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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편 ㅣ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8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7월
평점 :
<시월의 저택>을 재미있게 읽고 서슴없이 주문한 단편집. 그랬더니 두 번째 작품으로 실린 <4월의 마녀>가 바로 <시월의 저택>에서 가장 중요한 배역을 하는 정령 세시다. 또 저 뒤에 실린 <에이나르 아저씨> 역시 <시월의 저택>에 출연한 바 있다. 초록 날개가 달려 알프스에서 살다가 밤에 미국의 상공을 날다가 고압선에 걸려 정착해버린 남자 돌연변이. 하긴 <시월의 저택>이 장편소설이기는 하지만 특징적인 등장인물이 한 챕터 씩 담당해 서로 연결시키는 연작의 형태를 띠어 단편으로 쓴 몇 작품을 묶었을 수도 있었겠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정령이나 영화 <엑스맨>에서 무수하게 등장하는 돌연변이를 다루었다거나, 작가의 본령인 SF 소설이라고 단정했다가는 브래드버리 팬들에게 타박을 받기 십상이겠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괴기나 SF라는 아주 특색 있는 방법으로 사람 심성의 섬세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인류의 지속continuousness 의무의 중요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일리노이 주면 알 카포네의 도시 시카고를 품은 미국의 중서부로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와 일곱 시간을 운전해가도 똑같은 밀밭이 펼쳐진다. 브래드버리는 이 동네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별과 우주, 로켓 등에 경도되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진짜로 이런 사람들 있다. 나도 한 명 아는데, 경북 영천 사람으로 이이의 파티션에는 화성표면 사진을 우정 돈 주고 사서 붙여놓았고, 2013년에 고흥반도에서 나로호를 쏘아올릴 당시엔 실장으로 있다가 그만 물을 먹어 대기발령 상태였는데도 그저 연신 로켓 발사 이야기에 정신을 놓고는 했던 기억이 있다. 몇 년 후에 희망퇴직 해서 고향으로 내려가 우애 좋은 형제들과 뭉쳐 즐겁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렇다고 별 볼 일 있는 전공인 천문학을 공부한 건 아니고,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걸로 기억한다. 딱 브래드버리가 이런 과의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이이가 김실장과 다른 점은 엄청난 독서와 갈고 닦은, 절차탁마! 문장력, 그리고 놀라운 상상력으로 자신의 관심사에 소설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 내면을 절묘하게 얹어놓을 수 있었다는 점.
나는 ‘세시’라는 이름의 정령이 물속의 아메바를 숙주로 촌 동네 아가씨의 몸에 들어가 사람들이 사랑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춤을 추고 즐거움이 도대체 뭔지, 서로의 피부를 만지는 것이 무슨 기분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에 더욱 관심이 갔으나 이런 그건 <시월의 저택>에서 나름대로 충분히 이야기한 것 같아, 오늘은 시선을 브래드버리 표 SF로 돌려보겠다.
SF라고 해서 멀리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찾아 읽지는 않는다. 그래 브래드버리의 SF가 정말로 브래드버리 ‘만’ 이렇게 쓰는 건지, 다른 SF 작가들도 마찬가지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이이의 SF적的 모험에 대하여 내가 거칠게 두 가지 주장하는 점이 있다. 하나는 사람의 마음, 소설이 줄기차게 탐구하는 인간 심성을 묘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젠가는 멸종해야 하는 인류를 존속시키기 위해, 현존하는 인류는 전혀 혜택을 보지 못하겠지만 종의 연속을 위한 노력과 희생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두 번째 주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그리하여 이이가 로켓을 타고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에 기지를 건설하고 그곳에서 황량한 삶을 살거나, 심지어 태양의 화염 속으로 탐험하거나, 불시착한 우주선에서 무시무시한 자기장에 노출되어 1분에 천 번의 맥이 뛰고 인생이 겨우 8일밖에 안 되는 방향으로 진화한 인간의 행위들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모두 다 이런 의식, 인간의 영속을 위한 기지 건설이나 정착지 발견과 관련이 있다.
내가 흥미를 느낀 색다른 단편은 <여기 호랑이가 출몰한다>였다. 84번 항성계의 7번 행성에 착륙한 탐사우주선 이야기인데, 포레스터 선장과 인류학자 겸 광물학자 체터턴이 주요 등장인물이다. 단편소설의 주요 스토리는 공개하지 못하겠지만(더구나 내가 흥미롭게 읽었으니), 브래드버리가 지구인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우주의 한 행성에 관해서도 따뜻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광물학자는 우주 탐사의 비용 거의 전부를 댄 회사에서 파견한 학자라서 일단 행성에 도착하면 거대한 굴착기를 사용하여 행성에 어떤 광물이 있는지, 있으면 얼마나, 그리고 오래도록 뽑아올 수 있는지를 조사해야 한다. 물론 채터턴은 빠를 속도로 행성의 자원을 약탈할 것이며, 자원이 거덜이 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철수할 것이다. 전형적인 식민주의자들의 시선이며, 북아메리카의 백인들이 인디언을 향했던 시각이다.
실제로 식민주의자들은 식민모국을 코즈머폴리탄cosmopolitan, 피 식민지를 플래넛planet이라 칭한다. 브래드버리도 당연하게 이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서, 아무리 무한한 우주의 한 행성에 불과할지라도 무차별한 착취, 채굴에 반대하고 있다고 봤다. 물론 자신있게 이런 시선이다, 라고 주장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책에서 일관되게 보이는 작가의 양식이라면 그랬으리라고 믿는다.
그냥 SF라고 간단하게 말하기 쉽지 않은 작품들. 일찍이 나는 이이의 <화씨 451>에서 크게 실망한 적이 있어 <시월의 저택>을 읽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었는데, 이제는 본격적으로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몇 권 되지 않지만 그간 읽어본 SF와는 아예 접근 자체가 다르고, 무엇보다 이이의 이색적인 접근이 나와 합이 맞는다는 것이 기쁘다. 다만 서른두 편의 단편 모두 마음에 든 건 아니라서 만점이라고 하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이 정도면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열 용의가 있다.
한 번 더 강조하자. 특별한 SF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