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보다 매혹적인 오페라의 세계로”라고 띠지를 단 책이 나왔나 봅니다. 이 책을 읽을 의향은 없지만, 많은 알라디너께서 에이, 진짜 드라마보다 매혹적인 오페라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섣불리 오페라가 드라마보다 매혹적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재미’라는 측면으로 시각을 좁혀보면 확실히 오페라가 드라마보다 재미있습니다. 적지 않은 고상한 시청자들을 제외하고 제 수준의 일반인들이 TV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막장 드라마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아무리 양보해도 21세기 우리나라의 TV 드라마보다 19세기 유럽에서 작곡하고 공연한 오페라가 훨씬 더 엽기, 잔혹, 막장 드라마적 성격이 짙습니다.


베를리오즈, <트로이 사람들> 디동과 애네의 이중창 "가없는 환희의 밤이여"


  벨리니와 도니제티, 감탄할 수준의 절묘한 선율로 벨칸토의 정점에 선 작곡가들의 18번은 아름다운 여자 주인공이 헤까닥 미쳐버리게 만드는 건데요, 거품 물던 소프라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오해 풀리고 남자 주인공하고 시집 장가들어 잘 먹고 잘 사는 해피엔드요, 끝까지 미쳐 있으면 아무 잘못도 없는 새신랑을 신혼 첫날밤에 칼로 푹 쑤셔 죽여놓고 피칠갑 한 잠옷 바람에 헤어진 애인 이름 부르며 노래하다가 죽어버리는 엽기, 잔혹, 막장의 비극 드라마가 됩니다.

  가장 웅대한 오페라라고 일컫는 <니벨룽겐의 반지>의 중요한 주인공인 지그린데와 지그문트는 같은 부모를 둔 쌍둥이 남매이면서 보자마자 뜻과 몸을 맞추어 아들 하나를 낳습니다. 이들의 아들 지크프리트는 고모 브륀힐데와 정식 부부가 됩니다만, 이런 복잡한 족보는 계약의 신이면서 계약을 합법적으로 깨뜨릴 주신 보탄의 잔머리에서 만들어집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오페라가 고급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20세기 들어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만든 <장미의 기사>는 바람난 유부녀가 애인 정리하는 내용입니다. 고급은커녕 그냥 사는 수준도 안 됩니다. 즉, 음악이 없다면 누가 비싼 돈 들여 극장 티켓을 사겠느냐는 것이지요. 음악의 하위장르이면서 극작품일 뿐입니다. 여기서 작곡가들이 딜레마에 빠진다더군요. 음악이 먼저냐, 극이 먼저냐. 베르디는 결국 극이 먼저라는 입장으로 돌아섰다는 얘기를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오페라는 한 시간 동안 졸다가 아리아 하나 듣고, 또 한 시간 동안 졸다가 다른 아리아 하나 듣고 집에 가는 것.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 많습니다. 저는 한 명이 심각한 노래하는 것도 좋지만 역시 음악의 꽃은 둘 이상의 악기나 둘 이상의 화성이 섞여 빚어내는 하모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리아보다는 이중창, 트리오, 사중창, 심지어 팔중창 같은 것을 더 좋아합니다. 훨씬 더. 같은 선율을 따라 각기 다른 내용을 노래하는 감정의 뒤섞임 같은 건 오직 오페라 한 장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입지요. 물론 가오싱젠은 <버스 정류장>에서 사성이 확실한 중국어 발음을 이용해 희곡/연극에서도 오페라의 중창 비슷한 효과를 노린 것 같습니다만(이건 제 생각일 뿐입니다. 다른 곳에서 인용하시면 심하게 창피당하실 수 있습니다).

  하여튼 오페라의 전성시대는 확실히 저물었습니다.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도 오페라는 사망선고를 받아놓은 거 같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소호흡기를 달아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위에 이탈리아 사람 몇 있(었)는데, 오페라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무릎 위에 대본(리브레토) 올려놓고 길고 긴 시간동안 졸며 들으며 감상하는 재미없는 예술형식으로 선을 딱, 그어버리더라고요. 이제 이탈리아에서 축구만 살아남았다고 하더군요.


핸델, <롱고바르디의 왕비 로델린다> 로델린다와 베르타리오의 이중창 "한 번 안아봅시다."


  <루살카>에서 루살카의 아리아 “하늘 높은 곳의 달님이시여”를 많이 좋아하시는군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드보르자크는 실내악과 교향곡 작곡가로 알려졌지만 아홉 편의 오페라를 출판하기도 했습니다(열 편이라고 주장하시는 분도 있는데, <성 루드밀라>는 오라토리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거 같습니다). 세계에서 배우기 가장 힘든 언어가 체코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건 체코 작곡가,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야나체크에겐 큰 아픔입니다. 뛰어난 오페라를 많이 만들었는데 체코 외에서 공연을 자주 하지 못하니 서구 작품들과 비교해 무지하게 큰 핸디캡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드보르자크의 몇 오페라는 제가 참 애정을 갖고 있어서 작품이 거론되는 것이 반가워 그의 오페라 목록을 소개합니다.


