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이야기 사슬
정영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를 매우 흥미롭게 읽어 이이의 다른 책도 꼭 한 권 읽어야겠다, 싶었다가 마침 눈에 띄어 골랐다. <어떤 작위……>가 장편소설이었던 반면 《검은 이야기 사슬》은 무려 마흔다섯 편의 단편 또는 이야기, 혹은 메모를 모은 책이어서 더 관심이 갔다. 사실 보통의 단편집인줄 알았다. 45편이 245쪽에 실려 245÷45=5.4, 평균 5.4쪽 분량의 손바닥 소설이란 걸 알았다면 과연 ‘선뜻’ 집어 들었을까 싶기도 하다. 온라인 구매에서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현상. 오프라인이었으면 선 채로 몇 편 읽어보고 그냥 살포시 놓고 나와 버렸을 듯.
  그러나 단정하지 마시라. 여전히 정영문은 내 기호에 근접한 우화와 문법과 특유의 문자 유희를 즐기고 있으니. 문자 유희? 그렇다. 예를 들어 스물아홉 번째 소설 <막연한 공포에 대한 상상>의 피날레는 다음과 같다.

 

  “다만 그는, 이것은 내가 그 전모를 알지 못하는, 그리고 알 수도 없는 공포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야, 라고 중얼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208쪽)

 

  “알지 못하는”, “알 수도 없는”, “알 수 있을”의 연속과 “뿐이야”와 “뿐이었다.”의 반복. 이를 통한 독자의 혼돈과 집중을 유도하고, 동시에, 작가가 의도 했든, 하지 않았든, 문장을 발음할 때의 음악성까지 부여하는 효과를 낸다. 이런 문자 유희는 책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의 빈번한 사용은 심지어 전에 읽은 <어떤 작위……>에서도 이런 형태의 문자 유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는 기억까지 떠올리게 만든다. 이 정도면 가히 정영문 문장의 한 특징으로 봐도 되겠다 싶지 않을까. 물론 이런 유희가 언제나 즐거운 건 아니다. 가끔 짜증도 나긴 한다.
  제일 먼저 ‘문자 유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책의 분위기가 유희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책의 제목을 왜 《검은 이야기 사슬》이라고 했느냐 하면, 마흔다섯 개의 단편 또는 이야기나 메모의 색조가 대부분 ‘검은 이야기’, 상복의 색깔, 죽음과 유사한 자리에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짭쪼름한 소금의 맛을 탐하는 할머니가, 하나 있는 손자가 자신의 품을 떠날까봐 손자의 눈을 파내는 소설을 떠올렸다. 이 작품이 제목은 잊었지만 아마 박상륭의 단편집 《열명길》에 나오는 이야기일 듯하다. 하여튼 이 탐욕스러운 노파를 떠올린 순간 정영문의 다른 책은 모르겠고 하여튼 《검은 이야기 사슬》은 박상륭이 집중적으로 탐구한 죽음과 (종교라기보다는) 신god의 문제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앞에 실린 작품 <임종기도>는 말 그대로 죽음을 앞에 둔 환자를 위하여 임종기도를 하는 목사의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다. 한겨울의 오밤중에 신자들도 소명의식도 별로 없는 목사를 찾는 난쟁이가 그를 이끌고 역시 난쟁이인 아내의 죽음의 침상으로 데려간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가는 길엔 분명히 있었던 사과 과수원도 없어지고, 교회도 없어지고, 자기 집의 침대 위엔 예의 난쟁이가 누워 있는 우화. 이걸 ‘우화’ 말고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두 번째 작품 <장의사>도 그로테스크의 극치를 달려, 역시 밤중에 내가 전화해서 방문했다고 하는 장의사가 처리해야 할 시신이 바로 나 자신이다. 장의사는 이미 죽은 나의 내의만 입은 시신을 발가벗기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능숙한 솜씨로 내 몸에 딱 맞는 수의로 갈아입힌 다음 관에 넣지도 않고 그냥 둘러매고 나가 나귀가 모는 마차에 싣고 미리 파 놓은 무덤에 던져넣은 후 흙을 덮어버린다는 이야기. 주인공 ‘나’는 작품이 시작하기 전에 이미 죽어 있는 상태다. 세 번째 작품에서도 장애인이 등장한다. 이번엔 제목 자체가 <곱사등이>다. 화자이며 작가인 ‘나’와 단둘이서 신과 죽음에 대해 토의하다 저 까마득한 높이의 다리 위 난간에 서더니 자신을 밀어달라고 부탁하는 곱사등이의 등을 기꺼이 밀어 추락시키는 ‘나’.
  이어서도 마찬가지다. 거의 모든 작품이 이렇듯 다 어두운 죽음과 이미 죽음 비슷한 자리로 추락해버린 신, 장애, 유령상태 등 보통의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거나 애초에 상상하기를 거부하는 저 어두운 두려움 너머의 세계를 천착했다.

