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열한 시 - 120 True Stories & Innocent Lies
황경신 지음, 김원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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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여느 날처럼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다가 책 표지에 눈이 가서 집어 들고, 책을 펼쳐서 마주한 ‘대답 없음도 대답이다’라는 구절 덕분에 사 읽게 된 에세이가 있다. 바로, 이 책 『밤 열한 시』의 작가 황경신의 이전 에세이집 『생각이 나서』다. 글과 사진, 그리고 황경신만의 감성이 담긴 책 『생각이 나서』를 읽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내가 가장 좋아라하는 시간인 ‘밤 열한 시’를 보내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참 좋았더랬다.

 

그랬던 에세이집 『생각이 나서』 그 후 3년 동안의 이야기가 담긴 에세이집이 바로 『밤 열한 시』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출간되어 그런지, 가을을 시작으로 겨울, 봄, 여름으로 이어지며 120편의 글이 네 계절로 나뉘어 담겨있다.

 

가을에는 “언젠가라는 말처럼 슬픈 말도 흔치 않다. 이미 가버린 과거의 언젠가이든,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의 언젠가이든. (p.31)” 이라 이야기하고, 겨울에는 “비록 덜 사랑하는 자가 권력을 가질지는 몰라도 / 사랑이 행하는 일을 온전히 겪는 사람은 / 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자이다 / 정말 아름다운 일은 그다음에 일어난다. (p.117)” 이야기하고, 봄에는 “그리운 사람을 /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 그것 말고는 다를 도리가 없는 / 봄의 한가운데 (p.169)”라고 이야기하고, 여름에는 “밤 열한 시 /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 어떤 기대를 품어도 괜찮은 시간 /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들에 대해 / 그저 포기하기에도 괜찮은 시간 / 의미를 저울에 달아보거나 / 마음을 밀치고 지우는 일도 무의미해지는 시간 (p.254)"이라 이야기하는 글들과 무심하면서도 감성적인 김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생각이 나서』를 읽던 그때처럼 언제, 어디서 읽어도 그 찰나가 꼭 밤 열한 시 같은 기분이 든다.

 

때론 시 같이 읽히고, 때론 노래 가사처럼 읽히고, 때론 일기 같이 읽히는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면 문득 나의 밤 열한 시가 떠오른다. 어떤 날은 드라마를 보고 있고, 어떤 날은 책을 읽고 있으며, 어떤 날은 라디오를 듣고, 어떤 날은 글을 쓰고, 어떤 날은 글씨를 쓰고, 어떤 날은 차를 마셨던 밤 열한 시. 열흘이면 열흘 깨어있는 시간. 생각하기 보다는 활동하기 바쁜 시간. 모든 글을 밤 열한 시에 쓴 건 아니겠지만, 내가 밤 열한 시를 그렇게 보내온 동안 이 사람은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들은 글이 되었으며, 한 권의 책이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드니 새로웠다. 누군가의 밤 열한 시는 이런 시간일까, 하고 말이다.

 

황경신이 말하는 밤 열한 시 같기도 하면서 나만의 밤 열한 시 같기도 한 시간들. 우리는 그 시간들 속에서 사랑을 생각하고, 이별을 생각하고, 기억을 생각하고, 마음을 생각하고, 말을 생각하고, 시간을 생각하며 매일 밤 열한 시를 보냈고, 보낼 것이다. 밤 열한 시는 그런 시간이니까.

 

p.s. 매 글의 본문도 좋았지만, 더 좋았던 건 원고지 칸 안에 담긴 글들이었다. ‘대답 없음도 대답이다’라는 구절에 빠졌던 그때처럼 간결해서 훅, 하고 내 마음으로 들어오는 그런 글. 원고지 칸 안에 글을 담은 구성이 크게 한 몫 했다. 원고지에 손으로 쓰인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과 글 안의 글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동시에 들었는데, 글의 감성과 구성이 주는 아날로그함이 잘 어울렸다고 생각한다.

