두 번 올랐으며 미국에서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중간에 질려서 이제 그만 읽겠다, 도저히 더는 못 읽겠다, 라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왜냐하면, 주인공 매기 모건 여사가 내 아내하고 너무 똑 같은 거다. 물론 동서의 차이가 있으니 생긴 거야 비슷도 안 하겠으나, 하는 행동, 말하는 버릇, 물론 매기처럼 나한테 절대 존대말은 바치지 않지만, 존대는커녕 주옥 같은 욕이나 안 퍼질르면 다행이지만, 끝없는 수다와 기상천외한 어림짐작까지, 너무너무, 느므느므 똑같아서, 확 질려버렸던 거다. 그래 이 책을 아내에게 읽어보라 권해서 자아성찰의 기회로 만들어줄까도 싶었으나 오히려 모건 여사를 통해 더 고단수의 말빨을 장착하는 기회가 될까 두려워 그만두기로 했다.
  앤 타일러는 결혼생활에 대하여 정말 도가 튼 거 같다. 내가 살아보니 남자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게 여자하고 사는 거고, 여자 인생을 가장 불행하게 만드는 게 남자하고 사는 일인 거 같다. 앤 역시 메기와 아이러 모건 부부를 통해 이 비극적 필연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이 대강 1940년 아래 위쪽 태생으로 결혼은 필연이라 여긴 세대였을 테니.
  9월. 매기의 42년 친구, 그것도 절친인 세레나의 남편이 죽어 장례식장에 가기로 한 날이다. 아무리 절친이라 하더라도 살면서 여러 번 절교와 화해를 거듭하고, 어린 시절 자신만의 비밀을 은밀히 다른 친구에게 알려주기도 하는 법. 물론 고의도 아니었고 악의도 없었지만 이런 오해가 없다면 그건 인간도 아니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난 몇 년 동안 편지는커녕 전화 한 통 없었는데, 울며불며 과부가 된 슬픔이 어떠니 저떠니 눈물바람을 하는 게 당연히 장례식에는 가줘야 하는 걸로 결론이 난 거다. 하물며 암으로 죽은 맥스의 젊은 시절의 매혹적인 장면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음에야. 세레나는 죽음의 병상에 누운 남편 맥스에게 악을 쓰고 소리를 질렀단다. 살아생전 건강을 위해 조깅을 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말을 듣지 않아서, “멋진 빨간색 운동복을 입고 뛰다가 갑자기 죽은 거하고, 주사바늘과 튜브를 잔뜩 꽂은 채 병상에 자빠져 죽는 거하고 뭐가 더 좋니?”라고.
  장례식이 오전 10시 반이라 집에서 늦어도 여덟 시에는 출발을 해야 하는데, 매기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모닝 콜을 잘못 눌러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다. 말없는 남편 아이러는 일찌감치 일어나 잠깐 일을 보고 동네 어디서 기다리기로 했으니, 매기는 서둘러 닷지Dodge 승용차 수리를 맡겨 놓은 정비소에 들러 차를 찾아 출발한다. 정문을 나가 도로로 진입하는 순간 매기는 브레이크를 밟으려다 브레이크를 밟는 힘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그리하여 마치 급발진하는 차처럼 순간이동에 버금가는 속력으로 도로로 쳐들어갔으며, 때마침 왼쪽에서 질주하던 거대한 펩시콜라 트럭이 비명을 지르며 급정거를 했음에도, 방금 정비소를 나온 닷지 승용차에서 유일하게 한 번도 상처를 입히지 않았던 왼쪽 앞 펜더를 살짝 우그려뜨리는 수준의 하느님이나 내릴 수 있는 행운을 아침부터 거머쥐었다…는 것을 메기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남편 아이러가 알면 뭐라고 할까, 변명거리만 머릿속에서 왔다 갔다 했던 거였다. 눈 앞에 광경이 그려지시지? 어쩜 그리 똑같은지. 누구하고? 안 알려줌. 내 복장이 다 터진다.
  매기와 아이러는 슬하에 순서대로 아들 제시, 딸 데이지, 이렇게 두 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결혼 28년만에 일곱 살 손녀를 둔 건 제시가 열일곱 살 때 임신 2개월 상태인 열여섯 살 피오나와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럼 뭘 해. 손녀딸 리로이가 돌도 되기 전에 이혼해버린 걸. 그럼에도 매기는 아들 부부가 재결합하기를 기대해 마지 않아서 리로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변장한 모습으로 며느리가 사는 집 근처에 숨어 며느리와 손녀딸의 모습을 멀리서 보고오기도 자주 했었다. 그런데 정비소에서 차에 시동을 거는 순간, WNTK 라디오 방송 청취자 대담 프로그램에서 누군가가, 다음 주에 재혼을 할 예정이다, 첫번째 결혼은 정말 사랑해서 한 결혼이었지만 잘 되지 않았고, 두번째 결혼은 생활의 안정을 위해서라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지금 이 말이 옛 며느리 피오나의 목소리라고 믿어, 그만 깜짝 놀라 브레이크 대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밟은 거였다.
  억지로 구겨진 펜더를, 바퀴가 굴러갈 정도로만 펴고 남편을 만나 아이러에게 운전대를 맡긴 후 매기의 머릿속엔 모종의 음모가 움트기 시작한다. 세레나 남편이자 옛 시절 자신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맥심의 장례식에서 얼른 나와 돌아오는 길에 피오나 집에 들러 웬만하면 다음 주에 결혼하지 말고 어떻게저떻게 지금은 오토바이 판매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시절의 하드 록 그룹의 리드 싱어 제시와 재결합을 하는 게 어떠냐고 운이라도 떼어봐야 하겠다는.
  이렇게 9월의 화창한 날, 열네 시간에 걸친 로드무비의 막이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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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1-14 09:05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제가 앤 타일러를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어도 좋아하는 작가군단에 넣어두었으므로 책 여러권 읽었거든요. 저는 사실 그중에 이 작품 <종이시계>가 제일 별로이긴 했어요. 이야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싫어서요. 완전 슈퍼 오지라퍼.. 어림짐작으로 기어코 일을 벌이는 사람. ㅠㅠ 읽으면서 몇 번이나 그만읽을까 했었어요. 휴..

