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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예쁜 말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9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코맥 매카시는 최근에야 우리에게 이름이 알려졌지만, 미국에서는 윌리엄 포크너와 허먼 멜빌의 명맥을 잇는 최고의 작가로 오래전부터 비평계와 대중 모두에게서 사랑받고 있다.”
역자 김시현이 쓴 세 페이지 분량 “역자해설”의 첫 번째 문장이다. 아, 절망이다. 이것으로 문학, 특히 소설책을 읽는 나의 소양이 얼마나 하잘 것 없는지 백일하에 밝혀지는 순간이다. “허먼 멜빌과 윌리엄 포크너와 명맥을 잇는다.”라니. 어떤 미국 작가가 있어서 이런 광휘에 찬 찬사를 받을 수 있을까. 인류의 문화유산인 <모비 딕>과 저 거대한 모더니즘의 만개를 이룬 <음향과 분노>, <압살롬, 압살롬>의 전통을 <모두 다 예쁜 말들>이 이어받았다니. 읽고도 그런 눈치, 눈치는커녕 기미도 알아채지 못한 나의 우둔함이 그저 한심할 뿐이다. 미국의 명문 가운데서도 명문인 예일 대학의 가장 존경받는 테뉴어이며 문학평론가인 해럴드 블룸은 매카시를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 필립 로스와 더불어 현대 미국의 4대 작가로 꼽았다고 하는데, 그가 어느 책이나 어떤 페이퍼에서 그렇게 얘기했는지는 몰라도, 하여튼 미국에선 대단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작가인 것은 확실한 거 같다. 그건 이해가 간다. <모두 다 예쁜 말들> 역시 미국인이 아니라면 결코 쓸 수 없는 20세기 말의 서부극 자체이니까.
근데 김시현의 해설이 좀 의아한 건, 최근에 코맥 매카시의 이름이 알려졌다고? 책 좀 읽는 우덜이 알기로 코맥 매카시의 책이 나온 것이 벌써 이십 년 비슷하게 되지 않았나 싶게 익숙한데, 이게 최근? 정신 차려 확인해보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9번에서 말하는 ‘최근’은 2008년,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이다. 13년 전인 2008년에 김시현의 번역으로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번으로 찍었고, 무슨 사정이 있는지 책 껍데기 그림만 바꿔 2011년에 모던 클래식 43번으로 번호를 바꿔 나왔다가, 다시 10년 만에 세계문학전집 379번으로 판갈이를 하면서, 13년 전에 썼다고 짐작할 수 있는 “역자해설”을 수정 없이 그대로 복사해온 것 같다. 와우, 놀래라. 그래 김시현은 13년 동안 이 책의 의미를 독자에게 새롭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없었나? 아니면 있었기는 한데 출판사에서 얼른 찍어야 하니 있더라도 좀 참으라고 해 입 꾹 했나.
그리고 좀 보시라. 2008년에 찍은 책을 그대로 복사하니까, 교정 교열이 얼마나 좋은가 말이지. 내가 몇 번을 얘기하지만 민음사가 당시만 해도 꽤 괜찮은 출판사였다니까 그래. 고인이 된 박맹호 사장께서 책 하나는 똑바로 찍으라고 했거든. 그래서 ‘훈민정음’으로부터 글자를 따와 출판사 이름을 ‘민음民音’이라 지은 거 아니냐고. 박사장께서 늙어 힘 빠져 두 아드님의 공동 경영체로 넘어가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분명히. 혹시 능력 있지만 월급 많이 줘야 하는 고참 교정, 교열 담당자를 잘라버린 거 아닌가 몰라.
