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왕세자빈 - 영혼의 한중록
마거릿 드래블 지음, 전경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영국 셰필드에 교사 캐슬린 매리와 소설가 존 드래블 씨 부부가 살았는데 금슬이 좋아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었다. 큰딸은 소설가이자 비평가로 여왕으로부터 여성 작위 Dame을 부여받은 안토니아 브랫이고, 둘째 역시 Dame의 위를 얻은 소설가이며 오늘 소개하는 마거릿 드래블이요, 셋째 헬렌 랭던은 미술 사가로 활약을 했으니 이 집 딸 셋을 날 때부터 확실하게 뮤즈가 입김을 불어 그 바람에 쑥 빠져나온 것이 틀림없으렷다. 아들 하나 있는 것도 변호사로 평생 밥을 먹고 산 리처드 드래블이라 하니, 캐슬린과 존 드래블 부부가 다른 건 몰라도 자식 농사 하나는 근사하게 지었다, 라고 일반 상식적 시선으로 볼 수 있을 듯. 마거릿 드래블은 주로 TV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 클리브 스위프트와 결혼해 순서에 입각해 아담, 레베카, 조 스위프트를 낳고 15년 동안 살다가 1975년에 이혼해버린 다음 7년 동안 돌싱 생활 끝에 전기작가 마이클 홀로이드 경Sir하고 두 번째 결혼생활에 들어가 오늘에 이른다. 다른 건 몰라도 하여튼 타인의 사생활이 조금 궁금하더라도 이쯤에서 참자.
  여든 두 살의 영국 할머니 작가의 책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쓴 명작 <찬란한 길>이 갑자기 생각이 나, 마거릿 드래블의 다른 책을 검색했고, 다른 책이라고는 오직 한 권, <붉은 왕세자빈>만이 번역 출판되었는데, 그것도 품절 상태라 얼른 알라든 중고 가게에 주문하게 된 것. 속으로는 <찬란한 길>이 3부작이라고 하니 3부작 가운데 다른 책도 혹시 나오지 않았을까 김칫국물 벌컥벌컥 마시고 검색을 했던 차라, 내심 저 동쪽 변방에 있는 작은 반도국가 한국에서 2백 년 전에 있었던 엽기 궁중 잔혹극, 사도세자 이야기, 바로 혜경궁 홍씨의 자서전 <한중록>을 엮어 쓴 작품만 보여 조금 실망을 하긴 했었다.

 

  이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의 화자는 놀랍게도 혜경궁 홍씨. 그럼 시대가 18세기 중순이냐고? 아니다. 21세기다. 근데 화자는 혜경궁 홍씨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독자가 볼 수 있는 화자는 몸을 가지고 있는 여성, 혜경궁 홍씨가 아니라, 인간으로 80년을 살고, 죽어서 백년 넘게 동서양의 숱한 도서관을 유람하며 공부를 계속해 정치, 경제, 철학, 역사, 문학, 인류학, 의학, 특별히 신경정신학 등에 통달한 혜경궁 홍씨의 영혼이다. 그리하여 혜경궁 홍씨, 즉 헌경왕후는 시아버지 영조는 물론이거니와 친 시어머니 선희궁 영빈 이씨 기타 등등의 심리분석을 너끈하게 해낸다.
  당연히 마거릿 드래블이 극동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의 별 볼 일 없는 근대사에 깊은 관심을 쏟은 건 아니어서 헌경왕후 영혼의 발언을 통해 주장하는 건, 당시 영조와 정조 시대의 정치적 필연성 같은 거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고, 오직 하나, 영조가 사도세자를 핍박했고, 사도세자가 정신분열에 이르러 환관을 비롯한 나인, 심지어 작은댁을 도살하고, 정부인인 헌경왕후에게도 엣다 이거나 먹어라, 무거운 바둑판을 집어던져 광대뼈와 눈두덩이 검보라색으로 무지막지하게 부어오르게 하는 등의 패악질을 거듭하다가, 뒤주에 갇혀 사형을 당하는 일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2부에서는 옥스퍼드에서 1년간의 안식년을 지낸 주인공 바버라 할리웰 박사가 조선호텔에서 오프닝을 하고 주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사용할 국제 학회에 약 1주일 동안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해 돌아올 때까지다. 할리웰 박사는 비행기 안에서 읽기 위해 책 세 권을 가지고 가는데 이 가운데 한 권의 제목이 <18세기 궁정 회고록 : 한국 왕세자빈의 메시지>, 바로 <한중록>의 번역본이다. 바버라는 비행기 안에서 이 책에 완전히 빠져버린다. 그래 인천공항에 내려 자기의 샘소나이트 수트케이스와 똑같은 가방을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가지고 출국장을 빠져나와 숙소인 파고다 호텔에서 곤경을 맞는데, 덕분에 친절한 한국계 네덜란드 의사인 우박사를 만나 다시 한국을 떠날 때까지 진짜 무거운 신세를 지고 만다.
  역시 우연은 작가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바버라는 평생 처음 자기 수트케이스 대신 다른 사람 것을 들고 나오고, 그것을 계기로 선량하기 이를 데 없고 친절하긴 부처님 가운데 토막 수준인 우박사를 만났는데, 뉴욕에 사는 우박사의 여동생이, 헌경왕후의 하나 남은 아들 정조가 환갑잔치를 베푼 수원 화성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하기 위한 UN 직원이자 학자여서, 우박사를 따라 창경궁과 종묘와 비원과 성균관을 구경할 수 있었던 건 물론이고 수원 화성까지 돌아보는데, 화성의 영어가 유창한 여성 안내원조차 글쎄 우박사 동생의 제자였던 거 아니냐 말이지. 그래 섣부른 독자들은 우박사와 바버라 사이의 인종을 초월한 러브씬 하나 정도를 기대할 수도 있지만, 진짜 베드씬은 바버라가 참석한 학회에서 가장 유명하고 저명한 학자인 예순여덟 살의 네덜란드인 얀 반 요스트와 벌어진다.