드보르자크 오페라 음반

왼쪽부터, <자코뱅 당원>, <반다>, <루살카>, <영리한 농부>, <고집쟁이 연인들>, <아르미다>, <왕과 숯쟁이>, <카챠와 악마>, <디미트리>

<자코뱅 당원>, <루살카>, <디미트리>가 명작이고, <고집쟁이 연인들>, <카챠와 악마>는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루살카>의 “하늘 높은 곳의 달님이시여”는 르네 플레밍을 많이 들으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하필이면 칼라스하고 동시대에 활약하는 동구권의 체코 소프라노라 실력보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밀라다 슈브라토바의 노래가 제 귀엔 훨씬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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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10-31 19: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아 이페이지를 찜해서 오페라에 무지한 저에게 짙은 밤 손전등과 나침반처럼 활용해야겠습니다👍

Falstaff 2021-10-31 19:15   좋아요 4 | URL
에고, 손전등이나 나침반으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

mini74 2021-10-31 19: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탈리아에서도 마치 우리나라 판소리같은 존재가 된건가요 ㅠㅠ 오페라는 잘 모르지만 알고싶은 일인~ 저도 미미님처럼 찜해놓고 검색하며 읽어봐야겠어요 *^^*

Falstaff 2021-10-31 19:32   좋아요 4 | URL
거의 그꼴이 났다고 봐야 하는데, 우리보다 상황은 더 안 좋은 거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예솔아~ 할아버지가 부르셔, 녜~ 아니, 너 말고, 이 노래의 예솔이, 이자람을 비롯한 젊은 소리꾼들이 계속 나오고 있고, 젊은 관객들도 꾸준히 있는 반면에 이탈리아에선 오페라 구경가는 젊은이들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리하야, 이태리에서 오페라 전공하는 성악가 지망생도 아시아, 동구권, 러시아 학생들이 더 많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새파랑 2021-10-31 19: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는 드라마도 낯설지만 오페라는 미지의 세계 같아요 😅
폴스타프님우 역시 오페라도 전문이시군요. 막장드라마가 재미있기는 한가 봅니다 ㅋ

근데 요즘 이탈리아는 축구도 그닥 잘하지는 못하던데 ㅜㅜ

Falstaff 2021-10-31 19:56   좋아요 4 | URL
ㅎㅎㅎ 그래도 축구는 아직 잉글랜드, 스페인,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이탈리아입니다!

붕붕툐툐 2021-10-31 20: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오페라 진짜 막장의 원조인 내용들 많죠~ 그래서 전 오페라 좋아라 하는데~ 드보르작 오페라도 찜해놨다가 공연하면 보러 가고 싶어요! 어차피 다 자막인데도 체코어는 공연이 어렵나 봅니다~~

Falstaff 2021-10-31 20:48   좋아요 4 | URL
ㅎㅎㅎ 예. 이탈리아 쪽은 치정, 살인, 복수 빼면 몇 남지 않을 거 같습니다.
아마 <루살카>는 국내 공연을 했었던 걸로 아는데, 나머지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할 듯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음반으로나마 찾아 들을 수밖에 없어요.
체코 오페라는 수프라폰 레이블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좋은 품질로 나왔었는데, 요즘엔 음반 값이 워낙 올라서 후덜덜합니다.

페넬로페 2021-10-31 23: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페라는 스토리와 음악이 함께 있는 것인데 저는 음악 위주로 감상하는것 같아요~~음악이 넘 좋으니 고급스럽다는 생각이 들고요.
막장은 우리 사람들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것인가요 ㅎㅎ
올려주신 영상의 음악 넘 좋아요.
소장하신 오페라 음반을 보니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으시다는것이 느껴집니다^^

Falstaff 2021-11-01 08:41   좋아요 1 | URL
아, 그럼요. 음악이 없으면 세상 누가 오페라 따위를 보겠습니까!
베르디와 이후 작곡가들은 스토리보다 ˝드라마˝라는 극적 요소를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무대미술 같은 장치와 가수들의 연기도 굉장히 중요하다, 뭐 이런 수준으로. 사실 저도 잘 몰라요. ^^;;;

링크 올린 베를리오즈와 핸델의 이중창은 대중적이진 않지만 숨어있는 명곡이랄 수 있습지요. 핸델의 것은, 왕과 왕비가 부르는 노래인데요, 카운터 테너 두 명이 부르고 있잖아요. 근데 대머리가 왕비 역할입니다. ㅋㅋㅋㅋㅋ 베를리오즈는 카르타고의 여왕 디도(프랑스 말로 디동)와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아스가 바야흐로 첫날밤을 치루기 전에 분위기 잡는 것이고요.

공쟝쟝 2021-11-0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역시 문외한이라 오페라는 되게 고상한 고급 비싼 문화(?)라고 생각했는 데, 곁들여진 설명과 유튜브 살짝 보니까 오페러는 웅장한 스케일과 다양한 협동(?)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라는 지점에서 현대의 영화와 비슷하게 대중들이 즐겼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 심리적 허들이 낮춰진 듯 하옵니다.

Falstaff 2021-11-01 09:13   좋아요 1 | URL
극의 내용만 미리 알고 입장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근데 워낙 많은 연주자와 성악가가, 그것도 있는 집에서 돈 처들여가며 배운 악기와 성악으로 폼을 잡으니 입장료가 비싸서 문제지, 오페라 자체는 그냥 오락거리예요. <아마데우스>의 뒤부분에서 <마술피리> 공연장면 나오잖아요. 일반 시민들도 막 미쳐 날뛰고 소리지르고, 따라부르는 거. 그게 진짜 오페라아니겠습니까.
요즘 오페라, 뮤지컬은 너무 엄숙주의, 뭐라더라, 관크. 아이고 저도 그거 드러워서 공연 구경하러 안 가요.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