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내리는 자세로
엄청나게 견디고 있다
이번 삶이 날 터뜨리진 않았지만
자꾸 쏘아올릴 것 같아서

- 권민경 시집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몸과 마음의 고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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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왜 사는가에 대한 답을 놓지 않는다면 자신만의 길을 걸을 수 있고 삶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김철종, 《미래를 여는 핵의학과 함께 핵의학 외길 반세기》, 새한사업, 2014, 7쪽)

잠시 책탑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내가 사는 까닭은 뭘까. 그야 자명하다. 내 삶은 실비아 플라스와 마찬가지로 의문형이다.

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많이 써보면 작품을 쓸 수 있을까? 작품을 잘 쓸 때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을 해야 할까?

(타니아 슐리, <실비아 플라스>, 《글쓰는 여자의 공간》, 이봄, 2016, 118쪽)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산다.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그런고로 나는 지금 ‘살아 있다’. 지금 이 순간 또 한 번 작품을 잘 쓰기 위해 책탑을 쌓는다. 누가 뭐라 하든 간에 삶을 걱정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기 위하여 아마 나는 계속 덕후의 삶을 살 듯하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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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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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하나뿐인 주인공 한아는 이런 사람이다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 시의 6호선에서 눈에 띌 정도지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의 소유자자주 아무렇게나 늘어진 머리에직접 짠 니트와 걸을 때마다 편안하게 접히고 움직이는 긴치마를 입은 사람의상디자인과를 졸업했고수선과 업사이클링 그 어느쯤에서 지구를 사랑하는 옷 가게 '환생'을 운영한다.


그런 한아에게 있어 최근의 고민은만난지 11년된 남자친구 경민이다경민이 가 있었던 캐나다 밴쿠버 근교에 미처 예상하지 못한 소형 운석이 떨어져 천체 관측중이던 시민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있었고한국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경민이 이상했다촉감이 개구리 같아서 개구리 채 친 것 같다며 먹지 않던 가지무침을 먹질 않나, 11년 동안 본 적 없는 표정을 짓질 않나여기까진 그러려니 했는데한아가 홍대입구역의 공중전화에서 누구나 다 아는 번호 111번을 누르게 만든 건 경민이 분리수거를 하던 어느날이었다.


"이건 플라스틱이야페트야?"


혼잣말을 하던 경민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고는 입에서 강렬한 빛줄기를 뿜었다그 빛은 경민의 손에 들린 일회용 음료수병을 핥았다순간이었지만 레이저처럼 강렬했고한아가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한아가 경민에 대한 의혹을 나날이 키워갈 무렵경민은 한아에게 청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한아의 친구 유리에게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는데제동이 걸렸다.


"나 생각할 게 좀 있어서며칠만 연락 없이 지내자."

 

경민은 청천벽력같은 한아의 말에 안절부절했다한아와 헤어진다니이제와 겨우 같이 있게 되었는데왜냐하면 경민은 그때와 다른 경민이었기 때문이다.


 


*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국드라마 '닥터 후덕분인지나는 한아와 외계인과의 로맨스에 거부감없이 빠져들었다겨우 두 대에 걸친 닥터를 보았을 뿐이지만닥터가 딱 그런 외계인이었기 때문이다외형은 사람이지만 속은 외계인인 존재.


"나는 안 될까처음부터 자기소개를 제대로 했으면 좋았겠지만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더 나은 방법일 것 같았어그래도 나는 안 될까너를 직접 만나려고 2만 광년을 왔어내 별과 모두와 모든 것과 자유 여행권을 버리고그걸 너에게 이해해달라거나 보상해달라고 요구하는 건 아냐그냥 고려해달라는 거야너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그냥 내 바람을 말하는 거야필요한 만큼 생각해봐도 좋아기다릴게사실 지금 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괜찮은 것 같아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야기들이 있으니까이거면 됐어."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데려간 국립공원에서 경민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생물이기는 하냐는 한아의 물음에 40퍼센트 정도는 광물이라고 대답하는 외계인아니 이전과는 다른 경민이우주가 아무리 넓어도 직접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2만 광년을 건너왔다니계속되는 이야기는 더 달달했다.


"넌 우주를 모르고 지구 위에서도 아주 좁은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도 이해하고 있었어나는 너의 선험적 이해를 이해할 수 없었어인간이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을 끊임없이 죽이고 또 죽이는 이 끔찍한 행성에서어떻게 전체의 특성을 닮지 않는 걸까너는 우주를 전혀 모르는데어떻게 우주를 넘어서는 걸까."


다른 경민이 제 별에서 본 한아는 엄청나게 일관된 사람이며 혼자 엔트로피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고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었다일관된 태도로 환경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인공 한아그런 한아의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다 사랑에 빠진 외계인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을 사랑이야기에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몽글몽글했다.


한아와 경민 주위에 사람들은 또 어떤가한아의 하나뿐인 친구 유리뮤지션 아폴로의 그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사는 주영한아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만 오로지 그 사랑만으로는 안 되었기에 우주로 떠난 진짜 경민까지 소설 속 인물에게 마음을 준다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었구나 다시금 깨닫게 해 준 멋있는 인물들이었다.


이 책을 올 여름 휴가지였던 여수와 순천에 머무는 동안 읽었다폭염으로 고생했지만 이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달달하고 말랑말랑했던 기억을 잊지 못할 것이다.



