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그런걸까.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소식만 들려오면 과도하게 추모하고, 마치 그 사람이 세상에서 최고였던 양 떠받드는 모습이 영 불편하다. 디자이너 앙드레김의 죽음 이후, 그의 희화화된 이미지를 팔아먹던 포털들이 최고의 디자이너였다며 너도 나도 추모 배너 하나 더 달지 못해 안달하는 것 역시 고운 마음으로 보기가 어렵다. 죽음 앞에 지극한 반성의 마음이라도 생겨서 그러는 거라면 다행이겠지만, (우리 모두 반성하자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게 아니라, 그저 추모의 물결 위에 숟가락 하나 더 얹겠다는 심정이라면, 그냥, 그만 해 주지 않겠습니까. 진심이 아니고서는 소식을 듣는 순간 철렁, 하더라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말을 하기 전 스무번쯤 망설이는 나로서는, 정말 불편하다. 불편하고 또 불편하다. 죽고나면 최고의 연기자, 죽고나면 최고의 가수, 죽고나면 최고의 개그맨, 죽고나면 최고의 그 무엇, 갑자기 숭고하게 조명되는 삶들. 나는 그저, 제대로 한 번 살아보겠다고 끝까지 노력했으나, 끝내는 실패한 평범한 사람. 이라는 평가를 받더라도 그걸로 족하겠다, 는 느낌이다. (결국엔 실패할테니) 삶이라는 게 꼭 그렇게 거창하고 숭고하게 조명되어야만 의미가 있는 것일까.
* 김두식 교수의 <불편해도 괜찮아>를 읽고 누군가 쓴 시사인 리뷰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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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우리’, 다 가졌으면서 불편함의 감수성까지 소유하려는 중심을 ‘위한’ 책이 아니기를 희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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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예리한 지적이다. 김두식 교수를 향한 경계의 메시지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또한 저 책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을 위한 경계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저 글을 읽고, 나는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했다. 이 말 앞에 좀 더 고민하며,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참고로, 저 리뷰는 김두식 교수가 직접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소개해 주었다)