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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490
허수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평점 :
1964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 국문과를 졸업한 진주토박이 허수경은 1987년에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해 등단했다고 하니, 출발은 전형적인 86세대의 참여시였을 듯하다. 『실천문학』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엔 무크지 활동을 끝내고 이제 2년 차든가 3년 차였을 땐데 87년, 투쟁의 시절에 적극적 참여시가 아니라면 지면을 할애해주지 않았을 터이니까. 이랬던 허수경이 데뷔 30년 차인 2016년에 모더니즘 시의 인싸인 문학과 지성사에서 찍은 것들 가운데 세 번째 시집인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를 냈으니 세월의 힘이 대단하긴 하다. 뭐 그동안 볼셰비키 소비에트가 역사의 조종弔鐘 속에서 이미 땅속에 묻혔으며, 우리나라도 전반적인 민주화는 이루어졌다고 해도 큰 탈이 아니어서 참여시의 효용이 전 같지 않을 수도 있고, 무엇보다 시인의 노선 변경은 전적으로 시인의 자유라는 점에서 이이의 변모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1987년이라면 내게는 새까만 봉급쟁이로 날마다 야근에 주말 출근, 일요일은 선택, 그나마 시간이 나면 부서 회식이란 명목으로 새벽까지 술 마시고 술집에서 곧바로 출근하는 게 일상이었으니 신문 한 장 못 읽는 처지에 시집 나부랭이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허수경이란 유행가 가수는 알아도 시인을 내가 어찌 알았을까. 세월만 갔고, 보냈고, 이제 시 좀 읽어볼까, 하니 또 아는 시인이 없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요즘, 허 시인의 시가 좋다는 얘기를 인터넷의 바다 여기저기서 읽어 드디어 시집을 한 권 구비한 것이 바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이 시집이 세상에 나온 것이 2016년 9월 말. 시인은 2018년 초에 자신이 말기 위암 투병 중임을 세상에 알렸고 10월에 55세의 짧은 생을 마친다. 그래서인지 나는 시집을 읽는 내내 시를 쓰는 당시에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인식했을 수도 있다고 짐작을 할 만큼 병과 죽음과 투병의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시집을 다 읽고 검색을 해보니 시인의 아버지가 5년 동안 암 투병을 했으며 20대의 시인도 아버지의 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 90년대 초, 아버지가 숨을 거둬 스프링의 압력이 빠지자 갑작스레 허탈에 빠진 시인은 어느 날 과감히 현타를 극복하고 1992년에 독일 유학을 감행, 고대 근동 고고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따기까지 10여 년 동안 고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고 한다.
이 내력을 알고 시집을 다시 읽어보니 처음에 낯설던 것이 이해가 가는 시편들이 있었다. 그것참, 근동 고고학이라니. 하긴 뉴욕 911 이전이라 그런 선택을 하는 것도 가능하긴 했을 터겠다. (근동 고고학: 세기 전 40세기 수메르 문명부터 고대 이집트, 고대 이란, 메소포타미아, 레반트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고고학) 공부를 10년 동안 하면서 박사학위 지도교수와 연애를 해 결혼까지 이르렀으니 허수경의 시집에서 달큰한 사랑의 냄새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랑을 했으되 불임의 여성에 관한 시들도 제법 읽을 수 있었다.
시집에 가장 먼저 실린 시를 읽어보자. 서문 격인 ‘시인의 말’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어서 이 시가 시집을 펴내는 서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농담 한 송이
한 사람의 가장 서러운 곳으로 가서
농담 한 송이 따서 가져오고 싶다
그 아린 한 송이처럼 비리다가
끝끝내 서럽고 싶다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
살고 싶다 (전문)
깊게 생각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 시인이 시를 쓰는, 그리고 시집을 내는 마음 또는 가짐이라고 읽었는데, 이런 감상은 단 하나, 이 시가 시집의 맨 앞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 아니라면 첫 행의 ‘한 사람’을 애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고 사실 그래야 더 재미있는 사랑의 시가 되리라. 하긴 나는 정철의 관동별곡도 사랑 시로 읽는 종자니까 할 말은 없지만. 하여튼 내 독법도 이해할 수준이라면 독자들에게 시집의 시들이 적어도 자신의 가장 서러운 곳에서 가지고 온 꽃, 즉 진심임을 알아달라는 요구일 수도 있다.
