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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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클레지오는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해 두 개의 언어를 다 모국어로 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의 <섬>이란 우리말 제목으로 출간한 <검역: La Quarantaine>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 마다가스카르 동쪽 9백 킬로미터 떨어진 먼 바다에 위치한 모리셔스였다. 지금 이름으로 모리셔스 공화국. 영국의 브리스톨 대학과 프랑스의 니스 문학전문대학에 다닌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에 이어 식민 지배를 하던 영국이 모리셔스에 부당한 물리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데뷔작 <조서>를 포함해 이후 모든 작품을 프랑스 문자로 써서 노벨문학상까지 받는 세계적 소설가가 된다.
  르 클레지오의 위키백과 내용을 보면 18세기에 선조가 브르타뉴에서 모리셔스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독자가 그걸 굳이 알 필요는 없지만 모리셔스에서 살던 집안이 부계인지 모계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허기의 간주곡>을 읽어보면 모계는 모리셔스 발음이 확실하게 섞인 이주민 출신이고, 부계는 적어도 한 시절이나마 모리셔스 인근의 프랑스령 레위니옹과 관계가 있던 것 같다. 그러나 소설은 픽션이고, 작가 역시 이 작품이 어머니와의 화해를 위한 작품이지만 허구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 하면, 이이의 대표작 <황금물고기>에서 주인공이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려 하고, <사막>은 끝내 사막을 벗어나지 못하고 도시의 경계에서 기름종이로 만든 루핑 집에 머물러야 하며, 모리셔스 섬을 향해 출발했지만 배에 전염병이 돌아 방역을 위해 거의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에 하선한 에피소드를 그린 <섬> 등,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아서였다. 물론 프랑스 작가들 가운데 과거 프랑스 식민지 출신 아프리카인이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도착하는 이야기를 매력 있게 쓴 작가도 있지만 (즉각 미셸 투르니에의 <황금구슬>이 떠오른다) 르 클레지오는 여태까지 내가 읽은 여섯 편의 장편과 작품집이 <조서>를 빼고 다 아프리카와 연결이 돼 있다. 그러니 작가의 아프리카에 대한, 더 넓게 이야기하면 ‘길’에 대한 집착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출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르 클레지오야말로 여행광이라고 불려 마땅한 인물이기도 하고. 이 <허기의 간주곡>도 서울에 거주하고 있을 당시 쓴 작품이라 해서 우리에게 관심을 받기도 했단다.

 

  원 제목 <Ritournelle de la faim>을 우리말로 <허기의 간주곡>이라 붙였다. “ritournelle”은 “협주곡의 독주 부분을 앞두고 반복해 연주하는 총주” 또는 “빠른 3박자 무곡”이라고 한다. 반면에 이 단어를 불-한 사전에서 찾으면 “17세기 오페라의 간주곡”이라 나와 있어서 그냥 <허기의 간주곡>이라 쓴 거 같다.
  그런데 우리말 ‘간주곡’은 프랑스어 ritournelle, 또는 이탈리아어 ritornello와는 달리 흔히 오페라에서 장면전환 등의 짧은 사이를 보완하기 위한 ‘interlude'나 ’intermezzo'를 의미한다. 유명한 곡으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들 수 있겠다. 사실 ‘ritournelle’를 우리말, 그것도 제목으로 뽑자면 애로가 여간 아니겠지만 독자들은 애로가 있건 없건 신경 쓰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간주곡’은 아니다.
  ‘허기’가 무엇인가. 배고픔이지 뭐. 2002년 한일월드컵 시절에 우리나라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가 늘 말한 “우리는 배고프다.”가 정말로 위장이 비어서 그랬던 건 아니지만(유상철 감독, Requiescat in Pace!), 이 책에서 말하는 ‘허기’는 전쟁 중 물자부족으로 인한 극도의 굶주림, 냄비 속에서 운명을 다한 개와 고양이 때문에 파리 시내에 반려견, 반려묘의 씨가 말랐다는, 이런 굶주림도 있으나, 어린 시절 반드시 지어질 것이라고 꿈꾸었지만 결코 지어지지 않았던 연보라색의 집도, 철없는 아버지 알렉상드르가 꿈꾸었던 사하라 횡단철도 건설 같은 것 등, 특정한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가슴 속에 느끼는 것도 ‘허기’일 수 있고, 죽음의 침상에서 완벽한 슈트와 왁스로 광을 낸 구두를 신은 채 “죽는 게 힘들구나. 오래 걸려…, 너무 오래 걸려.”라고 한탄하는 어진 종조부 솔리앙 씨에겐 죽음마저 허기일 수 있는 것.
  세상 살아가는 일이 다 이런 허기의 연속이다.
  이걸 느낄 즈음, 책 속에선 중요한 음악 하나가 등장한다. 라벨의 <볼레로>. 1928년 무용가 이다 루빈슈타인의 의뢰로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스페인 3박자 춤곡. 에필로그와 비슷한 형식을 담은 끝부분에 작가인 듯한 화자의 어머니, 책의 주인공인 에텔 브룅이 니진스키가 안무하고 루빈슈타인이 춤을 춘 초연을 보았단다. 이 현장을 당연하게 보지 못한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다 루빈슈타인과 무용수들은 광기어린 열정에 사로잡힌 꼭두각시들이다. 플루트, 클라리넷, 호른 색소폰, 바이올린, 북, 심벌즈, 팀파니, 모든 악기들은 휘어지고, 끊어질 정도로, 질식할 정도로, 현과 소리를 산산조각낼 정도로, 세상의 이기적인 침묵을 깨부술 정도로 팽팽히 긴장되어 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프랑코가 내전을 시작할 때부터 2차 세계대전이 ‘적어도 프랑스 땅 안에서는’ 끝날 때까지다. 에텔이 열두 살 경부터 스무 살이 되어 아버지 알렉상드르를 매장하고, 어머니 홀로 파리가 아닌 니스에 남겨둔 채 아버지끼리 레위니옹에서 알고 지내던 영국인 로랑 펠드와 결혼해 캐나다로 떠날 때까지, 아니지, 모르긴 몰라도 에텔과 로랑의 나머지 삶, 이들 사이의 허구적 아들일 수 있는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를 넘어 세상의 모든 인류가 멸종할 때까지 호모 사피엔스는 공복상태를 포함한 숱한 허기를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한 분기가 될 만한 사건인 전쟁과 학살 등을 겪으면 마치 볼레로의 뒷부분처럼 모든 악기가 다 모여 ‘반복해 연주하는 힘찬 총주: ritournelle'로 '빠른 3박자의 춤: ritournelle’을 추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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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6-11 11: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태어난 곳과 자란 곳, 자신의 뿌리가 되는 땅과 적대적 애증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진 곳에서의 활동 뭐 이런게 다양하게 섞이다 보면 문학작품에 독특한 시각을 부여할 수 있을 수 있을듯해요. 유럽쪽 작가 등 중에 유난히 이런 경력을 가진 작가들이 많은 것과, 미국 작가들 중에 이민자 출신의 탁월한 작가들이 많은게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르 클레지오도 항상 관심작가로만 올려두고 책은 못봤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작가인건 덕분에 처음 알았습니다.