책 뒤에 작가 연보가 나온다. 여기에 재미난 것이 있어서 소개한다. 1961년에 대학 동창인 리 홀먼과 결혼해 1962년에 아들 컬런이 태어나는데, 매카시는 처자식을 부양하기 위해 창작에 전념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내에게 일자리를 구해 자기가 소설 쓰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였다. 아기 엄마 리는 이 말에 너무나도 빡쳐서 그냥 서류로 말하자고 하더니, 이혼 청구를 해버렸다. 매카시 참 불쌍하게 됐다. 창작에 전념하기 위하여 자기만의 방과 연 수입(이라기보다 마누라한테 받는 연간 용돈) 5백 파운드를 원했다는 죄명 하나로 이혼당하고, 꼬박꼬박 양육비 송금하고, 심지어 와이오밍으로 이사까지 가야 했으니. 글을 쓰기 위해서라도 일단 먹어야 사니까, 몇 년 후 시카고의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오퍼레이터 일을 하며 장편소설을 써 랜덤하우스에 보냈고, 이걸 마음에 들어 한 편집자가 이때부터 무려 20년 동안 매카시를 찜해버렸다니 처음부터 미국적으로 잘 팔리는 소설을 쓴 거 같다.
<모두 다 예쁜 말들>은 1992년에 20만 부 가까이 팔렸고, 그 해에 전미 도서상과 전미 비평가협회상을 휩쓴 작품으로 이어 발표하는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과 합해 국경삼부작이라고 일컫는다. 코맥 매카시라고는 <카운슬러>만 읽어봤을 뿐인데, <카운슬러>가 얼마나 충격적으로 정이 떨어지든지, 내가 다시는 코맥 매카시를 읽나 봐라, 했다가 글쎄 다른 이도 아니고 허먼 멜빌과 윌리엄 포크너의 명맥을 잇는 작가라는 말에 혹해서, 어쩌다 재수없게 제일 언짢은 책 <카운슬러>를 제일 먼저 읽는 바람에 정나미가 똑 떨어졌을 수 있다고 여겨 독자평점 10점 만점에 10점짜리, <모두 다 예쁜 말들>을 골라서, 의미심장하게 읽었다는 거 아닌가.
10점 만점에 10점에 동의한다. 단, 텍사스 남부와 멕시코 북부 지역의 사막과 황량한 벌판, 크고 작은 메사 지형(레슬리 마몬 실코, <의식> 참조)의 야생마들 같은 자연의 광막한 풍경 묘사에 관해서만 그렇다. 아, 이 책에서도 메사 지형이 나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레슬리 마몬 실코의 <의식>이 떠올랐으며, 그런 황량한 지역으로 추방당해 살던 아메리카 원주민을 생각했는데, 이게 자연스럽게, 현대화의 광풍 속에 이제 농장경영으로는 돈이 벌리지 않아 농장을 때려치우는 바람에 아직 대농장을 유지하고 있는 멕시코로 길을 떠난 미국 소년들의 이야기인 것도 마땅하지 않았고, 명예로운 건국혁명의 역사를 가진 미국과 달리 부패와 배반이라는 터전 위에서 피비린내 나는 혁명의 역사 속에서 아직도 19세기 라틴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멕시코와 멕시코 사람들을 가비얍고 비아냥거리며 바라보는 눈초리도 심히 마땅하지 않았다.
