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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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 클레지오는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해 두 개의 언어를 다 모국어로 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의 <섬>이란 우리말 제목으로 출간한 <검역: La Quarantaine>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 마다가스카르 동쪽 9백 킬로미터 떨어진 먼 바다에 위치한 모리셔스였다. 지금 이름으로 모리셔스 공화국. 영국의 브리스톨 대학과 프랑스의 니스 문학전문대학에 다닌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에 이어 식민 지배를 하던 영국이 모리셔스에 부당한 물리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데뷔작 <조서>를 포함해 이후 모든 작품을 프랑스 문자로 써서 노벨문학상까지 받는 세계적 소설가가 된다.
  르 클레지오의 위키백과 내용을 보면 18세기에 선조가 브르타뉴에서 모리셔스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독자가 그걸 굳이 알 필요는 없지만 모리셔스에서 살던 집안이 부계인지 모계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허기의 간주곡>을 읽어보면 모계는 모리셔스 발음이 확실하게 섞인 이주민 출신이고, 부계는 적어도 한 시절이나마 모리셔스 인근의 프랑스령 레위니옹과 관계가 있던 것 같다. 그러나 소설은 픽션이고, 작가 역시 이 작품이 어머니와의 화해를 위한 작품이지만 허구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하느냐 하면, 이이의 대표작 <황금물고기>에서 주인공이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려 하고, <사막>은 끝내 사막을 벗어나지 못하고 도시의 경계에서 기름종이로 만든 루핑 집에 머물러야 하며, 모리셔스 섬을 향해 출발했지만 배에 전염병이 돌아 방역을 위해 거의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에 하선한 에피소드를 그린 <섬> 등,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아서였다. 물론 프랑스 작가들 가운데 과거 프랑스 식민지 출신 아프리카인이 고향을 떠나 프랑스에 도착하는 이야기를 매력 있게 쓴 작가도 있지만 (즉각 미셸 투르니에의 <황금구슬>이 떠오른다) 르 클레지오는 여태까지 내가 읽은 여섯 편의 장편과 작품집이 <조서>를 빼고 다 아프리카와 연결이 돼 있다. 그러니 작가의 아프리카에 대한, 더 넓게 이야기하면 ‘길’에 대한 집착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출생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 르 클레지오야말로 여행광이라고 불려 마땅한 인물이기도 하고. 이 <허기의 간주곡>도 서울에 거주하고 있을 당시 쓴 작품이라 해서 우리에게 관심을 받기도 했단다.

 

  원 제목 <Ritournelle de la faim>을 우리말로 <허기의 간주곡>이라 붙였다. “ritournelle”은 “협주곡의 독주 부분을 앞두고 반복해 연주하는 총주” 또는 “빠른 3박자 무곡”이라고 한다. 반면에 이 단어를 불-한 사전에서 찾으면 “17세기 오페라의 간주곡”이라 나와 있어서 그냥 <허기의 간주곡>이라 쓴 거 같다.
  그런데 우리말 ‘간주곡’은 프랑스어 ritournelle, 또는 이탈리아어 ritornello와는 달리 흔히 오페라에서 장면전환 등의 짧은 사이를 보완하기 위한 ‘interlude'나 ’intermezzo'를 의미한다. 유명한 곡으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들 수 있겠다. 사실 ‘ritournelle’를 우리말, 그것도 제목으로 뽑자면 애로가 여간 아니겠지만 독자들은 애로가 있건 없건 신경 쓰지 않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간주곡’은 아니다.
  ‘허기’가 무엇인가. 배고픔이지 뭐. 2002년 한일월드컵 시절에 우리나라 축구감독 거스 히딩크가 늘 말한 “우리는 배고프다.”가 정말로 위장이 비어서 그랬던 건 아니지만(유상철 감독, Requiescat in Pace!), 이 책에서 말하는 ‘허기’는 전쟁 중 물자부족으로 인한 극도의 굶주림, 냄비 속에서 운명을 다한 개와 고양이 때문에 파리 시내에 반려견, 반려묘의 씨가 말랐다는, 이런 굶주림도 있으나, 어린 시절 반드시 지어질 것이라고 꿈꾸었지만 결코 지어지지 않았던 연보라색의 집도, 철없는 아버지 알렉상드르가 꿈꾸었던 사하라 횡단철도 건설 같은 것 등, 특정한 것을 하염없이 기다리면서 가슴 속에 느끼는 것도 ‘허기’일 수 있고, 죽음의 침상에서 완벽한 슈트와 왁스로 광을 낸 구두를 신은 채 “죽는 게 힘들구나. 오래 걸려…, 너무 오래 걸려.”라고 한탄하는 어진 종조부 솔리앙 씨에겐 죽음마저 허기일 수 있는 것.
  세상 살아가는 일이 다 이런 허기의 연속이다.
  이걸 느낄 즈음, 책 속에선 중요한 음악 하나가 등장한다. 라벨의 <볼레로>. 1928년 무용가 이다 루빈슈타인의 의뢰로 모리스 라벨이 작곡한 스페인 3박자 춤곡. 에필로그와 비슷한 형식을 담은 끝부분에 작가인 듯한 화자의 어머니, 책의 주인공인 에텔 브룅이 니진스키가 안무하고 루빈슈타인이 춤을 춘 초연을 보았단다. 이 현장을 당연하게 보지 못한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다 루빈슈타인과 무용수들은 광기어린 열정에 사로잡힌 꼭두각시들이다. 플루트, 클라리넷, 호른 색소폰, 바이올린, 북, 심벌즈, 팀파니, 모든 악기들은 휘어지고, 끊어질 정도로, 질식할 정도로, 현과 소리를 산산조각낼 정도로, 세상의 이기적인 침묵을 깨부술 정도로 팽팽히 긴장되어 있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프랑코가 내전을 시작할 때부터 2차 세계대전이 ‘적어도 프랑스 땅 안에서는’ 끝날 때까지다. 에텔이 열두 살 경부터 스무 살이 되어 아버지 알렉상드르를 매장하고, 어머니 홀로 파리가 아닌 니스에 남겨둔 채 아버지끼리 레위니옹에서 알고 지내던 영국인 로랑 펠드와 결혼해 캐나다로 떠날 때까지, 아니지, 모르긴 몰라도 에텔과 로랑의 나머지 삶, 이들 사이의 허구적 아들일 수 있는 장-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를 넘어 세상의 모든 인류가 멸종할 때까지 호모 사피엔스는 공복상태를 포함한 숱한 허기를 경험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한 분기가 될 만한 사건인 전쟁과 학살 등을 겪으면 마치 볼레로의 뒷부분처럼 모든 악기가 다 모여 ‘반복해 연주하는 힘찬 총주: ritournelle'로 '빠른 3박자의 춤: ritournelle’을 추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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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6-11 11: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태어난 곳과 자란 곳, 자신의 뿌리가 되는 땅과 적대적 애증이라고 할 수 있는 관계를 가진 곳에서의 활동 뭐 이런게 다양하게 섞이다 보면 문학작품에 독특한 시각을 부여할 수 있을 수 있을듯해요. 유럽쪽 작가 등 중에 유난히 이런 경력을 가진 작가들이 많은 것과, 미국 작가들 중에 이민자 출신의 탁월한 작가들이 많은게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르 클레지오도 항상 관심작가로만 올려두고 책은 못봤는데 이런 배경을 가진 작가인건 덕분에 처음 알았습니다.