Falstaff 2021-06-11 12:13   좋아요 3 | URL
르 클레지오, 저도 이번에 검색해 알았는데, 번역해 나온 것이 꽤 많더군요.
저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고향과의 적대적 애증. 멋있는 말입니다.
저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전형적인 서울 깍쟁인데, 이제 서울이 싫습니다.
물론 그래서 만날 술 마시는 건 아니고요. ^^;;

stella.K 2021-06-11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르 클레지오가 노벨상을 받기 전 우리나라에
교환 교순가 해서 잠깐 머문 적이 있더군요.
이화여대에서 강의했던가 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가 <혁명> 출판 기념으로 와서
강연도 하고 사인회도 가졌죠.
저도 사인본을 가지고 있는데 그후 얼마 안있다 노벨문학상을 받더군요.
작가의 책이 좀 어렵다고 해서 아직도 쳐다보지도 않고 있습니다.ㅠ

동향이시네요. 저도 서울인데...ㅋㅋ

잠자냥 2021-06-11 15:43   좋아요 4 | URL
<황금물고기>는 전혀 어렵지 않고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르 클레지오 시작하신다면 <황금물고기> 추천합니다.

Falstaff 2021-06-11 15:53   좋아요 3 | URL
옙. 그랬다더군요. 제주에서도 르 클레지오가 다녀간 카페가 유명세도 타고 뭐 ㅋㅋ
잠자냥 님 말씀마따나 <황금물고기> 대박입니다. 그건 소설 독자 필독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전 <섬>과 <사막>도 팍 꽂히던 걸요. ^^

독서괭 2021-06-11 16:14   좋아요 3 | URL
오호 황금물고기 주섬주섬...

붕붕툐툐 2021-06-11 17:50   좋아요 2 | URL
황금물고기 주섬주섬 222222

잠자냥 2021-06-11 1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 님이랑 다부장 님 요즘 허기지세요?
<호프만의 허기>에 이어 <허기의 간주곡> ㅋㅋㅋㅋㅋ 그렇다면 저는 <굶주림>으로 가겠습니다!

Falstaff 2021-06-11 15:54   좋아요 1 | URL
아이고, <굶주림>은 느므느므 궁상스러워요.
그것도 정도가 있지 못 먹어서 머리칼이 뭉텅뭉텅 빠지는 꼴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읽으셔야 허겄습니까. 흑흑.....

잠자냥 2021-06-11 15:5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이미 읽었어요.ㅋㅋㅋㅋ 징글맞은 책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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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56년 잔나비 띠. 미국 메인 주의 포틀랜드에서 출생.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을 발표한 것이 1998년, 이이의 나이 마흔세 살 때. 이력을 보고 나는 문득 박완서 선생을 떠올렸다. 1931 신미년 양띠. 1970년 마흔 살에 장편소설 <나목>으로 등장해 한 시절을 풍미했던 국가대표 수다꾼. 얼추 가져다 맞춘 것이지만 세상 살아볼 거 거진 다 해보고 나이 들어 글쓰기 시작한 작가들이라서 그런지 글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참 찰지다. 물론 이들이 눈을 모아 바라보는 대상은 판이하다.

 

  스트라우트가 내세운 인물은 은퇴한 시골학교 수학선생. 골격이 크고 기골이 장대해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체격의 여성. 위로 9대 할아버지가 카누를 타고 강을 거슬러 자리 잡은 포틀랜드 인근의 크로스비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헨리 키터리지와 혼인해서 외아들 크리스토퍼를 낳고, 키우고, 답답한 남편과 살면서 복장 터지는 세월을 지내다 어영부영 나이 들어 퇴직하고, 더 늙어가는 올리브 스트라우트. 크로스비 마을의 유일한 중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으로 악명이 자자했으나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만큼 좋아하는 아이들도 많았던 건 무뚝뚝한 친절이 이이의 근본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말을 한 마디 해도 퉁명스러운 단어들을 효과적으로 조합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어딘지 모르게 타박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것들로 골라서 하는 게, 아무래도 버릇 같은데 이런 성향이 늙어갈수록 더 해가는 경향이 있다. 아무렴. 늙으면 늙을수록 세상에 원망스러운 게 많아진다고 하니. 예를 들어볼까. 강변을 따라 잘 포장해 놓은 산책로. 가는 데 3마일, 오는 데 3마일. 합해서 매일 아침 6마일. 70대 노인으로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인 9.7 킬로미터를 눈이나 비, 또는 모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매일 걷는 걸 습관으로 하고 있었다가, 하루는 눈꼴 신 하버드 출신의 재수없는 공화당 지지자인 배불뚝이 노인 잭 케니슨이 길바닥에 누워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 올리브가 가까이 가서 허리를 굽혀 노인의 새파란 눈을 바라보고 얘기하는 첫 마디가 이렇다.
  “당신 죽었소?”
  어쩌면 좋아. 외모는 다음으로 하고, 말하는 품새나 생각하는 거나 딱 빼다 박은 중년과 노년 사이의 우리나라 여자를 한 명 아는데, 방귀가 나올 거 같으면 출근하느라 밥 먹고 있는 남편 식탁에까지 달려와 시원하게 뀌는 이다. 남편 옆에 와야 방귀도 시원하게 나온다면서. 누구냐고? 안 알려줌. 역자 해설을 보면 작가가 먼저 올리브를 만들고 보니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 페이지마다 등장시키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 연작 형식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이리 이야기한다고 해서 연작소설 《올리브 키터리지》가 수다스럽고, 경쾌하고, 에너제틱하리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그것도 큰 오산이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이제 인생의 석양에까지 와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인간살이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노년의 주변에 관한 노인들의 심리상태를 절묘하게 묘사한 책이다. 올리브가 비록 외모나 성격, 언어 사용에 조금 부담스러운 면이 있으나, 피부색과 성적 기호에 관한 편견에 관한 한 도시 노인들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물론 공화당과 부자백인남성에 관한 편견은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지만. 세상엔 70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다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다.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만나 커플을 이루고, 이들이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루고, 가족들이 올망졸망 모여 친척과 동네를 만드는 것. 이들 사이에 상호간의 자기장이 있고, 개성에 따라 자기장의 세기가 달라 사람들 사이에 서로 갈등하고, 오해하고, 믿거나 비웃고, 호감이 생기고, 이것들을 다 합해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건 다 비슷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그냥 사는 이야기.

