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언어의 한 현상 형태로, 그 본질상 대화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유리병 편지」 같습니다, -분명 희망이 늘 크지 않은-믿음, 그 유리병이 언젠가, 그 언젠가에, 어쩌면 마음의 땅에 가 닿으리라는 희망을 품고 유리병에 담아 띄우는 편지요, 한 편 한 편의 시들도 이런 식으로 도중에 있습니다. 무언가를 마주해 있는 겁니다. 무얼 마주해 있느냐고요? 열려 있는 것, 점령할 수 있는 것을 향해서, 어쩌면 말을 건넬 수 있는 「당신」을 향해서, 말을 건넬 수 있는 현실 하나를 향해서요.

-223쪽, 파울 첼란 「죽음의 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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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궁금했다. 재능은 누군가를 훨씬 앞선 곳에서 혹은 훨씬 높은 곳에서 출발하게 만드는 듯했다. 재능이 있다면 더 열심히 쓸 참이었다. 만약 없다면 글쓰기 말고 다른 일을 열심히 해볼까 싶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어른은 나에게 재능이 없다고 말했다.

스물아홉 살인 지금은 더이상 재능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게 된 지 오래다. 꾸준함 없는 재능이 어떻게 힘을 잃는지, 재능 없는 꾸준함이 의외로 얼마나 막강한지 알게 되어서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이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 이슬아, 부지런한 사랑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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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복잡할 때
에린남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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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기,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가 서 있다. 자신은 어디에 가까운지 파악하고 그 뒤에 가서 서보라고 한다면 나는 여지없이 맥시멀리스트 뒤로 갈 것이다. 장서가로 사는 한 짐이 많은 삶을 피할 길이 없다. 책만큼은 평생 덕질하겠지 싶어서.

책은 내가 덕질해 온 분야 중 가장 물성이 높은 분야다. 전자책도 많이 읽지만 종이책에 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물성이 낮았던 분야는 무엇일까. 뜻밖에도 야구였다. 8년 간 삼성라이온즈 팬으로 살면서 내게 남은 건 마킹 된 유니폼 한 벌, 싸인볼, 팬북, 마스코트 피규어, 직관 티켓이 전부다. 1년이 갓 넘은 공연 덕질에 비하면 햇수 대비 소량이다. 공연 덕질로 말할 것 같으면 굿즈, 없어서 못 산다. 내줘요 동그란 거(OST 혹은 DVD앨범)...

신발, 옷, 악세사리, 화장품은 욕심이 없어서 물건이 없는 편이라 이쪽으론 이야기 거리가 없다. 대신 문구류를 좋아해서 연필과 만년필과 노트를 조금씩 갖고 있다.




2. 어느 날 1200자 책장을 두 개나 들인게 무색하게, 책을 바닥에 쌓기 시작하면서 물건 정리에 심각성을 느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사 모은 거지? 그때부터 비우기에 관심이 생겼다. 하루아침에 미니멀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라도 덜 맥시멈할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구매해둔 태미 스트로벨의 『행복의 가격』을 다시 읽었고, 유튜버 Erin Nam의 영상을 챙겨보았다. 후자는 책의 출간으로 이어졌는데, 활자를 읽으며 비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라는 제목 앞에서 깨달았다. 비우기는 이렇게 직관적인 이유에서 시작하는 거구나. 내 상황을 대입해 이야기하면 '1200자 책장이 두 개나 있는데 바닥에 책이 쌓이기 시작해서 비우기를 시작했다'가 될 것이다. 그저 정리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정리를 시작하게 되었고, 정리하는 일이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결국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였기 때문에 채널을 구독했고, 그간 업로드 된 영상을 꾸준히 챙겨봤으며, 이야기를 한데 모은 이 책을 찾게 된 것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이 부분이다.


몇 달 동안 쉼 없이 물건들을 비우면서, 오랫동안 쓸모없는 물건을 ‘굳이’ 짊어지고 지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깊은 서랍장 안쪽에 있던 선글라스와 손목시계가 그랬고,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옷이 그랬고, 먼지만 소복이 쌓여 있는 전자제품 상자가 그랬다. 자연스럽게 짐이 된 그 물건들은 알게 모르게 내 삶과 생활을 무겁고,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고단하게 느껴졌다. 내 공간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물건들은 문득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들리지 않는 잔소리를 해댔다. “나 빨리 치워야 할 걸? 너 지금 쉴 때가 아니야. 얼른 청소하고 설거지해!”