 

  만일 당신이 이 책을 읽겠다면, 이왕 품절되기도 했고 그런데 굳이 찾아 읽을 필요가 있겠느냐고 물어보겠다. 내 옆에 있거나, 하다못해 같은 아파트 단지 안에 사는 독자라면 그냥 내 책을 주든지. 나 이래봬도 내 책 잘 주는 사람이다. 이런 책은 말이지.
  말한 것과 같이 1부의 화자는 혜경궁 홍씨로 알려진 헌경왕후. 그러면 2부와 좀 장황하고 억지스런 에필로그 격인 3부는 헌경왕후하고, 아니면 <한중록>의 주요 등장인물들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연결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연결이 된다. 단, 연결은 독자가 최선의 선량한 의도를 가지고 “억지로” 시켜주면, 된다. 까짓것. 우리나라 국민들이 지난 반세기 동안 줄창 외치고 또 외쳤던 구호가 뭔가. “하면 된다.” 또는 “까라면 깐다.” 그렇다. 기꺼이 맞춰주면 맞춰진다.
  난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었다. 딱 하나 보고.
  마거릿 드래블이 작품을 써나가는 솜씨.

 

 


  근데, 혜경궁 홍씨를 검색하려니까, 혜경궁 다음에 홍씨 앞에 왜 김씨가 먼저 나오지? 한 번 클릭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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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8-24 09: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타 트렉 작가가 세종 대왕을 주인공으로 쓴 판타지 ‘킹 세종 더 그레이트’ 생각나요! ^^

Falstaff 2021-08-24 09:23   좋아요 3 | URL
아, 그 작품이 외국 작가가 쓴 거였군요! 크... 재미있습니다.

새파랑 2021-08-24 10: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뭔가 특이한 설정의 책이군요. 주고 싶은 이런 책이라고 하시니 왠지 꺼려지는군요🙄 다 읽으셨다는걸 자랑스러워 하시는 기분이 드네요 ㅎㅎ

Falstaff 2021-08-24 10:40   좋아요 4 | URL
니옙. 구태여 품절된 책을 찾아 읽으실 필요까지는 없을 듯합니다.
읽는 재미는 있어요. 마가릿 드리블이 글이 참 좋거든요. 본문에 썼다시피 대산세계문학전집에서 낸 <찬란한 길>, 정말 괜찮습니다. 전 그 책에 반해서, 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1-08-24 14: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중록을 텍스트로 한 컨텐츠가 워낙에 많다보니 일단 소재에서부터 약간 식상한 느낌입니다. 근데 외국인들이 보면 또 좀 다르게 음 하면서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해봅니다. ^^

Falstaff 2021-08-24 14:58   좋아요 2 | URL
이제는 궁중 이야기가 정치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드래블도 여전히 궁중에서 벌어진 잔혹극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많이 실망했습니다.
별 거 없어요. 혹시 도서관에 가셔서 발견하시면 훑어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