 

p.s 2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 : 황경신 『생각이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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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가는 문 - 이와나미 소년문고를 말하다
미야자키 하야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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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했던 때가 떠오른다. 초등학교 6학년이었는데, 그 당시 담임선생님이 애니메이션에 무척 관심이 많은 선생님이셨다. 무슨 시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교실에서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여주셨다. <귀를 기울이면>을 시작으로 그 당시까지 나온 애니메이션을 모두 보여주셨으니, 지브리 애니메이션의 절반은 그 때 섭렵했다고 할 수 있겠다. 안 그래도 애니메이션을 좋아라했던 나였지만, 지브리 애니메이션은 정말이지 ‘신세계’였다. 매일 TV에서 방영해주던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애니메이션이었달까. 상상했거나 혹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내 상상력 그 이상으로 쉼 없이 펼쳐지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애니메이션에 빠져든 기억이 난다. 그렇게 봤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들은 내 인생 한 부분을 채웠고, 여전히 살아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발음할 때면 늘 어려워했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내게는 그런 미야자키 하야오의 책이어서 기대가 됐던 책이다. 그가 그 만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까지 어떤 소년문고를 읽었고, 어떤 유년을 보냈을까 궁금했다.

 

책은 2010년 <마루 밑 아리에티> 개봉과 이와나미 소년문고 창간 60주년을 계기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오랫동안 즐겨 읽어온 소년문고 400여 권 가운데 추천한 50권 한 권 한 권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1부와 자신의 유년과 어린이문학, 자신의 철학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2부로 나뉘어있다. 이런 책을 추천했구나, 하며 1부를 가볍게 읽고 나서 본격적으로 2부를 읽기 시작했는데, 2부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혼자 날 수 있게 되면 정말 굉장한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될 것입니다. (p.38)’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된 책 <바람의 왕자들> 소개라던가 <마루 밑 아리에티>의 원작이 된 <마루 밑 바루우어즈>에 관한 소개, 비행기의 원시적인 엔진이나 기체에 대해 생생하게 쓰인 책 <플램바즈>에 관한 소개 등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품들을 소개해 준 1부는 1부대로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런 책을 읽었구나’하는 정보가 되었다면, 2부는 ‘소중한 책 한 권만 있으면 된다’는 제목의 미야자키 하야오 다큐멘터리 속 인터뷰를, 보는 게 아니라 읽는 느낌이었달까. 그도 그럴게, 처음 책을 만난 무렵이라던가 처음으로 읽은 책, 어린이문학연구회 입회에 관한 이야기 등 이 책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어린이문학은 “다시 해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중략) 그런 어린이문학이 제 연약한 성정에 맞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어린이문학은 그런 유행과는 관계없는 구석진 곳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겠지요. (p.83)

 

아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현명해지는 만큼 또 몇 번이고 바보 같은 짓을 합니다. 아이에게는 거듭 바보 같은 짓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세계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p.100)

 

뭐랄까 내 안에 서랍 같은 게 있는 듯했습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무언가 가득 담겨 있었지요. (p.105)

 

아내가 『고도모노토모』(어린이의 벗이라는 뜻)를 구독해 그 잡지가 집에 꽤 많았는데, 열심히 읽은 것은 어른이었습니다. 어린이책도 꽤 많이 샀지만 아이들이 펼쳐본 흔적은 없습니다. 특히 정성껏 갖춰두면 읽지 않습니다. 제 경험으로 볼 때 놓아두면 읽는다는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 (p.132)

 

솔직히 말하면 많은 책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50권이 아니라 단 한 권이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p.137)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 하고 알 뿐입니다. 그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효과를 보려고 책을 건넨다는 발상은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읽히려고 해도 아이들은 읽지 않습니다. (중략) 책을 읽는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닙니다. 책만 읽는 아이는 일종의 외로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밖에서 놀면 바빠서 그럴 겨를이 없으니까요.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p.141-2)

 

어린이문학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하고 인간 존재에 대해 엄격하고 비판적인 문학과는 달리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살아도 된다”라는 응원을 아이들에게 보내려는 마음이 어린이문학이 생겨난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p.155)

 

2부 중에서 공감하며 읽은 구절을 모아봤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어린이문학은 그런 유행과는 관계없는 구석진 곳에 있고, 아이는 현명해지는 만큼 또 몇 번이고 바보 같은 짓을 할 권리가 있으며, 유년 시절 읽었던 책은 언제 읽었는지 기억하진 못하지만 내 안에 가득 담겨졌을 것이며, 책은 '갖춤'의 문제가 아니고, 책에는 효과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많이 읽는 게 중요하지 않으며, 그보다는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내게도 그런 책이 있다. 초등학생 때 읽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나는데, 몇 학년 때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거짓말하다 죽은 말 이야기>라는 책으로, 비룡소에서 출판되었고, 말 일러스트가 있었는데 하체만 있었다. 그 때 읽었던 이 한 권의 책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소설을 즐겨 읽는다. 어떤 이야기를 읽을 때, 상상력이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와 같은 상상력의 힘을 알게 된 책이었으니까.