 

  스트라우트가 생각하는 가족은 뭘까. 사랑한다고 착각해서 서로 몸을 부딪고 결혼을 해 두 명 다 스스로 지옥의 구덩이로 들어간다. 1930년 더하기 빼기 2, 3년생으로 보이는 올리브 키터리지 세대는 결혼생활 내내, 여성도 경제생활을 할 경우마저 더 과도한 가사노동의 의무가 주어지고 대신 바가지 박박 긁을 수 있는 권한 역시 확보한다. 부부는 서로가 모르고 있기를 바라며 다른 여성이나 남성을 흠모하기도 하지만 적절한 견제를 하거나 가정의 유지를 위해 모른 척 지나기기도 한다. 이게 1970년대식이었다. 서로를 향한 웬수 상태로 숱한 세월을 보냈음에도, 어느 순간, 이게 사랑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또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뜨면 곧바로 지옥이 다가올 거라는 걸 깊이 인식하게 되고, 둘 가운데 한 명은 어김없이 이 지옥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한 세상이 왔다가 유전자를 전하고, 간다.
  올리브의 자식 세대는? 이 세대가 작가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인다. 이들은 만나자마자 화르륵 불타오르고 생각난 김에 즉각 결혼해서 사랑 한 번 진하게 한 후, 또다시 화르륵 불같은 싸움 한 번으로 이혼해버리고 두 번째, 세 번째, n번째 결혼을 저지르는 유목민의 삶. 마음을 둘 정처 없는 대도시 지향으로, 전쟁을 겪은 완고한 부모(세대)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앙금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간단히 얘기하면, 사실 간단하게 말한다는 게 거칠게 단정한다는 거하고 비슷한 말이지만,  무뚝뚝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덩치 큰 노인 올리브의, 누구나가 다 공감할 수 있는 회상과 안타까움과 아쉬움과 질투와 위안을 얻기 위한 안간힘 같은 것을, 매우 감각적인 문장으로 써내려감으로써 더욱 더 공감할 수 있게 마련한 뷔페다.
  첫 번째로 실린 <약국>은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올리브와 헨리 키터리지 부부와 아들 크리스토퍼를 중심으로 이후에 등장할 인물들이 은근히, 그냥 지나치듯 소개하고 있다. 올리브의 아버지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다가 입천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해 생을 마감했고, 아버지의 우울증 유전자 일부가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전해졌을 수도 있다는 걸 마음 속으로 걱정하고, 약국을 운영하는 남편 헨리가 유난히 종업원 데니즈에게 정을 주는 것이 매우 아슬아슬하다고 신경을 쓰는 반면, 매일 자신과 아들을 학교에까지 태워 왕복해주는 동료교사 짐 오케이시를 향한 미묘한 끌림, 그것을 넘은 호감 이상의 것을 즐긴다. 짐 오케이시가 운전 중에 가로수를 정면으로 박아 죽어버리자, 부부 침대에 누워 짐 오케이시를 위해 눈물을 펑펑 흘리는 올리브에게 헨리는 이렇게 묻는데,
  “올리브, 당신, 날 떠나지 않을 거지, 그렇지?”
  올리브는 얼른 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대답한다.
  “아, 또 무슨 소리야, 헨리.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니까.”
  이들 중 적어도 한 명은 벌써 알고 있었다. 배우자가 세상을 뜨면 자신 앞에 곧바로 고독이라는 이름의 지옥문이 열린다는 것을.

 

  사람 사는 이야기의 분식. 야박한 말 같지만, 문학이 별 거냐. 사는 이야기를 분식, 메이크업 하는 일이 문학이지. 사는 모습에서 독자에게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해 채집하고 이를 적절하게 메이크업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위대한 별은 아니지만 밤하늘에 잔잔하게 빛나며 오래 떠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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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6-10 09: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국가대표 수다꾼^^
찰지다!...

Falstaff 님의 글을 읽는 이유?!
재밌어요~

잔잔하게 빛나는 별,
이건 제가 고전문학을 얘기할때 쓰던 말인데...ㅋ

Falstaff 2021-06-10 09:36   좋아요 4 | URL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 고전을 잔잔한 별이라 하시는군요. 전 대개 30년 이상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들을 그렇게 얘기합니다.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6-10 10:44   좋아요 2 | URL
항성으로 표현하죠!^^

잠자냥 2021-06-10 09: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다부장님께서 선물해주신 올리브 책이 2권이나 있는데 저는 왜 아직 시작을 못하고 있을까요? 흠... 잔잔하게 빛나는 별 같은 폴스타프 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ㅋ

Falstaff 2021-06-10 09:41   좋아요 4 | URL
아이고, 오늘은 또 잔잔한 별이군요. ㅋㅋㅋㅋ
전 올리브는 이 한 권으로 종을 치려 합니다만...

