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돈 드릴로 지음, 송은주 옮김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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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앞으로 얼마나 생존할 수 있을까. 급속한 온난화로 극지방의 빙하가 몽땅 녹아 상승한 해수면이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침수시키거나, 여의도만 한 운석이 충돌해 한 방에 지구 생명체의 90 퍼센트가 멸종하는 참사가 없더라도, 인간이 가장 오래 존속할 수 있는 가장 선의의 전망은 3만 년이다. 최장 3만 년 안에 지구에 대 빙하기가 닥칠 거란 지구과학자와 인류학자들의 의견을 따르면, 이 때 지구인구 90 퍼센트가 지금의 적도 지방을 빽빽하게 메울 것이고, 극심해질 식수와 식량 고갈로 인해 여태까지는 그저 책 속에 쓰여 있을 뿐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이리 상태’가 어떤 것인지 극명하게 나타날 것이라 한다. 그때가 되면 인류가 만들어 유지시켜왔던 모든 문명과 문화는 하루 아침에 사라질 것이며 인간종 간의 투쟁으로 자연소멸 하거나 급속도로 과거 석기시대로 돌아가리라고 경고한다. 이들이 적도지방에 바글바글 모여 벌일 제3차 혹은 제4차 세계대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몽둥이, 짐승의 뼈, 돌로 만든 칼과 창 그리고 도끼일 것이다. 그러면 지난 시절의 대 빙하기엔 인류의 조상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당시 인류는 원시 상태로 빙하기 정도의 자연재해를 극복할 수 있는 야수적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인류학자의 의견이다. 문명은 인간의 덩치를 크게 만들었으나 자연 적응력은 오랫동안 조금씩 빼앗아 가버렸다.
  이야기를 꺼낸 건, 책을 열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경구가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3차 대전에서 어떤 무기로 싸우게 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4차대전에서는 몽둥이와 돌을 들고 싸우게 될 것이다.”

 

  다이앤 루커스, 맥스 스태너. 이들은 딸 둘을 둔 부부로 큰 아이는 결혼해 보스톤에서 가정을 이루어 하여튼 겉으로 보기엔 아이들도 낳고 키워가며 행복하게 살고 있고, 작은 아이는 세계여행 중이다. 맥스는 술꾼으로 작품 속 이이가 출연하는 장면에서는 내내 미국산 오크 통에서 십년 이상 숙성한 버번 위스키 ‘위도우 제인’을 혼자만 마시고 있다. 다이앤은 자신이 37년간 불행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끔찍하게 지겨운 매일을 반복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는데, 이들 부부와 함께 TV를 통해 2022년의 56회 슈퍼볼을 보기 위해 초대한 옛 시절의 제자 마틴 데커와의 딱 한 번 불장난을 해보면 어떨까, 하고 은근히 몸을 달구고 있다.
  30대 초반의 청년 마틴 데커는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를 지냈던 다이앤의 제자이지만 이젠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 1912년 원고에만 집중해 연구하고 있는 교사다. 오래 전에는 다이앤의 말에 집중해야 했던 시절이 있으나, 이제는 마틴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다이앤이 오히려 가르침을 받기 위해 집중하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이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 TV를 시청하기로 한 커플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소설은 도착하지 않은 커플, 보험회사의 손해사정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짐 크립스와, 카리브해 지역, 유럽, 아시아 혈통이 복잡하게 믹스되어 까무잡잡하고 매끄러운 피부를 지닌 매력적인 여성, 문예지에 종종 작품을 싣는 시인이기도 한 테사 베런스가 시간에 맞춰 TV 중계를 보기 위해 파리 공항을 떠나 JFK 공항으로 가는 대서양 상공의 비행기 안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에서 시작한다.

 

