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부터 휴가였다. 목요일엔 금요일이 휴가라고 술을 마셨고, 금요일엔 내일이 토요일이라고 술을 마셨고, 논리적으로 따지면 오늘은 술을 마시면 안되는데, 주말이 가는 게 아쉬워 또 술을 마셨다. 아. 나는 주당으로 다시 태어났다. 만세.

 

유일하게 술을 마시지 않은 토요일(어제)은 종일 팟캐스트를 들으며 무도를 보며 집안을 청소하고 뒹굴뒹굴거리다가 느즈막히 안양 부모님댁으로 건너갔다. 뜻한 바가 있었다. 잃어버린 두 표를 꼭 찾으리라. 나름 작전도 세워서 집으로 돌격.

 

아. 설마설마 했는데...... 이 아줌마 아저씨들이 (아, 이젠 동네에서 가끔 할아버지, 소리도 들으신단다. 그치, 제가 시집을 갔으면 벌써 할아버지 소리 듣고 남지요 ㅠㅠ 그나마 엄마는 동안이라 아직 그런 굴욕은 안 당하신듯.) 정말 박근혜를 찍을 생각이었다. 세상에나 -_- 문제는 별 소신이나 생각 없이 그냥 박근혜를 찍을 생각이었나보다. 엄마는 여쭤보니 안철수는 좋았는데 문재인은 사람이 별로 맘에 안들어서 (이유도 없다 ;;) 싫다고 하고 박근혜는 뭐 좋지는 않은데 그냥 사람이 없으니 찍는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아... 안철수 사퇴한다고 박근혜 찍는다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냐고 했는데 우리 엄마였어. ㅠㅠㅠㅠ 투표 안할까, 생각도 했었단다. "차라리 하지 말아요...." 하다가, 협박에 엄마가 혹할 협상조건을 곁들여 한표 획득 성공. (조건은 비밀, 시집갈게요 이런 건 아님. ㅋㅋ)

 

아빠는 경상도 출신이라 새누리당 하는 건 보니 아닌 것 같은데 민주당은 뽑기 싫다 주의. 새누리당은 워낙 오래전에 실망하셨고, 지난 선거 때는 '차라리' 권영길을 찍겠다며 그쪽으로 한표... -_- 어쩔 수 없이 초초 유치하게 "아빠, 근데 문재인은 아빠랑 똑같은 창녕 출신이잖아" (흑흑 이것 밖에는 방법이...ㅠㅠ) 여기에 덧붙여 "그러고보면 창녕에 참 괜찮은 사람이 많아. 박원순 시장님도 창녕 출신이고. 쬐끄만 도시에 인물이 많이 났어" 까지 덧붙였 ;;; 그러자 아빠는 박영선도 창녕 출신이고 홍준표도 창녕 출신이라며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 그닥 알 필요는 없는) 정보들을 던져주신다. 아아... 우리 어르신들의 이 고향을 향한 끈끈한 마음이란 뭔가요... 물론 아빠를 설득한 논리는 이게 아니라, 뒤에 내가 덧붙인 아빠가 혹할 희생봉사의 조건이었지만 암튼 한표 더 획득 성공 -_-

 

엄마는 그래도 안철수가 좋다며 "그럼 다음 대권엔 안철수가 나오는 걸까? 그럼 엄마는 안철수 뽑고 싶은데" 라고 말씀하신다. 거기에 내가 "음, 다음에 야권은 안철수랑 박원순의 대결이 되지 않을까?" 그러자 엄마는 "어머, 그럼 엄마는 박원순 뽑을 거야" 라고. 박원순 시장님이 참 잘하고 계시긴 한가보다 :) "근데 엄마, 박근혜는 진짜 나쁜 사람이에요. 게다가 바보고, 그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나빠서 호시탐탐 다 이용해먹을 생각만 하고 있어서 박근혜는 진짜 안되. 토론회 봤죠? 이정희가 한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 다 지들 해먹으려고 하는 거지. 절대 국민을 위할 사람들이 아니야" 라고 말하자 엄마는 "야, 이정희는 근데 말을 너무 못되게 하더라. 그래서 여론도 안좋고 욕 많이 먹잖아"라고... (오마이갓....) "엄마, 그게 다 진짜니까 새누리당이 그렇게 여론을 조작하는 거야. 그게 다 진짜라니까. 틀린 게 하나도 없어. 박근혜는 절대 절대 안돼" 라고 못을 박자 엄마는 "알았어"라고 말하고는 덧붙인다. "근데 문재인은 말도 못하더라......" 아... 제인......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흙. 지금도 토론 준비에 한창일 제인.. 제인.. 내일은 잘해주세요. ㅠㅠ 아빠는 그냥 누가 되건말건, 내 협상 조건에 단박에 오케이. 아빠가 그럼 넌 오늘(토요일) 광화문엘 다녀왔느냐고 묻는다. 추워서 안갔다고 하자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욕먹었 -_- 으나, 암튼 한표는 약속 받았다. 다음주에 확인사살 들어감.

 

부모님들이야 저 멀리 있고, 다 똑같아 보이고 사실 지켜질 리 없어보이는 공약들보다는 현실적이고 가까이서 공약을 안지킨다고 구박할 수 있는 딸의 공약이 더 설득력이 있겠지. 암튼 이한몸 바쳐 나는 두표 획득에 성공했다. 하지만, 우리 엄마 아빠처럼, 그냥 별 소신이나 생각 없이(차라리 부모님이 강한 소신이 있었다면 나는 설득하려고 무리수를 던지지 않았을테고, 그 정치적 입장을 굳이 바꾸려 들지 않았을 거다.) 박근혜에게 그냥 당연한 듯 한표를 주는 사람이 있을테고, 그런 표들이 많을테고, 그게 많이 모여서 나라 말아먹을 놈들에게 간다고 생각하니 화가 난다.

