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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56년 잔나비 띠. 미국 메인 주의 포틀랜드에서 출생.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 <에이미와 이저벨>을 발표한 것이 1998년, 이이의 나이 마흔세 살 때. 이력을 보고 나는 문득 박완서 선생을 떠올렸다. 1931 신미년 양띠. 1970년 마흔 살에 장편소설 <나목>으로 등장해 한 시절을 풍미했던 국가대표 수다꾼. 얼추 가져다 맞춘 것이지만 세상 살아볼 거 거진 다 해보고 나이 들어 글쓰기 시작한 작가들이라서 그런지 글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참 찰지다. 물론 이들이 눈을 모아 바라보는 대상은 판이하다.
스트라우트가 내세운 인물은 은퇴한 시골학교 수학선생. 골격이 크고 기골이 장대해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는 체격의 여성. 위로 9대 할아버지가 카누를 타고 강을 거슬러 자리 잡은 포틀랜드 인근의 크로스비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고, 헨리 키터리지와 혼인해서 외아들 크리스토퍼를 낳고, 키우고, 답답한 남편과 살면서 복장 터지는 세월을 지내다 어영부영 나이 들어 퇴직하고, 더 늙어가는 올리브 스트라우트. 크로스비 마을의 유일한 중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선생으로 악명이 자자했으나 학생들이 무서워하는 만큼 좋아하는 아이들도 많았던 건 무뚝뚝한 친절이 이이의 근본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말을 한 마디 해도 퉁명스러운 단어들을 효과적으로 조합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어딘지 모르게 타박한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것들로 골라서 하는 게, 아무래도 버릇 같은데 이런 성향이 늙어갈수록 더 해가는 경향이 있다. 아무렴. 늙으면 늙을수록 세상에 원망스러운 게 많아진다고 하니. 예를 들어볼까. 강변을 따라 잘 포장해 놓은 산책로. 가는 데 3마일, 오는 데 3마일. 합해서 매일 아침 6마일. 70대 노인으로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인 9.7 킬로미터를 눈이나 비, 또는 모진 바람이 불지 않으면 매일 걷는 걸 습관으로 하고 있었다가, 하루는 눈꼴 신 하버드 출신의 재수없는 공화당 지지자인 배불뚝이 노인 잭 케니슨이 길바닥에 누워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그래 올리브가 가까이 가서 허리를 굽혀 노인의 새파란 눈을 바라보고 얘기하는 첫 마디가 이렇다.
“당신 죽었소?”
어쩌면 좋아. 외모는 다음으로 하고, 말하는 품새나 생각하는 거나 딱 빼다 박은 중년과 노년 사이의 우리나라 여자를 한 명 아는데, 방귀가 나올 거 같으면 출근하느라 밥 먹고 있는 남편 식탁에까지 달려와 시원하게 뀌는 이다. 남편 옆에 와야 방귀도 시원하게 나온다면서. 누구냐고? 안 알려줌. 역자 해설을 보면 작가가 먼저 올리브를 만들고 보니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 페이지마다 등장시키기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어 연작 형식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이리 이야기한다고 해서 연작소설 《올리브 키터리지》가 수다스럽고, 경쾌하고, 에너제틱하리라고 여기면 오산이다. 그것도 큰 오산이다. 오히려 처음부터 끝까지 이제 인생의 석양에까지 와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인간살이에 관한 쓸쓸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노년의 주변에 관한 노인들의 심리상태를 절묘하게 묘사한 책이다. 올리브가 비록 외모나 성격, 언어 사용에 조금 부담스러운 면이 있으나, 피부색과 성적 기호에 관한 편견에 관한 한 도시 노인들보다 훨씬 개방적이다. 물론 공화당과 부자백인남성에 관한 편견은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지만. 세상엔 70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들이 다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다.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만나 커플을 이루고, 이들이 아이를 낳아 가족을 이루고, 가족들이 올망졸망 모여 친척과 동네를 만드는 것. 이들 사이에 상호간의 자기장이 있고, 개성에 따라 자기장의 세기가 달라 사람들 사이에 서로 갈등하고, 오해하고, 믿거나 비웃고, 호감이 생기고, 이것들을 다 합해 인간관계가 이루어지는 건 다 비슷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그냥 사는 이야기.