잠자냥 2021-06-10 09:45   좋아요 5 | URL
ㅋㅋㅋㅋㅋㅋㅋ 다 부장님이 극찬하는 이 작가 폴스타프 님은 한 권으로 종치려고 한다니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제가 아직까지 손이 안 갔던 걸 보면... 음.... ㅋㅋㅋㅋ)

stella.K 2021-06-10 09: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캬~마지막 문단이 참...!
너무 잔잔해서인지 전 좀 지루해는데
다시 붙들어 봐야겠어요.^^

Falstaff 2021-06-10 09:49   좋아요 5 | URL
마지막을 잘 썼다는 말씀이시죠? 그죠? ㅋㅋㅋㅋ 으쓱으쓱. 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1: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국가대표 수다꾼! ㅋㅋㅋ 폴스타프님 글은 정말 쫀득쫀득하군요. 중년과 노년 사이 그녀, 알 것 같지만 모른 척하겠습니다.^^ ‘잔잔하게 빛나는 별‘에 공감 꾸욱. 그러나 저는 한 권으로 만족할 수 없어 몇 권 더 읽고 싶은 독자 ^^

Falstaff 2021-06-10 11:32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오늘은 제가 비행기 타는 날인가 봅니다.
아오, 이렇게 칭찬 받으니까 막 몸이 간질간질하니 따끔거리기도 하고 에휴...
고맙습니다. ㅋㅋㅋㅋ

다락방 2021-06-10 15: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크- 올리브는 이것으로 종치기에 [다시, 올리브]가 더 좋은데 말입니다!!

다락방 2021-06-10 15:18   좋아요 3 | URL
아 마지막 문장에 공감합니다. 위대한 별은 아니지만 밤하늘에 잔잔하게 빛나며.....
전 그 잔잔하게 빛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반짝반짝 작은별 아름답게 빛나네..아니 비치네..였나? 킁.

Falstaff 2021-06-10 16:14   좋아요 2 | URL
ㅋㅋㅋ 재미있는 책이었습니다.
공감할 수 있는 것도 아주 많고요. <다시 올리브>는 당장 말고요, 이 책이 기억에서 조금 가물거릴 때 날을 한 번 잡아보겠습니다.
이 책도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즐거움을 줄 것 같은데 더 좋다고 하시니 걍 넘어가기 쉽지 않네요. ㅎㅎㅎㅎ

coolcat329 2021-06-10 19: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폴스타님 글을 재미있게 읽는 한 사람으로서 저도 작가 생년을 보면 꼭 띠를 생각하고 급기야 이젠 만세력에 넣어 사주팔자까지 찾아봅니다 ㅋㅋㅋㅋㅋ
처음에 결혼하고 시할머니께서 잔나비해에 아이를 낳으라고, 그래야 재주가 많다고 하셨는데 저는 ‘잔나비가 뭐에요?‘라고 여쭈었죠. 잔나비하면 꼭 그 때가 떠오릅니다. 스트라우트도 잔나비띠군요 ㅎㅎ

이책은 제작년인가 제 생일에 저 자신에게 선물한 책으로 마지막 올리브가 마지막에 절절하게 생각하는 그 장면이 너무너무 슬프면서 인상적이엇어요.
젊은사람들은 모른다. 이 늙고 주름진 몸뚱이도 얼마나 사랑을 갈구하는지...이런 내용이었죠...
역시 문학은 사람사는 이야기네요.

Falstaff 2021-06-10 20:14   좋아요 2 | URL
으핫! 제가 쓰는 글이 재미가 있다고요? 오메.... 고맙습니다. 꾸벅.
만일 그렇다면 아마도, 서평이 아니라 읽고 느낀 감상을 적는 독후감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ㅋㅋㅋㅋ
뭐 또 아니라면 어때요, 재밌으면 장땡이지요!!!

근데... 늙어서 사랑을 갈구하는 건 맞을 거 같은데요, 그게 어떤 형태인지는 저도 조금 더 기다려 봐야 확실하게 알겠습니다. 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7-07 17: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당선 완전 축하드립니다~!! 나중에 별 다섯개 짜리 책좀 소개해 주세요 ^^

Falstaff 2021-07-07 20:30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근데 ‘당선‘은 좀 언어 인플레 같습니다. 얼핏 들으면 팔자 고친 거 같아서요. 걍 ‘선정‘ 정도가 편하지 않을까요? 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7-07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

Falstaff 2021-07-07 20:30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

mini74 2021-07-07 18: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새파랑님 의견에 동의! 축하드려요 ~~

Falstaff 2021-07-07 20:3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

초딩 2021-07-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이하라 2021-07-08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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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진주토박이 허수경은 1987년에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고 하니, 출발은 전형적인 86세대의 참여시였을 듯하다. 『실천문학』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엔 무크지 활동을 끝내고 이제 2년 차든가 3년 차였을 땐데 87년, 투쟁의 시절에 적극적 참여시가 아니라면 지면을 할애해주지 않았을 터이니까. 이랬던 허수경이 데뷔 30년 차인 2016년에 모더니즘 시의 인싸인 문학과 지성사에서 찍은 것들 가운데 세 번째 시집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냈으니 세월의 힘이 대단하긴 하다. 뭐 그동안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역사의 조종弔鐘 속에서 이미 땅속에 묻혔으며, 우리나라도 전반적인 민주화는 이루어졌다고 해도 큰 탈이 아니어서 참여시의 효용이 전 같지 않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시인의 노선 변경은 전적으로 시인의 자유라는 점에서 이이의 변모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1987년이라면 내게는 새까만 봉급쟁이로 날마다 야근에 주말 출근, 일요일은 선택, 그나마 시간이 나면 부서 회식이란 명목으로 새벽까지 술 마시고 술집에서 곧바로 출근하는 게 일상이었으니 신문 한 장 못 읽는 처지에 시집 나부랭이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허수경이란 유행가 가수는 알아도 시인을 내가 어찌 알았을까. 세월만 갔고, 보냈고, 이제 시 좀 읽어볼까, 하니 또 아는 시인이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요즘, 허 시인의 시가 좋다는 얘기를 인터넷의 바다 여기저기서 읽어 드디어 시집을 한 권 구비한 것이 바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온 것이 2016년 9월 말. 시인은 2018년 초에 자신이 말기 위암 투병 중임을 세상에 알렸고 10월에 55세의 짧은 생을 마친다. 그래서인지 나는 시집을 읽는 내내 시를 쓰는 당시에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인식했을 수도 있다고 짐작을 할 만큼 병과 죽음과 투병의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시집을 다 읽고 검색을 해보니 시인의 아버지가 5년 동안 암 투병을 했으며 20대의 시인도 아버지의 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 90년대 초, 아버지가 숨을 거둬 스프링의 압력이 빠지자 갑작스레 허탈에 빠진 시인은 어느 날 과감히 현타를 극복하고 1992년에 독일 유학을 감행, 고대 근동 고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10여 년 동안 고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고 한다.
  이 내력을 알고 시집을 다시 읽어보니 처음에 낯설던 것이 이해가 가는 시편들이 있었다. 그것참, 근동 고고학이라니. 하긴 뉴욕 911 이전이라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가능하긴 했을 터겠다. (근동 고고학: 세기 전 40세기 수메르 문명부터 고대 이집트, 고대 이란,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고고학) 공부를 10년 동안 하면서 박사학위 지도교수와 연애를 해 결혼까지 이르렀으니 허수경의 시집에서 달큰한 사랑의 냄새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랑을 했으되 불임의 여성에 관한 시들도 제법 읽을 수 있었다.

