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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드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김현철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멕시코의 외교관 라파엘 푸엔테스의 아들 카를로스는 파나마의 수도 파나마시티에서 출생한 멕시코 작가다. 이 양반이 재미있는 작품을 많이 썼다. <아우라>, <의지와 운명>은 민음사 세계문학 시리즈로 나왔고, 원제목이 <다이애나>이지만 우리나라엔 <미국은 섹스를 한다>라는 꼴불견의 제목으로 출간한 것과, 옴니버스 소설집 《모든 행복한 가족들》, 그리고 단편소설 단행본 <블라드>는 절판 상태. 이 다섯 권이 내가 읽은 카를로스 푸엔테스 전부이며, 모두 재미있다.
이 책, <블라드>. 한여름 밤에 읽기 딱 좋은 책. 1인칭 화자는 이브 나바로. 40대 초반으로 법무법인의 변호사 가운데 최고 선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법인의 대표 엘로이 수리나가는 올해 나이가 무려 여든아홉 살로, 긴 세월 동안 멕시코 정치인들의 비위를 맞추며 자기 분야에서 승승장구한 강직하고 권위적인 인물이다. 60년 동안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교묘하게 위기를 빠져나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공직자들과는 어떠한 적대관계도 만들지 않을 만큼 효율적인 전문가의 태도를 견지해왔는데, 최근 일 년 동안은 자기 집에서 나오지 않고 오직 전화로 지시하고 가끔 변호사를 집으로 불러 업무에 관한 논의를 해왔음에도 회사엔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때보다 더 큰 존재감을 불러올 정도의 장악력까지 있는 멕시코 최고 법무법인의 대표변호사이다.
그런 돈 엘로이가 화자인 나바로를 집으로 불러 조금은 사적인 업무를 지시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자기와 나이가 같으며 소르본에서 함께 법을 공부한 오랜 친구가 전쟁과 혁명의 와중에 파시스트들과 공산주의자들에게 헝가리와 루마니아 국경 지역의 거대한 땅을 빼앗긴 몰락한 귀족인데 이 친구가 멕시코시티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한적한 곳에 보금자리를 구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간 하도 당한 일들이 많아 주변 공간이 넓고 침입자들을 방어하기 쉬운 지형이면 좋겠다고 한다. 이것 말고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요구사항이 몇 개 있다. 집 뒤쪽에 절벽이 있어야 하고, 집과 절벽 사이에 터널을 뚫어달라는 것. 그리고 이사하기 전에 반드시 창문을 모두 폐쇄해달라 하는 것으로 보아 빛에 민감한 알레르기 증상이 있는 것으로 여길 수밖에.
돈 엘로이가 나바로에게 일을 부탁하는 건 나바로의 아내 아순시온이 부동산 중개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어서이기도 하단다. 나바로와 아순시온 사이에는 모든 운동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던 활기찬 아들이 열두 살에 바다에 빠져 죽은 일로 금이 갈 뻔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열 살이 된 딸 마그달레나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다. 아순시온은 완벽하게 아름다운 몸매를 갖고 있고(푸엔테스의 여자들은 거의 예쁜 얼굴과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긴 하지만), 자식이 죽고 난 다음 자주 발생하는 극심한 부부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각별한 속궁합을 들 수 있었다. 아순시온은 어둠이 깔리기만 하면 침대 위의 불도마뱀으로 변신한다고 한다. 그것참. 침대 위의 불도마뱀? 또 있다. 타오르는 얼음 덩어리. 크, 좋을 거 같지? 불도마뱀도 타오르는 얼음덩어리도 하루 이틀이지, 하고한 날 침대 위에 불도마뱀이 몸부림치고, 얼음덩어리가 불타오르면 그걸 어떻게 견디는지, 나바로가 불쌍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 뭐 그렇긴 하다.
고산지대에 자리 잡은 멕시코시티에 절벽 아래의 저택을 고를 수 있어서 드디어 계약을 하고 절벽까지 터널을 뚫는 공사도 마치고, 창문도 다 막은 다음, 돈 엘로이의 소르본 동창 블라디미르(약칭 블라드) 라두 백작이 첼리니가 조각한 페르세우스의 얼굴을 한 곱사등이 하인 보르고와 열 살짜리 딸 미네아와 함께 입주를 했다. 권리 소유 등기서류에 서명을 받기 위해 나바로가 저택을 방문해 라두 백작과 저녁 식사를 한다. 메뉴는 동물의 내장. 콩팥과 간, 허파, 염통, 소장, 대장을 갖은 향신료를 첨가해 야채와 함께 요리한 것. 창문처럼 투명하고 기다란 유리 같은 손톱과 짙은 검정색 선글라스를 낀 백작은 변호사의 아내 아순시온이 집을 얻어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순시온에게 전해주시오. 그녀의 향수 냄새가 아직 이곳에 남아 있다고. 이 집의 공기중에 떠돌고 있다고.”
백작은 적갈색 가발을 하고, 감정표현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가짜 콧수염을 달았으며 성형수술을 여러 번 받은 듯한 얼굴과 상처가 많아 작아진 귀를 가지고 있다. 귀족보다는 집시나 배우, 예술가에 가까운 옷차림을 한 백작과 즐겁지 않은 식사와 유쾌하지 않은 대화는 나바로에게 선뜻한 느낌이 들게 만든다.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나바로는 얼른 식사를 끝내고 서류에 서명을 받자마자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여느 때보다 훨씬 뜨거운 밤. 아순시온은 전보다 훨씬 더 뜨거운 침대 위의 불도마뱀으로 변신해버린다. 이윽고 도래한 진한 현타. 나바로는 침대 밑으로 손을 뻗어 밤에 신는 실내화를 찾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침대 밑으로 손을 뻗었다가 깜작 놀라 곧장 거두었다. 침대 밑에 놓인 다른 손을 건드렸던 것이다. 길고 매끄럽고 유리 같은 손톱이 달린 차가운 손. 그 차가운 손이 발목을 힘껏 잡아채 유리 손톱을 발바닥에 쑤셔박으며 걸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거라. 자거라. 아직 이른 시간이다. 서두를 것 없다. 자거라, 자거라.”
그리고 나바로는 누군가가 방을 떠나는 기척을 느꼈다.
올 여름, 얼마나 더울 것인지 모르겠지만 이 책으로 하루는 서늘하게 보낼 수 있을 터. 다만 절판이라 헌책방을 뒤져야 한다는 것이 아쉬울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