스트라우트가 생각하는 가족은 뭘까. 사랑한다고 착각해서 서로 몸을 부딪고 결혼을 해 두 명 다 스스로 지옥의 구덩이로 들어간다. 1930년 더하기 빼기 2, 3년생으로 보이는 올리브 키터리지 세대는 결혼생활 내내, 여성도 경제생활을 할 경우마저 더 과도한 가사노동의 의무가 주어지고 대신 바가지 박박 긁을 수 있는 권한 역시 확보한다. 부부는 서로가 모르고 있기를 바라며 다른 여성이나 남성을 흠모하기도 하지만 적절한 견제를 하거나 가정의 유지를 위해 모른 척 지나기기도 한다. 이게 1970년대식이었다. 서로를 향한 웬수 상태로 숱한 세월을 보냈음에도, 어느 순간, 이게 사랑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또 배우자가 먼저 세상을 뜨면 곧바로 지옥이 다가올 거라는 걸 깊이 인식하게 되고, 둘 가운데 한 명은 어김없이 이 지옥을 구경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한 세상이 왔다가 유전자를 전하고, 간다.
올리브의 자식 세대는? 이 세대가 작가와 비슷한 연령대로 보인다. 이들은 만나자마자 화르륵 불타오르고 생각난 김에 즉각 결혼해서 사랑 한 번 진하게 한 후, 또다시 화르륵 불같은 싸움 한 번으로 이혼해버리고 두 번째, 세 번째, n번째 결혼을 저지르는 유목민의 삶. 마음을 둘 정처 없는 대도시 지향으로, 전쟁을 겪은 완고한 부모(세대)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지우지 못하고 앙금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간단히 얘기하면, 사실 간단하게 말한다는 게 거칠게 단정한다는 거하고 비슷한 말이지만, 무뚝뚝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덩치 큰 노인 올리브의, 누구나가 다 공감할 수 있는 회상과 안타까움과 아쉬움과 질투와 위안을 얻기 위한 안간힘 같은 것을, 매우 감각적인 문장으로 써내려감으로써 더욱 더 공감할 수 있게 마련한 뷔페다.
첫 번째로 실린 <약국>은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올리브와 헨리 키터리지 부부와 아들 크리스토퍼를 중심으로 이후에 등장할 인물들이 은근히, 그냥 지나치듯 소개하고 있다. 올리브의 아버지는 우울증을 심하게 앓다가 입천장을 향해 권총을 발사해 생을 마감했고, 아버지의 우울증 유전자 일부가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전해졌을 수도 있다는 걸 마음 속으로 걱정하고, 약국을 운영하는 남편 헨리가 유난히 종업원 데니즈에게 정을 주는 것이 매우 아슬아슬하다고 신경을 쓰는 반면, 매일 자신과 아들을 학교에까지 태워 왕복해주는 동료교사 짐 오케이시를 향한 미묘한 끌림, 그것을 넘은 호감 이상의 것을 즐긴다. 짐 오케이시가 운전 중에 가로수를 정면으로 박아 죽어버리자, 부부 침대에 누워 짐 오케이시를 위해 눈물을 펑펑 흘리는 올리브에게 헨리는 이렇게 묻는데,
“올리브, 당신, 날 떠나지 않을 거지, 그렇지?”
올리브는 얼른 수건에 손을 닦으면서 대답한다.
“아, 또 무슨 소리야, 헨리.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니까.”
이들 중 적어도 한 명은 벌써 알고 있었다. 배우자가 세상을 뜨면 자신 앞에 곧바로 고독이라는 이름의 지옥문이 열린다는 것을.
사람 사는 이야기의 분식. 야박한 말 같지만, 문학이 별 거냐. 사는 이야기를 분식, 메이크업 하는 일이 문학이지. 사는 모습에서 독자에게 공감과 감동을 줄 수 있는 순간을 포착해 채집하고 이를 적절하게 메이크업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위대한 별은 아니지만 밤하늘에 잔잔하게 빛나며 오래 떠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