 

어제, 그리고 오늘 읽은 책이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지라도,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내일도 책을 찾아 읽었으면 한다. 이와나미 소년문고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를 채우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그 애니메이션이 내 유년시절을 채우고, 유년시절을 보낸 지금의 내가 무엇을 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책이, 독서라는게 그런 거 아닌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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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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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제목을 고민하다가, 문득 김춘수의 <꽃>이 생각나 패러디해봤다.

 

그가 초상화를 수집하기 전까지는 초상화는 다만 한 장의 초상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초상화를 수집하기 시작했을 때 초상화는 그에게로 가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

 

웃자고 패러디 해본 건 아니고, 이 책 『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에 대한 느낌이 딱 저러했다. 저자도 서문에서 말하지 않던가. ‘이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물론 당시에는 나도 미처 몰랐다.’ (초상화 수집에 대해) 고 말이다.

 

작가의 초상화를 수집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시, 소설, 희곡 등 작품이 곧 작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작품을 읽다보면 실제 작가의 얼굴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작가의 이목구비가 궁금할 때도 있고, 얼굴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인상이 궁금할 때도 있고. 그렇게 궁금해 하다가 기회가 되어 작가의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는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이목구비가 이렇게 생긴 사람이 이런 작품을 쓴 거구나, 이런 표정을 짓는 사람이 이런 작품을 쓴 거구나 싶은 생각. 그리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작가의 얼굴을 보면서 작가의 삶을 읽게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얼굴에 생긴 주름과 작가의 눈빛 그 사이에서.

 

이 책의 매력은 저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전하는 작가의 얼굴, 초상화 이야기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진정한 매력은 그가 초상화로 운을 띄우고 소개하는 작가들 이야기, 문학 비평에 있었다. 그의 글은 때로는 진지하고, 때로는 유쾌하고, 특유의 솔직하고 명료한 표현만큼은 일관되어서 책을 펼쳐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작가의 초상화보다 글에 더 집중해서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떤 작가에 대한 글을 읽고 있는지 모르고 읽었을 정도로)

 

아쉬웠던 건, 저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독일어로 글을 쓰는 문학평론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인데, 내가 독일 문학에 생소해서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작가 대부분에 대해 모르고 책을 읽었다는 것이다. 알고 읽으면 더 재밌었겠지만, 모르고 읽는 것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작가들의 작품이 ‘고전’이어서 가능했다. 1920년생으로 올해 나이 93세인 저자와 작가와 작품에 대해 공감할 수 있었던 까닭은, 작가가 쓴 작품이 고전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고전만이 가지는, 시대를 초월하는 힘 덕분에 나는 저자의 셰익스피어 혹은 괴테에 대한 평론을 읽고, 공감할 수 있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中)

 

김춘수 시인의 꽃 마지막 구절처럼, 저자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수집한 것은, 단순히 작가의 초상화가 아니라 잊혀지지 않는 한 장 한 장의 초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초상화 수집이었으나 자신에게 있어 인생의 일부가 되었고, 한 문학평론가의 이력에 한몫을 담당한 수집이었으니 말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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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
킴벌리 맥크레이트 지음, 황규영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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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있다. 일이 이미 잘못된 뒤에는 손을 써도 소용이 없음을 비꼬는 말이지만,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하는 입장에서는 이만큼 뼈아픈 일이 또 있을까. 적절한 예는 아니지만, 이 책 『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의 케이트에게 가장 적절한 속담이 바로 이 속담이라고 생각한다. 케이트에게는 외양간을 고치는 것보다 ‘소를 잃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뼈아픈 일이니 말이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아멜리아를 잃고 난 후에야, 케이트는 아멜리아를 위해 모든 걸 내려놓는다. 아멜리아는 잃었지만, ‘아멜리아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 케이트가 살면서 강요받아 온 커리어, 품위, 사회 제도에 대한 순응, 그 모든 것을 내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아멜리아의 죽음보다 중요한 건 없었으니까.