Falstaff 2021-06-11 12:13   좋아요 3 | URL
르 클레지오, 저도 이번에 검색해 알았는데, 번역해 나온 것이 꽤 많더군요.
저도 더 읽어봐야겠습니다.
고향과의 적대적 애증. 멋있는 말입니다.
저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전형적인 서울 깍쟁인데, 이제 서울이 싫습니다.
물론 그래서 만날 술 마시는 건 아니고요. ^^;;

stella.K 2021-06-11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르 클레지오가 노벨상을 받기 전 우리나라에
교환 교순가 해서 잠깐 머문 적이 있더군요.
이화여대에서 강의했던가 뭐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가 <혁명> 출판 기념으로 와서
강연도 하고 사인회도 가졌죠.
저도 사인본을 가지고 있는데 그후 얼마 안있다 노벨문학상을 받더군요.
작가의 책이 좀 어렵다고 해서 아직도 쳐다보지도 않고 있습니다.ㅠ

동향이시네요. 저도 서울인데...ㅋㅋ

잠자냥 2021-06-11 15:43   좋아요 4 | URL
<황금물고기>는 전혀 어렵지 않고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르 클레지오 시작하신다면 <황금물고기> 추천합니다.

Falstaff 2021-06-11 15:53   좋아요 3 | URL
옙. 그랬다더군요. 제주에서도 르 클레지오가 다녀간 카페가 유명세도 타고 뭐 ㅋㅋ
잠자냥 님 말씀마따나 <황금물고기> 대박입니다. 그건 소설 독자 필독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전 <섬>과 <사막>도 팍 꽂히던 걸요. ^^

독서괭 2021-06-11 16:14   좋아요 3 | URL
오호 황금물고기 주섬주섬...

붕붕툐툐 2021-06-11 17:50   좋아요 2 | URL
황금물고기 주섬주섬 222222

잠자냥 2021-06-11 1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 님이랑 다부장 님 요즘 허기지세요?
<호프만의 허기>에 이어 <허기의 간주곡> ㅋㅋㅋㅋㅋ 그렇다면 저는 <굶주림>으로 가겠습니다!

Falstaff 2021-06-11 15:54   좋아요 1 | URL
아이고, <굶주림>은 느므느므 궁상스러워요.
그것도 정도가 있지 못 먹어서 머리칼이 뭉텅뭉텅 빠지는 꼴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읽으셔야 허겄습니까. 흑흑.....

잠자냥 2021-06-11 15:55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 이미 읽었어요.ㅋㅋㅋㅋ 징글맞은 책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