시대는 1949년 이후, 50년대 초까지 특정 시기로 짐작할 수 있다. 1872년에 지은 집에서 77년 후에 주인공 존 그래디 콜의 외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죽음을 맞는다니, 일단 1949년이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죽어서 집에 실려 오거나, 그저 죽었다는 소문만 들려오거나, 다른 곳에 묻혀 있단다. 이 외할아버지 그래디 씨가 마지막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농장을 경영하고자 했던 이다. 이제 법적인 상속인은 외손자인 존 그래디 콜이 아니라 엄마 콜 여사인데, 농장을 해봤자 현상유지도 힘들고 관리하기에도 신경만 쓰이는데다가, 외할아버지가 죽기 몇 주 전에 남편과 깔끔하게 이혼을 해버려 세상에 걸릴 거 없는 서른여섯 살의 돌싱으로 여전히 피가 뜨거운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텅 빈 황무지가 아니라 도심 한 복판의 연극 무대 위라고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말을 타고 소를 몰고 다니는 카우보이가 평생소원(이 부근에서 애니 프루가 쓴 <브로크백 마운틴>이 생각났다.)인 우리의 주인공 존 그래디 콜은 당년 열여섯 살의 나이로 한 살 위인 동네 친구 레이시 롤린스와 뜻을 같이 하여, 1949년, 고속도로엔 거대한 트럭이 맹렬한 소음과 매연을 내뿜으며 질주하는 시기에 각기 말 잔등에 올라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멕시코의 거대 농장을 향해 떠난다. 20세기 말에 쓴 서부영화답게 이들은 가는 길에 열네 살이나 먹었을까 하지만 스스로 열여섯 살이라고 우기는 또 다른 소년 지미 블래빈스를 만나 셋이 한 팀을 이룬다. 그런데 서부영화라면 당연히 나와야 되는 거 하나 있지? 그렇다. 지미 블래빈스는 낡아빠진 콜트 비슬리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롤린스도 애초에 소총 한 정을 품에 가지고 있었고. 소설을 읽다가 작가가 조금의 의도를 가지고 총을 등장시키면, 그건 언젠가 적어도 한 번은 불을 뿜는다. 이건 진리다. 그러나 이 독후감에서는 총이 불을 뿜는 일까지는 소개하지 않을 터이다.
어쨌든 이 지미 블래빈스라는 이름의 소년이 문제아. 길을 가다가 저 남쪽에서부터 검은 먹구름과 천둥 번개가 몰아치기 시작하니, 집안에 유독 번개에 맞아 죽은 인간들이 많아 유별나게 공포심이 있는 지미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하천 둑(이라고 하자) 근처에 거의 헐벗은 상태로 숨어버린다. 말은 이미 도망가고, 단추나 후크 같은 금속 때문에 옷도 훌렁 벗어버린 채. 진짜로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난리를 부리고 지나가고 보니까, 부츠도 한 쪽이 없어지고, 옷도 누더기가 되고, 무엇보다 덩치가 산 만한 말도 사라져버렸다. 그리하여 지미는 존의 말을 얻어 타고 길을 가다가 멕시코 작은 마을에서 마침내 자기 말을 발견한다. 그러니 어떻게 말을 포기하겠는가. 이윽고 밤이 오고, 밤이 깊어지고, 밤이 거의 물러날 새벽 시간이 오자 지미는 말을 보관하고 있는 집에 몰래 들어가 마치 도둑질을 하듯 말을 타고 도망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모두 다 예쁜 말들>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 되는 사건. 하여간 우리의 주인공 존 그래디 콜과 레이시 콜린스는 예정대로 목장에 취직을 하고, 어려서부터 배운 말 조련 기술로 특별한 인정도 받고, 열여섯 살의 청춘에 어울리는 연애도 하려는데, 저 멀리서 말을 되찾은 어린 지미가 말과 함께 잃어버렸던 낡은 총 콜트 비슬리마저 되찾으려 하다가 이야기는 삼마처럼 엉클어져버린다.
아무리 1949년이나 50년 초라고 해도 그렇지, 세상에나. 이들의 나이 열넷, 열여섯, 열일곱 아닌가 말이지. 우리나라로 치면 중2, 고1, 고2. 이렇게 세 명의 청소년이 하는 일, 행동, 사고방식 등등. 이게 어떻게 청소년일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저 소년이라고 읽고, 완력이 필요할 때는 25세, 지능이 필요할 때는 40세, 사랑을 할 때는 30세, 인생을 논할 때는 60세이니 도대체 얘네들, 이 가운데서도 존 그래디 콜이 글쎄 사람이야, 화성인이야, 아니면 안드로메다인 거디야?
아주 정확하게 미국적인 작품. 아메리칸 웨스턴.
저 앞에서 얘기한 레슬리 마몬 실코의 <의식>과 비교 불가. 현대 미국의 4대 소설가이고, 멜빌과 포크너의 명맥을 이었다니 내 입장엔, 말.잇.못. 이기는 한데, 근데, 도대체 내가 누구하고 궁합이 맞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코맥 매카시일까, 역자 김시현일까. 아니면 둘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