필요 없던 물건들이 천천히 사라지자 생각 이상으로 삶이 쾌적해졌다. 우선 집안일의 압박감이 줄었다. 또 쌓여 있던 물건처럼 묵은 감정 역시 사라졌다. 짐이었던 물건을 비운 것뿐인데 이유 없이 복잡하던 마음까지 해결된 것이다. (p.139)



정리를 시작하며 깨달았다. 물건을 정리한다는 건 비단 물질적인 일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 물건에는 지난 시절의 추억이, 저 물건에는 끝까지 쓰고 버리겠다는 고집이, 그 물건에는 충동구매로 얼룩진 후회가 깃들어 있었고 물건과 함께 그 마음들을 비우는 것이 '정리'의 완성이었다. 고로 나는 방에 물건을 쌓아두는 동시에 내 마음의 짐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인상 깊었던 건 이 구절.


물건은 물건일 뿐


물건은 나에게 편리함을 주고, 삶의 질을 높여주기도 한다. 일의 능률을 높여주거나 쾌적한 생활을 도와준다. 하루에도 수십 번 물건들에 의지하고 도움받으며 살아간다. 물건 없는 생활을 꿈꾸지만, 사실 물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전보다 반 이상은 줄어든 물건으로 그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참 대견하다. 


같은 미니멀 라이프라도 사람마다 각자 더 중요시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유난히 물건 비우기에 집착했다. 무엇보다 ‘돈의 힘’을 알아버린 어린 시절부터 생긴 물욕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우는 기쁨을 알고, 비워진 공간에 물건이 아닌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내 생활을 천천히 돌아보려는 진중한 마음가짐 같은 것들이 채워졌다. 쉽게 물건을 사던 습관도 자연스럽게 고쳐졌다. 사실 나에게는 그게 가장 필요했다. 나는 오랫동안 물건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조바심을 버리고, 가진 물건으로 나를 평가하는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이제서야 물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확실해졌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절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물건이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기억하고, 추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물건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내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일의 능률을 위해, 즐거운 시간을 위해 필요하면 갖는다. 열심히 사용한다. 충분히 썼다면 비운다. 물건의 용도는 그뿐이다.

(p.205)


이에 대한 내 생각은 반반이다. 물건은 나를 대변해주기도 하지만 대변해주지 않는다. 물건은 내 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취향의 소유자인지 말해주는 점에서 일부는 대변할지 모르지만, 물건이 곧 그 사람은 아니기에 대변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분이 우울할 날엔 물건을 사며 기분을 풀던 때도 있었는데, 정리를 시작한 뒤로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오히려 물건을 사지않게 되었다. 물건 때문인지 소비를 했기 때문인지 기분이 일시적으로 달라지긴 하지만, 그렇게 사들인 물건으로 다시 기분이 울적해졌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제목을 곱씹어본다. 물건을 물건일 뿐이다.



3. 오늘은 외출하는 김에 중고매장에 책을 판매하기 위해 두 권을 챙겨나갔다. 두 권뿐이라 택배로 보내기엔 아까워서 선뜻 판매하지 못했던 책들이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기 위해서 두 권을 들고 나오다니. 친구가 그런 나를 보고 정말 변한 것 같다고 했다.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내내 들고다니다 집에 오는 길에야 비울 수 있었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이 책들을 찾는 사람이 많을 때 비울 것. 이것도 정리를 시작하고 배운 것 중 하나다. 최근에는 tvN의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를 통해 많이 배우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비우면 공간을 재배치 할 수 있고, 재배치 하고나면 원했던 것이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이 탈바꿈한 공간이고, 미안함을 덜어낼 수 있게 해준 시간이고, 사랑을 챙기느라 좁아진 꿈에 대한 위로가 그것이다. 내가 시작한 정리는 드라마 같은 변화를 맞이할 수는 없겠지만, 계속해서 정리 일기를 쓰고 불필요한 물건을 늘리지 않으며 나눌 수 있을 때 나누는 일상을 계속할 것이다. 나의 정리 일상이 누군가에게 "야, 너도 정리할 수 있어."하는 목소리가 될 수 있다연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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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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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년은 말을 더듬는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걱정해 언어 교정원에 보냈다. 2년 전에 간 언어 치료소와는 달랐다. 그때 담당 선생은 정말로 소년을 치료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곳의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웅변 학원과는 다르단다. 말을 잘하게 해 주는 곳이 아니야. 말을 하게 해 주는 곳이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할 순 없는 법이거든. 용기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용기를 내라고 할 수 있지만 용기란 게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에겐 그렇게 말해선 안 돼. 당연하지. 용기가 없으니까. 힘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도 이상해. 힘이 있었으면 힘을 냈겠지. 안 그래?