 

책 뒷표지의 책 소개 문구처럼, 아멜리아가 케이트에게 말하지 못한 아멜리아의 비밀과 케이트가 아멜리아에게 말하지 못했던 케이트의 비밀이 어지럽게 엮이는 전개와 정글보다 잔인한, 뉴욕 명문 사립학교 10대들의 은밀한 사회를 리얼하게 포착했다는 점 역시 이 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점이 될 수 있겠지만, 내가 주목했던 이 책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아멜리아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쫓는 과정에서 알게 된 아멜리아의 인생 이면은, 이게 아멜리아의 삶이었다고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참담했다. 참담할수록 케이트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 바로 이 부분이었다. 배우 니콜 키드먼이 주연으로 캐스팅 되었다는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도 바로 이 부분을 염두에 둔 영화화-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름답고 우아한 외양 아래 숨겨진 학교의 두 얼굴이 영상화 된다는 것도 기대되지만 무엇보다, 딸의 죽음과 그 진실을 쫓는 엄마의 애끓는 분투가 어떻게 그려질지 더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깝고 슬펐지만 아멜리아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궁금해서 읽기를 멈추지 않고 책을 계속해서 읽었던 것처럼, 케이트는 오직 아멜리아를 위해서 참담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예측할 수 없는 결말을 향해 내달리는 드라마와 나란히 달렸다. 아멜리아의 삶을 마주했을 땐 무너졌고, 아멜리아에게 오랫동안 구하지 못했던 용서를 빌고, 너는 절대 실수가 아니었다고, 너는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은 일이었다고, 늘 그렇게 남아 있을 거라 말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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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적게
도미니크 로로 지음, 이주영 옮김 / 북폴리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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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수필가의 수필이지만 오랫동안 일본에 거주하며 선불교와 동양철학에 영향을 받은 작가의 삶 덕분인지 이 책 『지극히 적게』는 책 곳곳에서 담백함의 묻어난다.

 

저자의 뜻대로 적게 소유하면서도 충만하게 삶을 즐기는 법이 쓰인 이 책은 덜어 낼수록 충만해지는 것들, 정돈된 삶이 가져다주는 깊이와 기쁨, 깃털처럼 가벼운 마음이라는 세 파트와 총 15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중 정돈된 삶이 가져다주는 깊이 파트가 좋았고, 챕터 중에는 시간과 에너지를 완벽히 절약하는 법이 가장 좋았다. 알게 된 사실이 새로웠던 건 아니지만 알고 있음에도 가장 지키지 못하고 살고 있는 부분에 대한 글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책의 정연한 구성과 저자의 간결한 문체가 ‘생각만 하지 말고 실천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자극을 받았달까.

 

 

각각의 글마다 예술가, 학자 등 다양한 인물의 격언이 함께 제시되어 생각의 여운을 남기는 구성은 이 책의 구성에 있어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성이다. 예를 들자면 ‘약속, 원칙을 분명히 한다’는 주제에 ‘시간은 우리가 유일하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쫀쫀하게 아껴도 되는 재산이다.’라는 19세기 프랑스 의사 쇼보 드 보셴의 격언이 따라 붙는다. 이 격언들은 주제에 대한 저자의 글에 힘을 실어주고, 조금은 생소해서 이 책이 아니면 접하기 어려울 것 같은 사람들의 격언이 많아서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프랑스 수필가지만 오랫동안 일본에서 생활한 덕에 서구적 라이프 스타일과 동양의 미⋅철학이 접목된 저자의 삶 덕분에 가능한 구성이었다고 생각한다.

 

 

책의 서문 바로 뒤에 ‘이 작은 책에 관하여’라는 짧은 글이 이어지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두껍거나 크거나 묵직하거나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들고 다니며 가볍게 읽을 만한 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는 작가의 바람과는 달리, 책은 여느 책들과 같이 가벼운 편은 아니고 부피도 작지 않아서 아쉬웠다. 물론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의 출판 여건을 무시할 수 없고, 책을 구매하는 독자들이 중요시하는 ‘소장’에 관련된 기호적인 부분도 고려해야하니 이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겠지만 저자가 지향하는 만큼 ‘페이퍼백’ 형태의 책으로 출판됐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제목이자 저자의 궁극적인 주장인 ‘지극히 적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 단언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맺는 글에 담긴 일본 미디어 아티스트 다쓰오미야지마의 “아주 작은 것은 아주 큰 것으로 가게 해주는 열쇠다.”라는 격언처럼, 지극히 적은 것에 만족하는 삶을 실천하다보면, 일도, 생각도, 소유하는 것도 너무 많아 인생 내내 짓눌려 사는 우리네 인생이 조금은 담백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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