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앞 꽃집에는 자주 칠판에 이런저런 시 문구들을 적어놓는데, 대부분 그냥 지나치지만 가끔 매우 인상적인 것들이 있다. 그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주아주 많은 것들이 생각나는 한구절이다. 이 무렵, 저 이제는 술 안마실 거에요, 를 습관처럼 외치고 다니던 나 자신도 생각나고, 늘 마지막 맥주다, 라고 서재에 글을 쓰곤 했던 hsc님도 생각나고, 내 주변에 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가운데, 어제는 내 주변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술꾼(?) 중 한 분이 술을 끊겠다, 라고 가열차게 선언한 이후 그날 바로 다시 가서 술을 마셨다는, 아니, 그조차도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에 한 선언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시 이 시를 떠올렸다. 이 시의 전문은 이렇다.
반성 16
김영승
술에 취하여
나는 수첩에다가 뭐라고 써 놓았다
술이 깨니까
나는 그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세 병쯤 소주를 마시니까
다시는 술마시지 말자
고 써 있는 그 글씨가 보였다
무에 그리 반성할 것이 많았는지, 16번째 반성, 이라니, 라고 생각하며 찾아보니,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시집의 이름 자체가 '반성' 이었다. 그야말로 반성들로 가득찬 시인의 반성시집인 셈이다.
반성 21
친구들이 나한테 모두 한마디씩 했다. 너는 이제 폐인이라고
규영이가 말했다. 너는 바보가 되었다고
준행이가 말했다. 네 얘기를 누가 믿을 수
있느냐고 현이가 말했다. 넌 다시
할 수 있다고 승기가 말했다.
모두들 한 일년 술을 끊으면 혹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술 먹자,
눈 온다, 삼용이가 말했다.
반성 156
그 누군가가 마지못해 사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할 때
그는 붕어나 참새 같은 것들하고 친하게 살고 있음을 더러 본다
마아고트 폰테인을 굳이 마곳 훤턴이라고 발음하는 여자 앞에서
그 사소한 발음 때문에도 나는 엄청나게 달리 취급된다.
그 누구를 사랑하는 것도 사실 끔찍하게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도
살벌할 만큼 다른 의미에서 거래된다
그들에게 잘 보여야 살 수 있다
반성 740
어둠-껌껌한 골목
구멍가게 평상 위에 난짝 올라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옛날 돈 2만원 때문에
쫓아다니면서 내 따귀를 갈기던
그 할머니가
어떻게 나를 발견하고 뛰어와
내 손을 잡고 운다
머리가 홀랑 빠졌고 허리가 직각으로 굽었고...
나도 그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다
맥주까지 마시니 돈 좀 생겨지나보지 하면서
웃는다
이따가 다른 친구가 올 거에요 하면서
나도 웃었다.
반성 902
하나님 아버지
저는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날이 갈수록 머리가 띨띨해져 갑니다
고맙습니다
이 시들이 수록된, 김영승의 <반성>이라는 시집은 현재 절판이다. 아. 창비님, 이 시집을 다시 찍어주시면 제가 다섯권 사겠어요. (돈이 없어서 열권이라고 썼다가 고쳤다 ㅜㅜ)
아쉬운 마음에, 시인의 다른 시집 중 구매가 가능한 것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무소유보다 더 찬란한 극빈> 이라니 이후에도 시인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나보다. 그 이후 2008년에 낸 시집이 <화창>이라니, 화창해진 것은 시인의 삶일까, 마음일까, 혹은 그저 아이러니일까, 궁금해진다.
검색하다보니,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에도 김영승의 시가 소개된 모양인데,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7862.html
함께 올라온 사진을 보니, 헛, 잘...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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