 

  시집에 가장 먼저 실린 시를 읽어보자. 서문 격인 ‘시인의 말’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어서 이 시가 시집을 펴내는 서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농담 한 송이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전문)

 


  깊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 시인이 시를 쓰는, 그리고 시집을 내는 마음 또는 가짐이라고 읽었는데, 이런 감상은 단 하나, 이 시가 시집의 맨 앞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라면 첫 행의 ‘한 사람’을 애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실 그래야 더 재미있는 사랑의 시가 되리라. 하긴 나는 정철의 관동별곡도 사랑 시로 읽는 종자니까 할 말은 없지만. 하여튼 내 독법도 이해할 수준이라면 독자들에게 시집의 시들이 적어도 자신의 가장 서러운 곳에서 가지고 온 꽃, 즉 진심임을 알아달라는 요구일 수도 있다.
  앞에서 시집에 가끔 죽음에 관한 노래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허수경이 죽음을 대하는 시각이 조금 독특하다. 죽음의 바로 앞에 서 있는 탄생이란 대위법을 시도했다. 예컨대 이렇게.

 


  병풍 속에는 눈 분분한데 매화가 깨어났네
  옹이 많은 가지를 잡고 꽃들은 다시 잠이 들었네
  꽃 사이를 산보하던 검은 새들은 눈을 안고 자는 꽃잎 속으로 들어갔네

 

  병풍 뒤에는
  아직 눈을 감지 못한 한 사람 누워 있었네
  가지 못했던 길 같은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병풍> 1, 2연. 하략)

 


  장례를 집에서 치루던 시절, 안성기 주연의 영화 <축제>를 보셔도 될 듯, 당시엔 방부처리도 하지 않고 염만 잡순 시신을 관에 담아, 바람이 잘 통하는 마루나 큰 방에 안치하고 문상객들에게 관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어서 관과 문상객 사이에 병풍을 쳐 놓았었다. 1연에 나오는 눈 분분한 매화와 검은 새가 바로 병풍 속의 그림이다. 비록 병풍 속은 눈 분분한 양력 1월 말 정도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병풍 뒤에 누운 고인이 맞은 계절은 한여름일 수도 있어서, 냉동장치가 없는 관을 칠성판 위에 올리고 장지로 모실 때, 이미 부패한 육신에서 시즙屍汁이 관을 맨 장정들의 어깨로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그랬다.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게들 살았다. 너무 끔찍해 하지 마시라. 시 속에선 병풍 뒤에도 겨울이니까.
  허수경 시인을 좋아하는 독자가 많은 건 혹시 이이의 시들이 요새 시들에 비해 수월하게 읽히고, 내용도 심각하게 우울하고 죽음 친화적인 대신 은은한 사랑 이야기가 많이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도 사실 이런 독자의 일원임을 고백하거니와, 그런 의미에서 시집에서 제일 잘 읽은 시 한 편으로 소개한다.

 


  호두

 


  숲속에 떨어진 호두
  한 알 주워서 반쪽으로 갈랐다
  구글맵조차 상상 못한 길이 그 안에 있었다

 

  아, 이 길은 이름도 마음도 없었다
  다만 두 심방, 두 귀
  반쪽으로 잘린 뇌의 신경선,
  다만 그뿐이었다

 

  지도에 있는 지명이
  욕망의 표현이
  가고 싶다거나 안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하는
  꿈의 욕망이
  영혼을 욕망하는 속삭임이
  안쓰러워

 

  내가 그대 영혼 쪽으로 가는 기차를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것만은 울적하다오

 

  욕망하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익히는 가을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게요 그런데도 그 기차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서 울적했다오 미안하오

 

  호두 속에 난 길을 깨뭅니다 오랫동안 입안에는 기름의 가을빛이 머뭅니다

 

  내 혀는 가을의 살빛을 모두어 들이면서 말하네, 꼭 그대를 만나려고 호두 속을 들여다본 건 아니었다고  (전문)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한다. J.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소개한 동종 주술의 하나로 호두의 열매가 마치 뇌처럼 생겨서 그걸 섭취하면 사람의 몸에 유사한 형태를 한 유일한 기관인 뇌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러나 시인은 호두의 속살을 보고 뇌보다는 두 개의 심방을 발견한다. 하나의 심장에 두 개의 심방이 있으니 호두 속살은 이건 그대의 하나뿐인 심장. 아울러 구불구불한 곡선들은 그대를 향해 가는 신경선이기도 하고 길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신경선 또는 길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 울적했단다.
  이런 시들을 모국어와 너무도 멀리 떨어진 유럽의 한 가운데서 만들어냈다니, 그리고 죽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명복을 빌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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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08 09:5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허수경 시인이 근동 고고학을 전공했는지는 몰랐네요. 참 재미난(?) 전공을 했군요. 폴스타프 님 덕분에 오랜만에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고 갑니다.

근데 이 포스팅에서 절 가장 놀라게 한 구절은 ‘1987년 새까만 봉급쟁이 폴스타프....‘ 스무살 잠자냥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서재에서 이렇게 친애하는 친구놀이도 하고 ㅋㅋㅋㅋ 세상 참 좋아요. ㅋㅋㅋㅋ 우리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자 폴~ㅋㅋㅋㅋ

Falstaff 2021-06-08 10:09   좋아요 5 | URL
근동 고고학을 전공하게 된 유일한 이유가요, 학문의 제목이 근사해 보였다는 겁니다. 아빠 죽고 뭔가 새로운 걸 해봐야겠다, 마음 먹은 다음에 유학... 사실은 이 땅을 뜨는 거였는데 제일 명목이 좋은 게 유학이니까 아무 생각없이 독일에 가서 1년 어학연수 받고 왼쪽 손바닥에 침 탁, 뱉아 오른손 둘째와 세째 손가락으로 빡 내리쳤더니 그쪽으로 튀더랍니다.