  뉴욕에 거의 도착한 비행기. 비즈니스 좌석에 편히 누운 짐은 머리 위의 액정에 표시된 정보들, 고도 3만 3002피트, 외기온도 영하 58도, 뉴욕은 지금 12시 55분 같은 걸 자주 바라보며 지루한 비행을 견뎠다. 그러다가 한 순간 액정이 다 꺼지고, 비행기가 요동을 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기장의 안내 방송도 없이 고도를 낮춰 뉴욕의 비행장에 비상착륙을 하기에 이르렀고, 바퀴가 지상에 닿은 순간의 충격 때문에 자리에서 튀어나와 창문에 부딪힌 짐의 이마가 찢어지면서 창 밖으로 연료통이 있는 날개에 불이 붙은 걸 알아차렸다. 모든 것이 아무런 정보도, 안내도 없이 그저 비행 간식을 기다리다 생긴 일이다. 다행히 비행기는 그나마 폭발하지 않았고, 짐은 테사와, 세 명의 승무원과 함께 벤을 타고 의료기계가 먹통이 된 병원으로 간다. 이들은 병원에 도착해 자기 순서를 기다리다가 눈을 마주치더니 자신들이 항공기 불시착에서 생존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병원의 빈 화장실에 들어가 선 채로 갈급하게 섹스부터 한다. 죽음의 위협이 지나가자마자 번식 욕망이 들이닥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그 후에야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네거리 신호등이 한 순간 먹통이 되어 갈팡질팡하다가 등등의 이유로 갑자기 다친 수많은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가 치료를 받고, 걸어서, 형광등 또는 LED 등이 아니라 촛불을 밝힌 다이앤과 맥스의 집으로 간다.

 

  맥스는 2022년 슈퍼볼의 마지막 경기에 큰 돈을 걸었다. 일찌감치 TV를 켜고 경기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좀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작품 전체로 보아도 초청해서 함께 풋볼 시합을 보기로 한 손님들은 모두 다이앤의 친구들인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맥스는 이들과 겉돌고 있다. 드디어 중계방송을 시작, 상당한 시간동안 광고가 쏟아지는 것도 맥스는 짜증을 내지도 않고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처럼 즐긴다. 그러다가 국민의례가 시작, 조금 있으면 국가 Star spangled banner가 울려 퍼지려는 순간, 갑자기 맥스네 QLED TV 화면이 일그러지더니 추상적인 패턴을 그리다가 다시 리드미컬한 파동으로 직사각형, 삼각형, 정사각형 등의 도형으로 변하고, 화면이 텅 비어버린다. 놀란 맥스가 자기 집만 그런지 다른 집, 다른 건물도 그런지 알아보려 휴대전화를 들었으나, 휴대폰도, 이젠 장식품에 불과하지만 (나처럼) 아직 철거하지는 않았던 집전화도, 노트북도 작동하지 않는다. 오직 남은 건 회색 모니터. “내 판돈은?”
  판돈을 걸지는 않았지만 다이앤과 마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이앤이 아는 한, 심각한 문제를 놓고 재치있는 농담을 던지는 스타일이 아닌 마틴이 의견을 낸다. 중국인에 의한 알고리즘의 통제일 것이라고. 책이 나온 것이 2020년. 미국과 중국의 신경전이 극도로 예민해지던 시기다. 마틴은 중국인들이 아메리칸 풋볼을 시청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인들이 경기를 보기위해 미국인들의 시청을 막는 인터넷 대재앙을 일으켰을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불친절한 돈 드릴로는 모든 디지털이 한 순간에 멈춰버린 이유에 대해서, 입 한 번 꿈쩍이지 않는다. 다만 전력도 공급되지 않아 전기난로와 냉장고도 꺼지고, 8층에서 거리로 걸어 내려갔다가 다시 걸어서 올라와야 하고, 불안에 차 거리에 몰렸던 사람들은 다시 어느 새 셧다운과 번아웃을 받아들인 듯 행동하지만, 완벽하게 어두워진 센트럴 파크를 건너가는 일은 어느때보다 위험하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즉, 세상의 모든 디지털은 리마스터 됐다. 아인슈타인의 1912년 특수상대성이론을 숭배하는 마틴은, 지금 이 현상을 3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게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비상착륙에서 생존하고, 병원에서 존재를 확인하는 섹스를 했으며, 치료를 받고 하여튼 침대가 있는 집 안으로 들어온 짐과 테사 커플은 마치 자아분열을 일으킨 듯 침실의 침대를 차지하고 누웠고, 맥스는, 우리는 지금 좀비가 되고 있어, 새대가리가 되고 있다고, 라는 말을 남기고 이웃과 거리를 관찰하기 위해 집을 나섰으며, 옛 사제지간인 다이앤과 마틴은 3차 세계대전, 전쟁의 불안 속에서 자신들도 확실하게 의식했는지도 모르지만 불 꺼진 냉장고에 기대 허겁지겁 섹스를 치룬다.