아니, 근데 골드문트 님의 아내분과 성격이 똑같다뇨!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14 10:17   좋아요 5 | URL
앗, 그렇습니까!
저도 앤 타일러를 좀 더 읽어봐야겠군요. 아이고, 근데 폭포같은 수다에 팍 질려서 말입죠, 마치 보통 크기, 약간 높지만 쇳소리 음색을 가진 중/노년의 여자가 귀 바로 옆에서 따따따다다다다다... 따발총을 쏘는 거 같더라니까요!
책을 읽으면서도 귀에 정말로 들리는 듯한. 이거 참. ㅋㅋㅋㅋㅋㅋㅋㅋ 누구하고 진짜 똑같아요.

잠자냥 2022-01-14 11:51   좋아요 3 | URL
우아, 저 앤 타일러 작품 1도 안 읽어봤어요. ㅋㅋㅋㅋ 재미없을 거 같아서 절대 손 안 가는 작가. 저는 왜케 책에 편견이 많을까요! 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14 11:57   좋아요 3 | URL
책에 편견 있는 게 말입죠, 사람한테 편견 있는 것보다는 낫더라고요. ㅋㅋㅋ
평소 다른 사람한테 편견 많이 ˝받는˝ 인간 올림.

다락방 2022-01-14 11:59   좋아요 4 | URL
잠자냥 님 앞으로 혹여라도 앤 타일러를 읽으실 생각이라면 종이시계로 시작하지는 마셨으면 합니다. 제가 보기엔 잠자냥 님도 이 책속의 캐릭터에 짜증 제대로 나실 것 같아서요 ㅋㅋㅋㅋㅋ

coolcat329 2022-01-14 09: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재밌을거 같아요. 작가와 책은 많이 들어봤는데 이런 내용인줄은 몰랐어요. 근데 매기와 아내분이 똑같다니 저도 소설에서 그런 경험 꼭 해보고 싶은데 아직 못 만났습니다 ㅎㅎ
결혼에 대한 생각 저도 살아보니 동감이에요. 서로의 만남을 위로하고 불쌍해하며 사는 수밖에요...

Falstaff 2022-01-14 10:19   좋아요 3 | URL
재미 있습니다. 너무 큰 걸 바라시면 실망하겠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한 상 잘 차려먹은 느낌이었어요! ㅎㅎ

새파랑 2022-01-14 10: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완독하셨군요? ㅋ 책의 내용도 그렇지만 매기 모건 여사가 더 궁금하네요~!!

Falstaff 2022-01-14 10:19   좋아요 5 | URL
요즘 대기하고 있는 책이 잔뜩 있는 거 같아서 함부로 추천을 못하겠고, 나중에 다 읽으시면 한 번 생각해보셔요!

그레이스 2022-01-14 14: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너무 오래전에 읽어서 가물가물 기억도 안나는 책이예요^^
재미있었다는 기억만...!

Falstaff 2022-01-14 15:44   좋아요 2 | URL
재미는 있는데요, 도무지 매기의 수다와 참견과 끼어드는 건 아휴,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서 말입니다. ㅎㅎㅎ

hnine 2022-01-14 14: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이 책 원래 제목이 <호흡연습>이었어요.
사실 저는 이 책 안 읽었는데도 마치 읽은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예전에 그 정도로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였기때문이겠지요.
늘 저자나 번역자에 대한 친절한 소개로 시작하는 골드문트님의 리뷰, 이제 적응이 되었답니다.

Falstaff 2022-01-14 15:45   좋아요 2 | URL
아, 이 책이 베스트셀러였군요.
전 퓰리처상 받았다고 해서 한 번 읽어볼까 했습지요.
ㅎㅎㅎ 매번 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mini74 2022-01-14 16: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디서 본 것 같은데 ㅠㅠ 했더니 정말 오랜 전 20대때 헉 겁나 옛날이군요. 그때 읽은거 같아요. 표지가 바뀌었군요. 아내와 닮은 주인공 힘들죠. 책은 약간 도피의 성격도 있는데 거기서 현실을 만나면. ㅎㅎ

Falstaff 2022-01-14 19:07   좋아요 1 | URL
아, 오래 전에 보셨구먼요. ㅎㅎㅎ 다시 읽으실 필욘 없.... 아닙니다, 옛 생각 나시면 후딱 읽어보셔요. ㅎㅎㅎㅎ
맞아요, 기껏 책으로 도망했는데 또 보는 겁니다. ㅋㅋㅋㅋㅋ 인생이란....
 
홀로 맞는 죽음
한스 팔라다 지음, 염정용 옮김 / 로그아웃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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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893년 독일제국의 북동부 그라이프스발트에서 치안판사의 아들, ‘루돌프 빌헬름 디첸’이란 이름으로 태어난 한스 팔라다. 아버지는 치안판사에서 시작해 나중에 최고법정 판사까지 지냈다. 전형적인 중류 집안 출신으로 음악에 열정적이었으며, 문학애도 흥미가 있던 어머니. 팔라다는 이들 사이의 아들이었는데,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분들은 주목하시라, 내 생각이 아니라 60여 년 동안 아동 도서관 사서를 역임한 프랑스의 빠뜨 여사가 강조에 강조를 한 바를 그대로 일러드리니, 한스 팔라다의 법관 아버지는 한스, 당시 이름으로 루돌프가 어렸을 때부터 셰익스피어와 실러 등의 작품을 아이들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을 해주었단다. 어린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일은 그림책이나 동화책을 보는 일이 아니고, “어른들의 목소리로 듣는” 일이며,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진지하게 책을 읽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한다. (즈느비에브 빠뜨, <사서 빠뜨> 재미마주, 2017) 한스 팔라다의 법관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 하나는 제대로 시킨 것이니, 어린 아이를 키우거나 주위에 어린 조카들 있는 분들은 유념하시기 바란다.