ㅋㅋㅋㅋ 이너넷 좋은 게 바로 그런 점 아닙니까. 안면 탁 몰수하고 친하게 지내는 거요. ㅋㅋㅋㅋ
 
블라드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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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멕시코의 외교관 라파엘 푸엔테스의 아들 카를로스는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출생한 멕시코 작가다. 이 양반이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썼다. <아우라>, <의지와 운명>은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고, 원제목이 <다이애나>이지만 우리나라엔 <미국은 섹스를 한다>라는 꼴불견의 제목으로 출간한 것과, 옴니버스 소설집 《모든 행복한 가족들》, 그리고 단편소설 단행본 <블라드>는 절판 상태. 이 다섯 권이 내가 읽은 카를로스 푸엔테스 전부이며, 모두 재미있다.
  이 책, <블라드>. 한여름 밤에 읽기 딱 좋은 책. 1인칭 화자는 이브 나바로. 40대 초반으로 법무법인의 변호사 가운데 최고 선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법인의 대표 엘로이 수리나가는 올해 나이가 무려 여든아홉 살로, 긴 세월 동안 멕시코 정치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기 분야에서 승승장구한 강직하고 권위적인 인물이다. 60년 동안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교묘하게 위기를 빠져나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공직자들과는 어떠한 적대관계도 만들지 않을 만큼 효율적인 전문가의 태도를 견지해왔는데, 최근 일 년 동안은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전화로 지시하고 가끔 변호사를 집으로 불러 업무에 관한 논의를 해왔음에도 회사엔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때보다 더 큰 존재감을 불러올 정도의 장악력까지 있는 멕시코 최고 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이다.
  그런 돈 엘로이가 화자인 나바로를 집으로 불러 조금은 사적인 업무를 지시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자기와 나이가 같으며 소르본에서 함께 법을 공부한 오랜 친구가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헝가리와 루마니아 국경 지역의 거대한 땅을 빼앗긴 몰락한 귀족인데 이 친구가 멕시코시티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한적한 곳에 보금자리를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간 하도 당한 일들이 많아 주변 공간이 넓고 침입자들을 방어하기 쉬운 지형이면 좋겠다고 한다. 이것 말고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요구사항이 몇 개 있다. 집 뒤쪽에 절벽이 있어야 하고, 집과 절벽 사이에 터널을 뚫어달라는 것. 그리고 이사하기 전에 반드시 창문을 모두 폐쇄해달라 하는 것으로 보아 빛에 민감한 알레르기 증상이 있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돈 엘로이가 나바로에게 일을 부탁하는 건 나바로의 아내 아순시온이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어서이기도 하단다. 나바로와 아순시온 사이에는 모든 운동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던 활기찬 아들이 열두 살에 바다에 빠져 죽은 일로 금이 갈 뻔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열 살이 된 딸 마그달레나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아순시온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있고(푸엔테스의 여자들은 거의 예쁜 얼굴과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긴 하지만), 자식이 죽고 난 다음 자주 발생하는 극심한 부부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각별한 속궁합을 들 수 있었다. 아순시온은 어둠이 깔리기만 하면 침대 위의 불도마뱀으로 변신한다고 한다. 그것참. 침대 위의 불도마뱀? 또 있다. 타오르는 얼음 덩어리. 크, 좋을 거 같지? 불도마뱀도 타오르는 얼음덩어리도 하루 이틀이지, 하고한 날 침대 위에 불도마뱀이 몸부림치고, 얼음덩어리가 불타오르면 그걸 어떻게 견디는지, 나바로가 불쌍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뭐 그렇긴 하다.
  고산지대에 자리 잡은 멕시코시티에 절벽 아래의 저택을 고를 수 있어서 드디어 계약을 하고 절벽까지 터널을 뚫는 공사도 마치고, 창문도 다 막은 다음, 돈 엘로이의 소르본 동창 블라디미르(약칭 블라드) 라두 백작이 첼리니가 조각한 페르세우스의 얼굴을 한 곱사등이 하인 보르고와 열 살짜리 딸 미네아와 함께 입주를 했다. 권리 소유 등기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해 나바로가 저택을 방문해 라두 백작과 저녁 식사를 한다. 메뉴는 동물의 내장. 콩팥과 간, 허파, 염통, 소장, 대장을 갖은 향신료를 첨가해 야채와 함께 요리한 것. 창문처럼 투명하고 기다란 유리 같은 손톱과 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낀 백작은 변호사의 아내 아순시온이 집을 얻어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순시온에게 전해주시오. 그녀의 향수 냄새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고. 이 집의 공기중에 떠돌고 있다고.”

 

  백작은 적갈색 가발을 하고, 감정표현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가짜 콧수염을 달았으며 성형수술을 여러 번 받은 듯한 얼굴과 상처가 많아 작아진 귀를 가지고 있다. 귀족보다는 집시나 배우, 예술가에 가까운 옷차림을 한 백작과 즐겁지 않은 식사와 유쾌하지 않은 대화는 나바로에게 선뜻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나바로는 얼른 식사를 끝내고 서류에 서명을 받자마자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훨씬 뜨거운 밤. 아순시온은 전보다 훨씬 더 뜨거운 침대 위의 불도마뱀으로 변신해버린다. 이윽고 도래한 진한 현타. 나바로는 침대 밑으로 손을 뻗어 밤에 신는 실내화를 찾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침대 밑으로 손을 뻗었다가 깜작 놀라 곧장 거두었다. 침대 밑에 놓인 다른 손을 건드렸던 것이다. 길고 매끄럽고 유리 같은 손톱이 달린 차가운 손. 그 차가운 손이 발목을 힘껏 잡아채 유리 손톱을 발바닥에 쑤셔박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거라. 자거라. 아직 이른 시간이다. 서두를 것 없다. 자거라, 자거라.”

 

  그리고 나바로는 누군가가 방을 떠나는 기척을 느꼈다.

 

  올 여름, 얼마나 더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으로 하루는 서늘하게 보낼 수 있을 터. 다만 절판이라 헌책방을 뒤져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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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1-06-07 09: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요일에 32도 예보가 있습니다.

Falstaff 2021-06-07 09:52   좋아요 2 | URL
ㅎㅎㅎ 읽다가 섬찟 하더군요. 오소소....

