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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이순원 지음 / 세계사 / 199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엔 문이당에서 "청소년 현대문학선"이란 시리즈의 책으로 나온다. 미쳤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책이 돼버린 거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저 먼 기억, 우울하고 유쾌하고 조급하고 갈급하고 무엇보다 누추했던 옛 시절을 떠올리며 피식,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청소년 현대문학선"이란 타이틀이 빼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 평엔, "아들 키우는 사람들은 꼭 읽어..." 나참. 내 속의 추억, 그건 중요한 거 아닌가?
오늘 좀 난감. 마음먹고 야~한 얘기하려 단단히 마음 먹었는데, 어제 술이 과했다.
중학교에 입학해서부터 19세 까지의 시기를 그린 성장소설. 주인공 이정수의 70%는 작가 이순원일 것이다. 이순원은 참 문장이... 아리아리하다. <수색, 그 물빛 무늬>를 읽고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도 아리아리해서 어떻게 흠을 한 번 잡아보려고 했다가, 드디어 했다. 그의 첫 소설집 <그 여름의 꽃게>를 찾아 읽은 후 이런 혼잣말을. "아휴, 이 상 찌질이가 용 됐다, 용 됐어." 그도 처음부터 아리아리한 글을 쓴 건 아니었고, <19세>는 하물며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요절복통이다. 아예 눈물을 쏙 뺄 때도 있다. 근데 문이당 책에 대해 잘 뜯어보니, 청소년을 위해서 작가가 다시 고쳐쓴 거란다. 그러니 그딴 건 읽을 필요 없단 얘기. 차라리 중고책을 사서 보시라.
주인공 이정수는 생일이 빨라 13세에 시험을 보고 중학교에 입학해서, 보나마자 강릉 중학교지 어디겠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소년. 자, 그럼 그림은 일단 그려진다.
2학년으로 진급한 정수, 사실은 반의 모든 아이들의 최고 관심사는 ① 어느날 갑자기 돋기 시작하는 배꼽아래 까실까실한 털, ② 여자 아이의 갈라진 장소의 윗부분 또는 주위에도 이같은 털이 돋을까 하는 궁금증, ③ 하물며 여자한테는 오직 생식을 위한 기관이 그 속에 있다는 충격적 사실의 인지, ④ 게다가 그 독특한 기관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피가 나온다는 터무니 없이 악의적인 거짓말의 횡행, 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그렇게 궁금하기 짝이 없는 도대체 말이 안 되는 갈증과 ⑥ 다른 아이 건 다 몽둥이만큼 굵어보이는데 왜 내것은 거의 엄지손가락 굵기밖에 안 되는지 앞으로 30년을 더 짊어지고 다녀야하는 낭패감의 시작, 뭐 이런 거다. 일단 위의 여섯가지 상상이 들기 시작하면, 여성들은 생각도 못하실지 모르지만 이 여섯가지 증상이 서서히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는데, 그 증상이 일단 시작하면 공부도 없고, 어미아비도 없고, 담임선생도 없고 오직 그거 뿐이다. 그래서 어느날 수염을 배꼽 아래까지 허옇게 기른 신령님이 나타나 내게 "네 생애가 그다지 성공한 거 같지 않으니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라고 하면 내가 정중하게 거절하겠다고 마음먹은 큰 이유 가운데 하나다. 어휴, 이거 진짠데, 나 소싯적에 쓴 짧은 메모에 "이렇게 강한 갈증은 고통보다 더하다"고 적혀있었기도 하다.
