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복잡할 때
에린남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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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기, 미니멀리스트와 맥시멀리스트가 서 있다. 자신은 어디에 가까운지 파악하고 그 뒤에 가서 서보라고 한다면 나는 여지없이 맥시멀리스트 뒤로 갈 것이다. 장서가로 사는 한 짐이 많은 삶을 피할 길이 없다. 책만큼은 평생 덕질하겠지 싶어서.

책은 내가 덕질해 온 분야 중 가장 물성이 높은 분야다. 전자책도 많이 읽지만 종이책에 비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장 물성이 낮았던 분야는 무엇일까. 뜻밖에도 야구였다. 8년 간 삼성라이온즈 팬으로 살면서 내게 남은 건 마킹 된 유니폼 한 벌, 싸인볼, 팬북, 마스코트 피규어, 직관 티켓이 전부다. 1년이 갓 넘은 공연 덕질에 비하면 햇수 대비 소량이다. 공연 덕질로 말할 것 같으면 굿즈, 없어서 못 산다. 내줘요 동그란 거(OST 혹은 DVD앨범)...

신발, 옷, 악세사리, 화장품은 욕심이 없어서 물건이 없는 편이라 이쪽으론 이야기 거리가 없다. 대신 문구류를 좋아해서 연필과 만년필과 노트를 조금씩 갖고 있다.




2. 어느 날 1200자 책장을 두 개나 들인게 무색하게, 책을 바닥에 쌓기 시작하면서 물건 정리에 심각성을 느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사 모은 거지? 그때부터 비우기에 관심이 생겼다. 하루아침에 미니멀한 삶을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라도 덜 맥시멈할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구매해둔 태미 스트로벨의 『행복의 가격』을 다시 읽었고, 유튜버 Erin Nam의 영상을 챙겨보았다. 후자는 책의 출간으로 이어졌는데, 활자를 읽으며 비우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고 싶어서 책을 구매하게 되었다.

『집안일이 귀찮아서 미니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라는 제목 앞에서 깨달았다. 비우기는 이렇게 직관적인 이유에서 시작하는 거구나. 내 상황을 대입해 이야기하면 '1200자 책장이 두 개나 있는데 바닥에 책이 쌓이기 시작해서 비우기를 시작했다'가 될 것이다. 그저 정리법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왜 정리를 시작하게 되었고, 정리하는 일이 물건을 구매하는 것에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결국에는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드는지에 대한 이야기. 이런 이야기였기 때문에 채널을 구독했고, 그간 업로드 된 영상을 꾸준히 챙겨봤으며, 이야기를 한데 모은 이 책을 찾게 된 것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이 부분이다.


몇 달 동안 쉼 없이 물건들을 비우면서, 오랫동안 쓸모없는 물건을 ‘굳이’ 짊어지고 지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깊은 서랍장 안쪽에 있던 선글라스와 손목시계가 그랬고, 이사 온 뒤로 한 번도 꺼내본 적 없는 옷이 그랬고, 먼지만 소복이 쌓여 있는 전자제품 상자가 그랬다. 자연스럽게 짐이 된 그 물건들은 알게 모르게 내 삶과 생활을 무겁고,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할 일은 끝이 없고, 삶은 고단하게 느껴졌다. 내 공간에 어지럽게 늘어져 있는 물건들은 문득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들리지 않는 잔소리를 해댔다. “나 빨리 치워야 할 걸? 너 지금 쉴 때가 아니야. 얼른 청소하고 설거지해!”

필요 없던 물건들이 천천히 사라지자 생각 이상으로 삶이 쾌적해졌다. 우선 집안일의 압박감이 줄었다. 또 쌓여 있던 물건처럼 묵은 감정 역시 사라졌다. 짐이었던 물건을 비운 것뿐인데 이유 없이 복잡하던 마음까지 해결된 것이다. (p.139)



정리를 시작하며 깨달았다. 물건을 정리한다는 건 비단 물질적인 일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 물건에는 지난 시절의 추억이, 저 물건에는 끝까지 쓰고 버리겠다는 고집이, 그 물건에는 충동구매로 얼룩진 후회가 깃들어 있었고 물건과 함께 그 마음들을 비우는 것이 '정리'의 완성이었다. 고로 나는 방에 물건을 쌓아두는 동시에 내 마음의 짐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인상 깊었던 건 이 구절.