  16세 때인 1909년에 말이 끄는 짐차에 치었을 때, 설상가상으로 말이 한스의 얼굴을 걷어차는 사고를 당한다. 1년 후 17세 때는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는데, 이 두 번의 장기 입원 당시 오랜 시간에 걸쳐 강한 마약성분의 진통제를 다량 투여한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한다. 성인이 되고 한스 팔라다는 자기 인생의 작지 않은 동안을 정신병원과 감옥, 요양소에서 흘려보내야 했으니 말이다. 이이는 나치 치하에서도 독일을 벗어나지 않고 독일에 남아 집필을 계속했다는데, 그 와중에 폭격 맞아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다행. 그래서일까, <홀로 맞는 죽음>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은 비록 정상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게슈타포에 체포된 이후 변호사로부터 정신이상의 핑계를 대라는 권유도 받고, 베를린 폭격의 와중에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의사는 스스로 자신의 팔뚝에 약한 모르핀을 주사하는 걸 낙으로 삼기도 하고.

  이 작품 <Jeder stirbt fuer sich allein: 누구나 혼자 죽는다>는 빽빽한 편집으로 770쪽을 넘어간다. 실제로 나치에 저항했던 함펠 부부의 기록을 모델로 해서 한스 팔라다가 불과 4주에 걸쳐 1947년에 완성을 했지만, 작가는 작품의 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2월에 베를린에서 죽고 만다. <소시민, 이제 어쩌나>와 더불어 한스 팔라다의 대표작으로 일컫는다고 한다.


  책은 4부로 되어 있다. 크방엘 부부, 게슈타포, 역풍, 종말.

  제3제국의 노동계급인 오토와 엘리제 함펠 부부는 1935년에 결혼을 해서, 1940년 엘리제의 남동생이 2차 세계대전 초기에 전사하는 바람에 반 나치 저항운동을 하기로 결심을 한다. 방법으로는 우편엽서에 반 나치 구호와 내용을 손으로 써서 우체통이나 공공장소의 계단 같은 곳에 놓아두어 베를린 시민들을 향해 나치에 협력하지 말 것을 선동한다. 이들은 1940년 9월부터 1942년 가을까지 모두 287통의 우편엽서를 써서 살포했으나, 나치의 공포정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거의 모든 엽서들은 즉각 신고와 함께 게슈타포의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이기만 했다. 이들은 결국 2년만인 1942년에 체포되었고, 오토 함펠은 히틀러와 제3제국에 저항할 수 있어서 그동안 행복했다고 발언한다. 나치의 국민재판에서 부부는 국가전복 예비음모로 사형을 선고받아 1943년 4월 8일 한날한시에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진다.

  한스 팔라다는 남편 이름은 그대로 오토, 라 하고, 아내의 이름만 ‘안나’로 해서 크방엘Quangel 부부를 만들었다. 나이도 오토 크방엘이 오토 함펠보다 열 살 정도 많게 했는데, 이는 아내의 동생, 오토의 처남 대신 크방엘 부부의 아들 오토헨의 전사를 이들 부부가 나치에 저항하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각색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처남의 죽음보다는 아들의 죽음이 행동변화에 더 큰 동기부여가 되는 것이 당연할 터이다. 여기에 픽션이니만큼 다양한 에피소드를 첨가한다. 먼저 이들이 거주하는 5층 아파트의 구성원들을 보자.

  2층엔 전직 최고재판관 프롬 씨. 한스 팔라다의 아버지가 최고재판관 출신임을 기억하리라. 전쟁이 끝나기 전에 지하실에서 고통스럽게 죽기는 하지만 무뚝뚝하게 친절하고 정의를 신봉하는 키 작은 노인. 최선을 다해 주위에 있는 약하고 고통받는 자들을 돕는데 위험을 무릅쓴다.

  3층은 전직 선술집 주인이었다가 본인이 술을 너무 좋아하는 바람에 술 때문에 파산 직전에 몰렸던 페어지케 씨 댁. 아들 셋 있는 건, 위에서 둘은 SS, 나치친위대, 막내 발두르는 HJ 히틀러 소년단을 거쳐 최고의 나치 지도자 양성기관인 나폴라에 재학중이며, 딱 하나 있는 딸 역시 여성 수용소에서 곱게 살아 노동능력이 없는 나이 든 여성 죄수에게 복잡다양한 고통을 주는 걸 취미로 여기는 골수 나치 집안이다.

  4층에 크방엘 부부가 살고, 5층엔 여성 내의 전문점을 수십년 해온 로젠탈 부부가 살았다가, 2주 전에 로젠탈 씨가 유대인 수용소로 끌려가 소식이 없고, 내의 가게에서 비싼 제품들을 모두 집에 가져온 로젠탈 부인 혼자, 불운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고 있다. 이를 가엽게 여긴 크방엘 부부는, 자신들 역시 보통의 독일인이라 유대인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지만 로젠탈 부부가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받고 있다는 건 확실하게 알아서, 로젠탈 부인을 보석, 귀금속, 현금 등과 함께 밤 동안 자기네 집에서 머무르게 한다.

  여기에 기생충 같은 두 명의 독일인이자 염탐꾼이자 게슈타포의 밀정이자 노동거부자인 에밀 바르크하우젠과 에노 클루게도 등장시킨다. (아오, 난 카를 오르프가 작곡한 <Die Kluge: 재치부인>을 무척 좋아해서 ‘클루게’라는 인물의 등장에 관심이 무척, 무척, 또 무척 컸다가, 팍 실망했다.)

  5층 로젠탈 부인의 집에 바르크하우젠과 클루게가 들어와 도둑질을 하려다 정작 하라는 도둑질은 하지 않고 생전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술을 퍼마시고 세상 모르게 취했다가 2층의 전직 최고판사와 오토 크방엘의 방해로 곤욕만 치루는데, 이 일을 기점으로 선한 판사 프롬 씨는 로젠탈 부인을 자신의 집과 방에서 거의 감금수준으로 보호하고자 한다. 부인은 프롬 씨를 친절하지만 냉정한 사람, 정의 때문에 의무감으로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여긴다. 로젠탈 부인은 소외를 견디지 못해 나흘만에 수면제를 한 움큼 삼킨 다음 몽롱한 상태가 되어 프롬 씨의 집을 나와 5층 자기집으로 올라갔다가 악당 발두르 페어지케와 게슈타포에 잡히지만, 창문으로 몸을 던져 죽고 만다.