  나는 1980년대 중반에 학교를 졸업해서 직업을 얻는다. 기억하는가, 당시 우리나라 기업들의 사무근로자 착취를. 퇴근은 아무리 빨라야 아홉 시고, 토요일 야근은 기본이며, ‘ㅇㅇ절’은 휴일 ‘ㅇㅇ날’은 근무일, 일요일 출근이 미덕이었던 시절. 나도 이런 블랙홀에 빠져 2010년이 지나서야 희망퇴직 대상자 신분이 되어 기어 나온다. 그러니 20년 넘어 책은 무슨 책. 내 독서에도 이렇게 큰 공백이 있다. 《검은 이야기 사슬》의 해설을 쓴 평론가 김춘식은 딱 나의 공백기, 1990년대의 소설적 지형을 “해가 저문 낯선 숲길을 걸으며 주위를 살피는 것 같은 불안감이 배어 있다.”고 묘사하면서 이들의 대표선수로 장정일, 배수아, 송정아, 백민석과 함께 정영문을 들며, 이들을 정의하기를 “굳이 집단을 버리고 탈주한 소수인, 정신병원을 탈주한 이들”이라 했다. 심지어 나는 대표선수 가운데 송정아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다. 뭐든지 흐름이 있는 즐길 거리에 일정기간 단절이 생기면 그건 치명적이다. 그리하여 정영문의 소설 가운데 몇몇은 도무지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거 같다.

 

 

  자화상

 

  내가 그린 나 자신의 자화상에서 나의 얼굴은 나의 발바닥에 눌려 일그러져 있다. 그 그림을 보며 나는 발에 좀더 힘을 싣는다. 그러자 그림 속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고, 그때서야 나는 발에서 힘을 뺀다. (전문)

 

 

  이것이 한 편의 작품이다. 근데 이 책의 표지엔 “정영문 소설”이라 쓰여 있다. 그러니까 이것도 한 편의 소설이라 주장해 서른세 번째 소설로 목차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오, 소설에선 1990년대에 벌써 소설의 해체와 개별화, 파편화를 시작했다는 말일까? 근데 조금 의심이 들긴 한다. 예컨대.

 

 

  방안에서

 

  이 방의 사물들이 감히 내게 대들지 못하고,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며 죽은 듯이 있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기세에 눌려서라고, 나는 믿고 싶다. 하지만 점차 나는 그 믿음을 잃으며, 오히려, 내가 방안의 사물들의 눈치를 보고 있으며, 그것들의 빈축을 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

 

 