 

  괜찮은 문명비평적 노벨라.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창비의 놀라운 편집술을 통해 억지로 140쪽의 단행본 한 권으로 출간을 했는데, 원래 미국에서 나온 것도 그랬을 터이지만, 그저 독자의 욕심으로 한 마디를 보태자면, 이 정도 분량의 다른 작품과 합쳐서 좀 경제적인 책을 만들어주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평소 현재의 문명이 갑자기 소멸되면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을 갖던 나는 아주 흥미로웠다. 다른 독자도 내가 읽으면서 느꼈던 공감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다. 문명은 인류의 자연 적응력을 아주 조금씩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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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1-11 11:5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는 돈 드릴로 두 권 읽은것 같은데 다 어렵다는 느낌이 남아 있어요. <화이트 노이즈>, <마오> 인데요. 딱히 재미있게 읽지도 않았고 어렵다고 느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남아 있는데, 아마도 화이트 노이즈에 그런게 나오거든요. 신약이 개발되어서 책 속 등장인물인 여자가 테스트를 하겠다고 자원하는거요. 그 약이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약‘이었을 거예요. 제가 그 부분에서 되게 놀랐던게요, 이게 보편적 감성인가 보구나, 약이 나올만큼. 하는 거였어요. 돈 드릴로, 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주는 신약... 이 바로 떠올라버립니다.

어려워서 그 뒤로 돈 드릴로 안찾아읽게 되었는데, 이 책 뭔가 무섭고 재미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140 페이지라니. 도전해볼만하다 싶습니다. 검색하러 가야겠어요.

Falstaff 2022-01-11 12:10   좋아요 4 | URL
이 책도 술술 읽히지는 않습니다. 독자들의 리뷰도 그리 좋지 않고요.
근데 제가 관심이 있는 분야라 아주 흥미롭게 읽은 것이지 다른 분도 그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짧으니까, 읽으셔도 무방하리라 싶어요!

yamoo 2022-01-11 17: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돈 두릴로...몇 권 읽어 봤는데 나하곤 안맞더라고요. 그나마 화이트 노이즈가 잴 나았죠. 침묵도 봤는데 의미심장한 작품 같기도 했지만 더럽게 재미없다는 인상도 받은 작품이었슴돠~ 근데 드릴로 작품은 대체로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아젠 안 읽을 거라는..ㅎ 받

Falstaff 2022-01-11 19:25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이 책을 누구나 다 좋아하시리라,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았습지요. 그저 마음에 닿는 작가들만 읽기에도 돈과 시간이 읎더라고요. ㅋㅋㅋㅋ

얄라알라 2022-01-12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재밌게 읽었습니다^^ 30년 후도 구체적 상상이 막히는 지라 ˝000˝ 동그라미 세 개 더 붙은 미래는 생각해본적 없었어요. 아인슈타인이 4차 대전 몽둥이 이야기를 한 게 골드문트님 글 읽으니 뭔 뜻인지 알겠네요...

저도 요새 책 중에는 경제적이고, 친환경 편집을 하면 몸집 줄일 수 있는 책들이 왜 이리 헤비급으로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아쉬워요. 그점이..골드문트님께서 140쪽 책에 아쉬우시듯..

Falstaff 2022-01-12 12:5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 책은 다만 전기하고 디지털만 없어졌을 뿐인데도 세상이 난장판 되는 상황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 문명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일수록 더 힘든 미래, 역설 아니겠습니까.

책은 좀 두꺼워야 해요. 이런 책은 비슷한 중편을 합해서 내주면 좋잖아요. 독자는 돈 적게 들고, 종이와 나무 덜 쓰고, 물론 작가와 출판사는 그만큼 덜 벌겠지만 말입죠. 아, 그래서 안 되겠군요.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2-01-12 14: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눈먼자들의 도시가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Falstaff 2022-01-12 14:36   좋아요 2 | URL
<눈먼 자들의 도시>가 언제 나올까, 기다리고 있던 참입니다!
그 작품 만큼 노골적이 아니라서 그렇지,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섬뜩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하고는 궁합이 제대로 맞는 책이었습니다.

mini74 2022-02-10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낮술? 중이신지 ㅎㅎ 감축드리옵니다. 뭐 책 사겠지요 ㅎㅎ

그레이스 2022-02-10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thkang1001 2022-02-10 18: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하라 2022-02-10 18: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축하드려요^^

새파랑 2022-02-10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축하드립니다. 역시 술 보다는 책이 좋은거 같아요 ^^

독서괭 2022-02-10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골드문트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Falstaff 2022-02-11 06: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윽,어제 꽐라의 밤을 보내고 눈을 뜨니 많은 분께서 축하를 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