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한 상황에서야 비로소 드러나 보이는 바닥들이 있는데, 정치인, 종교인 뭐 이런 분들에게는 이제 실망하고 화낼 힘도 내게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조모 목사님의 발언에 많은 분들이 엄청나게 충격을 받고 격하게 화를 내시던데, 그냥 나랑 비슷한 사이에서는 언제, 누가 제일 먼저 저 말씀을 꺼내실까, 의 문제였지 실은 그다지 충격적일 것도 없었다. 아. 학습이란 이렇게 무섭고 놀라운 것이다. 한국 교회라는 집단에 20년간 속하면서 더 험한 꼴도 많이 보고 화도 내고 속상해 하기도 했었다. 이 정도 발언은 시뮬레이션 가능한 범위의 일이었다. 실제로 페이스북 친구들 사이에서는 내일설교 기대된다, 뭐 이런 이야기가 오가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가끔 나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늘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일어나곤 하는데, 지금 소위 '맘'들 사이에서 붐이라는 일본 기저귀 사재기 열풍이 그것이다. 방사선에 오염되기 전에 일본 기저귀를 사놔야 한다고 100만원, 120만원어치 기저귀를 사들이는 엄마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 게다가 일본 분유나 과자같은 것들도 3월 11일 이전에 제조된 것으로 사놔야 한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고 한다. 정작 일본은 또 많은 것들이 모자랄텐데.... 남아 있는 기저귀에 분유에 과자까지 싹싹 긁어서 쟁여놓을 정도로 나의 아들/딸은 소중한 건지... 싶고...

자식이 없어봐서 엄마들의 그 애틋한 이기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비통함을 뒤로한 채 내 아이 기저귀부터 챙기는 게 엄마라는 분들의 그 숭고한 모성애인 건가 싶어, 소식을 접하며 참 많이 어이 없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 홍콩에서도 사재기 러시가 일고 있다고 하니, 참 사람의 속성은 어디나 비슷하구나 싶다. 내가 아이를 키운다면 아무리 말을 못하고 뭣 모르는 나이더라도, 그 때부터 불편함을 함께 나누는 훈련을 (나부터도) 함께 하면서 키우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줄 알고, 때로는 나의 불편함도 기꺼이 감수할 줄 아는 아이로 키워야 할 것 같은데... 이건 자식 없는 철없는 아가씨의 이상일까?

이렇게 엄마의 이기심을 듬뿍 받고 자란 아이들은, 어떻게 자라게 될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정말이지, 정 떨어지는 세상이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순오기 2011-03-17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남을 생각할 줄 알까요?
저만 아는 잘난 인간들은 결국 자식도 그렇게 키우더라는....ㅠㅠ

. 2011-03-17 0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추악한 일면도 모성애라고 포장되어야 하는 건가요?
애틋하다는 단어는 이기심이라는 단어와도 어울리지 않지만,
이런 추잡스러울 뿐인 행태에 붙일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쓰레기같은 근성까지 모성애라고 포장한다면 수많은 존경스러운 어머니들을
욕되게 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그네들은 그냥 인간 말종인 겁니다.
웬디양님은 자식 없는 철없는 아가씨라서가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인 가치관을 가진 건전한 성인이신 거구요.

hnine 2011-03-17 0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나라 기저귀도 좋은데...^^
엄마의 모성애라기 보다, 기저귀 아닌 다른 것도 그렇게 사재기 했을 엄마들 아닐까요?

Mephistopheles 2011-03-17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게 살아온 엄마들이라고 보고 싶어요. 천성이 그렇겠습니까. 사회가 병들고 막장으로 가는데 혼자서 고고하게 바른생활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들고 버겁죠. 각종 불이익과 불편을 죄다 받아들여야 하니까요. (대충 기저귀에 기백만원 쏟아부어 사재기를 할 정도라면 어느 지역 엄마들인지 대충 감이 잡힙니다.)

누구엄마 2011-03-17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마음이 이해가 되다가도 안되다가도 하고 막 그래요.
저도 외출할 때랑 잘 때는 일본 기저귀 쓰거든요. 낮에는 천기저귀 써도.
아가 태어나서부터 줄곧 저랑 아가한테 잘 맞아서 글케 쓰지요.

근데 일본에 그 사태났을 때, 기저귀를 사재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는데
발빠르신 엄마들 미친듯이 사재기한다는 기사가. ㅡ_ㅡ;;;
이번 같은 사태 아니더라도 일본 기저귀는 이따금 품절 나서
그것만 쓰는 엄마들 애태우곤 했던 걸 알아서 이해가 되려다가도
이 와중에 웬 사재기인가 싶더군요.

그제야 고민 시작. 진짜 기저귀 동나면 나 뭐쓰지. 이런 생각 이제 드네요.
사실 말도 못하고 자기 몸 하나 못가누는 아가한테
인류애를 강조하기는 민망하잖아요. ^^:

암튼 놀라운 건, 그 뉴스에 기저귀를 1번으로 떠올렸다는 엄마들이죠.
난 "헉ㅡ" 이거 말고는 아무말도 안나오던데. ~_~;

레와 2011-03-1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밖에 안나옵니다. 후아. 갑갑.

굿바이 2011-03-17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웬디양 말대로 격한 상황에 이르면 보이는 것들이 있지.
동일한 경험은 아니더라도 그런 상황을 목도하면 참 이상하게도 매번 놀라워.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말이지. 가끔 이런 상황을 보고 분노하는 나를 보면 아직도 인간에 대한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었나,싶어서 나 자신한테 더 놀랍고 말이야.
모든 '맘'들이 그렇게 행동하지 않겠지만, 몰라서라도 그렇지 않을꺼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것들을 기사화하는 엘로우저널에 아주 이가 갈려. 몰랐던 분들도 괜한 공포심에 덩달아 이상한 행동을 할 수도 있는데 말이지. 나는 인간이라는 것이 매우 약한 동물이라 동시에 악할 수도 있다고 믿거든.
여튼, 이번 한 주 이 땅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방송매체와 거기에 기생하는 거의 모든 저널리스트들의 태도에 침을 뱉는다. 거지같은 것들.

pjy 2011-03-17 1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머리짱~ 이래서 헤지펀드가 여전히 막대한 이익을 남기고, IMF때도 돈을 갈퀴로 긁어들이는 사람이 나오는거죠-_-;;

마노아 2011-03-17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기심을 듬뿍 섭취하고 자라는 아이들이 어른이 된 세상을 생각해 보면 진짜 아찔하네요. 지금의 막장보다 더 커진 막장을 보게 될 테죠. 이렇게 큰 사고를 접하고 나니 여러 면면들의 바닥이 보여요. 인간은 참....

개인주의 2011-03-17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어다니는 아기들이야뭐..;..
기저귀사재기 능력이 되면 그거 떨어져도 좋은 제품 찾을 수 있을텐데.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섭죠.

BRINY 2011-03-17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이 상상하셨을 지역에서는 '시골'로 불리는 곳에서 살지만,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본인은 시장표 잠바떼기를 걸치고 다닐 지언정, 아이를 위해서는 일제 기저귀를 사재기하는 사람이.

블리 2011-03-18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러니까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는 분이 있는데 숙제로 ARS 일본성금 보내기를 내줬다는데 (강요라기 보다는 권유였겠지.) 엄마들이 일본은 당해도 싸다며 딱 두 명만 숙제를 해왔더란다. 정말 이게 현실일까, 정상일까 싶더라. 예전에 본 일본 영화 중에 어른되기 자격시험이 있는 세상이 배경인 얘기가 있었는데 정말 그런 시험이라도 있어야 되는 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