내 경우 위의 여섯가지 가운데 ③과 ④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③은 당연히 내 몸엔, 일단 눈으로 봐서는 그런 기관이 없고(두 쪽 부랄은 할머니들이 손자 뉘어놓고 기저귀 갈아주면서 호로록 따먹는 간식거린줄 알았다), ④ 피는 상처가 아니면 몸에서 나올 수 없는 건데, 여자의 몸이 어떻게 생겼는 줄은 초등학교 시절에 여자 아이들이 변소 뒤에 일렬로 쪼그려 앉아 오줌누는 걸 여러번(거의 상습적으로) 봐서 알았다시피 "혹시 찢어져 갈라진 게 아물지 않아서 피가 나오는 건가?" 아주 아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 당시에, 참 무식도 하지, 고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의 성교육 전담 개인교수, 여드름이 완전히 얼굴을 덮고 있던 김지호(이새낀 지금 뭐하고 있을까? 아버지한테 중국집 물려받아 수타 짬뽕 두드리고 있을까?) 마저도 "그냥 나오는 거야"라고밖엔 이야기해주지 못했으니. 이런 성적인 무식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2학년에 시작해서 3학년 정도가 되면 남자아이들은 놀라운 능력을 지니게 된다. 또래 여자 아이들, 좀 위 여고생, 심지어 여대생, 여자 직장인 등등 거리를 지나는 거의 모든 대한민국의 젊은 여성들을 척, 보기만 해도 그냥 알몸이 다 보이는 투시력이 생기는 거다. 난 이 초능력이 나한테만 국한하는 초능력인줄 알았다가, 그것도 무려 30여년 동안이나, 내 아이 중학교 3학년이 돼 "너도 그러냐?" 물어봤더니 무심하게 "응"하는 걸 듣고, 그게 남자들 공통의 능력인 줄 깨닫고는 실망한 적이 있다. 만일 나 만의 능력이라면 하루종일 공항 검색대에 앉아 테러분자와 밀수 및 마약사범 색출에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어 억대가 뭐야, 수억대 연봉까지 보장했을 텐데 말씀야. 하긴 하느님은 절대 나한테는 그놈의 '능력'같은 걸 아예 주지 않기로 작정을 했으니. 하여간 당시 내 상상 속에서 했던 것이 모두 다 이루어졌다면 대한민국은 아니고, 그 중에 수도 서울까지도 아니나, 적어도 그때 살던 서울시 성북구 구민 가운데 모든 가임여성은 전부 내 애인이었을 걸?
나나 이 소설을 쓴 이순원이나 반올림하면 동갑내기니까 내 얘길 하면 이순원 어렸을 당시 이야기하고 크게 차이나지 않아서 지금 열심히 구라를 풀고 있는데, 그때 청소년,아니, 남자 아이들이 얼마나 무식했느냐 하면, ③과 ④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고서야 궁금증이 풀렸으며, 대학에 들어가서도 여자들이 성적으로 흥분하면 ③ 주위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조차 아무것도 몰랐다. 놀랐지? 사르트르, 마르쿠제와 강만길을 읽는 사내애들이 여자애들의 생식기관에서 일어나는 현상조차 알지 못했다는 게. 하긴 유럽에서도 여성들만의 기관, 오직 성적 흥분 만을 위한 기관을 '발견'한 게 겨우 16세기, 기껏해야 5백년도 안 되었음에야. (페데리코 안다아시, <해부학자> 문학동네. 2011. 참조)
근데 주인공 이정수라고 읽는 이순원이 다른 인간들하고 달랐던 것이 정말 골통이었다는 점. 지가 삼국지에 나오는 촉의 용맹무쌍한 장군이자 잔머리의 왕자, 뒤통수 반골의 소지자 위연이라 지칭하는데 천만의 말씀, 이순원이 어려서부터 똥을 싸게 절차탁마와 동시에 백두산석마도진 해봤자 위연 꽁무니도 못 따라갈 테지만, 하여간 제갈무후를 칭하는 형한테 얻은 별호 위연 장군 흉내를 내는 듯, 남들 다 하는 짓, 정해진 규격대로 움직이며 그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는 일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러니 골통일밖에. 나는 정말 이런 인간이 좋지만, 그게 내 아이들 가운데 있다면 참 헛심 빠지긴 할 거 같다. 그게 뭐냐고? 에이, 그걸 내가 어떻게 가르쳐드려. 여태 해온 것이 있는데.
근데 위에서 얘기한 성적 성숙과정 및 골통짓, 이런 모든 걸 다 합쳐 우리는 뭐라고 칭하느냐 하면, 성장이라 한다. 커감. 그리하여 드디어 어느 날 문득, 이젠 자신의 모든 것을 엄정하게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빌어먹을 성인이 돼버리고, 뒤를 돌아다보는 순간 내 뒤에 펼쳐지는 무수한 누추한 그림들. 그건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당신 뒤의 아름답지만 누추한 그림을 바라보는 일. 그것이 이순원의 짧은 장편소설 <19세>를 읽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