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소년은 말을 더듬는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걱정해 언어 교정원에 보냈다. 2년 전에 간 언어 치료소와는 달랐다. 그때 담당 선생은 정말로 소년을 치료하려 들었다. 그런데 이곳의 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웅변 학원과는 다르단다. 말을 잘하게 해 주는 곳이 아니야. 말을 하게 해 주는 곳이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할 순 없는 법이거든. 용기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용기를 내라고 할 수 있지만 용기란 게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에겐 그렇게 말해선 안 돼. 당연하지. 용기가 없으니까. 힘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도 이상해. 힘이 있었으면 힘을 냈겠지. 안 그래?

(p.10-11)

스프링 언어 교정원의 치료 과목은 이렇다. 말더듬증 치료. 자신감 향상. 스피치. 성격 개조. 인생 연구. 대화의 기술. 청소년 상담. 소년은 언어 교정원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잘하지 못해 아무거나 다 하는 능력 없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했다. 원장은 생각에 빠진 소년을 '강의실 A'로 데려갔다. 정상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은 곳에서, 원장은 네임 펜으로 이름표에 뭔가를 쓴 뒤 소년의 목에 걸었다.

"무연입니다."

"반갑습니다. 무연."

소년의 이름표에는 '무연'이라 적혀있었다. 둘러보니 사람들이 모두 이름표를 달고 있었는데, 이름이 죄다 이상했다. '루트', '마야코프스키', '핑퐁', '모티프', '처방전', '곰곰이'. 알고보니 최근 가장 말하기 어려운 단어로 이름을 짓고 한 달간 그 이름으로 사는 거였다. 말을 안 하거나 노트를 쓰지 않는 사람은 원장이 직접 별명을 지어 준다.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원장의 말에 당연하게도 소년은 거의 소개를 하지 못했다. 무연중을 다닙니다, 라고 말하려 했지만 무연이라는 단어부터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소년의 이름은 그렇게 '무연'이 되었다. 발음도 제대로 못 하는 단어로 이름을 지어 주는 걸 보니 원장이란 자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이 책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열네 살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 다니며 언어적, 심리적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인데, 이 책의 분위기를 소개하기 위해 도입부의글을 조금 풀어보았다.

2. 올해 초반에 내게 난청과 이명(耳鳴)이 찾아왔고, 이명과 상반기를 함께 보내는 동안 말수가 크게 줄었다. 업무에 관한 대화를 할 땐 문제가 없었지만, 모처럼 지인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종종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대화에 어려움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말이 길어질 때, 단어를 더듬는 불특정한 상황이 오면 매번 당황했다. 말을 좀 더듬으면 어때, 라고 생각했으면 괜찮았을까. 말을 더듬는 일은 말을 더듬으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이어져서 스스로를 깨나 괴롭혔다.

책이란 게,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것 같아도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책을 만난 것도 그랬다. 민음북클럽에서 진행된 '손끝으로 문장읽기' 의 이번 주제가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였고, 누군가의 피드에서 이 책을 추천받은 것이 기억나 골랐던 것인데 타이밍이 잘 맞았다. 이 책의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말하는 것에 대해 크고 작은 고민을 하고보니 주인공에게 좀 더 몰입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보자. 언어 교정 시간 중 '자기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는데, '나'는 우주에서 가장 싫은 국어(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나의 말더듬증을 고쳐 주는 것을 국어를 가르치는 자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은 듯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 교정원에서 친구가 된 루트와 곰곰이는 그런 국어에게 복수하자는 말을 꺼낸다. 나는 궁금했다. 어떻게 복수한다는 걸까? 복수하는 걸 도와준다고? 무슨 수로? 나는 결국 국어에게 한 번 더 괴롭힘을 당하고 나서야 복수 해달라고 부탁한다. 학교에 국어가 있다면 집에는 엄마가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애인이 소년을 괴롭힌다.

집과 학교, 안팎으로 어려운 나날을 보내는 주인공에게 감정을 이입해 읽다보니 금세 완독할 수 있었다. 주인공이 마침내 맞이하는 결말 앞에서 기뻐했고, 스프링 언어 교정원에 다니는 식구들 한 명 한 명에 정이 들어버린 나머지 헤어짐이 아쉬웠다.159쪽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소설이지만 작품이 주는 따뜻함은 결코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소설이었다.

가장 애착이 가는 구절을 덧붙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이이모, 이모는 왜 살아요?

이모는 웃었다. 그리고 나를 껴안아 줬다. 왜 사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아들. 알려 줄 테니까 잘 기억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그냥 살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 그냥 사는 게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야. 다른 이유는 없어. 돌멩이가 왜 딱딱한지 아니? 왜 나무는 말을 못 하게? 몰라. 나무도 돌도 몰라. 사람도 그래. 사는 데 이유는 없어.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사는 건 피곤해지고 슬퍼진단다.

(p.102)




이모는 두 종류의 라켓을 보여 줬고 둘 중 하나를 골라 보라고 했다. 하나는 공격에 유리하고 주걱처럼 둥글고 평평한 라켓은 방어에 능하다고 했다. 나는 주걱을 골랐다.

음, 이건 셰이크핸드야. 초보자들이 잡기 가장 좋은 라켓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선수들도 선호하는 라켓이야. 이상하게도 탁구는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선수보다 셰이크핸드를 쥐고 방어하면서 경기하는 선수들이 더 많이 승리해. 세계적인 선수들도 대부분 셰이크핸드고. 어, 잘 새겨들어. 잘 방어하는 것, 공격하지 않더라도 일단 부드럽게 넘기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계속 잘 방어하는 건 공격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거든.

(p.79-80)






이이이모, 이모는 왜 살아요?

이모는 웃었다. 그리고 나를 껴안아 줬다.

왜 사냐니. 무슨 질문이 그래, 아들. 알려 줄 테니까 잘 기억해. 왜 사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냥. 그냥 살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 그냥 사는 게 사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야. 다른 이유는 없어. 돌멩이가 왜 딱딱한지 아니? 왜 나무는 말을 못 하게? 몰라. 나무도 돌도 몰라. 사람도 그래. 사는 데 이유는 없어.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사는 건 피곤해지고 슬퍼진단다.

(p.102)



여기 나오는 아들이 엄마에게 복수하려고 평생 칼을 갈고 또 갈았는데 이렇게 마지막에 용서하기로 했다는 게 흐름상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고.

왜 마마말이 안 돼요?

넌 그게 돼?

…….

너도 안 되면서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면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미워하면서 동시에 사랑할 수 있고 싫지만 좋을 수 있으니까. 복수하고 싶으면서 용서하고 싶은 것도 가능하지.

(p.14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