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 / 눈송이의 유언
후안 마요르가 지음, 김재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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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생 뱀띠 스페인의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는 마드리드 인근 고급주택가 참베리Chamberi에서 낳고 자랐다. 스페인 국립연구원에 입학해 철학자 레이예스 마테를 사사한 후 파리와 베를린의 뮌스터 대학에서 학업을 쌓고 1997년에 국립원격교육대학 (National University Distance Education)에서 박사 학위를 얻었는데, 이후에도 물론 꾸준히 철학 공부를 했겠지만, 극작가로 더욱 알려져 있다. 이이가 영어권 국가에 알려지게 된 것은 2017년 영국의 런던 스페인 연극 축제 당시에 마요르가의 2004년 작품 <천국으로 가는 길>을 공연하고부터라고 한다. 책 뒤의 자료에 의하면 마드리드 왕립드라마예술학교에서 교수로 지내다가 지금(2019년)은 카를로스 3세 대학에서 무대예술 강좌를 총괄하고 있다니 학과장쯤 되는 모양이다. 아내와 세 자녀를 두었다. 2011년에 “라 로카 델 라 카사‘라는 극단을 만들어 한 해에 한 작품씩 직접 연출을 한단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비싼 책값으로 악명이 높았던(지금은 조금 저렴해졌지만 그래도 약간 비싼 수준) 출판사 지만지를 통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 보다시피 두 편의 희곡을 담고 있다. <비평가>는 두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 장편이고 <눈송이의 유언>은 눈송이라고 불리던 적도 기니 출생의 흰 고릴라가 바르셀로나 동물원에서 피부암으로 안락사를 당할 당시를 배경으로 삶과 죽음과 기타 등등을 설득력 있게 묘사한 짧은 3인극이다. <눈송이의 유언>, 죽음에 대한 상당히 고급스러운 비유를 함유한 문학이라는 데 동의하지만 그건 독자의 직접 독서를 위하여 남겨두고 오늘의 독후감은 <비평가>만 얘기해보기로 한다.

 

  비단 문학뿐 아니라 모든 예술 장르에서 언제나 시비 분연한 관계는 창작자와 비평가 사이였을 것이다. <비평가>에서는 노골적으로 극작가와 연극 비평가 사이의 관계를 사각의 링 안에서 심판도 없이, 판정도 없이 누군가가 하나가 녹 다운 될 때까지 벌어야 하는 권투시합으로 비유한다. 그렇다고 연극에 진짜로 극작가와 비평가가 나와서 트렁크 한 장 걸치고 주먹다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급 학교에서 제대로 문학을 배운 먹물답게 말 하나로 진검승부를 펼친다.
  작가는 스카르파, 평론가는 볼로디아.
  일찍이 십 년 전에 볼로디아가 스카르파의 작품에 대해서 무지막지한 비평을 가한 적이 있었다. 만일 가능했더라면 한없이 낙심했던 스카르파의 당시(지금은 이혼해버린) 아내에 의하여 살해당했을 수도 있을 정도로 가차 없이 혹평했던 것. 이후 스카르파는 절필에 들어갔다고, 거의 모든 사람이 믿었으나 누구보다도 스카르파를 이해했던 볼로디아는 그가 여전히 창작 중일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았던, 그만큼 비평을 했으되 신뢰해마지않던 극작가였다. 이 사이, 이해하시려나? 스카르파는 볼로디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십 년 만에 새로운 작품을 무대에 올린 날.
  연극은 대성공. 스카르파와 연출자, 배우들은 연극이 끝난 후 무려 15분 동안 기립박수를 동반한 커튼콜의 영광을 받는다. 하지만 볼로디아는 천생이 비평가. 그는 15분의 기립박수를 지켜보지 않고 도중에 급하게 집으로 가서, 연극 극장의 매표소 직원이었던 어머니가 살아생전 빽빽하게 기록한 회계장부 뒷면에 오늘 자신이 감상한 스카르파의 연극에 대한 비평문을 쓰기 시작한다. 회계장부 뒷면, 그러니까 짝수 페이지에 비평을 쓰는 건 볼로디아의 루틴이다. 그는 연극 초연을 관람하고 곧바로 집에 가서 딱 그 종이, 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사용했던 회계장부의 뒷면을 이용해 비평문을 쓰고, 정각 자정에 신문사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대고 자신이 쓴 비평을 읽어 다음 날 아침 신문에 실리게 하는 널리 알려진 습관이 있던 바. 사실 볼로디아는, 어머니가 위에서 얘기했듯 매표소 입장권 판매원이었고, 아버지는 극장 기도 정도였다고 보면 되는데 뛰어난 관찰력으로 관객들의 출신 성분과 교육수준, 빈부 정도를 뛰어넘어 그들이 느끼는 공감과 감동 수준까지 정확하게 알아채는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 능력을 이어받은 것. 게다가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아 예술을 감식할 수 있는 능력까지 배양했으니 비평가로서는 최고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오늘은 스카르파가 오랜 침묵 끝에 새로운 희곡을 쓰고, 그것을 무대에 처음 올린 날. 위에서 이야기했듯 볼로디아는 커튼콜이고 뭐고 하여튼 극이 끝나자마자 극장을 뛰쳐나와 눈썹이 휘날리게 집에 돌아와 어머니의 회계장부 짝수 페이지에 자신의 비평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다른 날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날은 특별히 빼어난 연극 한 편이 만들어지려고 그랬는지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볼로디아에게는 거의 없던 일. 그는 오직 홀로 작업하는데 이골이 난 인물이라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신경이 곤두서버린다. 누굴까. 볼로디아는 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누구? 라고 묻는다. 방문객은 다름 아닌 스카르파. 스카르파는 오늘 초연한 연극의 극작가답게 우아한 연미복을 입고 문이 조금 열리자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문을 밀고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그보다 나이가 많은 볼로디아는 막지도 못하고 들어오게 내버려 둘 수밖에.
  이렇게 해서 극작가와 비평가 사이에 먼저 신경전이 펼쳐지고, 곧바로 오늘 스카르파의 작품에 대한 비평가-극작가 사이에 진검승부가 벌어진다. 이에 걸맞게 오늘 공연한 작품이 권투 선수와 코치, 그리고 한 여인이 등장하는 연극으로, 희곡을 읽는 누구나가 권투 선수-극작가, 코치-비평가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제3의 등장인물인 여자. 극작가와 평론가의 변주자로 등장하는 연출가는 여인을 나체로 등장시킨다고 하는데 그건 다음으로 하자. 사실은 일종의 스포일러라 여인에 관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극작가와 비평가의 몰입한 토론은…….