  4층의 크방엘 부부는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유일하게 해피엔드를 쟁취하는 우편 집배원이자 현명한 재치부인, 에바 클루게로부터 타자로 작성한 군사우편을 받은 순간, 인생이 결정적으로 바뀌어버린다. 라디오 조립을 좋아하여 대단한 실력을 갖게 된 오토헨. 그래 여러 라디오 회사에서 영입제의를 받기도 한 어린 친구는 입대하기 싫어 엉엉 운 적이 있음에도, 군사우편은 “총통과 민족을 위하여 장렬히 전사”했다고 주장하고, 이게 뻔한 허위라는 게 너무도 원통한 엄마 안나 크방엘은 히틀러와 나치에게 극도의 악감정을 품게 된다. 이 순간을 맞춰 아래층 페이지케의 집에서는 파리 함락을 기념하기 위한 건배소리가 시끄러운데, 아내는 화를 참지 못해, 정말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누구에겐가 화풀이를 해야 해서, 남편에게 “당신과 당신의 총통”이 아들을 죽음으로 이끌었다고 퍼붓는다.

  가구예술가이자, 목재가공회사의 작업반장이자 구두쇠로 널리 알려진 오토 크방엘 씨는 “당신과 당신의 총통”이란 말을 도무지 수용할 수 없어 궁리에 궁리를 하다가 좁은 책상에 앉아 쓴다.

  “어머니, 총통이 제 아들을 죽였어요.”

  그리하여 오토는 아내에게 엽서를 통한 나치 저항행위를 설명하고, 겨우 엽서 나부랭이란 걸 듣고 히틀러 암살 정도를 생각했던 안나가 실망한 모습을 보이자 이렇게 대답한다.

  “미흡하건 지나치건 간에, 안나, 그들에게 걸리는 날엔 우린 목숨을 잃게 돼……. 만약 내가 목을 내놓아야 한다면 남들의 어떤 멍청한 짓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에 목을 걸고 싶어. 내가 어떤 짓을 하겠다면, 오직 당신과 하지. 이게 옳다고 하지 않겠어.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어. 난 그런 사람이야. 변하고 싶지 않아.”

  다른 사람(들)을 믿지 않고 오직 홀로 할 수 있는 저항은 이것 뿐이었다고 오토는 생각했고, 이를 실행에 옮긴다. 나치 치하에서도 저항은 있었다. 아무리 미미했다 할지라도.


  7백 쪽을 훌쩍 넘어가는 장편이지만 잘 읽힌다. 나는 얼마나 바보인지. 같은 작가인데 제목이 비슷하다, 비슷한 시기에 쓴 다른 작품이겠구나, 싶어서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누구나 홀로 죽는다>도 샀다. 그건 편집에 좀 여유를 두었다. 둘 다 괜찮지만 읽기는 이 책만 읽기로 했다.

  이와 비슷한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잉에 숄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한스 숄과 누이동생 조피 숄이 뮌헨 대학의 학생과 교수를 규합해 반 나치 전단을 뿌리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사형을 당한 사건. 읽을 때는 훅훅 속도감 있게 지나가지만 읽고 나서는 개운하지 않다. 어쩔 수 없이 그저 체제에 쓸려가는 소시민이라서 그럴까?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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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1-13 08: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또 마구 끌리네요~찜합니다!
작가가 말에 얼굴을 걷어 차이다니 죽지않은게 다행이지만 치료하느라 고통도 겪었네요.ㅠ
다른 출판사에도 이 책이 있군요.

Falstaff 2022-01-13 10:36   좋아요 3 | URL
말한테 걷어 차이는 건, 상상도 못할 고통이었을 겁니다. 아이고, 얼굴 뼈 몇 개는 부러졌을 텐데, 아, 두개골은 함몰이라고 하죠, 을매나 아팠으면 모르핀 성분의 진통제를 장기, 과다 복용했을지. 에휴.

유부만두 2022-01-13 0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백장미 책 사놨는데… 사놓기만 했는데요…

Falstaff 2022-01-13 10:37   좋아요 3 | URL
백장미 책도 사실 재미는 별로 없어요. 나치 시절에도 저항을 해 희생당한 실패한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데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잠자냥 2022-01-13 1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찾아보니, 같은 해에 비슷한 제목으로 두 출판사에서 나왔군요? 그런데 그걸 다 사신 분이 여기 또 있고... ㅋㅋㅋㅋ
이 작품에도 술 좋아하는 인간이 나오는군요? ㅋㅋㅋㅋ 한스 팔라다 이 인간 엄청난 술꾼인가봐요.... 꼭 누구처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2-01-13 10:39   좋아요 4 | URL
같은 해에 설마 같은 책을 찍었으리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아, 근데 작년에 문둥이네하고 민음사에서 동시에 <패싱>을 낸 걸 기억했어야 했건만. 흑흑흑....
오늘은 새벽에 열이 오르고 근육통이 있어서, 요즘같은 세월 그저 컨디션 의심스러우면 집에서 쉬는 거다, 싶어 진통 해열제 먹었더니 까무러쳤다가 지금 일어났습니다.
근데 진통 해열제 먹는 인간이 술도 마시면 인생 조기에 졸업한다고 조심하라네요. ㅋㅋㅋ