물건은 물건일 뿐


물건은 나에게 편리함을 주고, 삶의 질을 높여주기도 한다. 일의 능률을 높여주거나 쾌적한 생활을 도와준다. 하루에도 수십 번 물건들에 의지하고 도움받으며 살아간다. 물건 없는 생활을 꿈꾸지만, 사실 물건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전보다 반 이상은 줄어든 물건으로 그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내가 참 대견하다. 


같은 미니멀 라이프라도 사람마다 각자 더 중요시하는 부분이 있는데, 나는 유난히 물건 비우기에 집착했다. 무엇보다 ‘돈의 힘’을 알아버린 어린 시절부터 생긴 물욕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비우는 기쁨을 알고, 비워진 공간에 물건이 아닌 것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대신 그 자리에는 내 생활을 천천히 돌아보려는 진중한 마음가짐 같은 것들이 채워졌다. 쉽게 물건을 사던 습관도 자연스럽게 고쳐졌다. 사실 나에게는 그게 가장 필요했다. 나는 오랫동안 물건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조바심을 버리고, 가진 물건으로 나를 평가하는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다. 그리고 지금, 어느 정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이제서야 물건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확실해졌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절대 나를 대변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물건이 아닌 나 자신을 스스로 기억하고, 추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물건에 너무 많은 감정과 에너지를 내어주지 않아도 괜찮다.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일의 능률을 위해, 즐거운 시간을 위해 필요하면 갖는다. 열심히 사용한다. 충분히 썼다면 비운다. 물건의 용도는 그뿐이다.

(p.205)


이에 대한 내 생각은 반반이다. 물건은 나를 대변해주기도 하지만 대변해주지 않는다. 물건은 내 취향을 반영하기 때문에 내가 어떤 취향의 소유자인지 말해주는 점에서 일부는 대변할지 모르지만, 물건이 곧 그 사람은 아니기에 대변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분이 우울할 날엔 물건을 사며 기분을 풀던 때도 있었는데, 정리를 시작한 뒤로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땐 오히려 물건을 사지않게 되었다. 물건 때문인지 소비를 했기 때문인지 기분이 일시적으로 달라지긴 하지만, 그렇게 사들인 물건으로 다시 기분이 울적해졌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제목을 곱씹어본다. 물건을 물건일 뿐이다.



3. 오늘은 외출하는 김에 중고매장에 책을 판매하기 위해 두 권을 챙겨나갔다. 두 권뿐이라 택배로 보내기엔 아까워서 선뜻 판매하지 못했던 책들이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우기 위해서 두 권을 들고 나오다니. 친구가 그런 나를 보고 정말 변한 것 같다고 했다. 타이밍을 놓쳐버려서 내내 들고다니다 집에 오는 길에야 비울 수 있었지만 마음은 홀가분했다. 이 책들을 찾는 사람이 많을 때 비울 것. 이것도 정리를 시작하고 배운 것 중 하나다. 최근에는 tvN의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를 통해 많이 배우고 있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비우면 공간을 재배치 할 수 있고, 재배치 하고나면 원했던 것이 보인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이 탈바꿈한 공간이고, 미안함을 덜어낼 수 있게 해준 시간이고, 사랑을 챙기느라 좁아진 꿈에 대한 위로가 그것이다. 내가 시작한 정리는 드라마 같은 변화를 맞이할 수는 없겠지만, 계속해서 정리 일기를 쓰고 불필요한 물건을 늘리지 않으며 나눌 수 있을 때 나누는 일상을 계속할 것이다. 나의 정리 일상이 누군가에게 "야, 너도 정리할 수 있어."하는 목소리가 될 수 있다연 더할 나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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