앞에서 시집에 가끔 죽음에 관한 노래가 들어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허수경이 죽음을 대하는 시각이 조금 독특하다. 죽음의 바로 앞에 서 있는 탄생이란 대위법을 시도했다. 예컨대 이렇게.
병풍 속에는 눈 분분한데 매화가 깨어났네
옹이 많은 가지를 잡고 꽃들은 다시 잠이 들었네
꽃 사이를 산보하던 검은 새들은 눈을 안고 자는 꽃잎 속으로 들어갔네
병풍 뒤에는
아직 눈을 감지 못한 한 사람 누워 있었네
가지 못했던 길 같은 손을 가슴 위에 모으고 (<병풍> 1, 2연. 하략)
장례를 집에서 치루던 시절, 안성기 주연의 영화 <축제>를 보셔도 될 듯, 당시엔 방부처리도 하지 않고 염만 잡순 시신을 관에 담아, 바람이 잘 통하는 마루나 큰 방에 안치하고 문상객들에게 관을 그대로 보여줄 수 없어서 관과 문상객 사이에 병풍을 쳐 놓았었다. 1연에 나오는 눈 분분한 매화와 검은 새가 바로 병풍 속의 그림이다. 비록 병풍 속은 눈 분분한 양력 1월 말 정도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병풍 뒤에 누운 고인이 맞은 계절은 한여름일 수도 있어서, 냉동장치가 없는 관을 칠성판 위에 올리고 장지로 모실 때, 이미 부패한 육신에서 시즙屍汁이 관을 맨 장정들의 어깨로 뚝뚝 떨어지기도 하고 그랬다.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지만 그렇게들 살았다. 너무 끔찍해 하지 마시라. 시 속에선 병풍 뒤에도 겨울이니까.
허수경 시인을 좋아하는 독자가 많은 건 혹시 이이의 시들이 요새 시들에 비해 수월하게 읽히고, 내용도 심각하게 우울하고 죽음 친화적인 대신 은은한 사랑 이야기가 많이 보이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도 사실 이런 독자의 일원임을 고백하거니와, 그런 의미에서 시집에서 제일 잘 읽은 시 한 편으로 소개한다.
호두
숲속에 떨어진 호두
한 알 주워서 반쪽으로 갈랐다
구글맵조차 상상 못한 길이 그 안에 있었다
아, 이 길은 이름도 마음도 없었다
다만 두 심방, 두 귀
반쪽으로 잘린 뇌의 신경선,
다만 그뿐이었다
지도에 있는 지명이
욕망의 표현이
가고 싶다거나 안고 싶다거나 울고 싶다거나, 하는
꿈의 욕망이
영혼을 욕망하는 속삭임이
안쓰러워
내가 그대 영혼 쪽으로 가는 기차를 그토록 타고 싶어 했던 것만은 울적하다오
욕망하면 가질 수 있는 욕망을 익히는 가을은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게요 그런데도 그 기차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서 울적했다오 미안하오
호두 속에 난 길을 깨뭅니다 오랫동안 입안에는 기름의 가을빛이 머뭅니다
내 혀는 가을의 살빛을 모두어 들이면서 말하네, 꼭 그대를 만나려고 호두 속을 들여다본 건 아니었다고 (전문)
호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고 한다. J.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에서 소개한 동종 주술의 하나로 호두의 열매가 마치 뇌처럼 생겨서 그걸 섭취하면 사람의 몸에 유사한 형태를 한 유일한 기관인 뇌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그러나 시인은 호두의 속살을 보고 뇌보다는 두 개의 심방을 발견한다. 하나의 심장에 두 개의 심방이 있으니 호두 속살은 이건 그대의 하나뿐인 심장. 아울러 구불구불한 곡선들은 그대를 향해 가는 신경선이기도 하고 길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신경선 또는 길만 생각하면 설레다가 아득해져 울적했단다.
이런 시들을 모국어와 너무도 멀리 떨어진 유럽의 한 가운데서 만들어냈다니, 그리고 죽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명복을 빌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