2022-01-14 0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14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침묵
돈 드릴로 지음, 송은주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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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앞으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급속한 온난화로 극지방의 빙하가 몽땅 녹아 상승한 해수면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침수시키거나, 여의도만 한 운석이 충돌해 한 방에 지구 생명체의 90 퍼센트가 멸종하는 참사가 없더라도, 인간이 가장 오래 존속할 수 있는 가장 선의의 전망은 3만 년이다. 최장 3만 년 안에 지구에 대 빙하기가 닥칠 거란 지구과학자와 인류학자들의 의견을 따르면, 이 때 지구인구 90 퍼센트가 지금의 적도 지방을 빽빽하게 메울 것이고, 극심해질 식수와 식량 고갈로 인해 여태까지는 그저 책 속에 쓰여 있을 뿐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이리 상태’가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나타날 것이라 한다. 그때가 되면 인류가 만들어 유지시켜왔던 모든 문명과 문화는 하루 아침에 사라질 것이며 인간종 간의 투쟁으로 자연소멸 하거나 급속도로 과거 석기시대로 돌아가리라고 경고한다. 이들이 적도지방에 바글바글 모여 벌일 제3차 혹은 제4차 세계대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몽둥이, 짐승의 뼈, 돌로 만든 칼과 창 그리고 도끼일 것이다. 그러면 지난 시절의 대 빙하기엔 인류의 조상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당시 인류는 원시 상태로 빙하기 정도의 자연재해를 극복할 수 있는 야수적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인류학자의 의견이다. 문명은 인간의 덩치를 크게 만들었으나 자연 적응력은 오랫동안 조금씩 빼앗아 가버렸다.
  이야기를 꺼낸 건, 책을 열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경구가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3차 대전에서 어떤 무기로 싸우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4차대전에서는 몽둥이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다.”

 

  다이앤 루커스, 맥스 스태너. 이들은 딸 둘을 둔 부부로 큰 아이는 결혼해 보스톤에서 가정을 이루어 하여튼 겉으로 보기엔 아이들도 낳고 키워가며 행복하게 살고 있고, 작은 아이는 세계여행 중이다. 맥스는 술꾼으로 작품 속 이이가 출연하는 장면에서는 내내 미국산 오크 통에서 십년 이상 숙성한 버번 위스키 ‘위도우 제인’을 혼자만 마시고 있다. 다이앤은 자신이 37년간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끔찍하게 지겨운 매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들 부부와 함께 TV를 통해 2022년의 56회 슈퍼볼을 보기 위해 초대한 옛 시절의 제자 마틴 데커와의 딱 한 번 불장난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은근히 몸을 달구고 있다.
  30대 초반의 청년 마틴 데커는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를 지냈던 다이앤의 제자이지만 이젠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1912년 원고에만 집중해 연구하고 있는 교사다. 오래 전에는 다이앤의 말에 집중해야 했던 시절이 있으나, 이제는 마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다이앤이 오히려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집중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이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 TV를 시청하기로 한 커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소설은 도착하지 않은 커플, 보험회사의 손해사정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짐 크립스와, 카리브해 지역, 유럽, 아시아 혈통이 복잡하게 믹스되어 까무잡잡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지닌 매력적인 여성, 문예지에 종종 작품을 싣는 시인이기도 한 테사 베런스가 시간에 맞춰 TV 중계를 보기 위해 파리 공항을 떠나 JFK 공항으로 가는 대서양 상공의 비행기 안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에서 시작한다.

 

  뉴욕에 거의 도착한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에 편히 누운 짐은 머리 위의 액정에 표시된 정보들, 고도 3만 3002피트, 외기온도 영하 58도, 뉴욕은 지금 12시 55분 같은 걸 자주 바라보며 지루한 비행을 견뎠다. 그러다가 한 순간 액정이 다 꺼지고, 비행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기장의 안내 방송도 없이 고도를 낮춰 뉴욕의 비행장에 비상착륙을 하기에 이르렀고, 바퀴가 지상에 닿은 순간의 충격 때문에 자리에서 튀어나와 창문에 부딪힌 짐의 이마가 찢어지면서 창 밖으로 연료통이 있는 날개에 불이 붙은 걸 알아차렸다. 모든 것이 아무런 정보도, 안내도 없이 그저 비행 간식을 기다리다 생긴 일이다. 다행히 비행기는 그나마 폭발하지 않았고, 짐은 테사와, 세 명의 승무원과 함께 벤을 타고 의료기계가 먹통이 된 병원으로 간다. 이들은 병원에 도착해 자기 순서를 기다리다가 눈을 마주치더니 자신들이 항공기 불시착에서 생존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병원의 빈 화장실에 들어가 선 채로 갈급하게 섹스부터 한다. 죽음의 위협이 지나가자마자 번식 욕망이 들이닥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 후에야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네거리 신호등이 한 순간 먹통이 되어 갈팡질팡하다가 등등의 이유로 갑자기 다친 수많은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가 치료를 받고, 걸어서, 형광등 또는 LED 등이 아니라 촛불을 밝힌 다이앤과 맥스의 집으로 간다.

 