2019. 9. 1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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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규림일기
김규림 지음 / 비컷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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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언뜻 보면 일기장인지 책인지 헷갈릴 만큼 한 권의 공책처럼 보이는 책이 있다지난 도쿄규림일기도 그랬지만이번 책 뉴욕규림일기는 미국의 대표적인 노트라는 컴포지션 노트를 표지로 한 덕분에 더욱 공책 같은 느낌이 든다.

작년 이맘 즈음에 이 책을 샀는데사은품으로 컴포지션 노트를 받았다책과 나란히 두면 커다랗고 두꺼운 노트 한 권과 미니어처 노트 한 권을 가진 기분이 들었다문구인다운 발상에 즐거워하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서 내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프린티드 매터스(Printed Matters)’에 방문한 이야기였다만여 권이 넘는 아티스트들의 독립출판물을 파는 독립출판 전문서점어쩜 이렇게 다를까 싶을 만큼 다양한 형태와 주제의 책들은 다양성이 공존하는 뉴욕과 꼭 닮았다고 한다기성 출판사에서는 볼 수 없는 골 때리는 책도 많다는 서점.

내가 김규림 작가님의 책을 처음 만난 것 역시 독립출판물을 판매하는 동네 서점이었기 때문에프린티드 매터스에 관심이 갔던게 아닐까기성 출판에서 조금 벗어나면 이렇게 매력 있는 책들이 넘쳐나는구나하는 깨달음 속에 김규림 작가님의 책 로그아웃 좀 하겠습니다가 있었다.



프린티드 매터스 서점에 있는 책의 판형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보통은 네모난 형태로 생긴 걸 책이라고 하는데사실 아무도 그러라고 강요하진 않는다그런데도 우리는 늘상 하던 것과 고정관념에 스스로를 가둬버린다그 생각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결과물로 이어진다다양한 문화권에서 온 사람들이 섞여 사는 도시라 그런지눈치 보지 않고 각자의 개성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뉴요커들의 모습이 참 멋졌다고프린티드 매터스 서점의 책도 딱 그랬다는 표현에 이 서점이 궁금해졌다세상은 넓고많은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책이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나 역시 네모난 책의 판형에 갇혀있었던 것이 아닐까다양한 사람다양한 책을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하나만 더 이야기하자면브루클린 예술 도서관을 말하고 싶다이 도서관에서는 스케치북을 파는데그걸 채워 다시 갖고 와서 등록하면 예술 도서관에 자신의 책이 보관되는 시스템이란다무려 40,000권의 책이 꽂혀있다고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서가라니뉴욕에 가게 되면뉴욕 공립도서관과 더불어 프린티드 매터스 서점과 브루클린 예술 도서관에 가보고 싶다고 메모해두었다.



작가님만의 뉴욕 여행기만큼이나 매력적이었던 건 여행에 대한 생각이었다나도 여행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나 먹어야 할 것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다당시의 관심사에 맞춰 그 나라의 보고 싶은 걸 보고 그것으로 만족스러워한 여행기를 읽고 있으니 사무치게 부러웠다철저한 계획보단 허술하게 발길 닿는 대로 뉴욕을 여행하고나아가 쓰고 그린 이야기라니나의 지난 대만 여행이 떠올랐다철저히 계획하고 갔지만현지도 명절 연휴였던 탓에 허술하게 발길 닿는 대로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게 퍽 즐거웠다나의 여행도 여행자가 행복한 여행이었구나누군가가 아닌 스스로를 위한 여행이었구나이 책을 읽으며 다시금 느꼈다.



다음 여행에선 나도 규림일기처럼 아날로그한 기록으로 미래의 나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지소소하게 다짐하며 책장을 덮었다.



2019. 8. 30 기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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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글이고 인생은 인생이다. 인생을 글로,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순간은 인생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을 때다. 지구에서 떠나야 푸른 지구의 둥근 수평선이 보이듯이, 격렬한 인생의 사건들을 떠나야 가닥과 맥락이 보인다. 디테일이 뭉개진 지도가 보인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그때 살고 있는 인생이 있다. 인생에 대한 글은 마치 거울의 저편에 놓여있는 나처럼, 나와 닮았지만 나는 아니다. 인생을 닮았지만 인생은 아니다. 아침저녁으로 거울을 보듯, 우리가 인생 속에서 글 쓸 거리들을 찾아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합당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거울 속에 살지 않듯 글이 우리 인생을 살아주지 않는다. 밥 먹고, 잠자고, 걸어 다니고, 웃는 것처럼, 글 쓰는 것 또한 우리 인생의 작지만 생생한 한 부분을 이룰 뿐이다. - P67

작가의 삶과 작품이 아주 밀접하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끊임없이 그 거짓말이 정말일까? 물어왔을 뿐. 사실, 작가의 삶은 작가의 작품만큼이나 다양하다. 삶을 보며 작품을 가늠할 필요도 없고 작품을 기준으로 삶을 평가할 수도 없다. 작가의 삶은 작품의 땔감도 아니고 작품은 작가의 삶의 액세서리가 아니다. 작가의 삶 또한 하나하나의 작품처럼, 독자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삶은 더 특별한 이야기겠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의 천재성을 삶이 아니라 작품에 쏟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평범한 아저씨로 늙어가고 작품은 대단한 명작 목록에 속속 올랐을까. 그랬다면 그는 만족했을까. 아마도 전혀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욕망은 삶에 있었고, 그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남김없이 불탔다. 그래서 겹겹이 그에게 매혹당한다. 천재의 삶이 아니라 천재적인 삶이라서.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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