 

  …… 토론은, 극작가와 비평가 사이의 놀라운 수준의 토론. 만일 이 작품을 별 다섯 개로 평점을 매긴다면 만점을 받을 만한 고급스러운, 기본적 논의에 초점이 맞추어진다고 본다. 모르긴 몰라도 극 작품의 시작과 동시에 탄생했을 비평. 창작과 비평 사이의 기묘한 신경전과 불일치와 때론 투쟁 관계는 비단 변증법이란 골치 아픈 과정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서로 긴밀하게 협조, 고양, 가끔가다 비위 맞추기, 아부, 상호 협조, 격려 등의 선순환 또는 악순환의 사이클을 쉼 없이 거쳤으리라. 그런데 21세기 와서 이제 충분하게 세속화되어 있는 독자들한테 난데없이 창작과 비평의 잣대를 들이밀고 각자의 소신을 주장하니, 신기하게도 이게 또 참신하다는 거 아닌가. 얼마나 참신한지는 직접 읽어봐야 아실 듯하다. 처음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시작했다가 저절로 작가의 의도에 함몰되어 독자 스스로 심각해지는, 참 근사한 작품, 극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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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23 10: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희곡 마니아이신 폴스타프님 별 5개라면 읽어봐야 겠군요. 두편 모두 관심이 가네요. 이미 장바구니에 들어있는건 함정이라는 🙄

Falstaff 2021-08-23 10:31   좋아요 3 | URL
조심...하셔요.
진지한 이야기, 이 가운데서도 ‘창작행위와 비평에 관한 진지한 토론‘을 다른 말로 하면 ˝재미 없음˝일 수도 있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청아 2021-08-23 12: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이런 리뷰에 후안 마요르가면 꼭꼭 읽어야겠는데요?! <비평가>극작가와 비평가 사이 어떤 이야기가 오고갈지 너무 궁금합니다. 볼로디아의 사람을 간파하는 능력은 셜록을 능가하는 것도 같고요😉

Falstaff 2021-08-23 12:11   좋아요 3 | URL
좋은 작품입니다.
<눈송이의 유언>도 재미있습니다. 눈송이란 바르셀로나 동물원에서 진짜로 죽을 때까지 살았던 흰털 알비노 고릴라의 최후를 묘사하면서, 죽음에 대한 사색을 도모합니다. ㅎㅎㅎ 다만 책값이 좀 비싼 게 흠입니다. 도서관에 책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요.

붕붕툐툐 2021-08-23 21: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서 재미가 두 배였습니다. 저도 정말 재밌게 읽었어요~👍👍

Falstaff 2021-08-26 09:34   좋아요 0 | URL
이 사람 책, 지만지에서 나온 게 또 있지요?
저도 그건 도서관에서 빌려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