유부만두 2021-06-07 10:09   좋아요 1 | URL
납량특집의 계절이 ‘아니, 벌써!’ 왔습니다.

새파랑 2021-06-07 11: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리뷰 읽고난 후 ‘절판‘ 이라는 단어를 보고 희비가 교차하는군요 ㅎㅎ

Falstaff 2021-06-07 11:1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이 양반 책이 다 좋은데 품절, 절판이 좀 많아서 탈이더라고요.

새파랑 2021-06-07 12:25   좋아요 3 | URL
우주점에서 중고 발견하여 구매했습니다 ㅋ (무료배송을 위해 2만원어치 책 고르는게 일이네요. 동일 매장에서 책 찾기 힘들어요ㅡㅡ)

Falstaff 2021-06-07 12:28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맞아요. 우주점 한 곳에서 몇 권 고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재미나게 읽으셔요!!

페넬로페 2021-06-07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서운거를 잘 못봐요~~
그 영상이 며칠씩 가더라고요^^
근데 이상하게 책으로 읽으면 숨을 죽이며 계속 보게 되더군요~~
납량특집, 좋습니다^^

Falstaff 2021-06-07 12:12   좋아요 2 | URL
저도 영상으로는 무서운 거, 잔인한 거, 과하게 폭력적인 거는 못 봅니다. 으....
이 책, 인용한 거 가운데 침대 밑에서 손 나오는 장면 있잖아요, 진짜 오소소... 합니다. ㅋㅋㅋㅋ 근데 절판이라는 거, 그래서 오소소한 장면도 인용했습니다만. ㅋㅋㅋ

mini74 2021-06-07 1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무서운거 잔인한거 과하게 폭력적인거 잘 봅니다. 과하게 로맨틱한건 잘 못 봅니다 ㅎㅎ 절판이라니 도전정신을 일깨웁니다 ~

Falstaff 2021-06-07 13:57   좋아요 1 | URL
윽! 과하게 무섭지는 않습니다. 지가 무서워봐야 활자밖에 더 되겠습니까.
기대하시면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coolcat329 2021-06-07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저도 중고 알아봐야겠어요~~표지도 내용도 너무 맘에 드네요

Falstaff 2021-06-07 13:58   좋아요 1 | URL
흠...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하고 비슷한 강도입니다. ^^
 
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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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앨런 홀링허스트. 처음 읽는 작가. 역자 전승희의 발문에서 보면, 1954년 영국 글로스터셔의 스트라우드라는 소도시 중산층 가정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자신의 동성애 취향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은 동성애자라고 한다. 은행 지점장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고전음악과 건축에 관한 조예가 있으며, 도싯의 사립 기숙학교에 이은 옥스퍼드 영문학과를 다니며 1975년에 학사, 79년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고 하는데, <아름다움의 선>의 주인공 닉과 비교해볼 때 차이점은, 닉은 ① 아버지의 직업이 고가구와 시계를 주로 다루는 골동품상이고, ② 음악, 건축과 더불어 고가구, 미술품 등 예술작품에 조예가 있으며, ③ 작가와 달리 1983년에 학사를 마치고 UCL(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홀링허스트는 시간적 공간을 1983년에서 이후 4년으로 잡았는데, 이는 마거릿 대처 수상의 두 번째 집권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하여 작가는 작품을 구상할 때부터 대처 시대의 영국을 회화적繪畵的으로 묘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닉이 대학원에서 전공으로 선택한 것이 헨리 제임스의 문체. 독자는 닉의 전공을 일찌감치 알게 되는데, 처음에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일 듯하다. 내 경우엔, 1부에서 벌써 홀링허스트의 문장과 플롯을 읽는 대신, 헨리 제임스를 통해 익숙한, 즉 제임스를 변주한 문단들의 집합인 챕터들을 읽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낄 수 있었다. 주인공 닉은 사실 지방 소도시 출신의 별 볼 일 없는 청춘이다. 단지 사립 기숙학교와 옥스퍼드를 졸업했으며, 하원의원 아버지와 거대 은행을 소유한 케슬러 경의 상속자인 토바이어스, 애칭 토비 페든과 동기동창이란 이유 하나로 켄징턴파크 가든스라는 저택에 상징적인 집세만 내는, 쉽게 얘기해서 얹혀사는 인물. 그러면서 닉은 영국의 최상류 계층의 온갖 사교모임에 전부 참석하는 기회를 잡고 심지어 만인이 보는 앞에서 마거릿 대처 수상과 춤을 추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2부에서는 역시 옥스퍼드 동기동창인 앙뚜안, 애칭 ‘와니’의 부, 정확하게는 와니의 부모가 채소를 팔아 이룬 부에 힘입어 최고급 생활을 영유한다. 이거 어디서 봤다. 남들보다 조금 더 예쁜 외모 덕택에 이모네 집에 얹혀살면서 천성적으로 사교적인 성격을 겸비해 귀여움을 받다가 천문학적인 금액의 현금을 상속받는 <한 여인의 초상> 주인공 이사벨 아처.

  여기에 더해 며칠 전에 읽은 <대사들>의 문체까지. 헨리 제임스의 문체와 비슷하다는 건, 책을 읽기 위해 남다른 집중을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홀링허스트는 사람의 심리상태를 그대로 묘사하지 않는다. 특정인을 바라보는 눈빛, 목소리의 높낮이, 유럽식으로 부탁하는 말씨 등등. 게다가 1980년대를 관통하는 환상의 영미 파트너, 대처와 레이건 경제를 통과하며 점점 더 큰 부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부르주아들을 세밀하게 그려낸 것도 저절로 헨리 제임스가 떠오르게 만드는 요인이다. 번역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원서로 제임스와 비교해가며 읽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1983년 여름에 켄징턴파크 가든스의 페든 씨 가족이 딸 케서린만 남고 모두 프랑스 별장으로 여름휴가를 지내러 떠나게 됐을 때, 마침 대학원 진학을 앞에 두고 런던에 숙소를 마련해야 하는 닉더러 페든 가의 장남이자 닉의 옥스퍼드 동창생인 토비가 차라리 우리 집에 와서 동생을 돌보며 여름 한 철을 보내라는 호의를 보여, 시내에 방을 얻기까지만 임시로 이 저택에 머물려다가 무려 4년이 넘어, 이때 역시 타의에 의해, 저택을 떠나야 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1부부터, 주인공 닉은 책에서는 한 번도 이렇게 표현하지 않았지만, 기회주의적이고, 소심하고, 소극적이고, 의타적이고, 자존감이 없고, 이런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비겁하다. 성격 급한 독자는 답답해 짜증을 낼 수도 있다.