(p.10-11)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치료 과목은 이렇다. 말더듬증 치료. 자신감 향상. 스피치. 성격 개조. 인생 연구. 대화의 기술. 청소년 상담. 소년은 언어 교정원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잘하지 못해 아무거나 다 하는 능력 없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원장은 생각에 빠진 소년을 '강의실 A'로 데려갔다. 정상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원장은 네임 펜으로 이름표에 뭔가를 쓴 뒤 소년의 목에 걸었다.

"무연입니다."

"반갑습니다. 무연."

소년의 이름표에는 '무연'이라 적혀있었다. 둘러보니 사람들이 모두 이름표를 달고 있었는데, 이름이 죄다 이상했다. '루트', '마야코프스키', '핑퐁', '모티프', '처방전', '곰곰이'. 알고보니 최근 가장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이름을 짓고 한 달간 그 이름으로 사는 거였다. 말을 안 하거나 노트를 쓰지 않는 사람은 원장이 직접 별명을 지어 준다.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원장의 말에 당연하게도 소년은 거의 소개를 하지 못했다. 무연중을 다닙니다, 라고 말하려 했지만 무연이라는 단어부터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소년의 이름은 그렇게 '무연'이 되었다. 발음도 제대로 못 하는 단어로 이름을 지어 주는 걸 보니 원장이란 자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이 책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열네 살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 다니며 언어적, 심리적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인데, 이 책의 분위기를 소개하기 위해 도입부의글을 조금 풀어보았다.

2. 올해 초반에 내게 난청과 이명(耳鳴)이 찾아왔고, 이명과 상반기를 함께 보내는 동안 말수가 크게 줄었다. 업무에 관한 대화를 할 땐 문제가 없었지만, 모처럼 지인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종종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대화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 길어질 때, 단어를 더듬는 불특정한 상황이 오면 매번 당황했다. 말을 좀 더듬으면 어때, 라고 생각했으면 괜찮았을까. 말을 더듬는 일은 말을 더듬으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이어져서 스스로를 깨나 괴롭혔다.

책이란 게,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것 같아도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만난 것도 그랬다. 민음북클럽에서 진행된 '손끝으로 문장읽기' 의 이번 주제가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였고, 누군가의 피드에서 이 책을 추천받은 것이 기억나 골랐던 것인데 타이밍이 잘 맞았다. 이 책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말하는 것에 대해 크고 작은 고민을 하고보니 주인공에게 좀 더 몰입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자. 언어 교정 시간 중 '자기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는데, '나'는 우주에서 가장 싫은 국어(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나의 말더듬증을 고쳐 주는 것을 국어를 가르치는 자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은 듯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 교정원에서 친구가 된 루트와 곰곰이는 그런 국어에게 복수하자는 말을 꺼낸다.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복수한다는 걸까? 복수하는 걸 도와준다고? 무슨 수로? 나는 결국 국어에게 한 번 더 괴롭힘을 당하고 나서야 복수 해달라고 부탁한다. 학교에 국어가 있다면 집에는 엄마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애인이 소년을 괴롭힌다.

집과 학교, 안팎으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는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해 읽다보니 금세 완독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 마침내 맞이하는 결말 앞에서 기뻐했고,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다니는 식구들 한 명 한 명에 정이 들어버린 나머지 헤어짐이 아쉬웠다.159쪽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소설이지만 작품이 주는 따뜻함은 결코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소설이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구절을 덧붙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이이모, 이모는 왜 살아요?