  맥스는 2022년 슈퍼볼의 마지막 경기에 큰 돈을 걸었다. 일찌감치 TV를 켜고 경기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좀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작품 전체로 보아도 초청해서 함께 풋볼 시합을 보기로 한 손님들은 모두 다이앤의 친구들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맥스는 이들과 겉돌고 있다. 드디어 중계방송을 시작, 상당한 시간동안 광고가 쏟아지는 것도 맥스는 짜증을 내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처럼 즐긴다. 그러다가 국민의례가 시작, 조금 있으면 국가 Star spangled banner가 울려 퍼지려는 순간, 갑자기 맥스네 QLED TV 화면이 일그러지더니 추상적인 패턴을 그리다가 다시 리드미컬한 파동으로 직사각형, 삼각형, 정사각형 등의 도형으로 변하고, 화면이 텅 비어버린다. 놀란 맥스가 자기 집만 그런지 다른 집, 다른 건물도 그런지 알아보려 휴대전화를 들었으나, 휴대폰도, 이젠 장식품에 불과하지만 (나처럼) 아직 철거하지는 않았던 집전화도, 노트북도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남은 건 회색 모니터. “내 판돈은?”
  판돈을 걸지는 않았지만 다이앤과 마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이앤이 아는 한, 심각한 문제를 놓고 재치있는 농담을 던지는 스타일이 아닌 마틴이 의견을 낸다. 중국인에 의한 알고리즘의 통제일 것이라고. 책이 나온 것이 2020년.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이 극도로 예민해지던 시기다. 마틴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 풋볼을 시청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인들이 경기를 보기위해 미국인들의 시청을 막는 인터넷 대재앙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불친절한 돈 드릴로는 모든 디지털이 한 순간에 멈춰버린 이유에 대해서, 입 한 번 꿈쩍이지 않는다. 다만 전력도 공급되지 않아 전기난로와 냉장고도 꺼지고, 8층에서 거리로 걸어 내려갔다가 다시 걸어서 올라와야 하고, 불안에 차 거리에 몰렸던 사람들은 다시 어느 새 셧다운과 번아웃을 받아들인 듯 행동하지만, 완벽하게 어두워진 센트럴 파크를 건너가는 일은 어느때보다 위험하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세상의 모든 디지털은 리마스터 됐다. 아인슈타인의 1912년 특수상대성이론을 숭배하는 마틴은, 지금 이 현상을 3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게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비상착륙에서 생존하고, 병원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섹스를 했으며, 치료를 받고 하여튼 침대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온 짐과 테사 커플은 마치 자아분열을 일으킨 듯 침실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웠고, 맥스는, 우리는 지금 좀비가 되고 있어, 새대가리가 되고 있다고, 라는 말을 남기고 이웃과 거리를 관찰하기 위해 집을 나섰으며, 옛 사제지간인 다이앤과 마틴은 3차 세계대전, 전쟁의 불안 속에서 자신들도 확실하게 의식했는지도 모르지만 불 꺼진 냉장고에 기대 허겁지겁 섹스를 치룬다.

 

  괜찮은 문명비평적 노벨라.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창비의 놀라운 편집술을 통해 억지로 140쪽의 단행본 한 권으로 출간을 했는데, 원래 미국에서 나온 것도 그랬을 터이지만, 그저 독자의 욕심으로 한 마디를 보태자면, 이 정도 분량의 다른 작품과 합쳐서 좀 경제적인 책을 만들어주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평소 현재의 문명이 갑자기 소멸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갖던 나는 아주 흥미로웠다. 다른 독자도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공감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문명은 인류의 자연 적응력을 아주 조금씩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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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1-11 11: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돈 드릴로 두 권 읽은것 같은데 다 어렵다는 느낌이 남아 있어요. <화이트 노이즈>, <마오> 인데요. 딱히 재미있게 읽지도 않았고 어렵다고 느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데, 아마도 화이트 노이즈에 그런게 나오거든요. 신약이 개발되어서 책 속 등장인물인 여자가 테스트를 하겠다고 자원하는거요. 그 약이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약‘이었을 거예요. 제가 그 부분에서 되게 놀랐던게요, 이게 보편적 감성인가 보구나, 약이 나올만큼. 하는 거였어요. 돈 드릴로,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신약... 이 바로 떠올라버립니다.

어려워서 그 뒤로 돈 드릴로 안찾아읽게 되었는데, 이 책 뭔가 무섭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140 페이지라니. 도전해볼만하다 싶습니다. 검색하러 가야겠어요.

Falstaff 2022-01-11 12:10   좋아요 4 | URL
이 책도 술술 읽히지는 않습니다. 독자들의 리뷰도 그리 좋지 않고요.
근데 제가 관심이 있는 분야라 아주 흥미롭게 읽은 것이지 다른 분도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짧으니까, 읽으셔도 무방하리라 싶어요!

yamoo 2022-01-11 1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돈 두릴로...몇 권 읽어 봤는데 나하곤 안맞더라고요. 그나마 화이트 노이즈가 잴 나았죠. 침묵도 봤는데 의미심장한 작품 같기도 했지만 더럽게 재미없다는 인상도 받은 작품이었슴돠~ 근데 드릴로 작품은 대체로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아젠 안 읽을 거라는..ㅎ 받

Falstaff 2022-01-11 19:25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이 책을 누구나 다 좋아하시리라,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았습지요. 그저 마음에 닿는 작가들만 읽기에도 돈과 시간이 읎더라고요.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2-01-12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재밌게 읽었습니다^^ 30년 후도 구체적 상상이 막히는 지라 ˝000˝ 동그라미 세 개 더 붙은 미래는 생각해본적 없었어요. 아인슈타인이 4차 대전 몽둥이 이야기를 한 게 골드문트님 글 읽으니 뭔 뜻인지 알겠네요...

저도 요새 책 중에는 경제적이고, 친환경 편집을 하면 몸집 줄일 수 있는 책들이 왜 이리 헤비급으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아쉬워요. 그점이..골드문트님께서 140쪽 책에 아쉬우시듯..

Falstaff 2022-01-12 12:5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 책은 다만 전기하고 디지털만 없어졌을 뿐인데도 세상이 난장판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 문명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일수록 더 힘든 미래, 역설 아니겠습니까.

책은 좀 두꺼워야 해요. 이런 책은 비슷한 중편을 합해서 내주면 좋잖아요. 독자는 돈 적게 들고, 종이와 나무 덜 쓰고, 물론 작가와 출판사는 그만큼 덜 벌겠지만 말입죠. 아, 그래서 안 되겠군요.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1-12 14: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먼자들의 도시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Falstaff 2022-01-12 14:36   좋아요 2 | URL
<눈먼 자들의 도시>가 언제 나올까,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그 작품 만큼 노골적이 아니라서 그렇지,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섬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하고는 궁합이 제대로 맞는 책이었습니다.

mini74 2022-02-10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낮술? 중이신지 ㅎㅎ 감축드리옵니다. 뭐 책 사겠지요 ㅎㅎ

그레이스 2022-02-10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thkang1001 2022-02-10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하라 2022-02-10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2-02-10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술 보다는 책이 좋은거 같아요 ^^

독서괭 2022-02-10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Falstaff 2022-02-11 06: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윽,어제 꽐라의 밤을 보내고 눈을 뜨니 많은 분께서 축하를 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
 