  닉이 토비의 집에 들어간 스물한 살 때까지 동정이었다. 닉은 애초에 여자한테 관심이 없었고, 남자는 늘 그리웠지만, 그리움을 넘어 성적 충동이 말로 다 할 바가 아니어서 대학 시절 학교 대표 조정 선수이기도 했던 토비를 짝사랑하기도 했었는데, 이제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블라인드 데이트, 잡지에 난 동성의 애인 구함, 이란 광고를 보고 서른한 살 정도 되는 서인도제도 출신 작은 체구의 흑인 리오에게 편지로 자기소개를 보내, 무려 몇십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데이트를 하기에 이른다. 닉은 리오를 본 순간 반해버리고, 리오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아 이들은 만난 첫날 관계에 이르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문제가 있으니, 리오는 엄마, 여동생과 한 집에 살고, 닉 역시 범절을 어길 수 없는 명문 토리당 하원의원 페든 씨의 서생으로 머물고 있어 이들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 그리하여 이들은 페든 가 저택 켄징턴파크 가든스 주민들의 공동정원 안 으슥한 풀밭에서 드디어 닉의 딱지를 떼게 된다.

  뭐 가난한 연인들이 사랑은 하고 싶고, 돈은 없어 숙박업소에 갈 처지가 아니라면 한 번 정도는 그럴 수 있다고 친다. 오히려 눈물 나는 가난의 참경이라고 동정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가 문제다. 닉은 소도시 출신이라 하더라도 사립 기숙학교에 옥스퍼드 출신의 중산층 자제. 페든 가로 들어온 것도 다른 곳에 방을 얻을 때까지 잠시만이라는 전제였음에도 리오와의 사랑은 야외나 공중화장실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닉이 페든 집안의 안락한 생활과 상류사회, 미식취향, 금준미주를 물리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쟁취할 수는 없다는 진리를 닉은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조금이나마 짐작한다.

  생각해보자. 닉의 고향을 선거구로 하는 집권 토리당의 하원의원 집안에다가 모계 쪽으로는 귀족의 핏줄에다 거대 은행의 소유주인데, 한갓 시골 중산층의 자제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겠는가. 이들은 귀족, 부르주아, 집권층의 평균 모습대로 친절하고 온화하고 비교적 거의 ‘동등한’ 복지의 제공에도 불구하고, 격이 떨어지는 객식구 닉은 언제나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나쁜 방과 가구에 만족해야 하며, 은근한 부탁을 언제나 들어주어야 하고, 사소한 심부름 역시 무조건 승낙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준 하인, 그러나 주장하기를 항상 가족과 준하는 대우를 받아야 할 뿐이었다. 그래도 닉은 자존감 손상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리오와의 공중화장실 안에서의 섹스를 지속하는 게, 이게 말이나 되느냐고.

  닉의 이런 기생寄生 생활은 페든 가에 국한하지도 않는다. 2부로 넘어가면 옥스퍼드 동기생 가운데 가장 부자이며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 와니의 애인으로 지내는데, 대가로 와니로부터 1986년 화폐 가치로 5천 파운드의 돈을 받는다. 그러면서 <오지Ogee>라는 제목의 잡지를 창간한다는 핑계로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전전하며 환락과 마약과 술의 세상을 경험한다. 다분히 개인차이겠지만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겠는가. 난 죽어도 못한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닉과 다르기 때문이다. 다르다고 그를 비난하면 바람직하지 않겠으나, 나의 복지를 위해 애인과 공중화장실 안에서 섹스를 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또다른 애인에게 심부름해주고, 성적인 봉사를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싶지도 않다. 닉은 나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찌질해 싫다. 부당한가?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시골 향사의 런던 무협지다. 이런 측면에서 닉이 전공으로 연구하고 있는 헨리 제임스의 작품 속에 숱하게 나오는 유럽 속의 미국인들과 매우 유사하다. 닉은 훗날 자신의 생에 크게 보탬이 될 수도 있었던 상류사회와의 막강한 연줄을 맺는 데 성공 가까이 갈 수 있었고, 동창생 하나 잘 만나 그의 애인이 되다가 다른 곳도 아닌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런던의 고층빌딩을 유증받아, 책에서 말한 그대로 평생 일하지 않고 놀고 먹을 수도 있었다가 만다. 21세기 작품답게 해피 엔드로 마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극도 아닐 수 있었던 것은 현대 매스미디어의 즉물성을 감안할 때 그렇다. 이 책은 분명하게 헨리 제임스의 저 먼 후손이지만 결코 복제가 아니다. 하이 소사이어티를 관찰한 젊은 지식인을 통해 본 현대 유럽이며, 제 삼의 젠더가 세상을 향해 토해내는 사랑의 노래이기도 하다.

  다시 강조할 것은, 헨리 제임스의 후손이란 건, 읽는 데 집중을 요구한다는 의미이고 진도 빼는 데 여간한 애를 써야 한다는 뜻이라는 점. 전철에서 읽기 위해서라면 광폭의 마스크나 차라리 두건 또는 복면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도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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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05 20: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이 작품 좀 진도가 안 나가긴 하죠. 저도 좀 애먹었어요. ‘시골 향사의 런던 무협지’라는 표현 재미납니다. 그런 것도 같군요. 제 생각에 아마도 ‘닉’ 캐릭터는 다분히 작가의 분신스러운 면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암튼 전 이 작가 신간 <수영장 도서관> 사놨습니다요.

Falstaff 2021-06-05 21:07   좋아요 3 | URL
어쨌든 21세기 작품으로는 특색있었습니다. 요즘 작가들은 거의 선택하지 않을 문법으로, 작법이라고 해야 맞겠지만 하여간 색다른 목소리로 글을 짓는게 호기심을 바짝 일으켰습지요. 아직도 이렇게 글을 써도 괜찮구나.... ㅋㅋㅋㅋ 무슨 평론가나 된 듯한 생각도 들더라곱쇼.
저도 <수영장 도서관> 샀습니다. 8월 늦게 읽을 거 같아요. 잠자냥 님 리뷰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