이모는 웃었다. 그리고 나를 껴안아 줬다. 왜 사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아들. 알려 줄 테니까 잘 기억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그냥 살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 그냥 사는 게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야. 다른 이유는 없어. 돌멩이가 왜 딱딱한지 아니? 왜 나무는 말을 못 하게? 몰라. 나무도 돌도 몰라. 사람도 그래. 사는 데 이유는 없어.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사는 건 피곤해지고 슬퍼진단다.

(p.102)




이모는 두 종류의 라켓을 보여 줬고 둘 중 하나를 골라 보라고 했다. 하나는 공격에 유리하고 주걱처럼 둥글고 평평한 라켓은 방어에 능하다고 했다. 나는 주걱을 골랐다.

음, 이건 셰이크핸드야. 초보자들이 잡기 가장 좋은 라켓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선수들도 선호하는 라켓이야. 이상하게도 탁구는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선수보다 셰이크핸드를 쥐고 방어하면서 경기하는 선수들이 더 많이 승리해. 세계적인 선수들도 대부분 셰이크핸드고. 어, 잘 새겨들어. 잘 방어하는 것, 공격하지 않더라도 일단 부드럽게 넘기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계속 잘 방어하는 건 공격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거든.

(p.79-80)






이이이모, 이모는 왜 살아요?

이모는 웃었다. 그리고 나를 껴안아 줬다.

왜 사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아들. 알려 줄 테니까 잘 기억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그냥 살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 그냥 사는 게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야. 다른 이유는 없어. 돌멩이가 왜 딱딱한지 아니? 왜 나무는 말을 못 하게? 몰라. 나무도 돌도 몰라. 사람도 그래. 사는 데 이유는 없어.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사는 건 피곤해지고 슬퍼진단다.

(p.102)



여기 나오는 아들이 엄마에게 복수하려고 평생 칼을 갈고 또 갈았는데 이렇게 마지막에 용서하기로 했다는 게 흐름상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왜 마마말이 안 돼요?

넌 그게 돼?

…….

너도 안 되면서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고 싫지만 좋을 수 있으니까. 복수하고 싶으면서 용서하고 싶은 것도 가능하지.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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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운동을 하면서 체중계에 올라가지 않는다. 그 숫자는 내가 운동으로 얻고자 하는 것과 무관하다. 그 숫자는 나를 정의할 수 없고, 나의 아름다움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조금만 살이 쪄도 잘 맞는 여성복을 찾기 힘든 한국의 성차별적 의류 시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거워지는 것이 두렵지않다. 당장은 쉽지 않더라도, 점점 더 많은 여성이 ‘미용 체중‘ 같은 헛소리를 시원하게 무시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이 정한 ‘정상‘ 구간에 맞지 않는 나를 자랑스러워하자. 개인의 ‘정신 승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의 몸이 위축되지 않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한 여성이 자기 자신을 옹호할 때, 그는 사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주장도 펼치지 않으면서 모든 여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마야 엔젤루의 말처럼.

* 《여자다운 게 어딨어》(에머 오툴 지음, 박다솜 옮김, 창비, 2016)에서 재인용. - P70

친구들이 운동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여성의 성장 서사다. 꼭 성실하고 꾸준하게 운동하는 얘기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근근이 운동을 하는 얘기도, 이런저런 운동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얘기도, 심지어 운동을 얼마 안 돼 그만둔 얘기조차도 훌륭한 서사다. 실패를 인정하고, 실패를 딛고, 자기 자신을 위해 다시 도전하는 여성들의 얘기.
더 많은 여성이 스스로가 가장 즐거워하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다. 주변 사람에게 ‘요즘, 나 이런 운동 한다!‘고 자랑하고 떠들었으면 좋겠다. 운동을 주제로 수다만 떨어도 이렇게 재밌는데, 같이 운동하면 얼마나 더 재미있을까? 여성들이 더 많은 운동장을 점령했으면 좋겠다. 세상은 넓고 운동은 많다. 그리고 모든 운동은 여성들의 운동이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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