낙원상가 한국희곡명작선 36
정상미 지음 / 평민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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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극작가 정상미. 1979년 7월, 서울 강남 출생. 이이의 프로필을 보면 “어울리지 않게 강남에서 태어났다.”라고 썼다. 막내 이모가 1979년, 당시 기준으론 상 노처녀, 서른을 훌쩍 넘기도록 결혼을 하지 않자, 강남에서 농사짓는 사내에게 시집갔다고, 불쌍하다고, 언니, 그러니까 정여사께서 눈물을 찔끔거리던 시절이다. 거기 가려면 앞으로 들어설 서초역 1번 출구부터 걸어서 ‘40초’씩이나 걸리는 저 무지렁이 시골 동네였다. (끝까지 땅을 팔지 않아 나중에 진짜 부자가 돼 아직도 돈방석을 깔고 앉아 산다.) 어울리지 않기는 뭐가 어울리지 않나? 사방에서 땅 위로 솟은 건 칠성사이다 입간판 하나밖에 없던 동네였는데.
  하여튼 점점 자라서 추계예술대학 문창과에 진학해 소설을 전공한다. (그 여자 데려다주느라고 숱하게 가봐서 아는데) 161번 버스를 타고 굴레방다리 정류장에서 내려 공업학교 길 건너편 방향으로 쪽 올라가면 나오는 추계예대 문창과엔 장르별로 전공이 따로 있나보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가 4강에 오르는 바람에 전국민이 우리나라 자체가 세계에서 4등쯤 하는 줄 알았던 2002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한 4년 구성작가도 하고, 논술강사, 기자생활도 했다지만 번듯한 기자였다면 어디 기자였는지 밝혔을 테니 하여튼 그저 그런 기자 생활도 하며, 이때 아마추어 연극에 관여를 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 서른 살”이 된 2008년, 일본으로 건너가 극단 “문학좌 文學座”에 입단해 3년 동안 연출을 공부했었나보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에 의하면 처음 써본 희곡 <그들의 약속>이 201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극작가로 등단한다. 에이, 설마 정말로 난생 처음 쓴 작품으로 신춘문예에 당선할 수 있었을까. 습작은 죽어라 하지 않았겠어? 나 좀 알아달라고, 발표한 첫 작품이란 뜻으로 이해 해야지. 근데 이 해, 2012년에 신춘문예로 등단한 극작가 가운데 계속 극작을 해서 희곡집을 출간한 이는 아직까지 정상미밖에 없는 거 같다. 그러니 이이의 재능을 뽐내지 않을 이유는 없다. 가뜩이나 극작가의 일을 시작한 것에 “혹독한 대가를 치루며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는 사람한테. 그래도 정상미는 “극장을 찾는 이들이 잠시라도 웃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마음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사람인가 말이지.
  시중에 나온 이이의 책은 <낙원상가> 외에는 그림까지 포함해 50쪽에 불과한 작은 희곡집 <제발, 결혼>과 <2012 신춘문예 희곡 당선 작품집> 뿐이다. 이것들 외에 2014년에 공연이 이루어진 것으로 <내 마음의 슈퍼맨> 등이 있는 것 같다. 희곡 단행본 말고 예를 들면 좀 거창하게 ≪정상미 희곡집 1≫ 같은 걸 냈으면 좋았을 뻔했다. 뭐 사정이 있겠지.

 