 

동생은 나꼼수를 듣는다거나, 여러 게시판 등을 전전하는 징후를 몇번 목격했으므로 굳이 물어보지 않으려 했으나 엄마가 물어보라고 해서 물어봄. "내가 박근혜를 왜찍냐?" 아. 내동생 잘컸어. 몇년 전만해도 촛불집회에 갔다왔다는 얘기를 하자 "누나 그런 데도 갔다왔어?" 했던 동생이었다. 이쯤 되면.... 나꼼수 만세? 아니면... 가카 만세? (잡스 만세?)

 

 

나는 올림픽을 봐도 굳이 우리나라 선수 응원 안하는 사람이고, 노벨상도 고은 선생님보다는 다른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을 더 응원하게 되고, 우리나라가 뭐 선정됐다고 해도 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고, 무슨 사건 터졌을 때 외신부터 살피는 건 무척 쪽팔린 짓이라고 생각하는,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라고는 평균 이하로 많이 떨어지는 사람인데.... 박근혜 앞에서 다 무너졌다. 나는 내가 독재자의 딸을 대통령으로 뽑으려고 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너무 너무 부끄럽다. 12월 19일에 출구 조사 결과를 보고 박수를 치며 환하게 웃는 박근혜의 얼굴을 마주할 일이 벌써부터 두렵다. 부디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예전에는 굳이 2표 더 얻으려고 부모님까지 설득할 생각은 안했는데 -_- 지금은 내가 더 얻는 2표가 딱 2표의 가치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어디에서 나와 같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나 역시 누군가의 상상 속의 누군가가 되고, 그 누군가들이 결국 모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지푸라기를 잡아서라도 꼭 막고 싶다. "박근혜 후보 떨어뜨리러 나왔습니다" 하던 이정희의 마음에 백번 백번 백번 공감한다.

 

오늘, 안양에서 서울로 오기 전 빵 사러 잠깐 백화점 지하 빵집에 들렀는데 안철수 전후보가 유세를 왔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나는 또 추워서 찰스의 얼굴만 잠깐 보고 백화점으로 쏙 들어가버렸 ;;; 다 ;;; (제인이 함께 왔다면 견딜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추운 날 고생하시는 분들이 참 많다. 좋은 결과로 이어졌으면. 그리고, 앞으로 대선은 좋은 계절에 했으면 좋겠다. 봄이나 가을에. 너무 추워. ㅠㅠ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찌리릿 2012-12-10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인당 2명씩 책임져야... 부모, 형제자매, 왕래있는 사촌들과 이번 기회에 정치 얘기 약간씩이라도 해야겠다.

웽스북스 2012-12-10 01:37   좋아요 0 | URL
뭔가 잠재적 표가 많을 것 같은 동네. 책임이 막중하십니다 :)

Mephistopheles 2012-12-10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으로 다시 복귀하실 예정이실까요???

웽스북스 2012-12-10 01:54   좋아요 0 | URL
에이~ 설마요~

다락방 2012-12-10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반가운 글이에요. 참 잘했어요! ㅎㅎㅎㅎㅎ

뷰리풀말미잘 2012-12-10 20:08   좋아요 0 | URL
역시 당신은 알라딘의 보이지 않는 손, 알라딘의 엄석대, 알라딘의 빅브라더.

웽스북스 2012-12-10 23:15   좋아요 0 | URL
다락방 / 뿌잉뿌잉~
뷰리풀말미잘 / 그럼요. 이분은 알라딘의 매출까지 걱정하시는 분이십니다.

2012-12-11 0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10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12-12-1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다음에 연결되었던 '경실련의 후보선택도우미'를 전 팀원에게 뿌려서 한 표 획득. 그 분은 제게 '이거 문재인 지지 사이트냐?'라고 물었다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나의 말에 자신의 정책이 문재인과 맞다는 걸 확인했다고 했다니까요.

웽스북스 2012-12-10 23: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그거 해봤어요! 저는 회사에서는 더이상 거둘 표가 없어요. 흙흙.
근데 문재인과 정책이 맞는 사람이 그걸 알기 전에는 박근혜를 지지할 수도 있는거군요. 좀 놀라운데요.

별족 2012-12-11 10:11   좋아요 0 | URL
안철수를 찍으려던 사람이 박근혜를 찍을 마음을 먹기도 하니까, 이상하지는 않던걸요. 정책이 사라진 선거에 이미지만 남아있어서.

LAYLA 2012-12-10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녕드립 너무 귀여워서 광대 발사 되었어요 하하하하핳

웽스북스 2012-12-10 23:19   좋아요 0 | URL
고백합니다. 저 광대 발사가 무슨 말인지 몰라서 검색해봤습니다.
으흑. 굴욕의 30대 ㅠㅠ

지나던 이 2012-12-10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렇게 간절히 바라는 많은 분들의 마음이 모여서 19일에 제발 가슴 무너지는 결과를 받아들지 않았으면 합니다ㅜㅠ 독재자 딸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나라에 살고 싶지 않아요...

웽스북스 2012-12-10 23:1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ㅠㅠ
지나던 이, 님 가끔 또 지나쳐주세요

기쁜 마음으로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wkshim99 2012-12-16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