  이 서른아홉 번째 작품 같은 것은 내가 보기에는 전형적인 작가 메모로, 이런 메모들이 합종연횡을 거쳐 단편이나 장편으로 발전해가는 거 아닌가 싶은데, 아, 난 아마추어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묻지 마시라.
  (사이)
  독후감 쓰는 중에 오랜만에 작은 아이가 오는 바람에 등심 구워 쐬주 마셨더니 지금 제정신 아니다. 후진 독후감 읽어주시는 분들의 이해를 앙망할 뿐.
  (다음 날 오후)
  다시 평론가 김춘식이 말한 90년대 한국소설. 이 가운데서도 정신병원을 탈출한 몇 명의 작가들의 경우, 당시 소설의 해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절이라서 <방안에서>나 <자화상> 같은 단편斷片 또는, 단장斷章이 하나의 단편短篇소설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이 두 단편 또는 단장은 소설책이 아니라 시집에 싣고 ‘시’라 주장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물론 시나 소설 같은 장르의 구분이 별 의미는 없으나, 만일 시인 민영이 “외로울 땐 눈을 감는다. 바람에 삐걱이는 사립을 닫듯.”이라 쓰고 그걸 소설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난 책을 읽는데 진보적이지 않은 모양이다. 작가 메모는 여전히 작가 메모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11-04 10: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송정아는 저도 처음 듣네요. 장정일, 배수아, 백민석은 20대 때는 좀 읽었는데, 배수아 정도 빼고는 이젠 손도 안 가네요. ㅎㅎ 그래서 정영문도 손이 안 가나 봅니다.

Falstaff 2021-11-04 10:34   좋아요 2 | URL
ㅎㅎㅎ 저거 읽자마자 검색해봤더니 시를 쓰더라고요. 시집 두 권이 나왔는데 읽을 마음은 생기지 않는 걸로.... 장정일도 시 썼지만 안 읽은 것처럼요. ㅎㅎㅎ
전 배수아 포함해서 이젠 정신병원 탈주자들은 좀 멀리 해야겠습니다. 백민석도 두 권 읽은 걸로 충분했어요.

stella.K 2021-11-04 14: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저걸 두고 소설의 해체라고 하는군요.
정말 메모 정도 밖에 안 되는데...
그래서 유독 저 시대 때 소설가들 욕을 많이 먹었던 걸로 압니다.
하지만 뭐든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설은 소설다워야 한다는 걸 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을까요?
팔님의 일상을 슬쩍 넣으셔서 재밌게 잘 읽고 갑니다.^^

Falstaff 2021-11-04 19:4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재미나게 읽으셨다니 기쁘네요. 근데 그 시절 사는 게 다 그랬어요. ㅠㅠ
이 책 읽고 소설의 해체라는 건 전적으로 제 생각으로 쓴 거예요. 다른 곳에서 혹시라도, 안 하시겠지만 정말 혹시라도 인용하시면 크게 창피하실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저도 제 입이 싸서 고민이 큽니다. 흑흑흑....

coolcat329 2021-11-04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소설의 해체...처음 듣는 말이고 저도 저게 어떻게 소설일 수가 있지? 싶습니다.
<어떤 작위의 세계>는 찜해둔 책인데 작가 특유의 문자 유희를 기억해둬야겠네요.
오늘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1-11-04 20:30   좋아요 1 | URL
에이... 설마 처음 들으실라고요. ㅋㅋㅋ
하여튼 재미나게 읽으신 거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한 번은 읽을 필요가 있는 우리 작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답니다. ^^

바람돌이 2021-11-05 01: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990년대 제가 소설을 거의 읽지 않던 시기군요. 이름만 간간이 들은 사람들이네요. 폴스타프님 글을 보다 보니 제 취향과는 좀 떨어진 듯해서 저는 폴스타프님의 독서력과 글에만 감탄하고 갑니다. ^^

Falstaff 2021-11-05 08:30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처럼 책 좋아하시는 ˝다양한˝ 분들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늘 다른 분들의 서평, 리뷰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바람돌이 님도 물론이고요! ^^

그레이스 2021-11-05 06: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흔 다섯개... 기억은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작위의 세계 저도 갖고 있어요
읽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11-05 08:33   좋아요 1 | URL
작품들이 그로테스크해서 이 책은 권하지 못하겠지만, <어떤 작위...>는 미국의 사막과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그로테스크하지는 않습니다. 아니면 좀 덜 그렇던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