  <낙원상가>는 종로3가 탑골공원 노인들 이야기다. 할아비 셋과 할어미 둘.
  장기풍. 76세. 이름에 어울리게 탑골공원 장기계의 고수다. 바둑, 장기 할 때 그 장기. 젊은 시절에는 단역 영화배우로 이이의 말을 곧이 믿자면 신성일보다 출연작이 더 많단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던 어느 날, 안방 옷장 구석에서 영화감독 주머니에나 들어 있을 지포 라이터를 발견하고, 그걸 모른 척했다. 아내는 장기풍이 모른 척하는 걸 모른 척하다가, 결국 당신이 하는 연기가 지겨워 못살겠다며 나가버렸다. 그래 자기도 단역배우 때려치우고 색소폰 연주를 배웠는데, 다 늦게 배운 가락이라 정말 죽기 살기로 연습을 해 겨우 단계에 올라, 미군부대 클럽부터 시작해 전국 각지에 안 가본 카바레가 없었다. 그러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토록 많던 카바레가 싹 사라져버려 이젠 쪽방에서 홀로 지내며, 나름 연예인이라고 쪽 빼 입은 차림으로 탑골에 나와 장기도 두고 기분을 낸다. 요새는 낙원 빌딩 문화센터에서 이문희라는 75세의 여인을 만나 왈츠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으며, 사랑을 이어가려고 하지만 자기 신세가 좀 그렇다.
  김주식은 79세. 맹호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 참전 용사다. 전장에서 조국을 위해 치열하게 싸운 공로를 인정받아 인헌 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아들 내외, 손주들과 함께 살지만, 말이 좋아 아들 며느리가 모시는 것이지, 부자지간 세대차이로 날마다 또다른 전쟁터다. 요즘엔 죽은 아내와 조상의 묘를 파헤쳐 화장해 산골을 하겠다고 아버지한테 날마다 대드는 아들 때문에 환장할 지경이다. 이러니 탑골에 나와 장기를 두어도 마음이 즐거울 리가 없다. 어느 날, 원각사지 12층 석탑 근처에서 이말자라는 70대 할미를 만나 모텔에 대실을 하고 나오는 걸 훈수꾼 최만동에게 들킨다. 김주식은 이말자가 생긴 것도 곱고 마음도 착한 것 같아 은근한 생각도 들었지만.
  최만동은 쪽방 보다는 좀 나은 곳에서 혼자 산다. 가족은 있으나 떨어져 살고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남겨주기 위해 온갖 모멸을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은다. 하지만 탑골에 모인 모르긴 해도 독거노인들에게 몇 백 원씩 푼돈을 얼마나 모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만동은 2백원, 3백원, 5백원, 천 원을 위하여 서울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노인한테 무료로 제공하는 대중교통과 두 발로 씩씩하게 걸어다니고 있다.
  75세 여인 심남순은 이른바 탑골 삐끼. 찻집으로 손님을 데려가 매상을 올려주면 찻값의 일정비율을 수수료로 받는다. 이를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이는 남자 노인을 상대로, 차 한 잔 마시러 가요, 커피 한 잔 사주세요,를 수없이 시도한다. 그래 영감들한테 얻어 마시는 커피, 생강차, 쌍화차 때문에 늘 위통에 시달린다. 물론 상대를 골라 가능하면 몸을 내놓기도 하지만 가끔은 늙은 자신의 가슴을 보고 ‘납작만두’라고 비아냥 거리는 치사한 노인도 있다. 그런 것들은 벗겨보면 어떻게 하나 같이 미더덕이나 오만둥이하고 닮았는지 말야.
  역시 75세 이문희는 소위 박카스 아줌마다. 그러나 심성은 낭만파. 낙원상가의 문화센터에서 왈츠를 배우다가 색소포니스트 장기풍과 친해진다. 장기풍은 아들 내외와 함께 살며 손주들은 해외유학중인 줄 안다. 그러니 집안 좋고, 말하는 거 보면 배운 거 많을 거 같고, 손주 유학 보낼 정도의 재산이면 그것도 괜찮고, 무엇보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인격이 있어, 가능하면 그와 사랑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 몸의 매매를 전제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러나 장기풍은 분위기가 삼삼해지면 손주들이 귀국하는 날이라 가족끼리 식사가 예약되어 있다고, 터치를 삼간다. 그런 그의 몸가짐에 더욱 마음이 끌린다. 오직 하나의 의심은, 장기풍이 한 말이 사실일까? 하는 것. 탑골에 나온 노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전직 대기업 사장, 임원, 장군출신의 퇴역군인, 유명학교 교수들을 필두로 우리나라를 들썩거리게 만들었던 왕년의 명사들이 모두 출동한 것 같으니.
  그러나 정작 이문희는 가명. 한 시절의 명배우 문희의 이름을 따, 딱 그녀만큼의 삶을 살고 싶어 이문희라고 거짓 이름을 사용하는 박카스 아줌마로 본명은 이말자. 나중에 베트남 참전 용사 김주식과 모텔에 두 시간 동안 들었던 인물이다.
  이 다섯 노인들이 펼치는 일상극. 애초부터 비극으로 준비했지만 정상미는 이를 가벼운 터치로 그려나간다. 하마터면 무거운 저기압이 팽배할 노년과 죽음의 시간이 인생이 뭐 다 그런 거지, 경쾌한 뽕짝 리듬을 타고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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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1-10 09: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탑골 삐끼가 있었다니ㅋㅋㅋㅋ지나가며 보기에는 그저 평화로운 곳이던데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군요. 골드문트님 마지막 문장이야말로 경쾌해요.👍

Falstaff 2022-01-10 10:15   좋아요 3 | URL
옙. 막내 사촌동생이 종로 성당에서 혼인미사 올릴 때 한 번 가봤는데요, 아이고, 거기 은근히 살벌하더라고요. ㅎㅎㅎㅎ 늙어도 수컷들만 있어서 그런가봅니다.

mini74 2022-01-10 10: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윤여정 나온 죽여주는 여자가 떠오르네요. 안그래도 엄마가 노인정가면 다들 한 가닥 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네요.

Falstaff 2022-01-10 10:27   좋아요 3 | URL
ㅎㅎㅎ 저도 윤여정 생각했답니다!
은제 한 번 봐야지 안 되겠습니다.
전 그래서 늙어도 노인정엔 안 가는 걸로.... ^^;;

바람돌이 2022-01-10 10: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교사 출신들은 노인정 가면 안돼요. 노인정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전직 교장출신, 다음이 교사출신!!! 어디서든지 가르치려 들어서..... 다 똑같은 노인들인데 제가 생각해도 왕재수일듯요. ㅎㅎ
여기 나오는 노인들은 모두 제 부모님 세대라 좀 짠하네요. 요즘 들어서 부모님들 보면서 아 저분들은 무슨 힘으로 이날 이때까지 버티고 살아왔을까싶은 생각도 하고, 어제는 친정엄마랑 얘기하면서엄마 인생에서 지금이 제일 편한 때 아냐? 라고 물었던 것도 떠오르고 하네요.

Falstaff 2022-01-10 11:02   좋아요 4 | URL
ㅋㅋㅋ 정여사께서도 노인정에 잘 가지 않으셨습죠. 그게 다 이유가 있군요.
에휴. 더 늙어봐야 알게 될 거 같아요. ㅎㅎㅎ

얄라알라 2022-01-12 12: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탑골GD 연예인 기사 뜨거울 때, 알고리즘 떄문에 탑골공원 자료 보던 때가 생각나네요.

코로나 이전엔 지나다 보면, 장기(? 바둑?) 하시는 데 모여계신 분들 많았는데 이젠 코로나라 완전 다른 풍경이겠죠. 직접 접근하긴 어려우니 이렇게 [낙원상가] 읽으며 알아봐도 좋겠네요 ㅎㅎ

Falstaff 2022-01-12 13:00   좋아요 3 | URL
저도 가보진 않고, 그냥 지나가봤는데도 위에 댓글로 썼다시피 조금 살벌하더라고요. 노숙인들, 박카스 할머니들, 눈매가 사나운 노인들이 공원 밖 인도에서 서성거리는데 분위기가 그리 좋지는 않더군요.
에휴, 그런 데 가서 소일거리 안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말입죠.

그레이스 2022-01-12 14: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언제적 161번이예요?
왠지 낯설지가 않아서 생각해보니 대학 다닐때 버스였네요^^

Falstaff 2022-01-12 14:38   좋아요 2 | URL
ㅋㅋㅋ 학교 앞에 161번이 정차했었나봅니다!
하긴 신촌 로터리 쪽으로 갔으니 한 두 학교가 아니긴 했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